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 제1독서의 요시야 임금에게서 이스라엘의 쇄신 노력이 시작되는 것을 봅니다. 임금은 율법서의 발견을 계기로 정치적 위기가 다가오는 시기에 백성과 함께 오욕과 재난의 역사가 시작된 시점을 새기고 파국을 피하는 길을 찾습니다. 임금은 율법서가 가르치는 하느님과의 계약을 ‘실천’하지 않았기에 주님의 큰 진노를 샀다고 선언한 뒤 백성에게 계약 책의 말씀을 장엄하게 읽어 주고, 먼저 자신이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기로 계약을 맺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세가 가져다준 계명을 통하여 죽음이 아니라 진정으로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계명은 외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온 마음을 다하여 그 계명을 실천하였을 때만이 약속받은 축복과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요시야 임금이 보여 줍니다.
요시야 임금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생명의 길은 그럴싸한 겉모습이나 화려하고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드러나는 열매를 요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좋은 열매의 나무에 해당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주님을 따라 걸으려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자신의 겉모습과 말에 스스로 속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참으로 구원의 삶으로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계명을 선택하는 마음이 가슴속 깊이 자리 잡고, 구체적인 실천을 그 결실로 내놓을 때 비로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생명의 삶을 온전히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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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주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있지만 사나운 이리일 뿐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정의와 평화를 뒤흔들거나,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선택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체의 시도들은 모두 거짓 예언자들의 행태입니다. 이것들은 주로 우리 사회 안에서 사상이나 이념, 체제나 제도들을 등에 업고 나타납니다. 그것들은 흔히 현란하고 매력적이며, 언제나 인간적이라는 외양과 심지어 신앙을 앞세우면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세상 안에서 만들어 내는 과정들을 잘 볼 수 없습니다. 언제나 그들이 제시하는 그럴듯하게 포장된 결과들만 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양산해 내는 것들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것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재물욕, 얼굴을 드러내려는 명예욕, 내로라하는 권력욕 등을 통해서 우리는 거짓 예언자들의 실체를 알아 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그 행위를 보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현세를 살아가면서 거짓 예언자들에게 현혹되지 않도록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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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쥐 팥쥐’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엄마로 들어온 팥쥐 엄마는 팥쥐만 위하고 콩쥐에게는 매몰찹니다. 세월이 지나자 팥쥐는 엄마의 과보호로 거만한 아이가 되지만, 고생하며 자란 콩쥐는 겸손해져 복 받는 아이가 됩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 역시 간단합니다. 팥쥐처럼 되지 말고 콩쥐처럼 되라는 것이지요. 어머니들에게도 숨은 교훈이 있습니다. 팥쥐 엄마처럼 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그러한 어머니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웃 아이에게는 냉정하면서도 자기 아이에게는 갖은 정성을 다합니다. 다른 아이가 자기 아이를 조금만 건드려도 콩쥐 대하듯 합니다. 선생님이 조금 꾸중한 걸 가지고 전화를 걸어 따지곤 합니다.
아이의 외적인 면에는 이렇듯 극성스럽지만 내적인 면에는 둔감합니다. 겉만 예쁘면 속도 예쁠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닙니다. 영악한 아이는 영악한 어른으로 바뀔 뿐입니다. 오히려 어수룩했던 아이들이 성격 좋은 어른으로 탈바꿈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좋은 나무는 뿌리가 좌우하지요. 보이지 않는 뿌리가 좋은 나무의 열쇠인 셈입니다. 뿌리는 부모입니다. 선생님입니다.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들이 건전하면 아이 역시 건전해집니다. 좋은 나무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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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 일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판단하려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열매를 기다리기보다는 보는 첫 순간에 판단하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괜찮은 사람으로 판단하였으나 그게 아닌 사람, 반대로 처음에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여겼으나 정말 괜찮은 사람을 만난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서두르지 맙시다. 함부로 판단하지 맙시다.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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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을 가지고는 영적 식별에 대한 묵상을 함으로써 유익함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영적 식별력이야말로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덕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적 여정이 실은 구체적 일상을 통해 펼쳐지는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영적 식별이야말로 우리 인생에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 식별력이란 참으로 천차만별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했다 해서 혹은 사제이거나 수도자라고 해서 영적 식별력이 높다고 일률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 예외 없이 이 영적 식별력이 깊어지고 닦여 나갈 수 있는 은총을 간절히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적 식별력이란 어떤 기술적이거나 지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랑에 터잡은 문제입니다. 올바른 사랑이 깊은 이라야 상대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깊은 이라야 예수님의 생각과 눈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다만 유념할 것은 이때의 사랑이란 그저 단순한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분별력 있는 사랑이어야만 합니다. 사랑에 터잡고 자라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랑 그 자체가 또한 분별력을 머금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일견 좋아 보이는 것이 실은 좋지 않은 것임을 분별해 내는 것, 좋은 것과 더 좋은 것을 식별해 내는 것, 동기와 과정과 결과를 어떻게 일관성 있게 하나로 묶어 식별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이 영적 식별력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어려움들입니다. 복음의 표현을 빌린다면, 거짓 예언자들이나 열매의 좋고 나쁨에 대한 식별인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해서 이런 식별의 현상들을 점검해 봄으로써 적잖은 영신적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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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열매
-김민수 신부-
본당의 한 자매가 안타깝게도 정월 초하룻날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녀들을 두지 못한 채 전신마비가 된 남편을 18년간 정성과 사랑을 다해
간병을 하다 암에 걸린 것도 몰랐습니다. 몇 개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임종 때가 이르자 구역 신자들은 그를 위해 54일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자매는 자신의 임종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 주위에 부모가 없는 아이들에게 주라며
성금을 내놓았습니다. 자신도 부모없이 자랐기 때문에 늘 마음속에 한이
맺혀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54일 기도가 끝난 후 그녀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습니다.
