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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묵상글 (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 오랜 새로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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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오랜 새로움
어제 저는 저의 동기 수사님 삼우 미사를 가족과 함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제가 마침 2023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이고
올해 2024년을 맞이해야 할 날이었기에 이런 식으로 얘기했습니다.
연말연시에 우리는 버리고 갈 것과 가지고 갈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가져가야 할 것은 챙겨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하였고,
마찬가지로 수사님에 관련해서도 안 좋은 기억이나 감정은 버리고,
좋은 기억과 감정과 유산은 간직해야 할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에게만 그렇게 얘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올해 나는 무엇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선 작년의 무엇을 내가 가지고 살아야 할까 생각해봤는데
아예 새롭게 시작하고 살아가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해는 새롭게!
새 술은 새 부대에!
작년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작년이 올해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올해는 새해니 새롭게 시작하고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겠습니다.
그런데 새로울 것이 뭐 있겠습니까?
이 나이 먹도록 이것저것 살아봤는데 안 살아본 새로운 것이 있겠습니까?
사랑 말고 우리가 살아야 할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 말고 살아야 할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코헬렛서가 얘기하듯 태양 아래 새로울 것이 없고 다 있던 것입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산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사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 아닌 다른 것을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새롭게 사는 것인데,
새로운 영혼으로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오스딩 성인이 고백록에서 얘기한 바로 그 ‘오랜 새로움’입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우리가 살아야 할 것은 천지창조 이전부터 영원까지 살아야 할 사랑,
그 하느님의 오랜 사랑이고 그것을 매일 그리고 매해 새롭게 사는 것인데
오늘 축일로 지내는 천주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성령으로 잉태하면 됩니다.
새로운 영혼, 새로워진 영혼은 성령의 영혼입니다.
성령으로 매일 천주를 잉태하면 새로운 영혼이고 새로워진 영혼이 됩니다.
그럼으로써 진주조개가 진주를 잉태하듯
성령의 영혼은 사랑을 잉태하여 하느님 사랑을 만들어냅니다.
잘 아시다시피 모든 조개가 진주를 생산하는 것은 아닙니다.
몸 안에 들어온 모래와 같은 이물질을 진주 핵으로 품고,
오랫동안 인고의 시간을 거친 다음 생성되는 것만 진주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몇십 년의 고통을 사랑으로 살아온 결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반드시 고통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그러나 차츰 성령의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고통을 진주로 못 만들어내는 삶은 고통스럽기만 하고 슬픕니다.
고통이 진주가 되게 올해도 살아가야 하고
고통을 하느님 사랑으로 만드는 과정을 올해도 살아내야 합니다.
그렇게 올해 살아가시라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올 한해 고통이 없게 해달라고 여러분을 축복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무슨 축복이냐고 서운하단 소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그러는 중에도 올해 평화 주시기를 모세처럼 빌겠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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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리아는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루카 2,19)
오늘은 ‘천주의 모친 대축일’입니다. 2021년을 여는 새해의 첫 날이며, 또한 평화를 기원하는 세계평화의 날입니다. 새해의 첫날, 오늘은 새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시작은 언제나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건네줍니다. 왜냐하면,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난 한 해의 종이를 덮어버리고, 앞에 놓인 나날의 새로운 백지 위에 무엇인가 새롭게 색칠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첫 번째’, 곧 맏배, 첫 자녀, 첫 수확, 첫 봉헌 등 첫 번째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우리는 성경의 정신에 따라, 새해의 이 ‘첫 번째 날’을 통해, 1년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우리는 이 한 해의 ‘첫 날’에 ‘천주의 모친 마리아’를 기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원, 곧 구원 생명의 시원을 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 다름 아닌 구원자를 낳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관계는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당신 아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세상에 하느님을 낳아주시고, 하늘을 열어주셨습니다. 곧 복된 은총의 하늘 문을 여신 성모님을 통하여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시니, 성모님께서는 세상에 빛을 건네주신 빛의 문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하와가 잠갔던 낙원의 문을 다시 여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품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신 일이었습니다. 곧 ‘인간을 하느님의 어머니 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당신 자녀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신의 몸 안에 잉태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탄생시키며 살아가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셈입니다. 바로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이 신비의 그릇이요, 통로요, 그 ‘첫 번째’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비를 꿰뚫어보았던 중세의 유명한 신비신학자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아들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듯, 오늘 제 안에서도 그분이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도 “하느님을 낳는 날”이어야 합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곧 하느님이신 말씀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인간을 구원한 신비를 상기시키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크신 자비, 당신이 하신 일을 간직하고 되새깁니다.
