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이스라엘 분쟁으로 국내 언론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뉴스가 당연히(?) 눈에 띄게 줄었다. 그렇다고 우크라이나 전선이 조용해진 것은 아니다. 가을비로 땅이 질척거리는 '라스푸티카 현상'이 나타나기 전에, 이후 땅이 얼어붙고 눈이 쌓이는 혹한이 닥치지 전에, 한 뼘이라도 더 많은 땅을 점령하고, 탈환하기 위한 러-우크라 군의 공방은 주요 전선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다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600일을 훌쩍 넘긴 '장기전' 요인과 중동 지역에 전면전 위기가 고조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양상도 보다 현실적으로 바뀌는 모양새다.
우선, 우크라이나군은 여름철 대반격을 시작한 전선 3곳중 자포로제주(州) 남부 전선(라보티노~베르보보예 전선)으로 공격력을 집중시켰다. 서방 측은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이 당초 기대에 못미치면서 이곳 저곳에서 삐걱거리자, 전투력을 한 곳으로 모아 병력과 장비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성과는 기대 이하다. 넓은 지뢰밭과 대전차 장벽 등 러시아가 워낙 탄탄한 방어 요새를 사전에 구축한 탓이다. 그러다 보니 우크라이나는 서방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이 걸고 지난 6월에 빼앗긴 격전지 '바흐무트'의 탈환에 부쩍 공을 들이고 있다.
3중 4중 방어선을 구축한 러시아 요새/사진출처:pronews
파괴된 독일산 레오파드 전차(탱크) 곁을 지나가는 우크라군 장갑차/사진출처:스트라나. 영상 캡처
러시아는 방어에 한층 더 자신감을 보였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15일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은 실패했다"며 "러시아군은 거의 전(全) 전선에서 더 나은 입지를 확보하는 등 '능동적인(공세적인) 방어작전'을 펴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실리 네벤자 주유엔 러시아 대사는 아예 유엔 안보리에서 "러시아군은 이제 방어에서 공세로 태세를 전환했다"고도 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현지 매체나 서방 언론 보도에서 이제는 우크라이나군이 작은 마을이라도 탈환하거나, 러시아군을 외곽으로 밀어냈다는 소식을 접하기 힘들다. 매일매일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한 채,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서방 언론의 관심을 끈 크림반도와 흑해함대에 대한 우크라이나 미사일·드론 공격도 뜸해졌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15일 "하마스-이스라엘 충돌이 시작된 후, 우크라이나의 미사일·드론 공격은 며칠간 사라졌다"며 "그런 공격이 더 이상 커다란 홍보 효과를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수상 드론 '시 베이비'(위)와 새 수중드론 '마리치카'/사진 출처:u24.gov.ua 스트라나.ua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 해군은 '수상 드론'과는 차원이 다른 '수중 드론'으로 러시아 흑해 함대 소속의 '파벨 데르자빈'(Павел Державин)호에 손상을 가했다고 발표하는 등 대외 홍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마스-이스라엘 충돌로 외신의 관심이 현저히 줄어들고, 러시아 측도 우크라이나의 해상 공세에 '맞춤형 방어'에 나서면서 공격의 속도 조절에 나선 느낌이다. 예전 만큼 눈에 띄는 전과를 올리고, 관련 영상을 대외에 알려 홍보하기가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특히 러시아 측의 대응은 장기전을 겨냥한 듯, 영속적이고 신속하다. 흑해 함대 전함들을 안전한 인근 기지로 이동 배치하고, 수상(수중) 드론의 공격을 막기 위해 흑해함대 사령부가 있는 세바스토폴만(灣) 입구에 '인공 장벽'을 설치했으며, 우크라이나 특수 부대원들의 '사보타주'(특수 파괴 공작)를 차단하기 위해 훈련된 돌고래 부대까지 해안 최전선에 배치하는 등 적극적인 해상 방어 전략을 택한 상태다.
크림반도 세바스토폴만 입구에 설치된 인공장벽 위성사진/사진출처:스트라나.ua
또 영국의 장거리 미사일 '스톰 섀도'를 장착, 공격하는 구소련 미그 전투기가 주둔한 기지를 향해 끊임없이 드론 공격을 가했다. 우크라이나군으로서는 러시아군의 집요한 드론 공격을 피하면서 상대를 향해 '스톰 섀도' 공격에 나서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셈이다.
반면, 러시아군의 주력은 지난해 가을 무기력하게 물러났던 북서부 하르코프주(州) 지역을 향하고 있다. 하르코프시(市)로 이어지는 요충지 쿠퍈스크와 도네츠크주(州) 리만 등 2개 방향으로 화력을 퍼붓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아브데예프카(아우디우카)를 '제 2의 바흐무트'로 만들기 위해 '포위 공세'를 좁혀가는 중이다.
러시아측에게 아브데예프카는 도네츠크주의 주도인 도네츠크시(市) 방어의 1차 관문이다. 이 곳에 주둔한 우크라이나 포병이 도네츠크시를 향해 지속적으로 포격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이 아브데예프카를 장악할 경우, 도네츠크 시민들은 지금보다 훨씬 안전한 일상을 보장받을 수 있다.