구역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너나 할 것 없이
상주가 되었고, 음식을 차리며, 장례 미사를 정성껏 봉헌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장애인 남편만을 위해 희생한 삶이었고, 자식없이
세상을 떠난 불쌍한 여인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보잘것없는 한 인간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진정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구역 신자들도
한마음이 되어 그의 장례를 치러 주면서 교회가 공동체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을 뿌릴 때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라는 결실을 거둘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결실을 맺을 때
세상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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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열매
-김찬선신부-
“너희들은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이 말씀을 몇 겹으로 뒤집어 이해하면
“수도복을 입었다고 다 수도자냐.”입니다.
또는 “세례를 받았다고 다 신자냐.”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몇 십 년 수도생활을 했는데도
아직도 행복하지 않다면 수도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수도생활의 열매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신자로 살았는데도
아직도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것도 신자로서 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교무금 잘 내고 열심히 성당을 다녔어도
첫째가는 계명을 충실히 살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매를 보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유로움은 없고 방종만 있다면
참으로 순종 잘 하는 수도자가 아닙니다.
풍요로움은 없고 탐욕만 있다면
참으로 가난한 수도자가 아닙니다.
눈치만 보고 모두를 사랑할 줄 모른다면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 정결한 수도자가 아닙니다.
같은 맥락에서
나이를 먹을수록 고집만 세고 너그러움이 없다면,
일은 많이 하지만 기도하지 못한다면,
완덕 대신 변덕만이 쌓였다면
일생의 수도생활을 잘 못한 것입니다.
열매는 한 순간에 맺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봄의 생기와 여름의 열기를 머금고,
인내와 끈기로 비바람을 견뎌내야 나무가 열매를 맺듯이
기도로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을 먹으며
자기를 잃고 십자가를 지는 인고의 시간을 견디어내야
사랑과 행복의 열매가 우리에게 달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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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대학생인 어떤 청년에게 이러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요즘 살기도 힘든데, 저도 신학교 들어가서 신부님이나 되어 볼까요?”
신부의 삶이 만만하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이 말은 아마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부님, 요즘 살기 힘든데, 열심히 야구해서 고액 연봉을 받는 프로야구 선수나 될까요?”
신부의 삶이 쉬워 보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자리입니다. 그러나 앞선 그 청년은 하느님의 부르심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판단만으로 신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모습은 이 세상 안에서 자주 그리고 분명하게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의 보살핌 없이 살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별 것 아닌 나의 능력과 재주로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 당연히 얻어야 한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때 유행했던 유머 하나가 생각납니다. 실직한 형제님이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물었지요.
“아들아,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이에 아들은 큰 소리로 답변합니다.
“대통령이요.”
이 말에 아빠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아들에게 물었지요.
“네가 대통령이 되면 아빠는 뭘 시켜줄꺼니?”
그러자 아들이 재빨리 대답했답니다.
“탕수육이여!”
아빠가 생각하는 것과 아들이 생각하는 것의 차이가 있었지요. 그런데 우리들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도 이처럼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당연한 말씀이고, 또 이렇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 당연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한테만큼은 특별한 예외가 있기를 늘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쁜 나무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나이지만,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이 과정 안에서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서로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만약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앞서 살기 힘들다고 지금부터 노력해서 유명 선수가 되겠다는 착각과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결심 하나로 하느님과 하나를 이루는 좋은 나무가 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꾸준히 주님과 하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좋은 나무가 되어야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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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여라
- 전봉순 수녀-
내가 살고 있는 수녀원 분원 공동체는 일반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종교단체에서 대문을 두드리며 전교하러 온다. 전날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다음날 같은 사람이 또 찾아온다. 그들은 주로 낮 시간에 오는데, 초인종 소리를 듣고 누구냐고 물으면 “…`교회에서 왔습니다.” 하거나 “…`절에서 왔습니다.” 한다.
그러면 나는 “우리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하고 말한다. 그래도 문을 좀 열어 달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신앙이 있는 신자라고 해도 인정하려 들지 않고 끈질기게 조른다. 그러면 나도 더 말하기에 지쳐버려 초인종 인터폰을 끊어버린다. 그들은 꼭 두 명씩 짝을 지어 다닌다. 그래서 화면을 통해 현관 앞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아예 대꾸도 하지 않는다.
지난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젊은 개신교 신자를 만났다. 그 자매는 임신 중에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었다고 했다. 혼자서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 자매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개신교 신자든 천주교 신자든 모두 하느님을 믿기에 그분과 편하게 대화했다. 그 자매는 교회에서 ‘천주교는 이단’이라고 배웠는데 수녀님은 어떤 분을 믿느냐고 물었다. 역시 일부 개신교 신자들의 틀에 박힌 질문이라 놀랄 것은 없었지만 현대 젊은이마저도 이런 식인가 싶어서 당장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래도 인내하면서 그의 말을 들어보고자 했다. 자매는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다면서 예전에 직장 생활을 할 때도 천주교 신자인 동료에게`‘천주교는 이단이야.’라고 해서 동료를 울린 적이 있단다. 그 천주교 신자는 열성적인 개신교 신자 앞에서 대꾸할 방도가 없었는지, 아니면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랬는지 그냥 울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천주교 신자를 자기들의 교회에 끌어들이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꼭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그 자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씁쓸해서 “개신교의 하나님과 천주교의 하느님이 다른 분인가 보군요?” 하고 말했다.
교회의 역사나 그리스도교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자기들의 신앙이 전부인 양 떠드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현대의 신자들이 조심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가 제대로 교회 전통과 성경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진리를 잃어버린다.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하며 늘 ‘조심해야’ 한다. 열매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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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우 신부-
‘열매’란 말이나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구체적 품행을 드러내고 활동의 진실성 여부를 식별하게 해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보니 내 삶에 크고 작은 흔적을 남겨놓은 이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으로 삶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고 사는가를 나에게 알려주었다.
교통사고로 다친 불편한 다리로는 일상조차 살기가 어려울 주 선배는 절망에서 빠져 나오려고 몇 년 동안 애쓰며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다른 이에게 부정적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자존감을 지키는 모습은 아름답다.
자신을 바로 보기 위해선 날마다 시간을 내어 걷거나 앉아서 명상하며 경험하는 모든 것을 아주 찬찬히 살펴보아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선택이란 사실 얼마나 단순한가.