“마리아는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루카 2,19)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되새기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한 해 동안 가슴 깊이 품고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이 ‘새해 첫날’에, 천주의 모친 축일을 지내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상속자임을 상기시켜줌으로써, 긍지를 가지고 기쁘게 살아가라는 희망의 호소요, 외침이라 할 것입니다.
새해의 ‘첫 번째 날’, 오늘은 ‘평화의 날’입니다. 1967년 교종 바오로 6세께서는 [제1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평화가 인간 발전의 유일하고 유일하고 참된 길”임을 제시하면서, “야심적인 민족주의가 야기하는 긴장, 폭력을 통한 정복, 그릇된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억압은 그러한 길이 아니다.”라고 지적하셨지만, 오늘날 21세기에도 여전히 비이성적 야만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바로 그렇습니다.
한편, 나아가서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90년 [평화의 날 담화]를 통해, “오늘날에는 자연에 대한 마땅한 존중의 결여, 자연자원의 피해, 점차 악화되는 생활의 질적저하로 인하여 세계의 평화가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의식이 증대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인간들 사이에 실현되는 정의로만은 평화가 보장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창조물들도 모두 하느님을 찬미하는(시 148장, 다니 3,57-81) 주체인 목적적 존재로 대해야 함을 깨우쳐주셨습니다. 결국 생태정의가 실현 될 때 인간의 평화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찬미 받으소서]에서, “자연을 우리 자신과 분리된 것이나 단순한 우리 삶의 틀로만 여기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에 속하므로 자연과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합니다.”(139항)라고 혁명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사실, 지구온난화가 초래한 각종 환경재난은 전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를 휠씬 뛰어넘는 정도로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고통받았던 코로나 19 펜데믹 사태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는 모든 창조물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사랑하는 ‘생태적 회심’이 촉구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그리스도 제자들이맡은 사명의 핵심이며,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이 지구를 돌보돌고 부름을 받고”(2019년 53차 평화의 날 담화)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새해 첫 아침! 오늘 <복음>에서 목동들이 어둠을 가르고 첫 새벽을 달려와 구세주를 찬양하였듯이, 우리도 기쁨과 희망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기쁨과 희망으로, 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축복을 빕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주님!
지난 한 해 동안 당신이 하신 일,
그 큰 자비를 제 마음 한가운데 새겨 주소서.
그 자비가 제 중심이 되고,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그 자비를 늘 맨 첫자리에 두고,
그 어느 것도 그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올 해도 그 자비가 날로 커지고, 그 기쁨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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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새해 첫날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셈을 하지 않고 줍니다. 새해 첫날에 복을 받기에 앞서 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복을 빌어 주는 가운데 주님의 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과 가정, 이웃, 모두에게 주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민수기에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6,24-26) 이렇게 축복하고 빌어주면, 주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을 주시는 주체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또한 복을 잘 담을 수 있도록 마음의 그릇을 준비하는 데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옆에 분에게 인사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를 맞이하며 제야의 타종식과 해맞이 행사가 곳곳에서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며 참석합니다. 그런데 누가 복을 줍니까? 그 해가 복을 줍니까? 해를 만드신 분,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복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복의 근원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 가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형제애를 나누고자 미사참례를 하시는 여러분은 이미 복을 받으셨습니다. 앞으로도 넘치도록 받을 것입니다. 혼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통해 가족과 이웃이 함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복을 전달하는 소중한 연장입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복을 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몇 가지만 상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신명11,27).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될 것이다”(신명12,28). 결국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그 복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러니 하느님 말씀을 듣고 새기고 실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하는 자체가 복입니다. 은총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는 행복합니다.
한편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에서도 밖에서도 복을 받으려거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주님의 말씀에 머물면 하는 일마다 잘 될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머물지 못하면 마음이 허전하고 그 공허를 채우려 엉뚱한 곳에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술을 찾는 사람도 있고, 쇼핑에 매달리는 사람, 도박이나 다른 무엇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모님은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예기치 않은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행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1,45)으로 불리었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새기고, 말씀대로 행하는 가운데 복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갈라3,9).
