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8-12 아비멜렉이 그 아침에
일련에 있었던 아브라함 가의 일들의 배후에는 하늘 어전 회의에 결과들이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일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고 나서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꿈속에서 주어졌을지라도 아비멜렉에게는 뇌성벽력과 같아서 혼 줄이 난 것입니다.
그 날 아침이 되자 그랄 왕 아비멜렉 왕궁에 어전 회의가 열렸습니다.하나님의 개입으로 신하들까지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말과 행위에 대하여 변명합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합리적일지라도 참으로 체신머리 없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1. 본문 8절은
“아비멜렉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신복을 불러 그 일을 다 말하여 들리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입니다.
모세께서는 그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효과를 발생하고 있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받고 아침에 일어난 것은 자기에게 내려진 명령을 재빨리 순종하려는 것 뿐 만 아니라 자기 백성들도 그와 똑같은 일을 처리하도록 장려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준비된 순종의 본보기가 일개 이방인 왕에게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충고 말씀으로 너무도 빈약한 유익을 볼 때에 우리 자신의 무감각에 대하여 더 이상 변명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에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날마다 ‘우리들의’ 귀에서 모세,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쟁쟁하게 외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통합방식으로는 그분의 독생자를 통하여 그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많은 증거나 간증들이 이 한 가지 꿈보다 더 효과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2. 본문 9절은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그랄 왕이 아브라함에게 불평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회개를 선포하고 있다고 추측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공정하게 그의 말을 헤아려 본다면 충고가 혼합된 겁먹은 고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비록 그가 아브라함이 그렇게 부당하게 행동한 것을 불평하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잘못을 아브라함에게 전가시켜서 자기는 거기에서 빠져나오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잘못도 솔직히 인정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실제로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공정하게 돌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왕이 위선자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식으로 처신하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만한 구실이 생기면 그 즉시로 그들 자신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의 죄에 참여시킬 수만 있다면 그것을 자기들의 죄를 소멸시키는 것으로까지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자기가 속임수에 걸려 기만을 당하고 무분별로 인하여 거기에 빠지고 있다고 투덜거리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큰 죄를 지었다는 사실로 정죄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사실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 번하고 하였느냐’ 라는 말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그가 다른 사람의 사주로 인하여 죄를 짓게 되었다는 구실로 그는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아무도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음이 큰 죄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간음이라는 것이 단지 한 사람만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백성을 공통된 죄로 묶어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큰 죄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항상 주시해야 합니다. 그랄 왕이 결혼의 신성함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렇게 말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에도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자랑하고 있는 성도들이 그렇게 이방인들도 무서워서 몸을 섬짓하며 경계하는 그토록 큰 죄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익살스럽게 변명하는 데에 수치감을 모르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아비멜렉이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의 진정한 선포자였으며 그것을 사람들은 헛된 노력을 하면서 자기들의 트집으로 피해 나가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께서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엡5:6, 고전5:9). 그가 이 죄를 모든 백성에게 일반화시킨 것이 까닭 없이 한 것이 아닙니다. 범죄들이 발생해도 처벌되지 않고 지나가면 그 전 지역이 그 죄로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왕 때문에 백성 전체에게 내려지는 것은 특별히 주지의 사실입니다 여기서 정말로 지대한 신중함으로 그리고 주의를 기울여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임명해 주시는 자들을 다스려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처소로 허락해 주신 나라가 모든 죄에서 순수하게 보존되도록 주장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3. 본문 10절은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입니다.