‘깨달음에 도움이 될 일들을 하고 그렇지 않은 일들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또 하고 있는 그 일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영적 성장을 위한 첫번째 단계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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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김경식 몬시뇰-
거짓 예언자는 초대교회부터 교회의 골칫거리로 있어왔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구분해내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양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나운 이리가 양떼의 천적이면서도 양인 것처럼 양떼 속에 섞여 있습니다. 이리는 양들의 순진한 믿음을 이용하여 양들을 잡아먹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가려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된다”(16)는 것입니다. 양떼가 그들의 설교에는 쉽게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들의 행실을 보면 쉽게 가려낼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기”(18) 때문입니다. 한두 번은 속일 수 있어도 오래 속이지는 못합니다. 사고방식이 나쁘면 그 행동이나 성향이 나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말로써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을 행동으로 보일 때 비로소 배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로만 가르치고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면, 그분의 말씀을 그렇게 좋아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행동에 감복되어 그 말씀이 모두 진리라 믿고 그분을 따릅니다. 예수께서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다 가르치신 것은 당신의 온 생명을 다 바쳐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순교자들의 죽음을 보고서 많은 이들이 진리를 깨치지 않았습니까!
좋은 모범은 몸에서 배어나야 하는 것이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안다면, 우리는 좋은 스승으로서 좋은 행동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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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명 공동체
-박근범 신부-
여러분, 기쁨이 충만한 날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복음 말씀을 요한복음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비유’와 연관시켜 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예수님이시고 좋은 열매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품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떨어져서는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살아갈 때, 그 나무의 가지인 우리들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한 생명 공동체이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은 갖가지 감언이설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거기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현재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때 사람이 성숙해집니다.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모든 것이 감사할 일이고, 그리고 아름답게 봅니다. 사람들은 법보다 주먹이 앞서고 주먹보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이는 어리석은 자들의 생각입니다. 역경을 참고 이겨내는 시간을 통해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듯, 성실과 정직한 삶으로 행복의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잘나고 가진 것이 많다하여 교만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하느님이 우리를 불러 가실 수 있습니다. 아니 공기 중에 산소만 없어도 모든 생명체는 숨이 막혀 죽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간과하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얼마가지 않아 파멸과 죽음으로 끝장납니다. “내 생의 전부는 그리스도이십니다.”(필립서 1,21) 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생명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베푸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지 않다면 모든 것이 헛되고 부질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가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알고 보면 가장 연약하고 측은한 것이 인간인 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기란 너무나 어렵고 힘듭니다. 체험이 없는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삶을 통해 몸소 겪은 경험을 통해 성숙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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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이 아니라 속을
-김찬선신부-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부끄러웠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은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것은 아니고
더 지나고 나면 그때도 또 지금을 생각하며 부끄러워하겠지만
아무튼 지금 볼 때 어리석은 짓, 부끄러운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도 저를 어려워할 정도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학급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인데
말 않던 제가 한 마디 하니까 그대로 결정이 나버릴 정도로
그렇게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안 한 이유가
참으로 어리석고도 부끄러운 것입니다.
말실수를 하지 않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고,
그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 저를 얕잡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말실수를 하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데는 실패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속의 감정을 숨기지를 못합니다.
화가 나 있으면 그 화가 그대로 얼굴로 드러나고,
싫으면 싫은 것이 그대로 얼굴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얼굴로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너무 난처하고 민망하여
속으로는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도
겉으로는 허허 웃으며 악수하는 정치인들이 부러울 정도였고,
지금은 말 않고 억지로 있느니 숫제 말로 표현해버립니다.
사실 과거에는 속내를 감추지 못함을
저의 약점 또는 나쁜 점으로만 생각하였는데
지금은 꼭 그렇게만 생각지는 않습니다.
속내를 감추거나 겉꾸밈을 할 수 없으니
이제 겉포장을 하는데 애쓰는 것을 포기하고
아예 속내를 옳게 가져가는 쪽으로 애를 쓰게 된 점은 좋은 점이지요.
미움을 감추는 것이 불가능하니 미움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화를 내지 않아도 눈으로 말을 하니 화가 나지 않도록 저를 다스립니다.
그러니 속내를 감출 수 없음이 영적으로는 오히려 다행입니다.
쉽지 않은 것이지만 존재를 내적으로 가꾸고
근본적으로 바꾸는 쪽으로 노력을 하게하니 말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고려 때 지눌 선사가 말씀하셨습니다.
牛飮水 成乳,
蛇飮水 成毒.
소는 물을 먹어서 젖을 내고
뱀은 물을 먹어서 독을 냅니다.
같은 물을 먹는데 소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젖을 내고
같은 물을 먹어 뱀은 사람을 해치는 독을 냅니다.
존재가 바뀌지 않는 한
그 존재에게서 다른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처럼 열매를 보면 그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가시나무에서 장미가 도저히 꽃 피울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숨기려 애쓰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나의 존재를 직시하고
존재가 내면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바뀌게 해야 합니다.
뱀과 같은 존재에서 소와 같은 존재로 바뀌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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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하느님께 충실한 신앙인 요시야
-경규봉 신부-
대사제 힐키야가 성전을 보수하던 중에 법전을 찾았다. 이 법전은 신명기의 일부로 여겨지는데, 이 법전의 내용을 들은 유대 왕 요시야는 선조들이 겪은 불행은 곧 법전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을 소집한다. 그리고 주님의 성전에서 백성들과 함께 법전을 읽고, 목숨을 바쳐 주님의 계명과 규정을 지켜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언약을 이루기고 주님 앞에서 서약한다. 백성들 모두 왕과 함께 언약을 지키기로 서약한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좋았다!’는 감탄사를 여섯 번씩이나 발하신다. 빛도, 낮과 밤도, 온갖 식물과 동물도, 사람도, 만드신 모든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특히 사람을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시고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는데,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는 대단히 좋았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더더욱 좋고 아름답게 창조하셨던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이 좋은 세상을 더 좋은 사람이 잘 다스림으로써 복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에덴동산에서 살도록 하셨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복되게 살 수 있었다.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하와가 뱀에게 “하느님께서는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창세 3,3)라고 말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하느님께서는 그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만 말씀하셨지만, 하와는 따먹지 않기 위하여 만지지도 않아야하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하와가 그처럼 굳게 결심하였지만 유혹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자 그녀의 생각이 달라진다. 그리고 다른 생각을 가지고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준다(창세 3,6).
