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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카이로스( Kairos)
(고대 그리스어 : Καιρός,
라틴 문자전사 : Kairos,
라틴어형 : Caerus)는
그리스어로 '기회 (찬스)'를 의미하는
καιρός를 신격화한 남성신이다.
원래는 '새긴다'라는
의미의 동사에 유래하고 있었다고 한다.
히오스의 비극 작가 이온에 의하면,
제우스의 막내동이로 되어 있다.
카이로스의 풍모의 특징으로서
두발을 들 수 있다.
후대에서의 그의 조각은
앞머리는 길지만
후두부가 벗겨진
미소년으로서 나타내지고 있어
'기회의 신은 앞머리 밖에 없다'
즉 '호기는 빨리 포착하지 않으면
나중에 파악할 수 없다'라는
의미이지만,
이 속담은 이 신에 유래하는 것이다고
생각된다.
또, 양다리에는
날개가 뒤따르고 있다고도 한다.
올림피아에는
카이로스의 제단이 있었다.
그리스어에서는
'때'를 나타내는 말이καιρός (카이로스)와
\χρόνος (크로노스)의 2가 있다.
전자는 '시각'을,
후자는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또, '크로노스 시간'으로서,
과거부터 미래로
일정 속도, 일정 방향으로
기계적으로 흐르는
연속한 시간을 표현해,
'카이로스 시간'으로서,
일순간이나
인간의 주관적인 시간을
나타내기도 한다.
고성 신계사 (高城 神溪寺)
고성 신계사 (高城 神溪寺) 전경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사찰로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외금강 온정리에서 옥류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 31본산 중의 하나인 유점사(楡岾寺)의 말사였다. 신라의 보운(普雲)이 519년(법흥왕 6)에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확실하진 않다. 유점사·장안사·표훈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사찰로 꼽힌다.
원래 이름은 신라의 신(新) 자를 따서 신계사(新溪寺)라 하였으나, 뒤에 귀신 신(神) 자의 신계사로 바뀌었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신계사의 절터 계곡인 신계천에는 해마다 많은 연어가 올라와 사람들이 이 연어를 잡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를 본 보운이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에 따라 신통력을 발휘해 연어떼가 계곡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신계사의 신(新) 자가 신(神)으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918년(경명왕 2)에 법인국사(法印國師)가 중수하였고, 1130년(인종 8)에 묘청(妙淸)이 중건하였으며, 1332년(충숙왕 복위 1)에는 우심(尤深)이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452년(문종 2)에 해파(海波)가 중건하였고, 1485년(성종 16)에는 지료(智了)가 중수하였으며, 1531년(중종 26)에는 유환(宥還)이 시주를 얻어 중건하였다.
1597년(선조 30)에는 강원감사 황융중(黃隆中)이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린 절을 중건하였고, 1669년(현종 10)에는 석철(石喆)이, 1711년(숙종 37)에는 청휘대사(淸暉大師)가 각각 중건하였다. 그 뒤 1782년(정조 6)에 재우(載雨)와 관성(寬性)이 향로전(香爐殿)을 중수하였다.
또한 1821년(순조 21)에는 유신(宥信)이 향로전을 다시 중수하였고, 1835년(헌종 1)에는 조정(朝廷)으로부터 모연금(募緣金)을 받아 절 전체를 중수하였다.
1869년(고종 6)에는 동하성의(東河性宜)가 영산전(靈山殿)과 첨성각(瞻星閣)을 건립하였고, 1874년(고종 11)에는 취암(翠巖)과 의성(義惺)이 적묵당(寂默堂)을 중건하였으며, 1880년에는 의성과 지담(止潭)이 유리전(瑠璃殿)을 중수하였다.
1887년에는 대웅전을 중창하고 영산전을 옮겨지었다. 1893년에는 칠성각을 중수하고, 1914년에는 대향각(大香閣)을 중건하였으며, 1919년에는 김우화(金雨化)가 최승전(最勝殿)을 건립하였다.
1922년 12월에 용화전(龍華殿)이 화재로 모두 불타버렸고, 1929년에는 만세루(萬歲樓)를 중건하였다. 그러나 그 뒤 화재로 소실되어 1945년경에는 반야보전(般若寶殿)·나한전·칠성각 등의 전각만이 남아 있었고, 반야보전 앞에 석탑 1기가 남아 있었다.
《여지도서》고성군조의 기록대로라면 당시 신계사는 11개의 전각을 거느린 큰 절이었다. 대웅전 앞에 삼층석탑이 있고, 그 동쪽에 칠성각, 대향각, 극락전이 있고 서쪽에 나한전, 어실각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 남쪽에 만세루 좌·우에 향로전과 최승전 그리고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51년 6·25전쟁 때 건물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삼층석탑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2004년 11월 대한불교조계종과 현대아산(주), 북한측 조선불교도연맹이 공동으로 대웅전을 복원하였다. 명부전을 비롯한 나머지 11개 전각도 2007년 10월에 복원 완료되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어칸이 협칸보다 넓다. 유점사 능인보전과 함께 북한의 조선시대 말기 사찰건축을 대표한다. 신계사 삼층석탑은 2층 기단과 3층의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위 기단의 각 면석 양쪽 끝에 우주와 한 개의 탱주가 있고, 옥개석받침이 4단구성으로 되어 있다. 금강산의 정양사 삼층탑, 장연사 삼층탑과 함께 “금강산의 세 옛 탑”으로 불리는 탑으로 다른 탑들과 비슷하면서도 일부 다른 점도 지니고 있다.
근현대의 고승인 석두(石頭)·효봉(曉峰)·한암(寒巖) 등을 배출한 이름난 절이다. 절 주위가 온통 울창한 노송으로 둘러싸여 있고, 문필봉·관음연봉·세존봉·집선봉 등 외금강의 절경을 사방에 거느리고 있어 영험한 사찰로 꼽힌다.
고성 신계사 (高城 神溪寺 大雄殿) 정면
1,400년 전의 돌탑을 가진 신계사는 외금강 신계천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신계사는 뒤에 관음련봉줄기인 붓끝같이 뾰족한 문필봉과 앞의 구름을 끼고 아슬아슬하게 솟아있는 세존봉, 채하봉, 집선봉 등과 잘 어울렸다.
광복 후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는 아름다운 외금강에서도 절승경개를 이루는 이곳에 자리잡은 신계사를 외금강박물관(《금강산특수박물관》, 《신계사특수박물관》이라고도 함)으로 꾸리고 인민들이 그 우수한 건축술과 유물들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1951)년 모두 불타버렸다. 신계사는 519년에 처음 세운 후 여러 차례 다시 짓고 34차례나 보수하였었다. 전쟁 전까지 있던 건물은 대부분 1597년에 세운 것이였다.
신계사는 대웅전과 만세루를 통하는 남북중심축이 설정되고 뒤의 대웅전구역과 앞의 만세루구역으로 나누어 건물들이 배치되여 있었다. 대웅전구역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에는 3층 돌탑이 놓이고 동쪽에는 칠성각, 대향각, 극락전이, 서쪽에는 라한전(령산전), 어실각이 일정한 사이를 두고 배치되여 있었다. 만세루구역에는 만세루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향로전과 부속건물이, 서쪽에는 최승진과 부속건물이 배치되여 있었다.
이 절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은 1887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서 유점사 능인보전과 함께 조선시대 말기의 사찰건축을 대표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3칸(12.45m), 측면 3칸 (7.54m)의 겹처마합각지붕을 이고, 바깥 9포, 안 13포의 높은 두공을 짜올린 포식 건물이다.
고성 신계사 (高城 神溪寺大雄殿) 외부 두공 및 헌
고성 신계사 (高城 神溪寺 大雄殿) 내부 두공
신계사 삼층석탑
금강산에는 오래된 옛 탑 세 개가 있다. 이를 금강산 3고탑(三古塔)이라 하며, 신계사 삼층석탑, 장연사터 삼층석탑, 정양사 삼층석탑을 말한다. 다음은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금강산 3고탑의 중 신계사 삼층석탑 모습이다.