올 한해는 주님 안에서 복을 짓고 빌어주며 복을 많이 받으시길 빕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이 순간이 얼마나 큰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은 이 세상을 넘어 영원한 천상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오복(五福)을 보면, 1.수(壽)로서 천수(天壽)를 다 누리는 장수(長壽)의 복(福)을 말했고, 2. 부(富)로서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풍요로운 부(富)의 복(福)을 말했으며, 3. 강령(康寧)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사는 복(福)을 말했습니다. 4. 유호덕(攸好德)으로서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복(福)을 말했고, 5. 고종명(考終命)으로서 일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福)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서민들이 원했던 또 다른 오복(五福)으로는
1. 치아가 좋은 것 2. 자손이 많은 것 3. 부부가 해로하는 것 4. 손님을 대접할 만한 재산이 있는 것 5. 명당에 묻히는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오복은 무엇일까요?
1. 건강한 몸을 가지는 것 2.서로 아끼면서 지내는 배우자를 얻는 것. 3.자식에게 손을 안 벌려도 될 만큼의 재산을 가지는 것. 4.적당한 일거리를 갖는 것. 5, 나를 알아주는 참된 "친구"를 가지는 것을 신(新)오복(五福)으로 여긴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현세에 국한된 것입니다. 천상의 복과 연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세 안에서 복을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으로 누리는 복은 천상을 차지하는 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에페1,3).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느님 안에서의 복, 하느님 나라, 영원생명, 완전한 구원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더 큰 사랑으로’라는 주제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올해는 ‘더 큰 사랑을 담아’ 라고 정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을 담아야 하고, 그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사는 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복이라는 사실을 일깨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무슨 공로를 세워 더 큰 복을 받으려니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더 큰 사랑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지금 감사함을 발견하고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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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4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福)’라는 한자의 어원을 생각해 봅니다. 하늘에 의해서 배가 부른 것을 상징합니다. 중국의 고대에는 장수를 누림(壽), 가멸함(富), 건강하고 마음 편안함(康寧), 심성의 후덕함(攸好德), 임종을 성취함(考終命)을 다섯 가지 복(五福)으로 보았습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치아가 좋은 것, 자손이 많은 것, 부부 해로하는 것, 손님을 대접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것, 명당에 묻히는 것을 다섯 가지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당 신부에게도 다섯 가지 복이 있다고 합니다. 모두 사람과 관련된 복입니다. 보좌 신부님 잘 만나고, 본당 수녀님 잘 만나고, 사목회장 잘 만나고, 사무장 잘 만나고, 주방 자매님 잘 만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 생활 5년째인 저도 5복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건강을 주셨습니다. 함께 기뻐하고, 고민할 수 있는 동료 사제들을 주셨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신문사 직원을 주셨습니다. ME와 꾸르실료 봉사자들을 주셨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지난 5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2024년에는 제가 받은 복을 기쁘게 나누면서 지내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복을 나누면 더 큰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반인이 생각하고 있는 이런 복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며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하여 늘 깨어 지키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가장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면서 시작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깨어 있고, 믿는 사람이 복되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참된 행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복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만남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이 세상에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복은 이 세상은 물론 하늘나라에서 완성되는 복입니다. 그렇기에 때로 시련도, 박해도, 고난도,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복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한 이들을 복자(福者)로 공경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한 이들을 성인(聖人)으로 공경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이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참된 평화, 참된 행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복은 우리의 노력으로 더 커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재능,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물을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받는 복은 우리의 노력과 헌신을 통해서 하느님께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2024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세상 끝 모든 곳이 그분을 경외하리라.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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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2024년의 첫날입니다. 갑곶순교성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올 한해 모든 교우분의 가정에도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그러니까 24년 첫날 우리에게 들려오는 복음의 말씀은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그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것과 목자들 자신이 목격한 아기 예수님에 관한 것을 찬양하고 찬미했다는 내용입니다.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그곳에 하느님의 표징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목자들의 주된 일은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들은 자기 양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목자들은 양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며 풀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합니다. 또한 위험에서 양들을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목자들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목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역할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표징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와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 메시아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은 목자들에게 기쁨과 희망이 되어주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삶의 자리가 있습니다. 삶의 위치가 있습니다. 또한 오늘의 목자들처럼 하느님의 표징 또한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오늘의 목자들에게 주님께서 표징으로 드러나셨듯이 우리의 하루하루에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표징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 기쁨과 희망을 얻었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순간이 기쁨과 희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새해 첫날입니다. 목자들의 기쁨이 우리 가슴에도 일년내내 넘쳐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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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하루의 시작은?