다른 생각을 품으면, 그 생각에 따라 마음도, 행동도 전혀 딴판으로 달라진다. 그래서 선인이 악인이 되기도 하고, 악인이 선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와가 그처럼 하느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자신의 생각에 따름으로써 죄를 짓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이 얻은 것은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옷을 벗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부끄러움을 알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컸다. 그들은 친교를 누렸던 하느님을 멀리 피하게 되었고, “내 살에서 나온 살이요, 뼈에서 나온 뼈”라고 외칠 만큼 친밀했던 부부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이로 갈라졌으며, 고통과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은 생명과 삶, 친교와 일치를 가져오지만,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생각을 따르는 것은 분열, 고통, 죽음을 가져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하느님을 거스르곤 한다.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가 어머니가 가려서 주는 것을 마다하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가져다 자기 입에 넣듯이 사람도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닥치는 대로 아무 것이나 먹은 어린아이가 병을 얻듯이, 사람도 죄를 짓고 고통과 죽음의 위험을 당하게 된다.
요시야 왕(기원전 639-609)은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남부 유다 왕국도 고통을 당하는 까닭이 곧 자신들의 선조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하느님의 법전에 기록된 계명과 규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하느님의 법전에 따라 계명과 훈령과 규정을 지켜 하느님과의 언약을 이루기로 백성들과 함께 서약한다. 그는 사람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며 사람을 죽음의 길로 끌고 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느님의 뜻과 계명과 규정은 곧 사람이 좋고 아름답게 살도록 주시는 것임을 요시야 왕은 잘 알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요시야 왕처럼 하느님의 계명과 훈령, 규정이란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임을 알고, 이를 믿음으로 지키는 신앙인, 오직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기로 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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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사제연수를 받으면서 많은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어제의 강의는 너무나 힘들더군요. 매년 연수중에 이렇게 강의를 통해 교육을 받지만 이번만큼 힘든 강의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피교육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딱딱한 의자에 오랫동안 앉아 있는 것이 정말로 쉽지 않네요.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바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졸음입니다. 신부님께서 열성적으로 강의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졸고 있는 제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앞에서 길게 말씀하시는 신부님을 향해서 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이제 좀 끝내죠?’
바로 그 순간, 제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성지에서 강론을 하고 성지 설명을 하는 저를 향해서, 사람들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즉, 나의 이야기에 힘들어했고, 속으로는 ‘빨리 좀 끝내지…….’라는 목소리를 얼마나 많이 외쳤을까요?
사실 제가 강론이나 성지 설명을 할 때 하품을 하시고 졸음을 못 참고 꾸벅꾸벅 조시는 분들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때마다 제 스스로는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데…….’ 하면서 그 정도의 시간도 참지 못하는 순례객들을 원망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랍니다. 하지만 어제 절실히 느낀 것은 말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듣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제대로 잘 듣지도 못하면서, 남에게는 제대로 들으라고 말하면서 온갖 책임을 부과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를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그 ‘거짓예언자가 바로 나는 아닐까?’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사랑보다는 미움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 모습이 거짓예언자가 아니고 무엇일까요?
사실 우리들의 모습과 행동 하나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커다란 미치게 됩니다. 따라서 예언자란 소위 말하는 종교 지도자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우리 모두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며, 남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거짓예언자가 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거짓예언자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내 안에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거짓예언자가 있었습니다.
남의 허물을 바라보려고 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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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면 과실수들의 성실함이 드러나듯이
-이봉하수사-
지난 봄, 공동체 조그마한 쉼터에 과실수 몇 그루를 심었습니다. 준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이었기에 어떤 나무가 좋을까 생각하다 정원수와 과실수를 함께
심기로 하고 묘목장엘 갔습니다. 봄의 문턱이라 그런지 여러 가지 나무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나무에 대해 많은 정보가 없었기에 필요한 정원수와
과실수를 묘목장 주인에게 골라달라고 하였더니 제법 큰 나무를 골라주면서
‘올해부터 과일이 열릴 것’이라 하였습니다. 나무를 정성스럽게 심고 물과 거름을
주자 얼마 후 제법 잎사귀들이 돋아났습니다. 하지만 과일이 열릴지 여부는
좀 더 기다려보아야겠지요. 예수님은 거짓 예언자, 거짓 스승, 거짓 정치인,
거짓 성직자, 거짓 경영인 등과 같은 사람들을 왜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라는
자연을 통해 비유로 말씀을 하셨을까요?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를 안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의 기준이 애매모호합니다만
좋은 나무의 열매는 우리에게 살과 피가 되지만, 나쁜 나무의 열매는 오히려
독을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열매는 먹어보아야 안다는 행위를 유발시킵니다.
사람 또한 행실 등이 바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오랜 시간 사귀거나 어떤 일
안에서 불법 행위나 위법이 드러날 경우에만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신문 방송 매체를 통해 우리 주위에 나쁜 나무들이 많음을 볼 때 복음의 비유는
쉽게 이해가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신앙생활 가정생활 사회생활 안에서
일관성을 가질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좋은 나무로 바로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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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강민구 목사-
◆예수님은 삼십여년밖에 살지 못하셨지만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실 만큼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소명을 완성하셨습니다. 그것은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셨고, 그 중요한 것을 먼저 실천하려고 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활동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루카 2,41-52)하여, 예루살렘에서 끝난다(마태 21장부터)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과 백성이 만나는 거룩한 성전이며,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의 중심이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가장 깨끗하고 건강해야 할 성전이 병들고 타락하게 되면 개인과 가정은 물론이요, 해당 사회와 국가도 그 병을 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장 많이 비판하신 이들이 하느님과 우리의 만남에 도움을 줘야 하는 자리에 있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영적 상태는 사회의 건강성을 재는 기준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희망은 종교 지도자들의 자기 쇄신에서 나온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이 어떤 지위에 있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가 그들의 거룩함을 담보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들이 거짓 지도자인지, 참 지도자인지는 그들이 실제로 어떤 영향을 끼치며 사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열매를 맺으며, 사람들에게 인생의 맛과 기쁨을 주고 있는지, 아니면 가시나무나 엉겅퀴처럼 다른 이들에게 아픔을 주고 삶을 옭아매는지.