신계사(神溪寺)는 외금강에 있다. 유점사(楡岾寺)의 말사에 속했으나, 오래 전부터 장안사(長安寺), 표훈사(表訓寺), 유점사와 더불어 금강산 4대 사찰로 꼽히는 명찰이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불에 타 폐허로 변했다. 최근 남북한 불교계에 의해 공동으로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탑은 대웅전 앞마당에 있다. 2층 기단에 3층 탑신부와 상륜부를 올렸다. 하층기단 면석에는 8구의 비천상이, 상층기단 면석에는 8구의 팔부중상이 새겨져 있다. 1층 몸돌에는 4면에 간단한 문비장식이 새겨져 있다. 위 사진에는 상륜부 일부가 남아 있으나, 최근 사진을 보면 모두 없어졌다.그리고 1층 지붕돌이 새것으로 바뀌었다. 탑의 조성시기는 통일신라시대 말로 추정된다.
신계사 삼층석탑 상층기단부 - 상층기단 면석에 새겨진 팔부중상의 모습
해주 신광사 (海州 神光寺)
황해도 벽성군 서석면 (지금의 황해남도 해주시) 신광리 북숭산에 있었던 절로 일제강점기에는 패엽사(貝葉寺)의 말사였다.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삼국유사』에 923년(태조 6) 입조사(入朝使) 윤질(尹質)이 중국에서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이 절에 모셨다고 한 것으로 보아 창건연대 또한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그 뒤 현종은 1026년(현종 17) 이 절에 행행(行幸: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것)하였고, 1053년(문종 7) 9월에는 왕이 이 절에 이르러 나한재(羅漢齋)를 개설하고 제왕(諸王)과 재추(宰樞)·시신(侍臣)을 향연하였다.
또한, 1102년(숙종 7) 10월에는 왕이 이 절에 들러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설하였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1334년(충숙왕 복위 3)에 원나라의 마지막 왕인 순제(順帝)가 그의 원찰(願刹)로 중건하였기 때문이다.
순제는 일찍이 서해의 대청도(大靑島)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때 그는 서해의 산천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해주의 북숭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 나무와 풀이 우거진 속에 이상한 기운이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찾아가 보았더니, 수풀 속에 한 부처님이 있었다. 이에 그는 만약 부처님의 도움을 얻어 환궁등극(還宮登極)할 수만 있다면 마땅히 절을 지어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기도하였다.
그 뒤 그가 환궁등극하고 2년이 지난 어느 날,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서 “어찌 서로 잊을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꿈을 깬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중국의 재력을 기울여 이 절을 중창하였는데, 그 웅장하고 화려하기가 동방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이 역사에는 원나라의 대감 송골아(宋骨兒)가 이끄는 37인의 공장(工匠)이 참여하였고, 고려의 시중 김석견(金石堅)과 밀직부사 이수산(李壽山)이 송골아와 함께 감독하였다.
이 때 이루어졌던 건물은 법당인 보광명전(寶光明殿)을 중심으로 그 앞에 장랑(長廊), 동쪽에는 누(樓)와 재료(齋寮), 북쪽에는 1동의 전우(殿宇)와 그 앞에 석탑(石塔), 서쪽에는 나한전(羅漢殿) 등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이 밖에도 침실과 석경판(石經板)을 봉안한 해장전(海藏殿)·중문(中門)·종루(鐘樓)·양진당(養眞堂)·영마전(影磨殿)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1335년 8월에는 충숙왕이 이 절에 들러 축수를 하였다. 그리고 이 절은 일찍이 화재를 만난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한 과객이 이 절에 머물고 있을 때 누의 남쪽을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처음 절을 지을 때 남산(南山)에 석옹(石瓮)을 묻어 물을 저장함으로써 화재를 막았다.
이제 그 석옹이 기울어져 물이 새고 있으니, 몇 년 지나지 않아 절에 화재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1677년 4월 5일에 화재를 만났다. 이 때의 화재로 전우와 불상 및 승방 등이 모두 탔다.
다음해에 보광전(普光殿)·설법전(說法殿)·약사전(藥師殿)·시왕전(十王殿)·만세루(萬歲樓)·승료(僧寮) 등을 중건하고, 다시 27년이 지난 1705년에 이르러 나한전을 세웠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문화재로는 1324년(충숙왕 12)에 세워진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2호인 신광사오층탑과,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3호인 신광사무자비(神光寺無字碑)가 있다. 무자비는 글자가 없는 비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주 신광사 보광전 (海州 神光寺 寶光殿) 측면
해주 신광사 보광전 (海州 神光寺 寶光殿) 외부 두공 및 헌
황해 연탄 심원사 (燕灘 心源寺)
황해 연탄 심원사 (燕灘 心源寺) 전경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 덕우리자비산(慈悲山)에 있는 절. 일제강점기에는 성불사(成佛寺)의 수석 말사이었다.신라 말에 국사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1709년(숙종 35)에 세운 「심원사비」에 의하면, 고려 말에는 절이 많이 퇴락하였으나 1374년(우왕 즉위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이색(李穡)이 황폐된 절과 부근의 지세가 군사적으로 요새지인 점을 착안하여 절을 중건하고 성을 쌓게 하였고, 중국의 유명한 화가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관음도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큰 가뭄이 계속되어 완공하지 못한 채 중단하였다. 조선 숙종 때 이색의 12대손인 이여택(李汝澤)이 황주목사가 되어 이 절을 살펴보니 이색 이후에 네 차례나 중수되었으나 여전히 퇴락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므로 이색의 뜻을 상기하여 승려들과 함께 희사금을 모아서 수년 후에 본전(本殿) 및 부속건물을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들은 대부분 이때에 중건된 300여 년 전의 건물이다. 1573년(선조 6)에는 계묵(戒墨)이 중수하였고, 1574년에 53불을 봉안하였다. 이 절 부근에는 돌로 쌓은 남점행성(南岾行城)이 있으며, 그 밖에도 이 부근에는 강선대(降仙臺)와 묵대사영필(默大師靈筆) 등이 있다.
현존 당우로는 보광전을 중심으로 응진전·칠성각·향로각·청풍루가 있다. 청풍루는 고려의 건축 양식을 간직하고 있어 현재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해 연탄 심원사 (燕灘 心源寺 大雄殿) 정면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燕灘 心源寺 大雄殿) 외부 두공 및 헌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燕灘 心源寺 大雄殿) 외부 두공 및 헌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燕灘 心源寺 大雄殿) 외부 우 두공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燕灘 心源寺 大雄殿) 정면 문비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燕灘 心源寺 大雄殿) 내부 두공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燕灘 心源寺 大雄殿) 내부 천정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燕灘 心源寺 大雄殿) 내부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燕灘 心源寺 大雄殿) 불단
심원사 보광전은 황해도 황주군 구락면 덕양리(북한의 행정구역상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심원사에 있는 고려 말기의 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둥은 배흘림을 두었고, 바깥두리기둥 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놓고 그 위에 안팎 모두 3출목(三出目)인 공포(栱包)를 짜 올렸다. 그러나 다른 다포계 건물과는 달리 기둥 중심에 공포를 그대로 맞추지 않고 측면 귀기둥 위에서부터 같은 간격으로 분할, 배열하였다.
귀공포 위에는 원숭이 모양의 조각을 세워 추녀를 받치고 있어서 특이한데, 강화도 전등사의 대웅전에도 이러한 장식이 있다.
첨차는 메뚜기머리 모양이며 공안(空眼 : 건축물에서 구멍·총혈 등의 총칭)을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첨차의 끝은 몽똑하게 밑으로 처져 있어 다포계 초기의 수법을 보여 준다.
