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88
8월20일[연중 제2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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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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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wEQasfc-CNk
(박종수 사도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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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큰 겸손과 강한 믿음의 소유자, 가나안 부인>
마귀 들린 딸을 둔 가나안 부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가 평소와는 사뭇 다릅니다. 본문을 읽는 동안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던지는 말씀이 상당히 귀에 거슬리고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마귀의 횡포에 하루하루가 지옥인 딸 때문에 잔뜩 기대를 안고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이었습니다.
절박하고 딱한 처지에 놓인 여인에게 위로와 기쁨, 희망과 구원을 선사해야 마땅한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청을 강경하게 거부하시며 이방인인 여인에게 ‘강아지’라는 표현까지 쓰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 15,24)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예수님의 말씀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이면 오해의 소지가 꽤 큽니다.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전후 맥락과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맥락을 잘 헤아려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전통에 뿌리를 둔 ‘성경의 구원사적 기본 원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에도 순서와 절차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구원에 도달해야 하며, 그래야 이방인들도 하느님 구원을 희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구원에 모든 역량을 기울여야 할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지금 현재 이스라엘의 구원이 최우선 관건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스라엘 사람 예수님의 머릿속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있었습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의 행동반경을 보면 이러한 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경로 주변에는 수많은 이방인의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던 도시들을 대체로 비켜 가십니다. 대신 갈릴래야 호숫가 이스라엘의 여러 도시들, 특히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온 신경을 집중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머릿속에 이방인들의 구원은 전혀 없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청을 거절하신 것을 통해 이방인들이 그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이방인들 때문에 그분께서는 지금 이스라엘에 집중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안에 하느님의 새 세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새 세상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우선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높은 장벽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결론은 ‘해피 엔딩’이요 초긍정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큰 겸손과 강한 믿음 그리고 절실함은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게 합니다. 아직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치유와 구원을 선물로 받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딸의 치유는 사실 가나안 부인이 얻은 것 가운데 작은 선물이었습니다. 더 큰 선물, 더 큰 깨달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 이 세상에서의 일회적인 치유와 회복뿐이 아니라 영원한 치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 하느님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인의 내면 안에서는 큰 도약과 성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치유자를 넘어 영혼의 치유자란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주인임을 넘어 또 다른 세상의 주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적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강한 확신뿐만 아니라 철저한 겸손의 덕이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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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VwJuhMIbR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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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칼자루를 쥐고 기도하지는 않는가?>
오늘 복음은 마귀 들린 딸을 고치고 싶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고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자신을 믿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믿음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그 신뢰를 하느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자존심도 버렸는지 시험하기 위해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여인은 강아지도 주인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며 자비를 간청하고 이에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녀가 원하는 청을 들어주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무언가 청하면서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자녀가 아니라 강도가 되는 행위입니다. 역사적으로 사도세자는 영조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고픈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모죄로 뒤주에서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도 아무 이유 없이 100여 명이나 죽이는 미쳐버린 아들을 살려두거나 왕위를 내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영화 ‘역린’(2014)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어떤 죽임을 당해야 했는지 똑똑히 지켜본 정조가 어떻게 자신의 왕위를 굳혀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조의 편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제 갓 왕이 된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환갑이 넘어 결혼한 젊은 할머니 정순왕후와 온 나라 군대의 80%를 쥐고 있는 구선복 장군에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였습니다. 구선복 장군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을 때 사도세자에게 얼굴에 침을 뱉고 밖에서 음식을 쩝쩝거리며 정조의 아버지를 놀렸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정순왕후와 노론의 반란 세력들은 어떤 방식으로 정조를 죽일 것인지 그 방법만 논의하면 되었습니다.
정조 이산은 아버지 사도세자와는 다르게 칼자루를 모든 이들에게 쥐여주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영화에서는 자신을 시해하려고 어렸을 때 내시로 들어온 살수 상책이 나옵니다. 정조는 상책에게도 자기 목을 내어줍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그를 풀어줍니다.
결국 상책은 정조를 대신하여 죽습니다. 누구도 자신을 그렇게 믿어주지 않았는데 임금만이 자신을 믿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조가 설득해야 할 가장 큰 인물은 구선복 장군이었습니다. 구선복 장군은 자기 아버지를 능멸한 철천지원수였습니다. 그는 정순왕후의 명을 받고 나를 전복시키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키고 있었습니다. 정조는 구선복 장군이 아직 진군 중일 때 그들 안으로 들어가 많은 군사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칼을 구 장군에게 던집니다.
모든 군인 앞에서 임금이 장군에게 칼을 던지며 목을 치라고 할 때 왕은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정조는 말합니다. “임금의 보검이다. 이 칼로 나를 베겠나, 아니면 나의 칼이 될 텐가?”
구선복은 부하들이 많이 보는 가운데 자신을 무력화한 임금을 칼로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일단은 임금 편에 서기로 합니다. 설득의 전문가인, 다카시마 유키히로는 “설득은 20%의 기술과 80%의 인간적 매력으로 승부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설득은 상대로부터 은총을 얻어내는 일입니다. 자칫 칼자루를 내가 쥐고 설득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상대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고 강도에게 순순히 은총을 내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타니 쇼헤이는 일본 야구 선수로서 투수와 타자를 겸하며 메이저리그에서 매년 역사를 갱신하는 인물입니다. 그에겐 철칙이 있습니다. 떨어진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남이 버린 운이라고 생각하고 줍는 것입니다. 그리고 팬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여겨 어린이들에게도 친절하게 다 사인을 해 줍니다.
하늘의 운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늘을 신뢰한다는 표현이 바로 쓰레기를 줍는 일입니다. 하늘이 이렇게 무장해제 한 사람에게 축복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으며 칼자루를 자신들이 쥐기를 원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에게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이나 가진 재산을 다 봉헌하며 자신의 안위를 모조로 주님께 맡기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처럼 우리 신뢰를 나 자신이 아닌 주님께 돌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얻어내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은총의 사람이 되기 위해 이러한 겸손함이 곧 믿음이고 그 믿음만이 은총의 그릇이 됨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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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5,21-28: 가나안 여인의 믿음
오늘 복음은 가나안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통하여 강하게 믿음을 촉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마귀에게 시달리고 있는 이 여인의 딸을 낳게 해주시겠다고 하면서(마태 15,28)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신다.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복음 선포가 모든 인류에게 향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사야는 당시 사람들에게 국가주의와 율법주의의 편협성을 버리고 보편적 구원론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하느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기에 외국인들도 개종하여 그분의 계시와 율법을 지키기만 한다면 구원해주시는 분이시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의 고향이 될 것이며 그 성전은 뭇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이사 56,6-7). 이러한 일치된 모습은 하느님을 모두 아버지로 깨닫고 흠숭할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이 아니면 인류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아름다운 꿈에 지나지 않는다.