답은 이미 예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자신의 뿌리를 생명과 희망을 공급해 주시는 예수께 두어야 합니다. 또한 신자들은 모든 것을 면밀히 살펴보고 참과 거짓을 스스로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굶주린 이리들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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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양승국신부-
<토선생 vs 토제자>
지난달부터 하얀 토끼 한 마리가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몰래 수도원에 입회해서 저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성모상 뒤에 굴을 파서 방 한 칸을 마련하고 나서는 줄곧 수도원 근처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요즘은 아주 주인행세까지 합니다. 저희가 단체로 소풍이라도 나가려고 하면 밖으로 나와 배웅까지 합니다. 수사님들이 이름까지 지어줬습니다. ‘토선생’이라고.
혼자 지내는 것이 쓸쓸할 것 같아서, 최근 ‘토선생’ 제자 두 마리를 더 입회시켰습니다. 아직 어려서 낮에는 자유를 주고, 해가 떨어지면 현관 안으로 들여다 놓는데, 다들 얼마나 귀여워하는지 모릅니다. 아침 기도만 끝나면 너나 할 것 없이 토끼 잘 있는지부터 확인합니다. 나갔다 들어오면 토끼 도망 안 갔는지 확인합니다.
저도 새끼 토끼가 그렇게 예쁜지 처음 알았습니다. 오물거리는 입, 쫑긋한 귀, 빨간 눈... 아이들이건 수사님들이건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기를 쓰고 도망가는데도 어떻게 해서든 잡아서 쓰다듬어주고, 먹을 것을 주고, 안아주고 토끼 정신없게 만듭니다.
그러는 모습 바라보면서, 토끼에게 퍼붓는 사랑, 반만이라도 형제들에게 향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더군요. 토끼보다 훨씬 존귀하고, 훨씬 사랑스럽고, 훨씬 소중한 우리 형제들인데...
그러면서 토끼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아직 어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작기 때문이 아닐까요? 앙증맞기 때문이 아닐까요? 안쓰럽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는 작아질 필요가 있겠지요. 동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겠지요.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내려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오랜 세월이 흘러도 계속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 역시 그분이 가장 작은 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겸손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게걸든 이리 같은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거짓 예언자들, 처음부터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겠지요. 그들도 나름대로 잘 한번 살아보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실패한 거짓 예언자로 전락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작아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뒤에 오실 메시아를 위해 밑으로 내려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비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게걸 든 이리’의 모습 상상해보셨습니까? 게걸들렸다는 말은 가장 일차적인 욕구인 식욕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게걸들린 이리가 모든 말초신경, 모든 지각능력을 총동원해서 추구하는 유일한 목표는 바로 먹잇감 확보입니다. 게걸 든 이리의 머릿속에는 다른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오직 먹잇감입니다.
먹잇감이 어떤 것이든, 어떤 상태든 상관없습니다. 남이 ‘찜’해놓은 것이든, 먹다 버린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우선 내 배만 채우면 그만입니다.
당시 설치고 다니던 거짓 예언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에게 메시아는 돈벌이 도구였습니다. 자기들 사업의 발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백성들은 그저 자기들 성취의 도구였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그들이 죽든지 살던지, 멸망의 구렁으로 빠져들던지 도무지 상관이 없습니다. 내 사업만 확장되면, 내 영역만 확보되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형제자매님들, 부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을 정신없이 따라다니다가 결국 도착하게 될 종착점은 멸망입니다.
늘 착한 목자만 따라다니십시오. 우리를 빛과 생명에로 인도할 착한 목자,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줄 착한 목자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갖춰야할 덕목이 예리한 판단력입니다. 누가 착한 목자인지, 누가 거짓예언자인지 식별할 능력을 주님께 청하십시오. 모든 사목자들이 착한 목자들의 영원한 모델이신 예수님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종할 수 있도록 주님께 의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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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탈을 쓴 이리
-강영구신부-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마는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에게
사이비(似而非)라는 말을 아시지요. “닮았지만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 출처를 찾아보았더니, 맹자(孟子) 진심장구(盡心章句) 하편(下篇)에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공자(孔子)는 향원(鄕原)이라는 사람을 싫어했는데, 그가 사이비(似而非)학자였기 때문입니다.
‘孔子曰 惡似而非者 惡유(가라지) 恐其亂苗也, .......惡鄕原 恐其亂德也’
‘공자가 이르기를 내가 사이비를 싫어하는데, 가라지를 싫어하는 것은 그것이 벼이삭과 닮아서 혼란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듯이,.........
향원(鄕原)을 싫어하는 것은 그가 덕(德)을 혼란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가라지를 싫어했을 뿐(마태13,24-30) 아니라, 사이비 예언자도 싫어합니다.
사이비(似而非)가 무서운 이유는 진짜에 가깝기 때문에 누구나 속아 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사이비(似而非)는 자신도 거짓 속에 살지만, 속아 따라오는 사람들도 거짓의 수렁에 빠뜨립니다.
가짜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면 아무도 속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람은 이미 가짜가 아닙니다. 가까이면서 진짜인 채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즘 세대는 사이비(似而非)를 짝퉁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늘 제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는 짝퉁 사제가 아닌가 하고 반성합니다.