양측의 지상 작전 양상은 크게 보면, 우크라이나가 자포로제주 남부전선에서, 러시아는 하르코프-도네츠크 전선에서 총력전을 펴는 가운데, '바흐무트' 탈환과 '아브데예프카' 점령이라는 단기 목표를 세우고 달려드는 모습이다.
러시아군이 공세를 펴는 아브데예프카(아우디우카, 표시) 주변 지도. 도네츠크주 주도인 도네츠크시(러시아 점령지)에 우크라이나 포병이 지속적으로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위치다. 지도 맨위가 지난 6월 러시아군이 장악한 최대 격전지 '바흐무트'이고, 맨왼쪽 아래 '벨리카야 노보숄카'는 우크라이나가 여름철 반격을 시작한 3곳 중 하나다/얀덱스 지도 캡처
최근 들어 갑자기 주목받기 시작한 제 3의 전선은 남부 헤르손 지역이다. 러시아 용병 '바그너 그룹'의 6·24 군사반란에 연루돼 현장 지휘봉을 놓은 것으로 알려진 세르게이 수로비킨 장군이 지난해 10월 특수 군사작전(우크라 전쟁)의 합동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뒤, 군사물자 보급의 어려움을 이유로 러시아군의 철수를 전격적으로 결정한 바로 그곳이다.
특이하게도 이 전선에 언론의 눈길을 몰아준 이가 푸틴 대통령이다. 그는 우크라이나군이 헤르손시(市)를 가로지르는 드네프르강을 건너 자포로제 지역으로 압박해 들어가는 전격적인 '도하 작전'을 준비중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직은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건 별로 없다.
스트라나.ua는 19일 '전황 분석' 코너에서 "러-우크라 간에 헤르손 '도하 작전' 계획에 대한 말 씨름이 계속되고 있다"며 "기선 제압을 위한 우크라이나군의 침투 작전과 선제적인 러시아의 집중 폭격이 이 곳 '도하 작전'의 실행 가능성을 알려주는 징표"라고 밝혔다.
러시아 국방부의 발표에 따르면 4개 그룹으로 구성된 우크라이나군은 17일 헤르손시의 안토노프스키 철교 쪽으로 드네프르강을 건너 러시아군 통제 하의 페스차노프카(Песчановкa)-포이마(Пойма)와 포드스테프노에(Подстепное) 마을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패퇴했다. 러시아에 합병된 헤르손 지역의 블라디미르 살도 수반도 "우크라이나군이 강 동쪽 지역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침투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측은 페스차니프카 지역 일부를 점령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군의 드네프르강 도하작전/사진출처:우크라군 합참 페북, 영상 캡처
우크라이나군 도하작전 루트(점선). 드네프로강을 건너면 페스차노프카, 포이마로 이어진다. 오른쪽은 포드스테프노예다.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르 강 '도하 작전'설은 지난 달(9월) 말부터 러시아 측에서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언론으로서는 러시아군 지휘부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는 경고의 의미로 제기했을 수도 있다. 10월 초 'D-데이', 10월 10일 'D-데이'설도 제기됐다. 하지만, 소수의 침투 외에는 조용하게 지나갔다. 하마스-이스라엘 충돌이 드네프르 도하 계획을 무산시켰을 수도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직접 나서 "그들이(우크라이나) 오랫동안 예고해 왔던 다음 반격을 헤르손 방향으로 시작했다"고 주장했으니, 모두가 주목할 수 밖에 없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장군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격했듯이, 우크라이나군이 드네프르강을 건너 러시아군이 장악한 남부 지역을 뒤흔들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강을 건너면 자포로제 '남부전선'과 같은 강력한 3중, 4중의 러시아군 방어 진지도 없다. 문제는 강폭이 넓은 드네프르강 자체다. 천연적인 자연 요새다. 러시아군의 총구를 피해 드네프르 강을 건너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 또 위험하기 짝이 없다. 물론, 도하 작전이 성공할 경우,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으로 바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헤르손시에서 철수한 러시아군이 드네프르강 동안에 구축한 참호 시설 위성사진/사진출처:스트라나.ua
안토노프스키 대교 밑에 놓인 부교를 통해 지난해 11월 헤르손시에서 드네프르강 동안으로 철수하는 러시아군
스트라나.ua는 "도하 작전의 가능성을 100% 배제해서는 안된다"며 "러시아군이 드네프르강 서안을 따라 대규모 포격을 가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도하작전을 우려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도하 작전'설이 러시아군의 예비 전투부대를 헤르손 지역으로 유인하기 위한 것인지, 본격적인 공세를 준비하고 있는지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분명한 것은, 지상 반격작전과 흑해함대 해상 공격에 이어 '드네프르강 도하작전'이라는 제 3의 전선이 우크라이나군에게는 '비장의 카드'라는 점이다. 그 전선이 푸틴 대통령이 예견한 만큼 커질 것인지, 소수의 침투작전 수준에 계속 머무를지 여부는 지켜봐야 한다. 그것도 결국,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의 양상에 달려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