공포 위 한대(限大 : 귀기둥 위에서 도리에 45° 각도로 건 쇠서)와 보뺄목[樑頭 : 기둥을 뚫고 나온 보의 끝머리]도 3분두(三分頭) 형식으로 다듬었다. 마룻보 위에는 기둥대공과 ‘人’자 대공을 겸하도록 간결하게 짰다.
천장은 우물천장이고 바닥은 마루를 깔고 불단(佛壇)을 놓았다. 보광전은 문살로 아름답게 장식하였는데, 정면의 문들은 가운뎃칸에 모란과 연꽃을 뚫어 새겨 꽃살문을, 양 옆칸에는 격자무늬를 뚫어 새겨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단청은 18세기에 다시 칠하였으나, 아직도 일부에는 고래단청이 남아 있어 은은하고 무게있는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 건물은 1374년(공민왕 23)에 건립되었는데, 그 시기에 지어진 석왕사(釋王寺)의 호지문(護持門)·응진전(應眞殿), 개성 남대문, 평양 보통문 등과 양식적으로 같은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평성 안국사 (平城 安國寺)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청룡산(靑龍山)에 있는 조선시대 사찰로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학동 봉린산 기슭에 있는 사찰로, 503년(고구려 문자왕 12)에 지은 사찰이라 전해진다. 1419년(조선 세종 1)에 중창하고, 1654년(효종 5)과 1785년(정조 9)에 중수하였다. 옛날에는 봉린사(鳳麟寺)라고 불렀으며, 사찰 주변에서 고구려 때의 것으로 보이는 기왓조각이 발견되어 창건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원래는 암자 두엇을 거느리던 큰 규모의 절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경내에는 주불전인 대웅보전, 태평루(太平樓), 요사채, 주필대(駐畢臺)와 9층석탑이 남아 있다. 중앙 진입로 왼쪽의 탑 위쪽 태평루를 지나 마당 안쪽에 대웅보전이 있고 마당 서쪽에 요사채, 대웅보전 동쪽에 주필대가 있다. 전체적으로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사동중정형’ 가람배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대웅보전은 높이 쌓은 기단 위에 정면 5칸(17.04m), 측면 4칸(13.2m)으로 세운 다포계 팔작지붕집으로, 현재 북한에 남아 있는 불전 중 유일한 중층건물이다. 전면 5칸 중 좌우 협칸보다 중앙 3칸의 각 칸을 넓게 하고 전면에 좁은 쪽마루를 두었다. 가구는 고주를 이용한 위층 7량, 전체 9량가의 구조이다. 또한 대웅전의 공포는 두공의 2단 첨차 부분에 대각선 방향으로 보조 제궁을 교차한 것이 특징이다.
보통 대웅전이라고 이름을 붙인 불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게 일반적이지만 안국사의 대웅보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다. 불단 위에는 삼층으로 된 매우 날렵한 형태의 닫집을 설치했다. 이 닫집은 그 규모도 크고 여러 가지 조각을 다듬은 솜씨가 정교해 보인다. 천장은 빗천장과 우물천장으로 구성하였다. 내부의 공포와 공포 사이, 귀공포에서 첨차가 서로 교차하는 부위에는 ‘가릉빈가’ 조각을 장식했다. 전면 창호는 2짝씩의 꽃살창을 달고 화려한 금단청을 입혔다. 그 중에서도 특히 높이 7.7m나 되는 큰 기둥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있는 그림은 그 필치가 힘차 보인다.
대웅보전 앞에 있는 태평루는 정면 5칸(14.25m), 측면 3칸(6.8m)의 합각지붕을 이은 단층건물이다. 가운데 칸에는 통로를 내고 어칸 좌우에 중방 높이로 마루를 깔아 누각처럼 보인다. 태평루 앞에는 9층탑이 있다. 그 조성양식이 고려 중기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이 사각형 탑은 높이 6.23m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차례줄임을 크게 주지 않고 옥개석의 높이를 높여 전체적으로 위로 솟은 듯 날렵하다. 당시 석탑 조성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탑이다. 주필대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길에 잠시 머물렀다 하여 지은 부속건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툇마루이다.
북한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랜 문화유적의 하나인 안국사는 건물 전체에서 아름답고 우수한 조각들을 볼 수 있다. 특히 대웅보전은 건물의 규모가 매우 클 뿐만 아니라 균형미가 뛰어나서 조선 중기의 건축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안국사에서 그리 멀지 않는 절골에는 수많은 부도가 있어서 당시 이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평성 안국사 대웅전 (平城 安國寺 大雄寶殿) 전면
대웅보전은 2층으로 된 본전으로 정면 5칸(17.04m), 측면 2칸(6.3m)의 합각집이다. 문루의 도리가 9개나 되는 것이 특이하며, 내부는 기둥들을 2층 천정까지 높게 올렸다
평성 안국사 대웅전 (平城 安國寺 大雄寶殿) 전면
대웅전은 2층 전각으로 북한에서 현존하는 2층 형태의 절 건물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평성 안국사 대웅전 (平城 安國寺 大雄寶殿) 외부 정면 두공 및 헌
평성 안국사 대웅전 (平城 安國寺 大雄寶殿) 외부 측면 두공 및 헌
평성 안국사 대웅전 (平城 安國寺 大雄寶殿) 내부
평성 안국사 대웅전 (平城 安國寺 大雄寶殿) 문비
평성 안국사 대웅전 (平城 安國寺 大雄寶殿) 내부
함남 고원 양천사(高原 梁泉寺)
함경남도 고원군 영천리 반룡산(盤龍山)에 있는 절로 753년(경덕왕 12)에 창건되었다. 당시에는 원통전 안에 소불상(塑佛像)이 있었고, 그 앞에 만세루와 서쪽에 극락전이 있었다. 그 뒤의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만세루 부근에서 고려 시기 기와조각들이 많이 나온 것으로 보아 고려 시기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함경남도지』에 따르면 1677년에 묘련대사가 개축했다고 한다. 현재 대웅전과 만세루, 극락전이 남아 있다. 주변에 여러 기의 부도와 '우금신', '좌금신'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경계석 석인상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31본산이 정해진 후에는 석왕사(釋王寺)의 말사였다. 1950년 6.25 때 파괴되었으나, 전쟁 뒤에 복구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만세루 등이 있다. 대웅전과 만세루는 1677년에 중창된 것이다. 특히 만세루는 현재 북한에 남아 있는 다락집 형태의 건물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목조 조각과 단청이 뛰어나다.
함남 고원 양천사(高原 梁泉寺) 만세루 전면
만세루는 정면 5칸(19.4m), 측면 3칸(10.5m)으로 새긴 7량 구조의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1729년(영조 5)에 세웠다. 경사진 지형의 특성에 따라 전면은 중층이고, 후면은 단층으로 처리되었다. 흘림기둥 위에 4익공 외목도리식 공포를 얹었다.
기둥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밑은 돌로, 위는 나무로 만들었다. 화려한 모로단청을 하고 액방, 도리, 대들보를 비롯한 여러 곳에 용, 호랑이, 사자, 보상화무늬, 매화, 연꽃과 수련꽃, 소나무, 학, 매, 귀면 등의 단청 그림을 가득 그렸다. 천장에는 구름무늬, 폭포, 사슴 등이 그려져 있다. 현재 북한 지역에 현존하는 사찰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깊은 산속에 있어 주변 풍광이 좋고 앞쪽으로 용흥강과 덕지강이 마치 백포(白布)처럼 펼쳐져 장관이다. 수준 높은 건축 예술을 보여주는 한민족의 문화유산으로서 특히 사찰 단청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사찰이다.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1920년대 말에 촬영된 사진자료가 남아 있다.