당신도 짝퉁 그리스도인, 짝퉁 예수의 제자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워낙 짝퉁들이 많고 힘이 커서, 진짜마저도 짝퉁으로 대접받는 현실이 두렵고 안타깝습니다.(一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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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자신의 열매를 보라 †
-박상대 신부 -
어제 복음에서 산상설교의 결론이자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으로 “너희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황금률이 선포되었다. 사실 황금률은 행동함에 있어서 최소한의 규범이다. 사실상 요구되는 것은 그 이상이다. 그래서 의인(義人)의 길은 외롭다고 했던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옳게 산다는 것, 나아가 남보다 더 옳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의인의 길은 좁고 외롭다. 그러나 이 길을 걷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된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바로 이 생명의 길을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소중한 삶의 지침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행동의 지침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니다. 행동이란 경우에 따라 많은 변수를 가져오기 때문에 행동지침에 대한 늘 새로운 해석과 응용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고, 그들을 참 예언자들로부터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가르치시는 대목이다. 속에는 사나운 이리를 품은 거짓 예언자가 겉으로는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나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겉포장이 화려하고 요란할수록 내용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겉모양이 양처럼 부드럽고 고울수록 그 마음도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만약에 그러한 겉과 속이 다르다면 실망 또한 클 것인즉, 그것이 거짓 예언자라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참 예언자가 공동체에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효과보다 거짓 예언자가 가져오는 부정적인 효과가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거짓 예언자에 대한 구별은 참으로 중요한 사안이다. 예수께서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통하여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원리를 구별의 기준으로 내세우신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보다 행위의 과정과 결과가 구별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는 언제나 함께 있어왔고 지금도 그렇다. 예수님 당대에도 그랬고, 마태오복음 공동체 안에서도 그랬다. 구약시대의 예레미야 예언자도 일생 동안 전문적인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을 벌였다. 예레미야는 야훼께서 보여주시는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의 구별을 통하여 자신을 참 예언자(예레 26,1-24)로 거짓 예언자(예레 23,9-40; 특히 거짓 예언자 하나니야: 28,1-17)와 구별하였고, 거짓 예언자와 섞은 사제들이 한 통이 되어 이스라엘 전체를 그릇 인도하고 있음을 통탄하였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참 예언자는 백성을 일깨워 회개하도록 하지만,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이익을 좇아 권력에 아부하느라 정신을 빼앗긴다고 하였다. 아모스 예언자도 거짓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꾸짖지 않고 오히려 원수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그들의 멸망을 예언하지만, 참 예언자는 이스라엘 자신의 죄를 고발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한다고 하였다.(아모 1,3-2,16)
신약성서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결성된 초대교회에 대한 연구 자료로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은 단연 100년 이후에 집필된 ‘디다케’로 손꼽힌다. 《12사도의 교훈》으로 통용되는 디다케는 총 16장으로 구성된 초대교회 규율에 관한 지도서로서 신약외경(新約外經)에 속한다. 예언과 복음의 수용자세를 다루고 있는 11장에 다음과 같은 거짓 사도와 예언자의 식별 기준이 들어있다. “사도는 하루 동안만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이틀을 머물러도 된다. 그러나 사흘이나 머물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다. 사도가 떠날 때는 다음 머물 곳을 찾을 때까지 필요한 빵밖에는 더 가지지 말아야 한다. 만약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다. 영(靈)으로 말한다고 모두가 다 예언자인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생활태도를 지녀야만 예언자이다.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는 그 생활태도로써 밝혀진다. 진리를 가르치는 예언자라도 가르치는 것들을 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다. 누구든지 영으로 말한다면서 돈이나 다른 어떤 것을 달라고 한다면 그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빈궁한 이들을 위해서 달라고 한다면 아무도 그를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디다케 11)
예언서와 디다케를 근거로 참된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는 방법을 요약한다면, 참 예언자는 주님의 양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바치지만 거짓 예언자는 생명은커녕 자신에게 손해 될 일은 하지 않는다. 참 예언자는 하느님나라를 구현하기 위하여 자신과 공동체의 끊임없는 쇄신과 회개를 촉구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필요하다면 쓰레기로 여기지만(필립 3,8), 거짓 예언자는 되도록 남의 잘못을 꾸짖고 남의 불행을 축복하면서 개인의 이익과 명성을 도모하고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학식과 견해에 더 의존한다. 이러한 기준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행실을 보고 아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도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는 공존한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통하여 얻은 식별의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야 한다.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일은 공동체의 사랑과 일치를 쉽게 깨뜨릴 수 있다. 따라서 남보다는 우선 내가 스스로 맺는 열매에 따라 주님의 ‘참 제자요, 참 목자’인지를 물어보고 점검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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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깨어 있는 믿음의 생활로 영적 구분을 †
오늘 성독한 복음을 중심으로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고 싶은 주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도의 하나인 곧 '영의 분별력과 좋은 영적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짓예언자를 따르지 말 것이며, 참 예언자를 통해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신다는 말씀을 잘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냥 대충대충 신앙생활해서는 거짓이고 참이고 구별할 것 없이 같이 있으면서 시간만 떼우면 됩니다. 그러나 머리털 숫자까지도 감찰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런 자들이 '주여 주여' 하고 부른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을 분명하게 성서에서 언급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나라 백성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참 예언자를 따라서 좋은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깨어 있는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바른 믿음생활이란 곧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땅에서 농사한 과실수에서 좋은 열매를 기대하듯이 하느님께서도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들이 좋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서,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귀한 열매맺는 삶을 사시는 신자들이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복음을 묵상하겠습니다.
오늘복음에서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는 주님의 말씀은 너무 당연한 상식적인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쉬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잘 알아듣도록 유치원 선생님같이 잘 하십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물론 요즘은 사람들이 이것저것 접을 붙여서 희한한 과일과 채소들이 나오고 심지어 유전자를 조작하여 이상한 열매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원래 자연의 순리대로 하자면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주님의 말씀이 맞는 거지요.