초대교회에서는 이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것 같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앞에는 종족의 특권이나 신앙의 특권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오직 자기 자신이 “불순종에 안에”(로마 11,32) 있는 ‘죄인’이라는 점을 깨닫는 겸손만이 필요하고 그 때문에 그분의 용서와 사랑이 필요하고 하느님은 이러한 조건에서만 종족을 따지지 않으시고 모두를 구원해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지만, 그것을 거부하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태오는 예수께서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배타주의의 장벽을 무너뜨리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여인에게 붙여지는 가나안이라는 호칭은 종족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특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 여인이 이교도라는 것이다. 우선 예수께서는 그 이교도 여인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시며 처음에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23절). 오히려 사도들이 그 여인을 도와주어야겠다고 느낄 정도였다. 예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절).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도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10,5-6)고 하셨다. 그런데도 계속 간청하는 여인에게 더욱 가혹하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26절). 이 표현은 이방인을 가리키지만, 경멸의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점점 더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 드러내는 가나안 여인의 항구한 자세에 양보하신다. 이방인인 그 여인이 예수께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청한다는 사실 자체가 예수께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항변은 단호하기까지 한 예수님의 말씀을 무색게 하는 그녀의 믿음과 고통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주인의 집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거기서 그녀는 주인의 발밑에 웅크리고서라도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 ‘믿음’에 탄복하시고(28절) 그녀가 원하는 은총을 베풀어주신다. 그 여인의 믿음을 갖게 해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여기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도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여인의 믿음이라면 어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겠는가! 즉 구원의 조건은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종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구세주로 믿을 수 있는 능력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 예수님의 모순적인 태도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에 투신할 힘을 발견한 것이다. 사도들은 믿음의 가치에다 구원의 최고 능력을 부여한다. 이 믿음의 가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위해 하신 말씀의 가치에 근거하고 있다. 바로 오늘날에도 이 말씀을 새로운 형태와 방법으로 선포함으로써 새 이방인들, 세례를 받았더라도 이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자신 역시 구원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혹은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굳게 믿는 신앙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신앙은 어떠한 어려움에도 포기되지 않는 항구한 신앙이어야 함을 우리는 가나안 여인에게서 보았다. 우리도 그런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하여 끝까지 항구하여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우리 모든 교우가 그렇게 되어 기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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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글을 읽을 때 중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단어는 글의 기본입니다. 단어가 문장이 되면 글을 쓰는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문장이 모여 문단이 되면 글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위로를 주는 글, 용기를 주는 글, 비판과 비난의 글이 됩니다. 문단과 문단의 맥락을 이해하면 글의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신문의 사설이나, 칼럼은 대부분 신문사의 편집방향과 일치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일의 날씨는 예측하면서 어째서 시대의 징표는 모르느냐” 단어와 문장에만 머물면 글의 목적과 가치를 알기 어렵습니다. 글의 맥락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면 주체적으로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취하고, 버려야 할 것들은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에 유익한 음식을 선택해서 먹지, 몸에 독이 되는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인터넷과 검색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이해해서 받아들일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토마시 할리크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교의 오후’에서 시대의 징표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의 치유력을 새로 일깨우고, 내부적으로 분열된 절름발이 교회를 야전병원으로 만들고 민중의 빛이 되게 할 수 있을까 교회와 종교를 게토, 폐쇄되고 요새화된 벙커, 철 지난 과거 신조들로 장식된 무덤, 진정제나 수면제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개인 정원으로 만들려는 유혹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신뢰를 잃고, 자유 좌파들에 의해 단호히 배격당하고 외면된 그리스도교가 다양한 목소리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상호 존중과 소통, 가치 공유의 도덕적 풍토로 바꿀 수 있는 정치 문화를 형성하도록 이끌 수 있을까 어떤 유형의 신앙이 다가올 시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현재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이 책에서 그리스도교의 오후라고 지칭한 시대에 사람들을 위한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교회, 신학, 영성이 어떤 형태의 변화를 격어 나가야 하는지 대답하고 싶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토마시 할리크가 진단한 시대의 징표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청년들의 이탈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성소의 감소로 성직자들의 고령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사제가 없는 성당은 폐쇄되거나 이웃본당과 통합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에게 교회의 문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함께 기도하는 모습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산업화와 자본주의는 블랙홀이 되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마저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인간이 쌓고 있는 탐욕과 욕망의 바벨탑은 아름다운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를 넘어 지구열대화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폭염, 가뭄, 화재는 삼종세트가 되어서 우리의 삶에 큰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편의를 위해서 내보내는 ‘온실가스’는 지구열대화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아름다운 지구를 훼손하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땅, 물, 공기가 오염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땅, 물, 공기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생명의 죽음을 초래합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 평등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실패를 거듭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 모욕과 수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새로운 권위를 지니셨고, 기존의 질서와 틀을 허물었던 예수님은 늘 당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꼼짝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그렇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믿으셨고, 예수님께 포도주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아니었지만 자신을 믿고 부탁한 성모님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행한 첫 번째 표징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백인대장이었습니다. 백인대장이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저도 부하들에게 명령을 하면 부하들이 저의 말을 듣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하인이 곧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도 그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오늘 우리가 만나는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말을 듣고 또 감동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믿음은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시작이고 출발입니다. 그 믿음은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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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강아지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 15,21-23)
이 이야기는 어떤 이방인 여자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우상 숭배자가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자가 아니라 그 여자를 변화시키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를 ‘간절함의 본보기’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러나 ‘믿음의 본보기’는 아닙니다.>
여자의 간청에 대한 예수님의 첫 반응은 ‘침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라는 말에서, 요한복음 8장에 있는 다음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그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요한 8,3-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쓰셨는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이 침묵은 각자 자신의 내면을 성찰해 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가나안 여자의 경우에도, 예수님께서 여자의 간청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은총을 청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내면을, 또는 자신의 신앙 상태를 성찰해 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침묵에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의 간청은 대답할 가치가 없는 간청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침묵을 거절로만 해석해서, 그 여자를 쫓아버리자고 건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기도하면서 주님의 침묵을 경험하는 때가 많습니다. 정말로 간절하게 기도하는데도 아무런 응답도 없고, 어떤 체험이나 느낌도 없고,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이 그저 삭막하기만 하다고 생각될 때, 그때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의 내면을 더욱 깊이 성찰하는 일입니다. 아무런 응답도 주시지 않는다고 주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언제나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고, 어떻게든 우리가 청하는 것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7) 예수님은 결코 빈말을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이라는 말씀은 잊어버리고,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말씀만 기억하면서, 왜 약속을 안 지키시는가?라는 생각만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주님 안에 얼마나 잘 머무르고 있는지, 또 ‘내 안에’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모시면서 살고 있는지, 그것을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4-28)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집안의 양이 아닌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을 줄 수 없다.”라고 거절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은총을 받기를 원하면 먼저 이스라엘 집안의 양이 되어라.”라고 권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는 말씀은, ‘자녀들의 빵’을(하느님의 은총을) ‘강아지들’에게는(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는) 줄 수 없다고 거절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원하면 먼저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느님만 섬기라고 권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우상숭배는 양립할 수 없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만 섬겨라.”
