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방랑 시인 김 삿 갓
김 삿갓이 물에 빠져 죽은 스님을 형식적으로 나마 장사까지 지내 주고,
첩첩산중으로 또다시 걸어가고 있노라니, 이번에는 어디서 인가 늙은이가 대성 통곡하는
곡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아이고. 이 무정한 친구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하던 자네가 나를
내버려 둔 채 혼자만 가버렸으니, 이 무슨 기가 막힌 일이란 말인가!"
(음? 이게 무슨 소리일까?)
김 삿갓은 길을 가다 말고, 귀를 유심히 기울여 보았다.
저편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넋두리는 분명 사람의 소리였다.
김 삿갓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부랴부랴 달려가다가, 너무 뜻밖의 광경에 기절초풍을
할 듯이 놀랐다.
높다란 벼랑 아래 풀밭에는 뼈와 가죽 뿐인 호호백발노인이 하나 쓰러져 있었는데,
그와 똑같은 또래의 호호 백발 늙은이가 시체를 부둥켜안고 슬픈 목소리로 넋두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보세요, 어르신 네! 이게 어찌 된 일이옵니까?"
김 삿갓은 가까이 다가가 노인과 시체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호호 백발 늙은이는 울음을 그치고 김 삿갓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정 노인과 정 노인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있는 윤 노인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60 대에 영생 불사하는 신선이 되고자 속세를 떠나 이곳 지리산에 들어와,
영지버섯과 나무 열매, 풀뿌리 등, 오직 초식 생활을 해오며, 백 살이 가까운 오늘날까지
잘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정 노인이 영지버섯을 따려고 높은 벼랑에 올라갔다가 그대로 벼랑에서
떨어져 즉사를 했다는 것이다. 노인은 거기까지 말하고, 또다시 시체를 부둥켜안고 넋두리를
계속했다.
"아이고, 아이고! 이 무심한 친구야. 어떤 일이 있어도 3 백 살까지는 같이 살자고 하던 자네가
백 살도 다 못 살고 죽어 버렸으니, 혼자 남은 나는 어쩌란 말이냐!"
김 삿갓은 그런 넋두리를 듣고 입이 딱 벌어졌다. 지금 눈앞에서 넋두리를 하고 있는 늙은이는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 사람이라고 말할 밖에 없겠지만, 뼈와 가죽만 남은 데다가 눈알만 반짝 거
리는 것이, 사람이라 기 보다는 귀신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앞으로 2 백 년을 더 살아갈 예정이라니 도대체 사람의 생명에 대한 욕심은 어디까지
가야 만족할 수 있단 말인가?
"돌아가신 노인께서는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옵니까?"
"이 사람이 나보다 세 살이 아래니까 올해 아흔여덟 살이지. 3 백 살까지 살려면 아직도 2 백 년
이나 남았는데, 이 친구가 비명횡사(非命橫死)를 했으니,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느냐 말일세.
"김 삿갓은 들을수록 놀랍기만 하였다. 사람이 백 년을 넘겨 살기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윤 노인
자신은 이미 백 년을 넘겨 살아왔을 뿐 아니라, 아흔여덟 살에 죽은 친구를 비명횡사라 말하니
그래도 말이 되는 것일까?
"아무려나 친구분이 돌아가셨으니까 매장을 해드려야 할 것이 아니옵니까?"
"물론 그래야지. 그러나 내가 기운이 없어 땅을 팔 수가 없네 그려. 미안하지만 젊은이가 무덤
좀 파줄 수가 없을까?"
무덤을 팔 기운조차 없는 사람이 2 백 살이나 더 살겠다고 하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김 삿갓은 노인을 대신해 광혈(壙穴)을 손수 파 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정 노인을 땅속에
묻게 되자, 윤 노인은 김 삿갓에게 생각조차 못 했던 청탁을 하고 나왔다.
"여보 게, 젊은이! 이 친구하고 나하고는 생사 고락을 같이해 온 평생 동지라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동지였지만 우리 두 사람은 저승에서도 동지가 되기로 약속했단 말일세.
단짝 동지의 마지막 길을 그냥 보내기가 너무 섭섭하니 자네가 혹시 글을 알고 있거든
만장輓章)이나 한 틀 써 주게나."
김 삿갓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좋습니다. 마침 종이와 먹이 저에게 있으니 만장을 써드리지요."
그리고 김 삿갓은 즉석에서 만 시(輓詩) 한 수를 써 갈겼다.
동지생전 쌍동지(同知生前 雙同知) 그대와 나는 살아서는 쌍 동지였는데
동지사후 독동지(同知死後 獨同知) 그대가 죽어 나는 외 톨 동지가 되었네.
동지착거 차동지(同知捉去 此同知) 그대 단짝 동지인 나도 데려가 주게.
지하원작 쌍동지(地下願作 雙同知) 이제는 저승에서 쌍 동지가 되고 싶네.
윤 노인이 <동지>라는 말을 하도 뇌까려 대기에 김 삿갓은 짓궂게도 일부러 <동지>라는 말만
가지고 만장을 써 주었다. 그리고 만장 속에는 <영감님도 친구를 따라 빨리 저승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윤 노인이 글을 볼 줄 알았다면 김 삿갓을 죽이
겠다고 덤벼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윤 노인은 글을 모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자네도 나처럼 오래 살고 싶거든 이 산속에서 신선도를 닦으며 나와 함께 살면 어떻겠는가?"
하고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다.
김 삿갓은 어름어름하다가는 윤 노인에게 붙잡혀 버릴 것만 같아 부랴부랴 걸음을 옮겨 나가며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갈 길이 바쁜 사람입니다."
김 삿갓은 산길을 걸어 내려오며 마음속으로 혼자 생각해 보았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다는 것은 무엇이기에 윤 노인은 생에 대한 애착이 이렇게도
강렬한 것일까?"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오고 싶어서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본인도 모르게 부모가 만들고
낳아 주셨으니까 사람으로 태어났을 뿐이다. 그렇게 인생의 출발은 본인의 뜻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죽음 역시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오래 살고 싶어도 때가 되면 반드시 죽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고 일러오지 않던가?
따라서 내 목숨은 틀림없는 나의 것이지만,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이 땅에 나온 것이 아닌 것처럼,
아무리 오래 살고 싶어도 내 맘대로 오랫동안 살 수 없는 게 사람의 수명이다.
우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은 하루살이와 같은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 전에 작별한 윤 노인은 3 백 살까지 살고 싶어 지리산에 들어와 선도(仙道)를 닦는다고 하였다.
사람의 명이 자기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닌데 도를 닦는다고 과연 3 백 살까지 살 수 있을 것인가?
설령 3 백 살까지 산다 손 치더라도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혼자 3 백 년을 산다는 게 무슨 뜻이
있을 것인가?
일찍이 어떤 시인은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다"라고 했다.
풀잎 끝에 달려 있는 아침 이슬은 해가 뜨면 사라지는 슬픈 운명을 지고 태어났다고 했다.
이렇게 영겁(永劫)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존재는 아침 이슬 같은 존재이다.
이런저런 두서없는 생각에 잠겨 길을 가고 있었으니 김 삿갓은 자신도 모르게 인생이 참으로
보잘것없는 듯 느껴졌다.
김 삿갓은 그 순간 분명 시를 한 수 읊조렸음 직 한데 전해오는 기록이 없으니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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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