그 진리는 오늘의 복음 말씀을 여는 도입부 안에 들어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시오. 양의 옷을 입고 오지만 속은 약탈하는 이리들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아보시오." 뒤이어 나오는 나머지 말씀은 유대인의 언어습관을 빌어서 반복적으로 비유를 들어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와 열매 얘기를 한참 묵상하다 보면 조금 혼돈에 빠집니다. '좋은 나무 따로 있고 나쁜 나무 따로 있으면 나는 무슨 나무에 속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별로 좋은 나무에 속하는 것 같지 않다고 생각되면 조금 더 심각해집니다. '그럼, 나쁜 나무는 그 뭐냐 회개하고 좋은 나무가 될 수 없는건가? 영영??? 조금 불안하고 찜찜합니다. '나쁜 나무는 모두 찍혀 불에 던져진다는데?' 이거 큰일 났습니다.
그러나 너무 미리 앞질러 걱정하지 맙시다. 도입부 안에 열쇠가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아는 체 四字成語로 하면) 말 그대로 羊頭狗肉과 같은 '거짓 예언자들'을 향해 있습니다. 물론 우리처럼 이렇게 강론하면서 교우들에게 이래라 저래라하면서 폼잡는 사람들에게는 찔리는 게 많은 말씀이지만 여러분은 그리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거짓과 참을 식별하는 깨인 안목이고, 거짓을 경계하는 지혜만 있으면 되는 것이니까요!!!
아마도 초대교회 시절에는 여러가지로 혼란스럽고 정리가 안돼 있어서 개중에는 그럴 듯한 말로 사람들을 어지럽게 하면서도 턱도 없이 존경을 바라고 높이 군림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던가 봅니다. 예언자로 자처하면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며 쉽게 저항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쥐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사람들이었겠지요. 겉으로는 위해주는 척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를 챙기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에 그런 거짓말쟁이들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거야 눈별력 있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알 것이고요..........
예언자라는 단어를 성직자라는 단어로 대체하면, '열매로 그들을 알아 보라'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오늘의 성직자들에게 다가오는 주님의 경고로 들립니다. 내면에서 솟아나는 삶의 모양을 조심스레 눈여겨보며 거짓과 참을 식별하는 교우들의 눈길이 있기에, 아무리 겉으로 꾸미면서 얼마간 아닌 척해도 마침내 열매를 알아보는 눈길이 있기에 결국은 알아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성직자들도 내면으로부터 옳게 살고 반듯하게 살지 않으면 불에 던져지는 나무가 되리라는 주님의 충고로 들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좋은 예언자가 좋은 말씀을 전해주는데도 신자들이 열매를 맺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참으로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사목자들은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사목자들을 떡 주무르듯 비판하는 여러분들의 오늘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적인 관점에서 잘되고 이기고 복많이 받는 것을 원하십니까? 잘되는 것만이, 돈을 많이 벌고 명예를 얻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복받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범림받아 복을 받지 않은 것일까요? 그런 복을 못 만들어주는 교회나 사목자들은 전부 잘 못된 사람들입니까? 다시말하면 내가가 느끼는 복의 기준에 의해 교회와 사목자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나왔다고 심보가 바뀌면 냉담하고 배교하고 그러는 것입니까? 이러한 생각에서 오늘의 교회나 신자들은 하루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오늘 묵상은 신자 여러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거짓예언자를 중심으로만 하겠습니다. 우리 시대를 보면 사목자, 신자 그리고 교회가 비윤리적이고 비신앙적인 흐름속에 깊이 파묻혀 있어서 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교회는 스스로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자정 역할을 잃어 버린 것같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당연히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앞에 정직히 설 때만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공의, 사랑과 공평을 제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예와 아니오를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성서의 예언자는 하느님과 백성앞에서 제 소리를 내었던 하느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을 함께 선포했고, 하느님의 공의와 진리에 근거하여 바른 소리를 역사앞에 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3장에는 예레미야가 거짓예언자에 대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다섯 개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23, 9-12. 13-15. 16-22. 23-32 그리고 33-4-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한 복음은은 이 다섯 개의 말씀중 세 번째와 네 번째부분에 해당합니다.
예레미야는 우리가 아는대로 눈물의 예언자입니다. 예루살렘성의 멸망을 목전에 바라본 사람이며, 또한 당대의 수많은 거짓예언자들과 논쟁을 했고, 심지어 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까지도 감수해야만 했었던 고난의 예언자였습니다. 본디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입니다. 참예언자라하면 글자 그대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전하는 예언자입니다. 반면에 거짓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 그리고 그 예언을 듣는 사람의 마음에 좋게드는 말 즉 그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말을 전하는 자입니다.
당시 예레미야의 적대자였던 거짓예언자들은 궁정에서 왕과 가까이 있어 당시 소위 왕의 구미에 맞는 예언 아닌 헛된 예언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축복과 평화만을 예언했고 빌므로서 권력에 아첨하며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아 전체를 보면 곳곳에 이들 거짓예언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23장에만 보더라도 저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23,10절을 보면 "이 나라에는 들끓느니 간음하는 것들뿐, 이런 자들 때문에 땅은 마르고 광야에 있는 목장은 타버린다. 못된 짓이나 하러 쫓아다니며 있는 힘을 모두 버리는구나."
또 13절에서는 "나는 보았다. 사마리아 예언자들의 어리석은 짓을! 바알을 불러 예언하면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그릇 인도하였다."고 말합니다.
바알이 어떠한 신입니까? 그것은 풍요의 신이요, 성적 타락을 부추기는 신이요 복만을 가르치는 신인 것입니다. 이 시대의 잘못된 풍조를 이끄는 신 그리고 세상과 이 땅의 교회가 미혹되어 오늘도 좇아가는 신이 곧 바알신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바알을 좇고 있는지 아니면 참 신인 야훼 하느님을 예배하고 있는지 깊이 돌아볼 때입니다. 14절에서도 "나는 보았다. 예루살렘 예언자들의 망측한 짓을! 간음하며 헛소리를 따라가고 못된 것들 편이 되어주며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 하나 없어, 내 눈에는 모두 소돔같이만 보인다. 그 시민이 모두 고모라 주민같이만 보인다." 고 했습니다. 이제 이들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는 하느님의 탄식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15-16절에서 무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이 예언자들을 어찌 할 것인지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예루살렘 예언자들이 썩어, 온 나라도 따라서 다 썩었다. 이제 그것들에게 소태를 먹이고 독약을 마시게 하리라.'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내 말이라 하고 전하는 이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마라. 그들은 내 말을 들은 적이 없는 것들이다. 제 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면서 너희를 속이는 것들이다."...
