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내 젊은 날의 숲』 - 김훈*
*김훈 : 1948년 서울서 남. 돈암초등·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정외과 입학, 영문과로 옮겼다가 중퇴. 1973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일보,「시사저널」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 등 역임. 2004년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
고려대 2학년 때 우연히 바이런과 셸리를 읽고 좋아서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영시를 읽으며 영문과로 전과할 준비를 했다. 후에 영문과 2학년에 편입했으나 군에서 제대할 때쯤 여동생이 고려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어려운 데다 두 명이 대학에 다닐 형편이 아니어서 스스로 "내가 보니 넌 대학을 안 다니면 인간이 못 될 것 같으니, 이 돈을 가지고 대학에 가라"고 하고 자신은 중퇴했다.
2010년 가을에 출간된 이 책에서 김훈은 “책 속에는 길이 없다. 나는 책을 많이 읽었는데 책에서 길을 본 적이 없고 책 속에는 글자가 있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말의 구조물로서 지식은 있으나 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길은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땅 위에 있다. 나, 자식, 친구, 이웃들 사이에 길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설사 책 속에 길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길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길은 있으나 마나다. 책 속에 있다는 길을 세상의 길로 끌어낼 수 있느냐, 그로 인해 내가 바뀔 수 있느냐가 문제다. 혹시 내 말을 잘못 알아듣고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책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라고도 했다.
내가 봐도 책 좀 읽었다고 하는 사람들 좀체로(비표준어-좀처럼)신뢰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행동은 책 읽는 것과 무관하게, 삶과도 세상과도 연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아는 것도 아니요, 실천도 아닌 그리하여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세나 부리기 일쑤였던 것 같다. 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나는 갈망하는지 모른다. 이 책을 대하면서 김훈의 ‘책읽기론’을 되새겨 보는 이유다.
저자는 젊음에 대해서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 관악갑에 출마했던 김대호 후보가 ‘30,40대는 무지하다’고 한 것처럼 젊은이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젊음을 예찬하는 상투어들을 그는 말로 베어내고 짓뭉개버린다. ‘젊음’이라는 교만함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당연할 수 있겠지만 젊음은 무지하고 무질서하며 계통이 없는 시절이다. 그는 그런 시절을 졸업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질서와 계통, 전통이 가지런한 사람을 그는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도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가 젊은이 앞에 서는 걸 무서워하는 건, 혼란과 무질서와 계통 없음과 좌충우돌 하는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빛나던 한때를 소설에 담았다. 그의 인생에는 책이 있고 책이 어떻게 자신의 삶에 삼투압 되고, 어떻게 발효되는지, 젊음이 어떻게 세상을 만나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나는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돌아다보았다. 풍경의 안쪽에서 말들이 돋아나기를 바랐는데 풍경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풍경은 태어나지 않은 말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적막강산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을 거느리고 풍경과 사물 쪽으로 다가가려했다. 가망 없는 일이었으나 단념할 수도 없었다. 거기서 미수에 그친 한 줄씩의 문장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걸 버리지 못했다. 이 책에 씌어진 글의 대부분은 그 여행의 소산이다.
구름이 산맥을 덮으면 비가 오듯이 날이 저물면 노을이 지듯이 생명은 저절로 태어나서 비에 젖고, 바람에 쓸려갔는데 그처럼 덧없는 것들이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눈물겨웠다.
중생의 말로 ‘사랑’이라고 쓸 때 그 두 글자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부재의 결핍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 같아서 겁 많은 나는 저어했던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그토록 덧없는 것들이 무인지경, 적막강산에 한 뼘의 근거지를 만들고 은신처를 파기 위해서는 사랑을 거듭 말할 수밖에 없을 터이니 사랑이야말로 이 덧없는 것들의 중대사업이 아닐 것인가.’산천을 떠돌면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산천은 나의 질문을 나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래서 나의 글들은 세상으로부터 되돌아온 내 질문의 기록이다.”(작가의 말 중에서)
“숲에 눈이 쌓이면 자작나무의 흰 껍질은 흰색의 깊이를 회색으로 드러내면서 윤기가 돌았다. 자작나무 사이에서 복수초와 얼레지가 피었다. 키가 작은 그 꽃들은 눈(雪)위에 떨어진 별처럼 보였다. 눈 속에서 꽃이 필 때 열이 나는지, 꽃 주변의 눈이 녹아 있었다. 차가운 공기와 빈약한 햇살 속에서 복수초의 노란 꽃은 쟁쟁쟁,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꽃은 식물의 성기라는데 눈을 뚫고 올라온 얼레지 꽃은 진분홍빛 꽃잎을 뒤로 활짝 젖히고 암술이 늘어진 성기의 안쪽을 당돌하게도 열어 보였다. 눈 위에서 얼레지 꽃의 안쪽은 뜨거워 보였고, 거기에서도 쟁쟁쟁 소리가 들리는 듯싶었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에게로 향한 도라지꽃의 보라색 속살을 마주하게 되고, 온기를 품고 눈을 녹이며 올라온 얼레지 꽃의 쟁쟁쟁, 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꽃이 열리는 순간이 아니라, 내가 함께 열리는 순간이기도 하다. 풀을 들여다보면서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식물들의 시간을 나는 느꼈다. 색깔들이 물안개로 피어나는 시간이었다. 숲이 저무는 저녁에 가끔씩 아버지가 생각났다. 어두워지는 시간에는 먼 것들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여름의 숲은 크고 깊게 숨 쉬었다. 나무들의 들숨은 땅속의 먼 뿌리 끝까지 닿았고 날숨은 온 산맥에서 출렁거렸다. 뜨거운 습기에 흔들려서 산맥의 사면들은 살아 있는 짐승의 옆구리처럼 오르내렸고 나무들의 숨이 산의 숨에 포개졌다.”(본문 중에서)
‘나는 스물일곱, 여자대학 미대를 나온 뒤 두 군데 취직을 해 봤으나 여러 사정으로 여의치 않아서 그만두고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곳이라 생각 된 민통선 안에 있는 국립수목원에서 식물의 세밀화를 그리는 계약직으로 취직했다. 내 아버지는 사무관으로 공무원이었으나 뇌물을 받은 죄로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남쪽 해안가 절벽 옆에 있는 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나는 어머니와 같이 서울에서 살았으나 수목원에 취직되는 바람에 따로 나와 민통선 근처 마을에 살고 있다.’