예수님의 답변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여자가 하느님에 대한 믿음 없이 간절함만으로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께 간청할 때에도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에게는 은총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면서도, 여자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시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고,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는 말씀은 여자의 변화와 결심을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참 신앙과 미신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의 간절함만 내세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고, 스스로 강아지가 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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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은 우리에게 놀라운 믿음의 본보기를 보여 줍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강한 믿음으로 자신의 딸을 살려 주십사고 끊임없이 청하여 마침내 구원을 얻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흔들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정찰하러 갔던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가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땅에 사는 백성은 힘세고 성읍들은 거창한 성채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민수 13,27-32 참조)
그들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일과, 현실적인 어려움에 낙담하여 용기를 잃고 주저앉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업신여긴 자들은 모두 그 땅을 보지 못할 것이다.”(민수 14,23) 우리는 불신이 만연한 세상에 살면서 사람에 대한 불신, 하느님에 대한 불신이 더욱 커져 가는 것 같습니다. 많은 것이 변하는 세상입니다. 우리 자신도 변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는 우리 인생의 의미를 마지막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미약한 자신의 힘과 능력만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며 용기를 내지 못하는 대신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의 은총에 기대어 살려고 하여야 합니다.
복음서의 가나안 여인처럼 우리는 모두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성장시키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며 살도록 초대받은 이들입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예수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주십시오. 저희가 당신의 길을 찾도록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타게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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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허석훈 루카 신부님]
<간절함이 키우는 신앙>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시런을 겪게 마련입니다. 흔히 우
리가 겪는 고통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 경제적으로 겪는 고통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들과 불화로 겪는 심리적 고통이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고통이 찾아들 때. 우리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고봉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절망으로 자포자기의 삶을 살기도 하고, 세상을 탓하거나 타인을 비난하며, 현실을 부정하기도 함니다.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복음을 듣자니,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딸의 병이 고통의 시작이었지만, 그 아픈 딸을 돌보느라 이웃과 관계가 무너졌을 것이고, 가정불화도 자초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힘든데도 애끓는 모정은 고통에 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해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았을 것임을 쉽게 추측하게 합니다. 그렇게 그 여인은 이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이방 여인으로 유다인인 예수님을 마주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만도 하지만 '다윗의 자손이시여!'라는 외침에 이미 예수님을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의 고백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수님의 반응이 너무도 차갑습니다. 일단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이 느낌은 마치 기도할 때, 우리가 받는 느낌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 같은 하느님의 침묵처럼 말입니다.
그 차가운 반응에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지만, 제자들의 냉대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쳐댑니다. 예수님의 첫 반응이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여인은 기죽지 않고 매달립니다. 심지어 에수님은 이제 그 여인을 개에 비유함니다. '자녀들의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라는 말씀이 야속해 보입니다. 그래도 그 여인은 매달립니다. 예수님과 가나안 부인의 대화는 마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반복해야 함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의 말씀을 시험하는 듯합니다.
이제 다시 우리의 고통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고통
안에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수님이 필요하긴 합니까? 얼마나 간절히 겸손하게 청합니까? 유다인들이 광야에서 걸있던 40년의 세월만큼, 그 청을 드리는 시간이 길어도 상관없습니까? 저 자신을 돌아봐도 기도의 마음이 너무 얄팍합니다. 조급하게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 하고, 효과 없음에 빨리 지치고, 섣부른 판단을 하기 일쑤입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의 모든 것을 내러놓을 수 있는, 그리고 온전히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그 신앙의 간절함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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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이수영 다미아노 신부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이사야 예언서 56,1)>
이스라엘이 탈출기(Exodus) 이후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거기서 원주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 가나안 주민들을 죄인으로 여기며 땅 위에서 박멸할 족속으로 멸시했습니다. 그런 인종 차별적 견해는 이후 예수님 시대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생각들이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특별히 당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선포하십니다. 이는 원천 무효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마태 15,21-28)에 나오는 부인이 바로 그 가나안 사람입니다. 지금 자기 딸을 마귀에게서 구해 달라고 주님께 간청하는 그녀는 절박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마태 15,22) 이윽고 문제의 장면 즉 사도들의 진부한 의견이 제기됩니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 15,23) 예수님 보고 가나안 여자를 내쫓으라고 재촉한 것입니다. 당시 사고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엎드려 비는 여인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우리는 이 말씀에서 그 어떠한 예수님의 감정도 읽어낼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 시절 유대인들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했던 말을 인용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청하도록 허락해 주신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진짜 속내는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특별히 가나안 여인에게만 국한돼 있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차별과 미움으로 고통받는 사람 모두를 의미합니다. 사랑은 자기편만을 애지중지하는 배타적 감정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은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심지어 원수마저도 품에 안는 보편 연대적 사랑입니다.