앞면 마루돌기둥에 새긴 글에 따르면 만세루는 1729년에 고쳐 지은 건물이다. 앞면 5칸(19.4m), 측면 3칸(10.5m)의 합각집으로, 현재 북한에 남아 있는 절과 누각 가운데 제일 크다. 경사진 언덕을 그대로 이용해 앞면은 마루돌기둥을 높이 세워 2층으로 하고, 뒷면만 1층으로 하였다.
만세루는 건물 안 가운데에 4개의 고주를 세워 중보를 직접 받들게 하고, 그 위에 다시 작은 종보를 놓은 7량집의 구조이다. 화려한 모루단청을 하고 액방, 도리, 대들보를 비롯한 여러 곳에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용, 앞으로 내달리는 범과 서 있는 사자 등의 단청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만세루에 걸려 있는 양천사 종은 1693년(숙종 19)에 주조됐으며, 높이 1.15m, 무게가 373㎏이다. 이 종은 원래 함흥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것으로 2000년대 중반 이곳으로 다시 옮겨왔다. 만세루는 현재 북한에 남아 있는 다락집 형태의 건물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목조 조각과 단청이 뛰어나다.
함님 고원 양천사(高原 梁泉寺) 만세루 내부, 함남 고원군 상산면
함남 고원 양천사(高原 梁泉寺) 만세루 외부 공포(栱包) 및 처마(軒)
원문에는 '두공(斗栱)'으로 표기되어 있다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13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원군 낙천리에 있는 반룡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753년(신라 경덕왕 11)에 처음 세운 것을 후에 여러 차례 재건하였다. 현재는 대웅전·극락전·만세루가 남아 있다.
함님 고원 양천사 대웅전 (高原 梁泉寺 大雄殿) 정면, 함남 고원군 상산면
대웅전은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높은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11.6m), 측면 3칸(7.35m)으로 세운 5량 구조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자연석 덤벙 주초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1636년(인조 13)에 다시 세우고 1708년(숙종 34)과 1758년(영조 34)에 수리했다. 공포는 바깥 5포, 안 7포로 하면서 6가지의 공포를 다양하게 배열하여 건물 4면의 미관을 잘 조화시켰다. 정면 공포에는 봉황머리를 새겼고 모서리 기둥에는 머리를 길게 내민 용을 붙였다.
오른쪽 공포 사이 벽에는 6장면으로 된 단청 그림을 그렸다.
첫째 장면은 큰 소나무 밑에서 젊은 남자가 거문고를 타는데 그 오른쪽 하늘에는 학이 날고 있으며,
둘째 장면은 한 남자가 외금강 구룡폭포와 비슷한 폭포를 바라보고 있으며,
셋째 장면은 여러 사람이 백발노인의 말을 듣고 있다.
넷째 장면은 세 사람이 층암절벽의 경치를 구경하고,
다섯째와 여섯째 장면은 백발노인을 앞에 세우고 여러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산천을 구경하는 장면을 그렸다. 정면의 액방, 공포 사이 벽에는 부처와 용, 봉황, 보상화무늬, 연꽃, 수련, 학, 범, 귀면, 구름 등이 그려져 있다.
불단 위에는 아(亞)자형의 물림닫집이 매달려 있다. 내부 천장은 소란천장과 빗천장이 설치되어 있는데, 빗천장의 중간에는 연꽃봉오리 조각이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좌우 측면의 빗천장에는 복숭아를 쟁반에 받쳐든 두 선인(仙人)을 중심으로 20여 명의 악사와 무인(舞人)들을 그린 무락도(舞樂圖)의 필치가 매우 힘있고 생동감 넘쳐 보인다.
정면 가운데 칸의 문짝 4개에는 문살 대신 꽃무늬를 새겼다. 단청은 아름다운 비단무늬를 표현하여, 크고 작은 원형·삼각형·육각형 등 기하학적 무늬들을 연속 반복한 금단청으로 마감했다.
함남 고원 양천사 대웅전 (高原 梁泉寺 大雄殿) 문짝 (門扉) 일부
대웅전은 1636년에 고쳐 지은 건물로, 정면 3칸(11.6m), 측면 3칸(7.35m)에 두공을 바깥 5포, 안 7포로 하여 겹처마 형식을 보여준다. 건물은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쌓은 축대 위에 포식두공을 짜 올린 합각집 형식으로 지었다. 양천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건물 내외부의 단청과 대웅전 별화이다.
오른쪽 공포 사이 벽에는 당시의 세태풍속을 담은 여섯 장면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단청 그림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좌우 옆면의 빗천장에 그려진 무악도(舞樂圖)이다. 건물 안 다양한 내용의 그림과 단청무늬는 조선시대의 뛰어난 회화술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함남 고원 양천사 대웅전 (高原 梁泉寺 大雄殿) 외부 공포(栱包) 및 처마(軒)
원문에는 '두공(斗栱)'으로 표기되어 있다
함님 고원 양천사 대웅전 (高原 梁泉寺 大雄殿) 내부 공포(栱包) 및 천장,함남 고원군 상산면
원문에는 '두공(斗栱)'으로 표기되어 있다, 원문에는'천정(天井)'으로 표기되어 있다 '천장(天障)'이 표준어이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5량 구조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높은 장대석 기단 위에 자연 초석이 덤벙 주초 방식으로 놓였다. 초석 위에는 민흘림기둥으로 세워졌다. 주간의 너비가 주고보다 훨씬 넓어 주심포계 건축과 같이 안정된 느낌을 준다. 공포장식으로 보아 조선 중, 후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금강산 유점사 (高城 金剛山 楡岾寺)
고성 금강산 유점사 (高城 金剛山 楡岾寺) 전경
강원도 고성군 서면 백천교리 금강산(金剛山)에 있었던 절로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 중의 하나였다. 사지(寺誌)에 따르면 원래 이 절은 서기 4년(유리왕 23)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53불(佛)의 연기(緣起)와 관련된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민지(閔漬)의 기문(記文)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 인도 사위성(舍衛城)의 사람들은 생전에 부처님을 보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다가, 부처님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서 금을 모아 53구의 불상을 조성한 뒤 이를 배에 태우고 바다에 띄우면서 유연국토(有緣國土)에 갈 것을 발원하였다.
이 배는 신룡(神龍)에 의하여 바다를 항해하다가 월지국(月支國)에 닿았는데, 왕이 이 불상들을 공경하여 전당을 짓고 봉안하였으나 원인 모를 불이 나서 전각이 타버렸다. 왕이 다시 전당을 짓고자 하였으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이곳을 떠날 것이니 수고하지 말라.” 하고 만류하므로 이 53불을 다시 배에 태워 바다에 띄웠다.
이 배는 900년 동안 여러 나라를 떠다니다가 신라의 안창현(安昌縣) 포구에 닿았다. 현관(縣官) 노춘(盧椿)이 나가 보니 불상들은 없고 바닷가의 나뭇잎이 모두 금강산을 향하여 뻗어 있었다.
이에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는데, 흰 개가 나타나서 앞장을 서서 따라갔더니 큰 느티나무가 서 있는 못가에 53불이 있었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 찾아가서 그 땅에 절을 짓고 유점사라 하였다. 광복 전까지 53불 중 3불이 없어지고 50불이 남아 있었다.
창건 이후 1168년(의종 22)에는 자순(資順)과 혜쌍(慧雙)이 왕실의 시주로 당우 500여 칸을 중건하였고, 1213년(강종 2)에는 강종이 백은(白銀) 1,000냥을 대선사 익장(益藏)에게 보내어 중수하도록 하였으며, 1284년(충렬왕 10)에는 행전(行田)이 시주를 얻어서 공사를 착수하였는데 1295년에 중건을 완료하였다.
1408년(태종 8)에는 효령 대군이 태종에게 아뢰어 백금 2만 냥을 얻어서 건물 3,000칸을 중건하였고, 1453년(단종 1)에는 신의(信義)·성료(性了) 등이 중건하였으며, 1595년 (선조 28) 유정(惟政)이 인목대비가 하사한 내탕금(內帑金)으로 중건하였다.