지금까지 읽은 소설의 줄거리다(4.21). 이제부터는 수목원에서 근무하는 동안에 벌어지는 일과 아버지의 출소... 이런 일들이 전개될 것으로 짐작된다.
“젖은 나무에 빛이 닿으면 햇빛을 받는 쪽으로 달린 잎들은 굵은 잎맥으로 기름기를 흘렸고, 그늘 쪽으로 달린 잎들에서는 어린 빛이 흘렀는데
바람이 불면 잎들이 거느린 그림자 속에 빛이 뒤섞였다. 젖은 숲이 마를 때 숲속의 나무들은 제가끔 한 그루의 발광체였다.
패랭이꽃과 노랑어리연꽃을 데생하다보니 여름이었다. 물과 꽃은 겨우 그릴 수 있지만, 숲과 산은 온전히 보이지 않았다. 숲은 다가가면 물러서고 물러서면 다가와서 숲속에는 숲만이 있었고 거기로 가는 길은 본래 없었다. 본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여야 보는 것일 터인데, 보이지 않는 숲속에서 비 맞고 바람 쏘이고 냄새 맡고 숨 들이쉬며 여름을 보냈다.”(178쪽)
“양쪽의 진영이 모두 병력을 총동원해서 전면전을 벌일 때, 개미들의 적개심의 근원은 무엇인가. 개미들은 개별적인 적병에 대해서 증오심을 갖는가. 개미들은 어쩌면 적이 되는가. 혈연이 달라서 적이 되는가. 서식지가 다르면 적이 되는가. 먹이를 다투면서 적이 되는가. 냄새나 색깔이 달라서 적이 되는가.
같은 흰개미의 종족끼리는 적이 되어 싸우는데 어떤 불개미집단은 왜 싸우지 않는가. 적개심의 근원은 무엇인가. 개미들의 적개심은 개별적 개미의 인식 속에 각인되어 있는가. 적개심이 각인되어 있다면 공포심은 없는가. 개미의 기억 안에 무엇이 축적되어 있기에 개미는 적개심을 반복해서 거듭 전면전의 싸움터로 나서는가. 개미들의 기억 속에 축적된 적개심이란 애초부터 없고, 개미들은 아무런 적개심 없이도 전면전을 수행하는가. 그렇다면 싸움의 동력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 세부적인 연구 항목이라고 팀장은 설명했다.
“일진(一陣)의 개미들이 허리가 끊어지고 목이 잘려서 궤멸하면 다시 구멍 속에 있던 이진들이 싸움터로 나오고 대열의 진퇴가 조직성을 보이고 있으므로 개미들의 싸움에는 지휘계통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지휘복종의 내용을 밝히는 것도 연구 과제라는 것이었다.”(189쪽)
전 세계에 서식하는 개미를 모두 합치면 무게가 인간의 무게와 비슷할 것이라는 학자들의 주장이 있고, 기록 종만도 5,000종이 넘는데다 개체 수가 1경∼2경 마리로 인간의 몇 배나 되는 족속, 개미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지 않았다면 쓸 수 없는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개미들을 만난 건 소설의 주인공인 내가 처음 수목원으로 면접을 보기 위해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던 중에 초소에서 만난 김민수 중위가 6.25전사자 유해발굴단 소대장으로 전근 가서 사단에서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전개해서 많은 유골을 수습했는데 이것들을 세밀화로 그려서 보존하려고 한다며 수목원장에게 협조공문을 보내왔고, 나는 그 제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유골 발굴현장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수목원에서 나를 채용한 목적도 나무와 꽃의 세밀화를 그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 소설의 설정이 현실에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세밀화보다 발달된 사진기술과 DNA분석 방법도 있는 세상에 말이다.