이 질문으로 그 왕은 장차 되어질 것을 미리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이런 위장술책을 폈을 때 무작정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그는 다시 그와 똑같은 위험에 빠질까 염려하여 그렇게 캐묻고 있습니다. 그렇게 물어봄으로서 자신이 그 죄악을 치료받기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이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자유롭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게 허락한 사실은 그의 속에 있는 공의롭고 온유한 성품에 대한 일반적인 표가 아닙니다. 남에게서 학대나 기만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얼마나 신랄하게 그리고 냉혹하게 비난하고 충고하는가를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지 못한 외국인에게 베푼 이 왕의 온건함은 그만큼 막대한 찬사를 받아야 마땅하였습니다. 한편 그가 보여준 본보기로 우리에게 잘못했을 형제들에게 충고할 때마다 그들 자신들을 자유롭게 변호할 수 있게 허락해야 되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4. 본문 11절은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입니다.
이 대답에는 두 가지 내용의 요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로는 그가 두려워서 자기 결혼을 은닉하려고 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 자신을 변명할 목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제 비록 아브라함이 진심으로 기만적인 의도로 자기 결혼을 감추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려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비난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두려워서 자기 아내를 창녀로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마땅히 자기에게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자기 아내의 명예를 변호함으로 남편된 의무를 완수하기보다 용기를 가지고 단호하게 밀고 나갔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부당하고 조야한 방법에 의존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불신의 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의혹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비록 그가 모든 곳에 지독한 반항이 팽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알지 못한 백성에 대하여 그렇게 평가절하 하여 판단을 내린 것은 공정하지 못한 처사였습니다. 그는 그들 모두가 살인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10장에서 이 제목에 대하여 약간 길게 다루었습니다. 그 정도로서도 충분한 암시가 됩니다. 한편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동기가 정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아비멜렉을 달래는 데에 그의 진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특이한 표현은 우리가 주목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지배되지 않고 있는 곳마다 사람들은 쉽사리 모든 죄악으로 질주하며 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피를 아끼지 않고 강탈하고 폭행과 기만적인 행동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행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만이 우리 인간의 공통적인 결속으로 우리를 서로 연합시키는 것이며 그것만이 온건함의 경계선 안에다 우리를 유지시켜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잔인성을 그분에 대한 두려움이 제압해 줍니다. 그렇지 않고 그 경외심을 떠난다면 마치 야수들처럼 서로 삼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결핍된 자들은 공평한 체제를 개발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멸망에서 구원시키기 위하여 그분의 은밀한 제재를 가하여 불경건한 자들의 정욕을 점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건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면 다시 이 모든 종류의 죄악에 대한 문이 활짝 개방된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오늘날에 더욱 분명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거의 전체 지구를 덮고 있는 범죄의 소름끼치는 홍수 가운데서 역력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갖가지 기만과 사기, 그리고 만연된 불신과 잔인이 무엇에서 야기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멸이 공의에 대한 모든 감성을 소멸시키는 데서 야기된 결과입니다. 이제 우리가 시대의 부패와 맞서서 어려운 투쟁을 할 때마다 아브라함 시대를 회고합시다. 그때도 비록 불경건과 모든 범죄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것이 이 거룩한 사람 아브라함을 본연의 위치에서 빗나가게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합시다.
5. 본문 12절은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였으나 같은 어머니에게서 출생한 것이 아니라 둘째 아내에서 태어난 누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누이라는 명칭이 히브리인들 가운데서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다른 추측을 채택하고자 합니다. 즉 그녀는 그의 이복누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형제들로 태어난 공통적인 부계에 속해있었다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더욱이 아브라함은 자기 죄를 변명하면서 침묵과 직접적인 사기와의 차이를 그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그는 진실하게 자기가 사라의 오빠였다고 공언하였습니다. 정말로 그가 사실 자체와는 판이하게 다른 말에는 전혀 가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은 다 걸러내고 면밀히 검토해본다면 그의 변호가 전혀 보잘 것 없는 것이거나 최소한 너무도 유약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고의적인 구실로서 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결혼을 의심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회의적으로 그들에게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그가 말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실에 관해서는 그의 위장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아비멜렉을 사기적인 방법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단히 큰 걱정을 하는 가운데 그는 바로 죽음을 피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내에 대한 이전의 관계를 구실로 삼았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