조금 다른 분위기이긴 합니다만 우리는 분단국가의 한반도 현실에서 러시아 침략 전쟁의 참상을 봅니다. 같은 하느님을 믿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토 야욕과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정치 현실에 폭력이라는 인간의 태도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개인과 개인이, 그리고 국가와 국가 간에 그 어떤 원망이 있다 하더라도, 인류는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더 큰 곤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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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윤호 윤호 요셉 신부님]
<호의가 계속되면?>
오늘 복음을 읽기 전, 마태오 복음 14장의 끝부분을 먼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에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티로와 시돈으로 이동하십니다. 겐네사렛은 갈릴래아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평원입니다. 이곳은 유대인들이 활동하던 지역이며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일으킨 곳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티로와 시돈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티로와 시돈은 이스라엘 서쪽에 위치한 지중해 인근의 항구도시입니다. 이곳은 페 니키아 지역으로 이민족들이 거주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민족들이 드나들었고, 온갖 향락이 일어나던 장소였습니다.
또한, 북이스라엘 아합 임금의 부인 이제벨이 이 지역 출신입니다. 이제벨이 혼인을 하며 이스라엘 땅에 바알과 아세라 여신, 몰록 신앙을 가져온 것을 떠올려보면, 겐네사렛과는 장소의 의미'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지역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에게 다가와 청을 합니다.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치유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며 매몰찬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에게는 기쁜 소식이었고, 이민족들에게는 절망적인 이야기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만 구원을 내리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계속해서 청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을 강아지로 비유하며 모욕적인 표현까지도 서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런 예수님의 말씀에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먹는다.'라고 표현하며 자신의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합니다. 여인의 간절한 청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유보되어 있지 않으며, 믿음으로 간절히 청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아무런 노력 없이도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누군가의 호의는 노력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아무 의미 없는 호의를 베풀지는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전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의무를 소홀히 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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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저의 젊은 날, 소위 혈기 왕성할 때는 성서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눈이 좀 더 열리면서 성서의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고 깨닫고 있습니다. 구약에선 아브라함에게 향한 하느님의 요구,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라.’는 요구처럼 그리고 신약에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나안 여인에 대한 태도 등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이 그렇지 않나요. 늘 한 없이 자비로우시고 따뜻하시며 사람들의 어려움을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접촉하며 생명의 말씀으로 치유하시던 예수님의 입에서 어찌 이토록 인종 차별적 뉘앙스(?)가 풍기는 냉정한 거절의 말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딸의 병고로 힘겨운 나날을 보낸 가나안 여인의 울부짖는 소리를 못 들으시지는 않으셨을 텐데도 예수님은 침묵하시고, 제자들이 그 여인 때문에 성가심에 시달리다 귀찮아서 예수님께 하소연하자 하시는 말씀이 고작!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15,24)라고 하시니 그 말씀이 비수가 되어 그 여인의 마음을 후벼 팠으리라고 짐작합니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우울한 일요일」에선 이 음악을 듣고 많은 사람이 자살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아픈 것이 바로, 누군가에게 무시받는 일이며, 무시받고 살기보단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흔히 시장에서 장사하는 분들의 싸움을 볼 때 정말 무섭게 싸우는 경우를 봅니다. 그렇게 처절하게 싸우는 그 밑바닥에는 바로 한 줌밖에 남지 않은 자존심에 상처받았기 때문입니다. “야, 이년아 내가 비록 지금은 돈 없어서 시장에 나와 콩나물을 팔고 있지만 아니 니년까지 나를 무시해!”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큰 모욕이며 치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쉽게 ‘야, 자존심이 밥 먹여 주냐고 핏대를 올리지만’, 그 자존심마저 버리면 이 세상에서 무엇으로 버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우리는 자존심을 중요시합니다. 그 누군가가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릴 때 우리는 참을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토록 그 여인의 가장 깊은 자존심을 건드리시고 아프게 하셨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외견상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몰인정하게 그 여인을 대하시고 사람들 앞에서 흔한 표현으로 ‘위로는 못 할지라도, 개망신은 주지 말아야지요’. 액면 그대로 보자면, 그 가나안 여인이 속된 말로 자기 팔자 고쳐 달라고 매달린 것도 아니고, 분에 넘치는 부귀영화를 달라고 한 것도 아니며, 단지 자기 딸 곧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사랑하는 딸의 병을 고쳐 달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바람을 간청했을 뿐입니다. 만일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낫지 못할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면, 어느 어머니인들 그 여인처럼 도움을 줄 사람에게 미친 듯이 매달리고 애원하며 하소연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지극히 당연한 어머니의 작은 바람이며 몸부림이라고 봅니다. 그런 여인에게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이지 자비로운 예수님답지 않게 느껴지며 거리감마저 느낍니다.