이러한 거짓 예언자들에 대해서 하느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심판의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저들에 대한 하느님의 판단은 21절을 보면 하느님이 보내지 않은 자들이고 그들에게 말씀하지도 않은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26절 후절을 보시면 저들은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했던 자들이고 27절을 보면 바알에 근거하여 거짓을 예언했던 자들입니다. 30절을 보면 저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도적질한자로 나타납니다. 마지막 32절을 보면 저들의 예언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예언이라는 것이 하느님의 판단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에 누가 거짓예언자이고 참 예언자입니까? 그 판단 기준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맡아서 그 말씀을 전하는 자가 예언자이기에 우리 시대의 예언자는 1차적으로 저와 같은 사목자이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여러분과 같은 신자들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기에 여러분 모두가 또한 에언자적 책무가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왜 당시의 예언자들과 대사제(제사장)들은 타락했고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바르게 깨어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22장에 보면 유다의 여호사밧왕이 이스라엘왕 아합을 찾아가 아람을 쳐서 라못길르앗을 도로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의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유다의 여호사밧왕은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이 일에 대한 야훼의 뜻이 어떠한지를 물어 볼 것을 요청하고 이 요청에 따라 이스라엘왕 아합은 예언자 400명을 모으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물었고, 이들 400명의 예언자들은 "공격하십시오. 야훼께서 라못길르앗을 임금님 손에 부치실 것입니다." 라는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이 때 여호사밧이 "이들 외에 우리가 물어볼 만한 다른 야훼의 예언자는 없습니까?" 라고 하자, 이스라엘왕 아합은 미가야라는 한 예언자가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왕상 22장 8절입니다. "야훼께 뜻을 여쭈어줄 자가 하나 더 있기는 합니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라는 자인데, 나는 그를 싫어합니다. 내가 하겠다는 일이면 사사건건 잘되지 않으리라고 하는 자입니다. 한번도 잘되리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결국 왕은 그를 불렀고, 미가야는 천상회의의 비젼을 보면서 왕에 대한 부정적인 예언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 왕주위의 많은 예언자들과 다사제들은 왕의 귀에 듣기 좋은 구원과 위장평화만을 말했지, 정작 하느님의 뜻과 심판에 대한 메시지는 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당시 성전과 이스라엘 백성을 타락하게하는 주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지 못했기 때문이요, 제대로 선포되지 못했고 시대의 흐름에 타협했기에 당시 예언자들과 성전 대사제들이 타락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고,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깨어 있을 때만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비판적으로 돌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지 못하고 말씀이 교회와 신자들의 삶속에서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습니까? 왜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성전을 더럽히는 타락된 일들이 이 시대의 성전에서 만연하고 있어 교회가 병을 앓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들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목자로서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드리는 것은 평신도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같은 사목자들이 바르게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평신자가 말씀에 바르게 깨어 있을 때만이 하느님의 교회를 성직자들이 함부로 할 수 없을뿐더러 그러한 깨어 있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교회를 바르게사목자와 함께 세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마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하면 좋은 열매가 땅에 떨어져야지만 좋은 마무가 다시 만들어집니다. 훌륭한 사목자가 훌륭한 신자를 들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훌륭한 신자가 훌륭한 사목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 훌륭함이란 인물이나 학벌이나 배경이 아니고, 오로지 말씀이 토양이 되어 있는 그런 교회를 말합니다. 사목자와 신자 이 두개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 시대에 희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언자적 사명을 담당해야 될 이 땅의 교회마져도 이 세상의 풍습을 좇아간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교회는 그르시도의 지체로서 거룩해야 합니다. 또 우리 신자들도 거룩해야 합니다. 만약에 교회나 신자들이 세상적인 권세와 명예에 탐닉한 자랑, 물질적 풍요, 거짓평화로 하느님의 성전을 오염시킨다면, 다시말해서 더 이상 하느님의 심판의 메세지를 듣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절망입니다. 그렇게되면 결국 말씀은 제대로 선포되어지지 못하고 있고, 신자들 곧 교회는 이 세상에 아첨하고 빌붙어 살므로서 지금 어디로 가는지 모른채 그져 둥둥 떠가는 나침판 잃은 배처럼 되어버릴 것입니다.
혼자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명예를 얻어 출세하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을 얻는 것이고, 또한 교인수가 늘어 거대한 교회를 짓는 일이 마치 하느님의 뜻이고 축복인양 되어 버린 풍조가 더 이상 우리 시대의 교회의 관심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평신자와 사목자들이 정말 하느님의 말씀에 바르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그나마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방향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레미야서 23,29절의 "내 말은 정녕 불같이 타오른다. 망치처럼 바위라도 부순다. 똑똑히 들어라"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불과 방망이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갖고 있는 이중적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과 방망이가 파괴하는 힘을 갖고 있지만 또한 동시에 세련되게 하고 새롭게 하는 일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가 다시 한번 정직히 불과 방망이와 같은 하느님의 말씀앞에 서서 우리의 더럽고 추한 모습이 사라지고 말씀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모습으로 빚어져 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복음의 마무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짓 예언을 분별할려면 항상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깨어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매일 하느님의 말씀인 불과 방망이로 우리를 단련시켜야 합니다. 즉, 하느님 말씀으로 늘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그것에서부터 과감히 돌아 서십시오. 거짓예언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단들을 보십시오. 자신을 예배하게 만들고 하느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을!
그러므로 이 시대와 교회와 사람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하느님께 구하십시오. 이 세상의 것들을 구하지 마시고, 어떻게 하면 말씀대로 잘 살 수 있는지를 그리고 주님의 뒤를 따름으로 섬김과 겸손 그리고 사랑의 열매맺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구하십시오. 오늘 여러분들을 통하여 우리 시대가 새로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아멘)........◆
[두올묵상팀]
첫댓글 아멘..
묵상 자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