1636년(인조 14) 화재로 소실된 뒤 곧 중건하였고, 1703년(숙종 29)에는 백금 2,000냥으로 중창하였으며, 1759년(영조 35) 불에 타자 북한치영(北漢緇營)의 승병대장 보감(寶鑑)이 와서 10년의 공사 끝에 중건하였다.
현재의 당우는 53불을 안치한 능인전(能仁殿)을 비롯하여 수월당(水月堂)·연화사(蓮華社)·제일선원(第一禪院)·반룡당(盤龍堂)·의화당(義化堂)·서래각(西來閣) 등 6전(殿) 3당(堂) 3루(樓)가 있다. 이들은 1882년(고종 19)의 대화재 뒤 우은(愚隱)이 중창하였고, 근대의 대선사 대운(大雲)이 중수한 것이다.
이 중 절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은 연화사인데, 이곳은 만일회(萬日會)를 열던 법회장소였다고 한다. 31본산 시대에 이 절은 산내·산외 말사 60개의 절을 관장하였던 금강산 제일의 가람이었다.
이 밖에 중요문화재로는 『보살계첩 菩薩戒牒』과 「보문품」이 있다. 나옹화상이 스승인 지공(指空)에게서 받은 『보살계첩』은 가로 약 7㎝, 세로 약 10㎝ 크기의 감색 장지에 금니(金泥)로 쓴 것을 책으로 묶은 귀중한 문화재이다.
이 계문의 말미에 있는 ‘지공’이라는 수결과 산스크리트 게송(偈頌) 등은 모두 지공의 친필이어서 귀중한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인목왕후가 친필로 쓴 은자 「보문품」은 왕후가 서궁(西宮)에 유폐당하고 영창대군이 참변을 당하였을 때 슬하에 남은 외동딸을 위해서 불보살의 보호를 받으려는 간곡한 정성으로 「관세음보살보문품 觀世音菩薩普門品」을 필사한 것이다
고성 금강산 유점사 (高城 金剛山 楡岾寺) 전경
외금강 은선대구역의 룡천가에 자리잡고 있었던 유점사는 금강산의 절간들 가운데서 가장 컸으며 1911년 이후에는 강원도 안에 60여 개의 말사(작은 절)를 가진 본사였었다. 9세기경에 처음 세워진 이후 12세기 중엽에는 500여간, 15세기 초에는 3,000간을 가진 큰 규모의 절간으로 확장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오다가 1882년에 모든 건물이 불탔는데 1883~1884년에 다시 크게 재건되였다.
유점사에는 중심건물인 능인전을 비롯하여 약사전, 룡음루, 산영루, 련화사, 수월당, 대향각, 령산전, 십왕전, 삼성각, 호지문, 의화당, 범종각, 보타전 등 6전7각2문3루와 기타 20여 종의 부속건물들과 돌등, 9층탑, 53존불상조각, 종 등이 있었다. 유점사에는 건축예술적으로 가치있는 건물들이 많았다. 특히 능인전의 바깥 9포, 안 15포로 짜올린 두공은 우리나라 중세건물 가운데서 가장 높고 화려한 것이였다.
고성 금강산 유점사 능인전 (高城 金剛山 楡岾寺 (能仁殿) 전면
우리나라 중세 건물 중에서 가장 높고 화려한 건물로 꼽혔으며 53불을 안치한 능인전(能仁殿),
일제강점기 6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전국 31본산 중의 하나로, 신라 초기 남해왕 때 창건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중건하였는데, 특히 조선시대에는 1408년(태종 8) 효령대군이 금 2만냥을 들여 3,000여 칸으로 중건하였다. 경내에 아름드리 느릅나무가 많아 '유점사'가 되었다고 한다.
유점사는 외금강 효운동 계곡에 세운 금강산 4대 사찰 중에서도 가장 크고 웅장한 금강산 제일의 대찰이었다. 당시 이 절에는 우리나라 중세 건물 중에서 가장 높고 화려한 건물로 꼽혔으며 53불을 안치한 능인전(能仁殿), 수월당, 연화사, 제일선원, 반룡당(盤龍堂), 의화당(義化堂), 서래각(西來閣) 등 6전 3당 3루가 있었다.
또 창건설화를 간직한 53불상, 패엽경, 나옹 혜근이 스승인 지공(指空)으로부터 받은 «보살계첩(菩薩戒牒)»과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었을 때 쓴 «보문품», 신라 남해왕이 하사했다고 전해지는 향로와 비취옥배, 나옹선사의 가사 장삼 등 수많은 보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절에는 까마귀가 쪼는 곳을 팠더니 샘물이 솟았다는 창건 설화가 전하는데, 이 전설을 증명하듯 실제로 유점사에는 오탁수(烏啄水)라는 샘물이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지금은 조선 세조 때 조성된 13층 석탑과 묘향산 보현사로 옮긴 동종(銅鐘)이 보존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당이 이곳에서 승병을 지휘하였다.
금강산 유점사 능인전 (高城 金剛山 楡岾寺 (能仁殿) 외부 두공 및 헌
유점사는 9세기경에 처음 세워진 다음 12세기 중엽에는 500여 칸, 15세기 초 리조 세조 때에는 큰 규 모의 절간으로 확장되였다. 《유점사본말사지》에 의하면 유점사는 1882년에 모든 건물이 불탄 것을 1883~1884년에 크게 재건한 것으로 되여 있다.
오랜 력사를 가진 유점사는 1911년 이후부터 강원도 안의 60여 개의 작은 절간들을 통솔하는 본사로 되였으며 거기에는 귀중한 문화 유물들이 수많이 보존되여왔었다. 그 중 유점사 능인전에 안치하였던 53불(부처)은 신라 말기에 창조된 우수한 조각작품으로서 금강산의 불상들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것이였다. 금 또는 금동제로 된 53개의 불상들은 대부분이 4㎝로부터 15㎝ 안팎의 작은 것들로서 모두 정교한 조각기법으로 훌륭히 형상된 걸작품들이였다.
지난 6·25전쟁 전까지만 하여도 우리 선조들의 우수한 건축술을 보여주는 능인전, 대웅보전, 산영루를 비롯하여 약사전, 룡음루, 련화사, 수월당, 대향각, 령산전, 십왕전, 삼성각, 호지문, 의화당, 무연각, 범종각, 보타전 등 40여 채의 옛 건물들이 아름다운 자연경치 속에 즐비하게 늘어 서있어 심산 속에서는 보기 드문 경관을 이루었었다.
유점사에는 인디아에서 종을 타고 온 53개의 부처를 두기 위하여 이 절간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유점사터에 남아있는 유물로서는 구리로 만든 종이 있다. 이 종은 범종각에 매달려 있었는데 지난 6·25전쟁 때 집은 불타 종만이 남아있었다. 이 종은 (1985)년에 묘향산으로 옮겨갔다. 유점사터는 옛날 수많은 까마귀들이 때를 지어 모여들어 주둥이로 땅을 쪼아 발견하였다는 《오탁수》라는 샘터가 있다.
유점사터에서 서북쪽 효운동으로 가는 길을 따라 조금 가다가 왼쪽 룡천개울에 내려서면 높이가 약 10m되여 보이고 웃면이 평평하여 수십명이 앉을 만한 큰 바위가 있다. 이것이 반야대이다. 개울 건너 맞은 편에서 반야대를 보면 마치 내금강의 명경대처럼 바위면이 매끈한데 거기에는 《반야대》라고 대이름을 썼고 비로봉에 대한 시 한수를 새겼다. 반야대 옆에는 또 하나의 큰 바위가 이마를 맞대고 있다. 그 경사진 한쪽 면에는 4개의 부처가 새겨져 있는데 그리 정교하지는 못하다.
