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냉전 시대에 미국과 구소련 두 나라가 벌인 치열한 우주 탐사 및 기술 개발 경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최고의 인재만 모아서 수백만 달러의 돈을 들여 무중력 상태에서 쓸 수 있는 볼펜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잉크는 중력을 받아 떨어지면서 글씨를 쓸 수 있는 것인데, 우주에는 중력이 없어서 잉크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소련에서는 어떠했을까요? 마찬가지로 그런 볼펜을 개발하고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구소련은 그런 볼펜을 개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연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연필을 통해 충분히 글씨를 쓸 수 있었고, 굳이 비싼 돈을 들여서 무중력 상태에서 써지는 볼펜을 개발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해결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자기 사고를 닫아 버려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어려운 일로 만들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진실은 아주 단순하고 바로 옆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주십니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 바라봅니다. 세상은 온갖 거짓과 불의로 우리를 계속 유혹해서 잘못된 길로 이끕니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루카 14,12)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사회적 ‘상부상조’의 관행이 있었습니다. 초대받았으면 나도 초대하는 것이지요. 또한 나중에 초대받을 것을 생각해서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결국 ‘사회적 투자’ 개념입니다. 이런 세상의 경제 논리를 반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익을 바라는 초대는 ‘자선’이 아니라 ‘거래’일 뿐이지요.
그래서 참 자선의 모습으로,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루카 14,13)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참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보답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은 계산적이지만, 하느님 나라는 자선과 나눔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어떤 모습이 더 올바른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을 철저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철저하게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누구도 타인에게 그토록 잔인할 권리가 없다(빅터 프랭클).
첫댓글 빠다킹(조명연 마태오)신부님 강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