그런데 어찌 한 치 앞도 보지 못한 우리가 주님의 속 깊은 뜻을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몇 수 뒤까지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그 여인을 거절하거나 무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단지 현세적이며 신체적인 치료로 끝나지 않고, 그 이상의 더 높고 깊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천상의 잔치에까지 그녀와 그 여인의 딸을 이끌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 여인의 마음에 천상적인 믿음의 씨앗이 이미 뿌려져 있음을 아시고 신체적인 생명을 되돌려 주는 것뿐만 아니라 천상적인 생명을 얻고 또 얻도록 이끄시기 위한 ‘반전의 교육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 반전의 교육 방법이란 ‘당신의 외면적인 거절’을 통해 그녀의 가장 깊은 내면에 내재 되어 있는 천상을 향한 갈망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냥 치료해 주었다면 그녀가 받은 천상과 영원한 생명을 향한 불씨에 불을 댕길 수가 없었기에 가장 극단적인 무시와 멸시를 통해 자존심에 상처를 줌으로써 그 어둠을 뚫고, 그 바닥을 치고 솟구쳐 생명과 축복의 잔치로 그녀를 이끌기 위한 도전이자 초대였던 것입니다. 이는 단지 그 여인만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그녀의 모든 것을 듣고 보고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시범 게이스’ 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참으로 인간이 찾아야 하고, 이루어야 하는 것은 단지 지상적 잔치상이 마지막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천상적 잔치에 참여하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애니어그램’을 만든 구르지예프에 관한 책, ‘인간이라는 기계’에서 구르지예프 또한 제자들에게 지나치게 혹독하고 엄격했더군요. 구르지예프는 잠들어 있지만 자신이 깨어 있다고 착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제자들을 일깨우기 위해 무시하고 엄청난 행위를 시켰더군요.) 물론 당신의 깊은 의도를 모르는 채 그 여인이 거절당했다고 생각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그 자리를 떠나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갔기에(=낮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고, 그 상처 입은 자존심을 억누르면서도 자식의 병을 고쳐야겠다는 반동으로 더 높고 더 깊은 믿음의 단계로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고대한 예수님 앞에 온전히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애걸한 것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를 무시하고 저를 개 취급하셔도 상관없으며, 단지 제가 바라는 것은 큰 것이 아닌 아주 작은 것으로도 족하고 족하오니 제발 제 자식 병만 고쳐주십시오.’ (15,25와 27참조) 드디어 극단적인 교육 방법을 선택한 예수님의 의도가 그녀의 겸손 어린 고백으로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뿌듯하고 그 여인이 대견스럽고 참으로 사랑스러웠으리라 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15,28)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으로 기적을 베풀고 관심을 쏟았던 지역의 사람들에게서 믿음이 없음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셨는데, 뜻밖에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에게서 그토록 크고 놀라운 믿음을 보시고 얼마나 대견스럽고 사랑스러우셨을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녀의 딸을 치료하신 것만이 아니라 그녀의 무시와 멸시당해 찢기고 부수어진 그녀의 영혼을 치유해 주시고 하느님 딸로 거듭나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세상을 살면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으로 인해 자존심 상하고 무시당하더라도 우리는 그 깊은 절망의 시간과 자리를 견디어 내고 마침내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됩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세상에서 참으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 될 것이며 참으로 사람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리라 믿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한없이 낮춥니다. 그녀는 자기가 개 취급받아도 개의하지 않고 자신을 뜻을 이루기 위해 당당히 그런 무시와 맞설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 따위를 내세우면서 자신을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자들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고 그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개도 될 수 있고 그것보다 더한 것도 될 수 있음을 오늘 복음은 저를 흔들어 깨웁니다. 아마도 제가 이 복음의 깊은 내용은 온전히 깨닫지 못했던 것은 제게 치명적인 약점인 사랑이 없다는 사실과 참으로 제 목숨과도 같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 또한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말로만이 아니라 참으로 개 취급당할 수도 있을 것 같고 그 알량한 자존심도 다 내팽개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토록 사랑은 위대하고 아름다우며 거룩한 것인가 봅니다. 아 오늘만큼은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1고린 13,7)
(의문: 가나안 여자는 본디 이런 덕행을 가지고 태어났을까요? 아니면 어머니가 되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무엇이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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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의 완력을 받아넘긴 여인의 믿음>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오 15,27)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이방인 여인,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탄복하시고 그 딸을 고쳐주십니다. 어느 면에선 주님이 여인에게 한판 대결로 지신 것입니다. 여인은 어쩜 그리 여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완력을 받아넘길 수 있었을까요? 여인은 한마디로 인생을 달관한 듯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유머를 알고 해학을 아는 여인입니다. 그 믿음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살펴보게 됩니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귀도가 떠오릅니다. 그는 어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죽음의 수용소의 험난한 상황을 ‘놀이’(게임)라고 속여 유머로 극복해냅니다.
1. 여인의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먼저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임을 전제로 하고 말씀드립니다. 딸아이가 마귀 들린 그녀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고통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양날의 칼입니다. 그 칼날에 베여 넘어질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활인검이 되어 악습이나 군더더기를 잘라낼 수 있습니다. 순수해질 수 있습니다.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여인은 주님이 자신과 딸을 싸잡아 모독에 가까운 폄하시키는 발언을 해도 끔쩍하지 않습니다. 요즘 같으면 모욕으로 여겨 고소하거나 항의할 수 있겠습니다.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 그렇습니다”하며 일단 긍정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며 받아넘깁니다. 여인의 태도에 주님은 화들짝 놀랍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하며 당신의 패배를 인정하십니다.
여인은 딸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모도 달게 받습니다. 사랑한다면 그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못 할 게 없습니다. 끊임없이 두드리고 기다리고 희망합니다. 그래서 여인은 감탄스러운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2. 주님의 믿음도 살아있는 생명의 나무
여인의 믿음도 놀랍지만, 우리 주님의 승복하는 모습도 경탄스럽습니다. 주님은 초창기 구원 계획을 소박하게 잡았던 것 같습니다. 당신 제자들을 파견할 때도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5)고 분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소리 지르는 여인에게 처음엔 한마디 대꾸도 없으시다가 나중에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위해서 왔다고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주님의 믿음도 살아있는 생명나무 같습니다.