반야대 부근의 개울바닥은 마치 정으로 쫏고 칼로 아로새긴 듯 모가 지고 날이 선 삐죽삐죽한 흰 바위가 깔려 있으며 그 우로 맑은 물이 흐른다. 다시 길에 올라서서 오른쪽에 들어서면 잡관목이 우거진 숲 속에 몇 개의 비석과 부도가 있다. 이 가운데는 사명당의 친우이고 허백당의 스승이였던 중 기암(1552년-1634년)의 비석인 《기암당법견대사비》를 비롯하여 300년 이상되는 오랜 비석들이 있다.
금강산 유점사 능인전 (高城 金剛山 楡岾寺 (能仁殿) 내부 두공 및 천정
금강산 장안사(淮陽 金剛山 長安寺)
금강산 장안사(淮陽 金剛山 長安寺) 전경
강원도 회양군 장양면 장연리금강산 장경봉(長慶峯)에 있었던 절.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안사는 금강산의 4대 사찰의 하나로 내금강 만폭동의 유명한 명승지였으며, 내강리 금강산 장경봉 아래 비홍교(만천다리) 건너편에 그 터가 자리잡고 있다.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과, 551년(양원왕 7) 고구려의 승려 혜량(惠亮)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왕명으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 때 비로전을 짓고 비로자나 철불(鐵佛)을 봉안했으며, 대장경을 절에 보관했고 오층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 뒤 773년(혜공왕 9)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수하였고, 946년(정종 1)에 왕의 태후 신명왕후(神明王后)와 황보왕후(皇甫王后)가 각각 『금강경』과 『법화경』을 금니로 사경(寫經)해서 비로전에 봉안하였다. 970년(광종 21) 화재로 불타 버린 뒤 12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982년(성종 2) 선사 회정(懷正)이 함열현 등에서 토지 1,050결(結)을 보시받아 중건하였다.
1343년(충혜왕 복위 4)원나라 순제(順帝)의 왕후 기씨(奇氏)는 고려인으로서, 황제와 태자를 위해 금 1,000정(錠)과 공인들을 보내서 굉변(宏卞)의 감독 아래 퇴락한 당우를 중건하고 새로운 누각을 건립하게 했는데, 지극한 정성과 뛰어난 솜씨는 금강산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작품이었다고 한다.
1392년(공양왕 4)에는 홍예교(虹霓橋)와 절의 사적비가 큰 비로 무너졌다. 1459년(세조 5) 세조가 행차하여 대웅전을 중수하게 하고 토지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1477년(성종 8) 화재로 전소됨에 따라 1483년 나라에서 금 3,000관과 백미 500석을 받아 일청(一淸)이 중건하였다.
1537년(중종 32) 다시 불타 버리자 1545년(인종 1)일청이 다시 중건하였다. 그 뒤 1708년(숙종 34)귀옥(歸玉)이 무게 3,000근의 대종을 조성하였다. 1728년(영조 4)묘현(玅玄)이 중창하였고, 1791년(정조 15) 순상(巡相) 윤사국(尹師國)이 전(錢) 5,000관을 내어 중수하였다.
1842년(헌종 8) 부원군 조만영(趙萬永)이 금 2,500관을 보시하여 새로 300여 칸을 증축하고, 밭 40여 석을 시주하였다. 1863년(철종 14)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가 주상하여 공명첩(空名帖) 500장을 내리게 하고, 자신의 재산 중 1,200냥을 보시하여 중수하게 하였다.
김병기는 1864년에도 3,000냥을 시주해서 불상·불화들을 보수하거나 새로 봉안하였다. 이 절은 입구에서부터 일주문(一柱門)·운성문(雲性門)을 거쳐 만천교(萬川橋)라는 징검다리를 건너면, 숲 사이로 만수정(萬水亭)이 있고 그 안에는 ‘금강산장안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안의 오른쪽으로는 대향각(大香閣), 왼쪽으로는 극락전,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곳에는 본전인 대웅전이 있다. 1945년 이전까지는 6전(殿)·7각(閣)·1문(門)을 가졌으나 그 규모는 옛날에 비해 축소된 것이고, 부속 암자로 장경암(長慶庵)·안양암(安養庵)·지장암(地藏庵)·영원암(靈源庵) 등을 가진 금강산 4대 사찰 중의 하나였다.
문화재로는 기황후가 중창할 때 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53불, 1만 5000불 등이 봉안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대법당 왼쪽의 지성전(至聖展)에 봉안된 나한상은 비범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기황후 당시의 것인지 그 후대의 것인지는 단정 짓기 곤란하다.
부속 암자 중 안양암은 장안사 동북쪽 3㎞ 지점에 있는데 고려 성종 때 회정이 창건한 곳이며, 이후 회도(懷道)가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이 암자에는 미륵불과 나한상 등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영원암은 신라 때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창건한 것으로 금강산 일원에서도 가장 맑고 고요한 수도처로 이름 높은 곳이다.
부근의 옥초대(沃焦臺)는 영원조사가 일심으로 수도하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고, 그 앞의 반듯한 돌은 영원조사가 공부하던 곳이라고 하여 책상바위라고 이름 붙여졌다.
금강산 장안사 (淮陽 金剛山 長安寺) 전경
금강산 장안사 대웅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大雄殿) 잔먄
금강산 장안사 대웅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大雄殿) 두공 및 헌
금강산 장안사 대웅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大雄殿) 외진 천장 및 두공
회양 금강산 장안사 대웅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大雄殿) 내부
회양 금강산 장안사 대웅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大雄殿) 내부
1951년 불타기 전까지 장안사에는 대웅보전, 사성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비로전, 어향각, 대향각, 소향각, 해광전, 극락전, 법왕루, 신선루, 만수정, 은주문, 종각, 산신각, 반야각 등 6전 7각 2루 2문과 그 밖에 10여 동의 건물들이 처마를 맞대고 장중한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장안사는 대웅보전과 사성전을 각각 중심축으로 한 두개 구역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에는 맨 앞에 신선문이 있고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좌우에 각각 한채씩의 건물이 배치되여 있었다. 맨 앞에 법왕문이 있는 사성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의 건물배치도 이와 비슷하였다.
절간건축에서 2개의 축을 정하고 두채의 2층건물(대웅보전, 사성전)과 두채의 다락건물(신선루, 법왕루)을 각각 남북으로 쌍 지어놓은 것은 장안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이였다. 여러 건물 가운데서도 2층건물인 대웅보전과 사성전은 모양과 짜임새에서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시기적특징을 보여주는 훌륭한 건물이었다.
여러 건물 가운데서도 2층건물들인 대웅보전과 사성전은 모양과 짜임새에서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시기적 특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건물이였다.
대웅보전은 앞면 5간(2층은 3간), 옆면 3간(2층은 2간)의 건물로서 두공은 1층에서 안팎이 모두 7포, 2층에서 바깥 7포, 안 9포로 짜올렸다. 밖으로는 휘여 내민 꽃가지산미를 붙이고 안으로는 아무런 장식도 없이 첨차모양으로 짜올려 간결하고 치밀한 조각솜씨를 발휘하였다.
특히 건물 안 뒤쪽 안기둥 4개 사이를 벽체로 막아 넓은 불단을 만들고 그 우에 2층으로 된 요란한 닫집을 드리워 놓았는데 리조 후기의 특징을 잘 드러내였다. 아래층 안에 세운 10개의 기둥은 곧추 올라간 2층바깥기둥을 겸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안은 층이 갈라지지 않은 통간이였지만 바깥은 아래, 웃층으로 갈라져 있었다. 가볍게 휘여진 지붕의 룡마루, 박공마루, 추녀마루와 처마선들로 하여 대웅보전은 더욱 부드럽고 맵시 있었다.
