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전에서 지워야 할 말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 이 말은 나폴레옹이 한 것으로 유명하다. 내 사전에도 앞으로 지워야 할 단어가 몇 개 있다. 우선 ’벌써’다.
오늘은 2019년 1월 31일이다. 예전 같았으면 ‘아! 벌써 새해의 첫 달이 다 지나가는 구나.’ 하며 일말의 허무를 느낄 것인데, 올해부턴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지나가면 가는 구나, 하며 무심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 내 나이 벌써 일흔셋이라는 등, 벌써 겨울도 지나가네, 하는 표현은 안 쓸 것이다.
다음으로 없는 단어, 없앤 말은 ‘마지막’이다. 앞으로도 창창한 세월이 남아있는데, 무엇이 두려워서 ‘마지막, 마지막’ 하며 애가 닳을 필요는 없다. 1월이 지나가면 2월이 오고, 내년에는 또 1월이 시작된다. 자연의 엄숙한 순환의 이치를 망각하지 않으련다.
요즘 사람들은 어지간해서는 만족할 줄을 모른다. 목표가 너무 높은 게 탈이다. 자신의 처지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모든 것을 한방에 날려버리려 한다. 고수와 달인에 이르기까지의 고행을 알려하지도 않는다. 아니 그딴 일에는 관심이 없다.
여성들은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푹 빠졌다. 성형외과에서 한 번 잘 손질하면 팔자를 고칠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일상 쓰는 말도 최상급이 유행이다. ‘완전 엄청 대박이다.’고 호들갑을 떤다. 완전은 무엇이고 엄청은 무엇이며, 대박은 또 뭔가? 나의 사전에는 이런 최상급 용어가 없다. 그것은 내겐 도달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완전’은 흠 잡을 데 없이 최고 수준에 도달한 것이고 ‘엄청’은 헤아리기 어려운 양이다. ‘대박’은 흥부가 박을 타다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온 것과 같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선 너무 대박이 많이 터진다. 실제로 그렇다면야 축하할 일이겠지만, 알고 보면 시시한 실적이나 성과도 대박으로 치고 있으니 문제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대박’이 터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한 번 대박을 만나지 못한다. 그런대도 TV에서 사람들은 웬만한 일에도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대박’ 소리를 지른다.
한국인 치고 ‘아이고’ 소리를 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누구에게서 배운 게 아닌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배어있다. 한글사전에 ‘아이고’는 몹시 아프거나 놀라거나 힘들거나 원통하거나 기가 막히거나 할 때 하는 말이라고 적혀있다. 이의 준말로는 ‘아이’, 힘준 말로는 ‘아이고 머니’를 쓴다. 의자가 있는 줄 알고 앉았다가, 그냥 바닥에 내동댕이칠 때 무의식중에 나오는 말, ‘애고머니’는 아이고 머니의 준말이다.
사람이 사는 동안 ‘아이고!’ 소리를 얼마나 할까?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은 할 것 같다. 내 경험으로 어렸을 적 팔이 부러졌을 때 ’아이고‘ 소리를 많이 했다. 초등학교 때 두 번 양 팔이 부러졌는데, 지금도 그때의 통증을 기억한다. 며칠 밤을 새우며 그 소리만 한 것 같다. 어머니는 아들의 고통소리를 들으면서 제대로 잠을 주무셨을까, 아마 나와 같이 뜬 눈으로 밤을 새우셨으리라.
앞으로 나의 사전에서 버리거나 사라질 어휘는 많을 것이다. 그런 단어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살아가는 데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말년에 불가능을 경험했다.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 웰링턴 장군에게 패배했다. 마지막 유형지 센트헤레나 섬에서 탈출을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나폴레옹의 사전에 불가능이 있었으나, 그것을 일찍 깨닫지 못한 자만으로 불행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그런데 나폴레옹처럼 나의 사전(辭典)에 없는 단어로 엮어진 일이 생전에 벌어진다면 어찌 될까?
“아니 벌써, 아이고! 내게 마지막으로 엄청난 대박이 터진 게야.” 하고 날 뛸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엊그제 꿈처럼.
(2019.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