당신의 하늘나라 비유 말씀처럼 자라나는 겨자씨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믿음으로 완벽한 구원계획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음은 예수님에 대한 히브리서의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렸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7-8)
주님도 고난을 통해서 단련을 받으셨습니다. 큰 소리로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엎드려 간청을 드린 여인은 주님을 닮아 보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십자가를 사랑했습니다. 그녀에게 마귀 들린 딸은 가장 큰 십자가였습니다. 문제는 사랑하느냐입니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한다면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황폐해지지 않습니다. 고통이 따른다 해서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구원됩니다. 사랑은 고통과 양립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별 관심이 없는 존재가 나에게 고통을 줄 수는 없습니다. 여인은 고통을 통해서 넉넉한 품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여유롭고 해학을 가지고 유머로 삶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삶은 주위를 밝히는 빛이 됩니다. 예수님도 당신 시야를 넓혀 사해 동포적인 보편적 구원계획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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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영원한 주님의 사랑에 눈뜰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와 엎드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하지 않으셨고, 다시 여인이 부르짖자,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셨습니다. 또 다시 여인이 도와달라고 청하자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가나안 여인으로 대표되는 이방인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은총은 준비된 사람에게 우선 주어지게 되어있다는 의미로 구원의 혜택이 이방인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이방인이라는 상황과 조건 때문에 구원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탄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큰 믿음을 보시고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확고하게 믿으면 그만큼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은총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인간의 협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구원은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사람으로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이방인 여인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자식을 위한 한없는 사랑, 그리고 세 번의 끈기 있는 간청으로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결국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느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4천여 전에 수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뽑아 주셨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선민의식이 뿌리 깊게 박혔습니다. 그들은 선택받지 못한 백성들을 구원받을 수 없는 이방인이라고 부르고, 심지어 ‘강아지’‘돼지’라 부르면서 교만함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과 표현으로 여인에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말씀하시고,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며 간절한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니 ‘정신 차려라!’는 꾸중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이요, 강아지라고 무시하던 사람이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냐?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하느님이 다 무슨 필요가 있느냐? 내칠 위험이 큽니다. 특별히 선택되었다면 그에 걸맞은 믿음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되었다고 다른 모든 민족이 배척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특별히 우리 내덕동 주교좌성당의 신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올해 본당설정 66주년을 지냈습니다. 청주교구의 중심성당으로써 많은 은총과 축복으로 살아왔습니다. 주교좌성당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믿음과 사랑을 간직하고 사느냐?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늘 풍요로움 속에 있으면 고마움을 잊게 됩니다. 따라서 더 큰 믿음과 사랑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겸손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더 많은 이가 미사참례와 기도로 성당을 지켜야 합니다. 온 세상을 향한 주님의 보편적 구원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2).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딸을 위해 어떤 어려움도 감당하는 어머니를 봐야 합니다. 강아지 취급받는 구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매달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끈질기고 집요하게 청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마침내 어머니의 믿음으로 딸이 치유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야고 5,11)
우리는 어떤 바람이 있을 때 반드시 얻게 되리라는 것을 믿고 기도하고,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죄를 짓고 잘못에 떨어졌다 해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선한 지향으로 인내하면서 청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며, 세상의 기둥입니다. 지혜의 저장소며 영혼의 힘이고 낙심의 치료제입니다. 슬픈 이들의 위안이며 의로운 이들의 승리고 하늘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받으려 하는 것보다 천배 만 배 더 베푸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과 고통 중에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 믿음의 자세가 필요한데 백인대장의 처신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8,8). 이 믿음의 고백은 오늘 우리의 미사 안에서 영성체 전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무엇을 주시든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여자도 믿음으로 병이 나았고(마태 9,20-22), 주님은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하시며 눈 먼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또한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마르 2,5) 하시며 중풍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더군다나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람이 큰 만큼 큰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음은 ‘설령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감추셨을지라도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 여인이 마치 예수님께서 외면하는 듯 여겼을지라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확고부동한 믿음을 지켰듯이 우리도 어두운 밤이 올수록 더 큰 신뢰를 지니고 믿음을 증거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기대하는 바와 간절한 소망이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어리석은 끈기
크고 튼튼한 집게발을 가진 어리석은 게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게는 늘 자기의 튼튼한 집게발을 내 보이며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였습니다. “난 무엇이든 한 번 물면 놓지 않아.”친구들은 모두 겁을 먹었습니다. 게는 더 기고만장해졌습니다. 어느 날, 어리석은 그 게는 낚시꾼의 낚싯대를 물고 가며 친구들에게 소리쳤습니다. “난 한 번 물면 놓지 않아! 절대 놓지 않아!”(이규경).
엉뚱한 고집 부리지 않는 지혜의 끈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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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정보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 편향’이라고 하는데, 자기 생각이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려는 심리를 말합니다. 이런 심리를 유튜브 같은 동영상 공유 플랫폼에서 이용합니다. 그래서 본인이 시청했던 콘텐츠와 유사한 내용의 영상을 자동으로 추천 콘텐츠로 뜨게 합니다. 이렇게 보다 보면 다른 사람 모두 아니 세상 사람 모두가 자기 생각과 신념에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한다면, 보기 싫은 것은 당연히 보기 싫어집니다. 이 역시 확증 편향 심리에 따라, 보기 싫은 것을 봐도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선택적으로 망각합니다. 따라서 이런 불완전한 인간의 말과 행동을 무조건 맞다고 할 수 있을까요? 기억이 계속해서 왜곡되고 조작되고 있는데 말이지요.
저 역시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친한 초등학교 친구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놀았던 일을 이야기해줍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제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친구의 설명이 너무 자세합니다. 맞습니다. 실제로 있었겠지만, 제가 단지 기억하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왜곡되고 조작될 수 있는 기억을 상대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겸손의 삶이고 지혜롭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과 함께할 수 있으며, 그들과 함께하는 주님과도 일치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자기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다면서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여인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도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가나안 부인의 청을 거절하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된 청에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는 모욕적인 말씀까지 하시지요.
이런 모욕에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갔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겸손과 지혜를 보여줍니다. 상대방의 모욕으로 틀렸다면서 거부하고 포기하며 화를 내는 것이 아닌, 인정과 지지를 통해 굳은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 믿음에 주님께서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보고 싶은 것 이상의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뜻대로 대답하지 않았다고 해서 포기하고 화내는 것이 아닌, 굳은 믿음을 통해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 모두에게 이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하며 주님 안에서 커다란 사랑과 은총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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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당신을 보십니다>
마태오 15,21-28 (가나안 여자의 믿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당신을 보십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오직
사랑 때문에
기꺼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오직
사랑 때문에
기꺼이
개가 되려는
사람에게서
당신을
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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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장들>
오늘 저의 나눔은 어쩌면 오늘 주제와 조금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사랑의 등급이랄까, 성숙한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차이랄까, 이런 것들과 관련한 얘기를 나누는 것에서부터 오늘 나눔을 시작할까 합니다.