회양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四聖殿) 전면
회양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四聖殿) 하층 외부 두공
또한 사성전(5간×4간)은 대웅보전이 수직적 요소가 강조된 데 비하여 기둥높이를 낮추어 수평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표현되여 있었다.
두공은 1층에서 안팎이 모두 5포로, 2층에서는 바깥 7포, 안 9포로 짜올렸는데 바깥산미는 대웅보전보다 짧게 아래로 처지게 하면서 널직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안에 있는 10개의 기둥은 웃층까지 곧추 올려세웠는데 밖에서는 웃층의 기둥이 보이지 않게 하고 액방과 평판방, 두공만을 보이게 한 것이 대웅보전과 달랐다.
지붕도 1층에서는 겹처마로, 2층에서는 홑처마로 처리하여 서로 대조적인 효과를 표현하였었다. 이러한 짜임새들은 건물들의 특징으로 되여 있었다.
회양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四聖殿) 하층 내부 두공
회양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四聖殿) 내진천장 및 보개
회양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四聖殿) 불단 일부
회양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四聖殿) 보개
회양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四聖殿) 외진 두공 및 천장
회양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四聖殿) 외진천장
회양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四聖殿) 내진천장
회양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四聖殿) 두관 채색 문양
회양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四聖殿) 두관 채색 문양
회양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四聖殿) 두관 채색 문양
영변 천주사 (寧邊 天柱寺)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약산 동대(東臺)의 동남쪽에 있는 절로 천주사의 창건 연대는 분명치 않다 1684년(숙종 10) 창건하였으며, 1722년(경종 2) 중수하였다. 진달래가 온산을 덮는 봄철에는 약산동대와 천주사가 꽃구름 속에 떠 있는듯하다 하여 예로부터 관서팔경의 하나로 불리어왔다.
이 절에서 약 30m 동북쪽 기슭에 있는 철옹성축성비에 따르면, 1684년 방백 신익상, 운산군수 이휘 등이 이 절에서 동북쪽으로 약 30m 지점에 있는 영변 철옹성을 수리하면서 쇄락해 있던 천주사를 중건한 것으로 기록이 있다. 천주사는 1684년 중건됐을 때 사찰의 규모가 80여 칸 정도였으나 현재는 보광전(普光殿), 천주루(天柱樓), 망월루(望月樓), 향일헌(向日軒), 요사채 등이 남아 있다.
천주사는 산비탈의 경사진 지대에 쌓은 축대 위에 있다. 출입문격인 천주루 양쪽에 망월대와 향일헌이 날개처럼 달려 있으며 그 뒤로 긴 요사가 있다. 천주루를 들어서면 마당이 있고 그보다 한 단 높게 쌓은 축대에 보광전이 서 있다.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약산 동대(東臺)의 동남쪽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찰. 중앙에 천주루를 놓고 양쪽에 회랑으로 연결된 망월루와 향일헌이 날개처럼 달려 있으며 그 뒤로 긴 요사가 있다. 천주루의 형태는 사찰 건물보다는 궁전이나 관아의 누정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초석은 장대석을 이용하였으며, 계자각 난간을 둘러 누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영변 천주사 보광전 (寧邊 天柱寺 普光殿) 전면
보광전은 천주사의 주불전으로 1722년에 지어졌으며, 그 이후 보수가 있었으나 지금의 건물은 기본적으로 그때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사각형으로 다듬은 돌로 쌓은 축대 위 두 단의 장대석 기단에 정면 3칸(10.3m), 측면 2칸(7m)으로 세운 다포계 팔작지붕집이다.
가구구조는 5량가이며 바깥쪽 7포, 안쪽 11포의 두공을 얹어 건물 높이에 비하여 기둥이 상대적으로 낮은 셈이다 날아갈듯 한 합각지붕을 올렸다. 10개의 기둥 사이 거리와 30개의 두공 사이 거리를 모두 같이한 것이 특색이며, 다른 건물과는 달리 넓이에 비하여 높이가 매우 높아 주위의 경사지대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공포장식은 바깥으로는 화려한 초각을 하고, 안으로는 연꽃과 봉오리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내부 공간의 장엄이 돋보인다. 귀공포는 용머리로 장식하고, 앞쪽으로 쪽마루를 설치했다. 전면 창호는 국화문과 기하학 문양이 장식된 꽃살창을 달았다. 단청은 청록 계통의 금단청으로, 현존하는 북한의 사찰건물 중 가장 화려한 것으로 평가된다.
보광전에 입힌 금단청은 이 시기의 우리나라 금단청을 대표하는 훌륭한 것이다.무늬 조직과 구성이 독특하고 청록색의 색조가 짙게 풍긴다. 보광전 앞에 있는 천주루는 일반 사찰의 누정들과 구별되는 특색있는 건물이다.
보광전 맞은편에 있는 천주루는 가운데 다락을 중심으로 그 양쪽에 복도로 연결된 두 채의 다락집이 앞으로 내밀어 날개처럼 설치되어 있는데, 동쪽 다락에는 향일헌(向日軒), 서쪽 다락에는 망월대(望月臺)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그 양쪽 다락 뒤로 부속건물들이 뻗었는데 그것은 마치 옛 관청건물인 듯한 느낌을 준다.
영변 천주사 천주루 (寧邊 天柱寺 天柱樓)전면
천주루는 장대석 주춧돌 위에 세운 중층 누각으로, 1823년에 중수하고 1851년에 개건하였다. 건축 양식은 익공계 팔작지붕집으로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나는 연등천장으로 마감하고,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장식하였다. 양쪽의 향일헌과 망월대, 그리고 뒤쪽의 요사까지 마루 깔린 회랑으로 연결되었다.
이 천주루는 사찰 건물이라기보다는 궁전이나 관아의 누정 같은 형태이다. 임진왜란 때 왕이 영변으로 피난을 왔을 때 숙소가 마땅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데, 만일 왕이 다시 영변으로 오게 되면 이 사찰을 숙소로 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천주루는 연변부사가 천주사를 세우면서 왕이 다시 연변에 오게 되는 경우 숙소로 쓸 수 있게 지은 건물이다. 절에서는 보기 드물게 궁전의 건축 양식을 띠고 있다. 천주사는 영변의 중요한 군사적 위치로 인하여 철옹성과 함께 군사적으로도 중시되었는데, 지금도 천주루에는 '청북유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부근에 무기고 터가 있다. 천주루의 양옆으로는 각각 다락건물이 부속되어 있다. 향일헌은 천주루 동쪽에 있는 부속건물로, 마루 깔린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천주루는 용마루기에 의하면 1823년에 중수하고 1851년 2월부터 4월까지 개건하였는데 ‘철옹비’에 1684년 천주사를 다시 확장할 때 양쪽날개가 향일, 망월로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때의 개건은 1684년에 지은 천주루의 짜임을 그대로 이은 것으로 보인다.
천주루에 오르는 계단은 가운데 다락 앞에 놓여 있으며, 이 다락집 뒤로는 단층집들이 잇달아 있어서 마치 옛 관청건물과 같은 느낌을 준다. 천주루를 이렇게 지은 것은 임진왜란 때 왕이 영변으로 피난을 왔는데 숙소가 마땅하지 않아 불편을 느낀 일이 있어, 영변부사가 왕이 만일 다시 영변으로 오게 되면 숙소로 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천주루의 평면구성과 형식은 총적으로 사찰의 누정이라기보다 궁전이나 관청의 누정과 같은 인상을 안겨준다. 천주사는 또한 우리 선조들의 높은 건축술과 예술재능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으로서 북한 건축사연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이절은 북한의 보물급 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46호로 변경되었다.
금강 금강산 표훈사(金剛 金剛山 表訓寺)
금강 금강산 표훈사(金剛 金剛山 表訓寺) 전경
표훈사는 금강산 4대 사찰(유점사, 장안사, 신계사, 표훈사)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금강산 만폭동(萬瀑洞)에 있는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7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강산 1만 2천 봉에 머무르고 있다는 보살들의 우두머리 법기보살을 주존으로 모신 사찰로 일제강점기 31본산이 지정된 때에는 유점사(楡岾寺)의 말사였다.