저는 가끔 ‘좋은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이곳에 방문하시는 분들에게도 이렇게 인사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좋은 하루의 시작은 그 전날 밤부터 시작됩니다.
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좋은 하루를 시작하려면
그 전날의 밤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던 당연한 것을
무릎을 치며 다시 깨달았습니다.
오늘이 행복하려면 어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같은 이치로 내일이 행복하려면 오늘이 중요합니다.
내일이 행복하고 싶으신가요?
그럼, 오늘을 소중하고 행복하고 사랑 가득하게 지내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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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에서 아주 오랜 시간 연구했던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1938년부터 시작되어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굳건히 진행하고 있는 ‘하버드 성인 발달 연구’입니다. 어렸을 때 겪은 문제부터 시작해서,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그들 삶의 다양한 경험을 기록했습니다. 이 연구는 최초 참가자 724명에, 그들의 후손까지 1,3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해 3세대에 걸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 진정 행복하고 좋은 삶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밝히고 싶었던 것입니다. 현재까지도 완결되지 않은 연구이지만, 지난 85년 동안 사람들을 추적하면서 수천 개의 질문을 던지고 수백 가지를 측정해서 그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게 뭔지 알아냈습니다.
직업적인 성취가 정답일까요? 아니면 운동? 또는 건강한 식단은 어떠합니까?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지만, 지속적으로 광범위한 중요성을 증명한 한 가지 요소는 바로 ‘좋은 관계’였습니다. 가족 안에서, 직장 안에서, 이웃과의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좋은 관계’야 말로 이 연구 조사 전체를 인생에 대한 단 하나의 원칙으로 요약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도 이 관계를 위한 것이 아닐까요? 결국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 안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사람과의 관계만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수직적인 관계라 할 수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더욱더 ‘좋은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철저히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예수님 잉태 소식도 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셨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십니다. 그렇다면 사람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요셉과 예수님과 함께 성가정을 이루십니다. 서로 불목하고 미워하는 관계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가정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목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 아기 예수님을 찬미했지요. 천사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 곧 하느님과의 ‘좋은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관계’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갑니다. 예전의 삶에 머물지 않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예전의 삶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좋은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삶.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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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그 어떤 위대한 일도 열정 없이 이뤄진 것은 없다(랠프 월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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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복의 하느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삽시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어제의 계묘년 토끼해의 끝은 오늘 갑진년 청룡(靑龍)해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용기와 도전을 상징하는 갑진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께서 새해를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새해 첫날 오늘은 제57차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담화도 각별했습니다. 주제는 시의적절하게도 “인공지능과 평화”였고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끝맺고 있었습니다.
“저는 인공지능이 발전하는 유형의 행보가 궁극적으로 인류의 형제애와 평화에 기여하는 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는 몇몇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인류가족 전체의 책임입니다. 저는 새해를 시작하며 인공지능 유형들의 급속한 발전이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불평등과 불의의 사례들을 늘리지 않고, 전쟁과 갈등을 종식시키며 우리 인류가족을 괴롭히는 다양한 형태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는 담화문입니다. 인류가족을 껴안아야 할 성가정 교회 공동체에 맡겨진 사명이 얼마나 지대한지 깨닫습니다. 성가정의 모범을 살아내야 할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가톨릭 교회입니다. 어제 성가정 축일의 본기도가 깊은 울림을 줍니다.
“하느님, 성가정을 통하여 참된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시니, 저희가 성가정의 성덕과 사랑을 본받아, 하느님의 집에서 끝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가정의 성덕을 본받아 살아가는 여기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은 하느님의 집, 평화의 집, 환대의 집, 사랑의 집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어제 공동체 친교의 날에는 한 해를 마치면서 수도원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을 들었습니다. 저절로 “아, 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구나! 정말 세상 인류가족에 활짝 열려 있는 하느님의 집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예전 써놨던 “사랑”이란 시가 떠올랐습니다.
