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주인인 천주님 섬기며 신앙 고백한 ‘순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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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제작된 작자 미상의 ‘경기 감영도’. 135.8㎝×442.2㎝ 크기의 이 작품은 보물 1394호로, 하느님의 종 조용삼이 순교했을 당시 경기감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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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주례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식이 열릴 것으로 보이는 광화문 광장. 이힘 기자 |
경기감영 터는 ‘잊힌’ 순교지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앞 인도변에 표석이 하나 세워져 있을 뿐이다. 도로명 주소로는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9(평동164).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외려 그 앞에 있는 노천카페가 더 눈에 띈다. 6월의 햇살에 빛나는 젊은 남녀들의 아름다움은 200여 년 전 순교자들의 모습과는 아무리 연결해도 이어지지가 않는다. 그랬기에 경기감영 터에는 ‘순교자 현양비’ 하나 세워지지 못했다. 하지만 순교의 숨결이 어찌 사라지랴! 오늘날로 치면 경기도청쯤 되는 경기감영 터는 시복을 앞둔 124위 중 조용삼(베드로, ?∼1801)의 ‘순교지’라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또 최창주(마르첼리노, 1749∼1801)와 이중배(마르티노, ?∼1801), 원경도(요한, 1774∼1801) 등이 1880년 10월께 끌려와 이듬해 4월 25일 고향 여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기까지 신앙을 고백한 ‘증거지’라는 점도 주목을 받고 있다. 게다가 1800년 5월 양근(현 양평)에서 체포돼 문초를 받던 윤유오(야고보, ?∼1801) 등도 그해 10월 경기감영으로 이송돼 형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경기감영을 거쳐갔는지는 알 수 없다.
배교를 거부한 예비신자
경기감영의 유일한 순교자 조용삼의 삶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리 빛나는 인생은 아니었다. 아니 평생 그의 삶은 불우했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고, 홀아버지, 그리고 동생(조호삼)과 함께 힘겹게 살아야 했다. 얼마나 생계를 잇기 힘들었는지 여주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에 있던 임희명(세례명 미상, ?∼1801)의 집에 들어가 살아야 했을 정도다.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을 통해 교리를 배운 조용삼은 1800년 4월 15일 여주 정종호(세례명 미상, 1752~1801)의 집에서 예수 부활 대축일 모임을 갖던 중 체포된다. 예비신자에 불과했지만 그는 혹독한 매질에도 꿋꿋이 신앙을 고백했다. 이에 여주 관아에선 그의 부친을 끌어내 “배교하지 않는다면 당장 네 아버지를 죽여버리겠다”면서 더 잔혹하게 매질을 했다. 이에 굴복해 신앙을 부인하고 관청을 나오던 그는 이중배를 만나 그의 권면을 듣고 다시 여주관아로 돌아가 신앙을 고백했다. 이후로는 그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다음 그해 10월 경기감영으로 이송돼 문초를 받던 그는 신유박해가 일어난 1801년 초 옥중에서 세례를 받는다. ‘베드로’였다. 이어 그해 2월 다시 경기감사에게 끌려가 배교를 강요당하며 문초를 받고 돌아온 그는 그해 3월 27일 숨을 거둔다.
박해자들을 향한 그의 고백이 황사영(알렉산델, 1775∼1801)의 「백서」를 통해 전해온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있을 수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님을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입니다.”