금강산은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주처(住處)로서 표훈사의 동북쪽 가장 높은 봉우리는 법기진신(法起眞身)이라 일컬어지며, 이 절이 금강산 법기신앙(法起信仰)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598년(진평왕 20)에 관륵(觀勒)이 융운(隆雲)과 함께 창건하였으며, 675년(문무왕 15) 표훈(表訓)·능인(能仁)·신림(神琳) 등이 중창 신림사라 하였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쳤다. 내금강 만폭동, 내금강 어귀에서 골짜기를 따라 약 4km 거리에 있으며, 금강산 4대 사찰(유점사, 장안사, 신계사, 표훈사)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불에 타버리거나 쇠락한 것을 1682년(숙종 8)과 1778년(정조 2)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하였다. 원래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 경내에는 반야보전(般若寶殿),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御室閣), 칠성각, 능파루(凌波樓) 등의 전각과 7층석탑이 남아 있다.
그 뒤 고려시대에 원나라 영종(英宗)과 태후·태자 등이 시주하여 크게 중창하고, 지정(至正) 연호가 새겨진 은문동로(銀文銅爐)와 향합(香盒) 등을 하사하였으며, 이 절을 중심으로 각종 법회와 반승(飯僧) 등을 베풀었다.
또한, 1408년(태종 8)과 1427년(세종 9), 1432년에 창성(昌盛)·백언(白彦) 등 명나라의 사신들이 금강산 유람 도중 이곳에 와서 반승회(飯僧會)를 개최하였다.
1424년 예조의 조사에 의하면 이 절은 승려 150명이 거주하였던 대찰이었으며, 나라에서도 기존의 밭 210결(結)에 90결을 더 내려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중건 및 중수의 역사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절의 본당은 다른 사찰과는 달리 반야보전(般若寶殿)이라 하였으며, 그 안에 『화엄경』의 법기보살 장륙상(丈六像)을 안치하였다.
그리고 불상을 법당 정면으로 모시지 않고 동쪽에 있는 법기진신봉으로 향하도록 안치하는 특수한 관례를 적용하였다. 또한 절 뒤의 법기봉에 대한 고유한 제사의식도 행해졌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나, 그 절차와 시기 등에 대해 밝힐 자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존 당우로는 반야보전을 비롯해서 영산전·어실각(御室閣)·산신각·능파루(凌波樓)·판도방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원나라 황실의 하사물 외에도 몽산화상(蒙山和尙)의 가사(袈裟)와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사리(舍利), 야보전 앞에 53불을 모신 철탑(鐵塔)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 의하여 강탈당하고 말았다.
이 절 부근에는 경순왕비가 창건하였다는 전설을 간직한 돈도암(頓道庵)과 신라시대의 탑이 있는 신림암(神琳庵), 서산대사가 창건하였던 백화암지(白華庵址)가 있다. 또 절 안의 수충영각(酬忠影閣)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四溟大師)를 비롯하여 고려 말의 명승 지공(指空)과 나옹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던 곳이다.
표훈사의 가람배치는 마당의 7층석탑을 가운데에 두고 동·서·남·북에 건물이 담을 에워싸듯 배치되어 있는 사동중정형(四棟中庭形)의 산지가람형이다. 7층석탑을 중심으로 본전인 반야보전과 입구인 능파루가 남북의 중심축을 따라 마주 보고, 반야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과 영산전이 양쪽에 나란하게 있으며, 석탑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극락전터와 명월당터가 있다. 또 능파루를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는 요사채인 판도방(判道房)과 어실각이 있다.
반야보전은 표훈사의 중심 건물로 잘 다듬은 돌로 쌓은 높은 축대 위에 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가구는 7량집의 규모이다. 네 모서리기둥과 어칸 양쪽 기둥 상부에 용두형 안초공을 짰는데, 외부로는 용의 머리를 내고 안으로는 몸통을 조립했다. 귀기둥 상부에는 낙양을 조각하여 매달았다.
내부는 천장 복판에 현란한 단청을 장식한 반자로 꾸미고 섬세하게 조각한 닫집을 설치했다. 불단에는 법기보살의 장륙상(丈六像)을 봉안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정면이 아니라 동쪽 법기봉을 향해 있다. 불당 이름이 반야보전인 것은 주존인 법기보살이 늘 반야(般若)를 설법하기 때문에 지어졌다고 한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주심포 형식의 맞배지붕집이다. 영산전은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형식으로 5량구조의 맞배지붕집이다. 전체적인 단청은 금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능파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주심포 형식의 팔작지붕 누각건물이다.
이밖에도 중심영역의 북동쪽에 칠성각이 있고 서남쪽에 어실각이 있다. 어실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다포계 형식의 맞배지붕집이다. 일반적인 사당건축 형식으로 지어졌으나, 단청이 화려하다. 1796년(조선 정조 20) 왕이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동쪽의 법기봉을 비롯한 금강산의 주봉들이 사방을 둘러 일대 경관을 이루고 있는 깊은 산골짜기의 반듯한 절터에 있는 사찰이다. 반야보전을 비롯한 건물들의 조성기법이 조선시대 사찰건축의 절정을 보여주며, 단청이 화려한 조선 후기의 건축술을 대표한다.
금강 금강산 표훈사(金剛 金剛山 表訓寺) 전경
금강 금강산 표훈사 반야보전 (金剛 金剛山 表訓寺 般若寶殿) 정면
반야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가구는 7량집의 규모이다. 네 모서리기둥과 어칸 양쪽 기둥 상부에 용두형 안초공을 짰는데, 외부로는 용의 머리를 내고 안으로는 몸통을 조립했다. 귀기둥 상부에는 낙양을 조각하여 매달았다.
내부는 천장 복판에 현란한 단청을 장식한 반자로 꾸미고 섬세하게 조각한 닫집을 설치했다. 불단에는 법기보살의 장륙상(丈六像)을 봉안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정면이 아니라 동쪽 법기봉을 향해 있다. 불당 이름이 반야보전인 것은 주존인 법기보살이 늘 반야(般若)를 설법하기 때문에 지어졌다고 한다.
표훈사 반야보전(表訓寺般若寶殿)는 표훈사의 중심건물이며 높이 1m 정도의 축대 위에 세워진 전각으로, 앞면 3칸(14.1m), 옆면 3칸(9.4m)으로 되어있다. 또 바깥 7포, 안 9포의 두공을 복잡하게 짜올렸으며, 합각지붕에 금단청을 하였다.
기둥은 위가 약간 홀쭉하게 오므라든 두리기둥이고 네 모서리 두공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여 내밀게 하였다. 전체의 균형이 잘 잡혀 굵직하고 힘차 무게가 있으면서도 섬세하고 화려한 꾸밈새를 자랑한다.
금강 금강산 표훈사 반야보전 (金剛 金剛山 表訓寺 般若寶殿) 비화협간 4종
금강 금강산 표훈사 반야보전 (金剛 金剛山 表訓寺 般若寶殿) 비화협간 4종
금강 금강산 표훈사 반야보전 (金剛 金剛山 表訓寺 般若寶殿) 비화협간 4종
금강 금강산 표훈사 반야보전 (金剛 金剛山 表訓寺 般若寶殿) 비화협간 4종
성천 향풍사(成川 香楓寺)
성천 향풍사(成川 香楓寺) 향풍루 전면
성천 향풍사(成川 香楓寺) 향풍루 두공 및 천장
성천 향풍사 보광전 (成川 香楓寺 普光殿) 정면
성천 향풍사 보광전 (成川 香楓寺 普光殿) 외부 두공
성천 향풍사 보광전 (成川 香楓寺 普光殿)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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