성숙한 사람, 행복한 사람은 성숙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고, 미성숙한 사람, 불행한 사람은 미성숙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고 단정적으로 얘기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제일 미성숙한 사람, 제일 불행한 사람은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실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미성숙하고 불행한 사람은 자신만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다음은 자기 가족만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다음은 자기 민족만 사랑하는 사람이고, 성숙하고 행복한 사람은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더 성숙하고 더 행복한 사람은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랑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자기부터 사랑해야 하고, 자기부터 사랑하는 것이 순서로 맞습니다.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은 가족 사랑도 이웃 사랑도 못하지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가족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뒤집어 얘기하면 자기를 사랑치 않는 사람은 가족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자기를 사랑할 때 사랑의 토대가 놓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 체험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계속 느끼는 사람이라야 자기를 진정 사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렸을 때 부모 특히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은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엄마의 사랑을 제때 받지 못한 사람에게 애정결핍이란 것이 있고, 애정결핍이 있을 때 자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도 사랑하지 못하며, 반대로 엄마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애정결핍이 없을 때 자존감과 함께 진정한 자기애가 가능하게 되고 이웃 사랑도 가능하게 되지요.
그런데 엄마의 사랑보다도 더 자존감과 자기 긍정과 자기 사랑의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 체험이 근본적으로 없을 때 우리는 자기가 버림받은 존재, 없어도 되는 존재, 잉여 인간이라는 자기 비하감이 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성숙하고 행복한 사람이라면 자기 사랑에서부터 가족 사랑과 이웃 사랑과 인류 사랑으로 사랑이 점차 확장되기 마련인데 자기 사랑의 근본이요 이 모든 사랑의 근본이 바로 하느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민족을 다 당신 사랑 안으로 초대하는 사랑인데 모든 민족을 당신 사랑 안으로 초대하기 위한 도구로, 초대장으로 먼저 뽑으신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것이 오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이스라엘 족속이 바로 우리이고 나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하느님 자녀가 된 것은 다른 사람을 그리고 모든 민족을 하느님 사랑 안으로 초대하라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사야서 말씀처럼 하느님의 집 곧 우리 교회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불릴 수 있도록 가서, 모든 민족을 초대하는 초대장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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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화의 길, 상생의 길, 지혜의 길>
- 주님이 답이다 -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라”
영롱하고 줄기차게 울어대는 풀벌레, 매미소리와 더불어 벌써 구수하게 익어가는 배열매들 향기가 가을이 깊어져 감을 알려 줍니다. 정말 요즘처럼 나라 걱정 많이 해보기는 처음입니다. 참 고약하게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같습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분들의 생각도 그러할 것입니다. 남북의 분열 못지 않게 남남분열도 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통합의 길은 참 멀고도 멀지만 그런 방향으로 가길 강력히 희망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그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서를 보듯 신문을 보고, 신문을 보듯 성서를 보라는 개신교 신학자 칼바르트의 오래 전 언급을 잊지 못합니다. 성서를 읽듯 그런 깊은 안목의 눈으로 새롭게 신문을 읽으며 시대의 징표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어제 양 일간지 1면 톱기사와 사진이 참 불길하다 싶었습니다.
“초밀착 한-미-일, 준동맹 한-미-일” 이라는 제하에 삼국정상 사진이 나란히 나와 있었습니다. 동맹이라 하지만 흡사 강대국 두 정상에 꼼짝없이 포위된, 미-일의 덫에 걸린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이를 어쩌나? 이를 어쩌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동안 어렵사리 북방외교에 힘쓴 결과 중국과 러시아와 관계는 물론 남북의 관계도 “이젠 전쟁은 없겠구나” 싶었는데 신냉전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 위기감까지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살길은 미-일-중-러 사대 강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면서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부단히, 꾸준히 추구해야 되는데 그반대로 역행, 퇴행하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보다는 현재의 분단과 대결구도를 원하는 4강대국입니다. 국제관계의 잣대는 국익이지 결코 정의, 평화가 아니라는 냉엄한 현실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이런 와중에서 고군분투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남북이 이런 엄중한 상황을 깨달아 평화의 길, 상생의 길, 지혜의 길을 추구해야 하는데 참 암담한 생각이 들었지만 결코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한민족의 저력과 지혜를, 무엇보다 애국가 가사 1절처럼 하느님의 보호를 믿기 때문입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1년반 전쟁동안 양쪽 군인의 사상자가 무려 50만이라 하는데 민간인까지 하면 그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쟁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전쟁의 결과가 너무 참혹하여 상처와 손실의 회복, 복구가 참 요원하다 싶었습니다. 전세계가 기후재난에 힘을 합쳐도 역부족인데 설상가상 이런 어리석은 전쟁이라니요! 참으로 국가지도자의 첫째 의무가 나라의 안위요 전쟁방지입니다. 그런가 하면 평화의 긍정적 표지도 발견하고 안도했습니다. 칠흑같은 절망의 어둠속에 새어 나오는 희망의 빛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전쟁은 없겠구나!” 말마디와 더불어 안도감까지 들었습니다. 바로 어제 가톨릭평화신문 한면의 기사 때문입니다.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 개최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의 물길 열릴 것”이란 제하에 태극기를 든 청년들의 밝은 모습의 사진이었습니다. 서울 세계청년대회가 동아시아 지역평화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란 내용도 반갑고, “아, 하느님은 이렇게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일하시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요즘 인터넷이든 신문이듯 자주 들여다 보게 됩니다. 한마디로 빛을, 희망을, 길을 찾는 심정입니다. 말그대로 빛을, 희망을, 길을 잃은 시대같습니다. 무엇보다 국민 대다수가 보는 눈을, 안목(眼目)을 잃은 듯 도대체 올바른 보는 눈, “관(觀)”을 보기 힘듭니다. 올바른 국제관, 역사관, 사회관, 시국관, 교육관, 결혼관등 보는 눈이 없습니다. 교육의 가장 중요한 것도 보는 눈을 길러주는 것과 참사람이 되는 것인데 교육현실은 이와는 너무 멉니다.