여름에 패랭이꽃과 도라지꽃 세밀화를 완성해서 안요한 실장에게 제출했다. “멀리서 보다도 꽃은 그 꽃을 쳐다보는 사람을 향해서 피어 있다. 꽃이 보일 때 사람들이 느끼는 환각일 테지만 숲속의 성긴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꽃들도 늘 나를 향한 자세로 꽃잎을 벌리고 있다. 내 눈에 그렇다는 애기고, 내가 꽃을 볼 때 꽃은 아무것도 보지 않을 것이다. ‘보인다.’라는 것이 이 환각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림을 그리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내가 잘 나가는 일류 화랑가의 화가가 되지 못하고 국가기관의 사업인 세밀화를 그리는 자리로 오게 된 것은 이런 잡생각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가을에는 서어나무를 그렸는데 “서어나무는 날마다 힘겨워져서 안쪽이 들여다보였다. 데생을 여러 점 완성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필을 쥐고 종이에 문지를 때 연필을 움직이는 내 팔목의 힘은 나무의 힘이 아니었다. 가을에는 숲의 힘이 물러선 자리를 빛들이 차지한다. 잎이 떨어져서 나무와 나무 사이가 떨어진 공간에 빛이 고이고 빛들은 시간에 실려서 흘러가는데, 빛에 시간이 묻지 않는 것처럼 시간에도 빛이 묻지 않았다. 봄에 나무는 새잎을 내밀어서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데, 가을에 나무는 빛을 떨군 자리에 빛을 불러들인다.”
안 실장의 부탁으로 아들인 신우의 그림을 지도하기로 했는데 자폐증을 앓고 있는 그는 학교에 가지 않고 매일 아버지와 수목원에 와서 사육하는 개미를 보거나, 연못의 물방개와 소금쟁이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머리 뒤의 가마가 서로 닮은 안 실장과 신우를 보면 안타깝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해결해 줄 방법이 없다. 그 무렵 수목원에서 수 년 간 해설사로 일한 ‘이나모’영감이 혼자 집에서 죽었다. 문상 갔던 김민수 중위가 장례식장이 너무 설렁하다며 전화로 문상을 오지 않겠느냐고 해서 나는 이나모와 인연은 없지만 문상을 갔고, 문상 뒤에 중국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거기서 묘한 젊음의 감상을 느끼기도 했는데 어떻게 진전될지는 더 가봐야 알 것 같다.
출소한 뒤 아버지는 어머니가 마련한 아파트에서 따로 살았는데 병세가 악화되어 어머니가 간병인을 붙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지지는 못했지만 함께 살지도 않았고, 아버지는 뇌혈관 파열로 왼쪽 팔다리가 마비되고 안면근육이 뒤틀렸다. 결국 아버지는 입원했고, 나는 일박이일 휴가를 내어 아버지를 보러갔다. 병상에 누운 아버지를 보고 나는 ‘아버지 좀 어떠세요?’라고 하자 아버지는 ‘괜찮다. 미안하다’고 단 두 마디만을 하고 돌아누웠다. 나는 돌아누운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저 가겠어요’했고, 아버지는 ‘그래, 가니? 가거라.’고 답했다.
안요한 실장의 아들인 신우는 이혼한 제어머니가 새로 결혼한 남자와 같이 와서 데리고 갔다. 얼마 뒤 아버지가 죽었다는 연락을 어머니로부터 받았다. 아버지는 화장해서 민통선 안 자등령 능선 언저리에 밥에 으깨 뿌렸다. 이 과정을 김민수 중위가 도와주었다. 12월 마지막 주 김중위가 제대하던 날 사령부 정문에서 그가 전화를 했다.
“전 이제 나왔습니다. 정문 앞이에요. 지금 예비군복을 입고 있어요.”
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터미널에 가서 버스 타고 서울로 갑니다. 후방으로”
“가서 좀 쉬세요.”
“잠깐 쉬었다가 직장으로 갑니다. 시화강 하구 방조제 축조 공사장 말입니다.”
“제가 버스터미널까지 태워다드릴까요.”
“아뇨, 부대에서 차가 나옵니다. 후방으로 나오시면 꼭 연락 주세요. 제 명함 가지고 계시지요?”
“예 핸드백에 있어요.”
김중위가 제대하고 사흘 뒤에 나는 수목원을 떠났다. 수목원으로 처음 갈 때처럼 단 한 번의 좌회전으로 자등령을 등지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은 넓고 눈에 걸리는 것이 없는 무인지경으로 보였다. 김중위의 첫 직장이라는 시화강 하구 마을이 떠올랐고, 제 어머니를 따라 남쪽으로 간 신우가 그리워졌다.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나는 서울을 향해 엑셀을 밟았다. (4.25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