“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있어
날아오는 새들
모두 안아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세상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성가정 수도 공동체를 상징하는 사랑의 큰나무 자체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축복의 하느님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 참 좋아하시는 일이 세상 피조물들에게 축복을 주시는 일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 역시 얼마나 신바람 나는지요! 가사도 곡도 짧고 좋아 하루종일 소리내어 부르고 싶은 노래입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축복중의 축복이 하느님의 자녀됨이 축복이요, 여기 이렇게 살아있음이 축복임을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새롭게 확인합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무지나 허무가 아닌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욕망덩어리 사람이 아니라 축복덩어리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오늘 제2독서 갈라티아서 말씀이 바로 주님 성탄의 축복을 명쾌하게 밝힙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는 우리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진정 우리는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시어,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요! 우리는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사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의무요 책임인지요! 바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의 본보기가 오늘 복음의 목자들이요 말그대로 구도자의 모범입니다. 가난하고 순수한 깨어있는, 진리의 하느님을 갈망하는 목자들입니다. 마침내 주님 천사의 안내로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고 아기 예수님을 만나니 말그대로 아이콘택트 눈맞춤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큰 축복은 없습니다. 목자들을 바라보는 아기 예수님의 눈빛과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목자들의 눈빛이 만난 것입니다. 우리를 굽어보시는 분을 우리가 바라보는 ‘눈맞춤(아이콘택트)’이야말로 지복(至福)이라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사랑의 눈맞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은총이기도 합니다. 예전 어느 가을날 티없이 푸른하늘이 흡사 나를 내려보는 “하느님의 눈”같다는 충격에 쓴 고백시도 생각납니다.
“그리움이 깊어 시리도록 푸른하늘이 되었다
영원한 하늘이 되었다
침묵의 하늘이 되었다
영원히 바라보는 눈빛이 되었다
하느님의 눈이 되었다
나는”-1997.11.27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의 눈”이 되고 싶은 것은 관상가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목자들은 관상가 마리아 성모님의 모습에서 감명과 더불어 큰 가르침과 깨우침을 얻었을 것입니다. 바로 다음 마리아 성모님의 모습은 우리가 배워야 할 관상가의 진면목입니다.
목자들이 전해준 모든 일들에 모두 놀라워하는데 우리 마리아 성모님만은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깁니다. 위대한 영혼의 특징은 깊이 담아두는 능력에 있다 합니다. 이런 성모님처럼 깊은 영혼의 사람들은 결코 조건반사적 감정적 “반응(reaction)”이 아니 인격적 “응답(respondence)”을 합니다.
이어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갑니다. 마침내 목자들은 주님 관상의 기쁨을 증언하고 나누는 선교사가 된것입니다. 주님의 증인으로서 관상의 기쁨을, 찬양과 찬미의 기쁨을 이웃과 나누고 싶은 선교 열정은 믿는 이들 누구나의 영적본능입니다. 저는 어제 베드로 광장에서 삼종기도후 강론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참 멋진 말씀에 감동했고 참 기뻤습니다.
“1년전 오늘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사랑스럽게, 지혜롭게 교회를 섬기다가 지상 여정을 끝내셨다. 우리는 그분께 크나큰 애정과 감사, 격려를 느낀다. 그분은 천상으로부터 우리를 축복하시며 동반하신다. 베네딕도 16세에게 박수를 보내자!”
축복의 하느님입니다. 축복중의 축복이 하느님의 자녀됨의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자비롭고 자유롭고 행복한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야 할 거룩한 의무와 책임, 권리를 지닌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청룡의 해 갑진년 새해 첫날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축복하시어 당신 평화의 사도, 축복의 사도, 찬미의 사도, 기쁨의 사도로 세상 우리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1.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2.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3.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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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로서 하느님께 찬양과 찬미를>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20)
어둠에 잠긴 벗들을 마주하는
해맑은 나의 얼굴이
나를 늘 비추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보이지 않는 벗들에게 건네는
정겨운 나의 눈길이
나를 늘 바라보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목소리를 빼앗긴 벗들을 대신하는
담대한 나의 부르짖음이
나에게 늘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서러움에 눌린 벗들에게 내미는
부드러운 나의 손길이
나에게 늘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굴레에 얽매인 벗들에게 다가가는
굳건한 나의 발걸음이
나를 늘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터전을 빼앗긴 벗들과 함께하는
든든한 나의 몸짓이
나를 늘 평화로 이끄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외로움에 지친 벗들을 보듬는
따스한 나의 품이
나를 늘 품어주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슬픔에 겨운 벗들을 품는
애틋한 나의 마음이
나를 늘 기쁘게 하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한숨에 젖은 벗들과 나누는
자그마한 나의 행복이
나를 늘 축복하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스러져가는 벗들을 일으키는
푸르른 나의 살림이
나를 늘 살리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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