나라가 있고 종교도 있습니다. 나라가 건재해야 천주교 신자생활도 건재할 수 있습니다. 나라잃은 종교생활 너무 비참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목숨을 바친 순교요, 나라 사랑에 목숨을 바친 순국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나라 사랑에 힘써야 겠다는 생각에 어제부터 집무실 예수님 십자고상밑에 태극기를 붙여놨습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닙니다. 길을, 희망을, 빛을, 보는 눈을 잃어버릴 때, 각자도생(各自圖生)에 병들도 많고 죄악도 많고 유혹도 많고 괴물도 많고 악령들도 활개치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 깊이에서는 길을, 희망을, 빛을 찾습니다. 제대로 보는 눈을 지니길 원합니다. 눈뜨고도 못보는 진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길을, 희망을, 빛을 보게 하고, 우리 모두 보는 눈을 지니게 합니다. 평화의 길, 상생의 길, 지혜의 길을 보여줍니다. 바로 하느님이, 예수님이 궁극의 답입니다. 궁극의 길은, 희망은, 빛은, 눈은 주님 한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빛이, 주님이 길이, 주님이 희망이, 주님의 눈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세가지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이교인 가나안 여자가 그 믿음의 모범입니다. 제대로 빛이자 길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찾아낸 가나안 여자의 눈입니다. 평생 이런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헛되이 살다 아까운 인생 마치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주님을 정조준한 가나안 여자의 믿음의 과녁은 정확했고 집요했습니다. 좌절이나 절망이 없는, 뒤로 물러날줄 모르는 불퇴전의 참으로 탄력좋은 믿음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현대판 마귀들린 사람들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자비송을 바치며 미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미사에 참석하면, 자비송을 바치면 눈물이 난다는 분의 진솔한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가톨릭교회의 명품성을 보장하는 미사전례입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은 저 여자를 돌려 보내라고 아우성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냉정한 대답에도 가나안 여자는 개의치 않고 엎드려 절하며, 재차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기도합니다. 이런 간절하고 절박한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표현이 기도요, 이런 기도가 믿음을 견고히 합니다. 마지막 주님과 가나안 여자의 대결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참으로 자존심 상하게 하는 모욕적인 주님의 말씀에 가나안 여자의 믿음은 굴할줄 모르니 과연 배수진을 친 불퇴전의 믿음의 전사답습니다.
“주님,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참으로 가나안 여자의 겸손한 믿음입니다. 이토록 주님께 대한 가나안 여자의 신뢰와 사랑은 깊었습니다. 빛이자 희망이자 길이신 주님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진 가나안 여자가 우리에게는 빛나는 믿음의 표지, 희망의 표지, 사랑의 표지가 됩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그대로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유쾌한 항복(降服) 선언입니다. 가나안 여자의 기도의 승리, 믿음의 승리를 뜻합니다. 가나한 여자는 믿음의 싸움에서 주님을 이겼고, 자신을 이겼고, 은근히 포기하기를 바랬을 악마의 유혹을 이겼으니 삼중(三重)의 승리를 뜻합니다. 그대로 가나안 여자를 통해 제1독서 이사야 예언, “이방인들에게 내린 축복”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그대로 우리에게도 성취되어 주님의 거룩한 산, 불암산 기슰 이 거룩한 “기도의 집” 요셉 수도원 성전에서 미사전례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둔 이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런 희망이 백절불굴의 믿음을,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믿음을 지니게 합니다. 이런면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를 희망의 주님께 인도하는 희망의 표지가 됩니다.
주님을 믿으십시오. 가나안 여자가 바로 빛나는 믿음의 표지요 모범입니다. 주님을 희망하십시오. 이사야 예언자가 바로 빛나는 희망의 표지요 모법입니다. 다음은 사랑하십시오. 제2독서 바오로가 그 사랑의 표지요 모범입니다. 바오로의 영적 시야와 지평이 참 웅대합니다. 타민족들의 구원에 이어 재차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합니다. 결국은 모두의 구원입니다. 결론같은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자비가 빛납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입니다. 마음 너머에는 신비가 있고 신비 너머에는 자비가, 하느님의 자비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 없는 이어지는 바오로의 하느님 찬미가를 소개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신비에 압도된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을 환히 드러내는 예수님의 궁극의 답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을 언제나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닮아가면서 우리 역시 주님의 빛, 주님의 길, 주님의 희망, 주님의 눈이 될 것이며 저절로 영육의 건강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게합니다. 결론하여 “절망은 없다!”입니다. 하느님 사전에 유일하게 없는 단어 하나가 “절망”입니다. 절망이 대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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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15,28)
<겸손한 믿음!>
오늘 복음(마태15,21-28)은 '가나안 여자의 믿음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을 때, 한 이방인 여자인 가나안 부인이 나와 호되게 마귀가 들린 자기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그런데 그녀는 예수님으로부터 세 번의 무시를 당합니다. 가나안 여인의 첫 번째 무시는 그녀의 소리를 들으시고도 '한마디도 대답하시지 않음'입니다. 두 번째 무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15,24) 라는 무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무시는 그녀가 강아지 취급을 당한 무시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15,26)
참으로 놀랍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완전 개 취급 당하는 무시 속에도 예수님께로 향한 그녀의 신뢰(믿음)는 변함없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15,27)
예수님께서 그녀의 겸손한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15,28) 바로 그 시간에 호되게 마귀들렸던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겸손한 믿음을 봅니다. 세 번에 걸친 완전 무시에도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을 봅니다. 이 겸손한 믿음, 큰 믿음이 바로 구원에 필요한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여러가지 기도와 신심행사에 열중하고 육신의 많은 극기와 고행을 하면서도,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마디만 듣거나, 혹은 어떤 것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우리들은 아닌지?'
겸손한 믿음이 되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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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Z3G_b5_eW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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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 28)
무엇 하나
새롭지 않은
일상이란
없습니다.
믿음은 일상을
비추며
일상은
믿음이라는
식탁을
더 환하게
드러냅니다.
믿음과 일상은
서로 다투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일상을
보살핍니다.
보살핌이
바로
믿음입니다.
적대적인 태도로는
믿음과 일상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믿음의 일상이
그대로 모여
주님을 향하는
큰믿음이 됩니다.
믿음은 낮추는
겸손으로
무르익어 갑니다.
때론 믿음도
아픈 것입니다.
아픈 관계처럼
우리의 울음을
주님 앞에
쏟아냅니다.
믿음이
우리의 관계를
우리의 일상을
지켜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믿음 없는 일상
일상 없는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넘어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믿음입니다.
함께 서로
단단해지는
우리의
믿음과
일상입니다.
아파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믿음이 있기에
해방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믿음이신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다시 살아가는
믿음의 소중한
일상입니다.
우리 일상을
새롭게 보게 하시는
주님을 찬미합니다.
주님께서
바라는 대로
도와주십니다.
믿음의 관계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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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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