화폭으로 전해지는 순교신심
순교자 조용삼이 뜨겁게 신앙을 증거한 서대문 밖 경기감영은 1896년 수원으로 이전하면서 군영이 됐다가 1907년 한성부가 이전해 사용했고 훗날엔 병원이 되면서 지금은 역사의 숨결을 모두 잃었다. 다만 보물 제1394호로 지정돼 있는 135.8×442.2㎝ 크기 ‘경기감영도(京畿監營圖)’를 통해 19세기의 옛 자취를 느껴볼 수 있을 따름이다. 12폭으로 이뤄진 감영도는 오른쪽에서 첫 병풍이 돈의문(서대문), 네 번째 폭이 북악산 측면, 여섯 번째 폭이 경기감사 혹은 관찰사가 집무하던 선화당, 여섯 번째에서 아홉 번째 폭이 인왕산, 열한 번째 폭이 안산이다. 감영 앞에는 관찰사 행차와 군사들 훈련 장면, 북쪽으로는 영은문, 남쪽으로는 서소문으로 향하는 도로와 민가, 행인이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다. 이 그림을 통해 순교자들이 어디에서 수감돼 있었을까, 유심히 들여다보며 추측해 볼 따름이다. 문의 : 02-365-7421, 서대문본당
순례자들의 발길은 그러나 경기감영에서 멈출 수 없다. 조선의 정치와 행정, 사법의 중심지였던 육조(六曺)거리, 곧 지금의 광화문광장이 지척이다. 불과 0.8㎞만 더 가면 옛 황토마루, 곧 세종로4거리 이순신 장군 동상 앞이다. 광화문을 바라보며 왼쪽 가까이에서부터 공조와 형조(세종문화회관 앞), 병조, 사헌부, 중추부, 삼군부가 자리했고, 오른쪽에 기로소, 한성부, 호조, 이조, 예조, 의정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또 세종로4거리에서 종로로 방향을 틀면 우포도청(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 광화문역 5호선 5번 출구)을 시작으로 의금부(SC은행 앞)와 전옥서(영풍문고 앞), 좌포도청(종로3가역 3호선 9번 출구) 등이 있었다. 순교자들의 눈길이, 숨결이, 발길이 닿지 않은 데가 없다. 한결같이 124위 순교자들이 거쳐간 신앙 증거지이자 순교지였다.
육조거리 중 형조(현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최필공(토마스, 1744∼1801) 등 7위가 문초를 받았다. 왕명에 의해서만 죄인을 다스리던 특별사법관청인 의금부에서도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 등 9위가 국문을 받았다. 형조에서 심문을 받기 전에 죄인을 가둬두던 일종의 교도소인 전옥서에서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 등 5위가 갇혀 있었다. 좌ㆍ우 포도청에선 124위 중 52위가 포도청을 거쳐 경향 각지에서 순교의 화관을 썼고, 윤유일(바오로, 1760∼1795) 등 5위는 포도청에서 순교했다. 그랬기에 오는 8월 16일 거행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식의 장소로 ‘광화문광장’이 유력시되고 있다. 박해의 심장이던 육조거리, 곧 광화문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시복예식을 주례함으로써 200년 전 순교의 숨결을 되살려 그 순교신심을 내면화하고 실천신앙으로 재정립하려는 것이다. 나아가 조선 후기 100여 년간 지속된 박해를 받으며 처형당한 순교자들이 하늘나라의 시민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의미와 함께 이제는 피의 박해에서 참된 용서와 화해, 평화의 길로 나아감을 보여주는 자리로 만들겠다는 교회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서울대교구 순교지(5곳)
124위 중 38위가 피를 흘린 서울대교구 관할지역 순교지는 서소문 밖과 포도청, 당고개, 새남터, 경기감영 등이다. 서소문 밖에서 25위, 포도청에서 5위, 당고개와 새남터, 경기감영 등에서 각각 1위가 순교했다. 다만 순교지가 한양으로만 표기돼 순교지를 특정할 수 없는 순교자들도 5위나 된다. 이들 중 1819년 기묘박해 당시 순교한 조숙(베드로, 1787∼1819)ㆍ권천례(데레사, 1784∼1819) 부부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1866년 병인박해 때 배티 교우촌에서 체포된 송 베네딕토(1798∼1867)와 송 베드로(1821∼1867) 부자, 송 베드로의 며느리 이 안나(1841∼1867) 등 3위는 한양에 압송돼 이듬해 순교했으나 정확한 순교지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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