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팔공산 동화사가 있는 수태골 산장 바로 아랫마을이다.
지금 고향 집은 없어지고 그 터엔 이방인이 ‘숲속의 쉼터’라는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 골짜기(노태우 대통령 전까지만 해도 산골짝이었다)에 부쳐먹던 논이며 밭뙈기를 이 사람 저사람에게 보리 한 됫박에, 쌀 한 됫박에 그냥 주어 버리던 분이셨다. (수십 년 전에 그 골짜기에 무슨 땅값이 있었을까마는…)
그래도 용케 버틴 먼 친척들은 지금은 알부자다. ?전부 그렇게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무작정 대구로 나오셨다. 가진 것도 없이, 배운 것도 없이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셨다.
지금 내가 기억하는 것이 (구) 대구은행본점을 지을 때 아버지가 그 곳에서 일하셨는데 그 때 일당이 오백원하는 출근표를 본 적이 있다. 도시에서의 어려운 생활…, 물론 그 당시에 대다수의 서민이 모두가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우리집은 유독 더 한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공부는 조금 잘 해서 반장을 했는데, 무슨 일로 돈 천 원을 못 내어서 크게 상심한 일도 있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결국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했다. 기술을 배워, 돈을 벌겠다고 기술학교를 한 2년 다니다가 그나마 형편이 안돼서 14세 가을 무렵 직물공장에 기사로 있는 외삼촌을 따라 공장으로 가고 말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친구들은 전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공부가 하고 싶었다. 무작정 회사에 사표를 썼다. 그 때는 나도 직물공장에서 기사라는 직책에 있었다.
두문불출! 학원은 생각도 못하고 대구역지하도에 있는 헌 책방에 가서 자습서를 9권 샀다. 그리고는 방안에 틀어 박혔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밤이 늦도록 무조건 자습서를 읽고 문제를 풀었다. 아니, 문제를 외우다시피했다.
돈과 시간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역정을 내셨다.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방 안에서 뭘 하는지 모른다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한달 동안 솔직히 세수도 안했다. 갓 나기 시작한 수염이 턱주위에 까맣게 자랐다.
그 때의 내 공부방법은 이랬다. 그 때는 솔직히 기도법도 잘 몰라서 ‘무조건 붙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다. 부처님은 내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 해 나는 중졸 검정고시와 고졸 검정고시를 연달아 합격했다.
6년의 시공을 넘어 1년도 안되는 시간 안에 초등학교 동기생과 동등의 학력 인정자가 되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나는 다시 회사, 아니, 공장으로 갔다. 정식으로 된 학벌이 없으니 이력서 내기가 뭐했다. 그러던 중에 서울올림픽이 유치되고, 2군사령부에서 군복무를 하고, 앞으로 관광분야가 유망하다기에 관광학원에 등록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말이 관광종사원이지 사실은 호텔웨이터였다. 그러나 어쩌랴 집안의 눈총을 받기 싫어 열심히 다녔다. 자격증이 있어야 된다기에 관광종사원 자격증도 땄다. 그리고 서울에 가서 관광종사원 연수받고 호텔업계에 발을 들였다. 속칭 ‘호텔보이’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이다.
지방에 있는 창원특급관광호텔이었다. 외국인이 많은 호텔이었다. 덕분에 ‘콩글리시’도 좀 배웠다. 지금은 모르지만 참 가관이었다. 웬만한 손님들은 그냥 반말이었고, ‘어이!’ 이게 우리들의 호칭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관광종사원 기능경기대회에 나가서 양식부문 우수상도 탔다. 그러나 공부에 미련이 남아 공부를 하려고 대구로 와서, 친구소개로 동아쇼핑 외식부 출장파티팀에 근무를 하게 되었다. 바쁜 생활속에서도 계속 공부에 미련이 남아 2년 가까이 근무하다 다시 사표를 내고 공무원 공부를 시작했다.
무학(無學)의 내가 인정 받는 길은 공무원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한때 좋아했던 여인과도 헤어졌다. 가진 것이 너무 없다는 이유였다. 그로부터 나는 떠돌기 시작했다. 종교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제 종교 강연회를 찾아 다니며 강좌를 듣고, 이단종교에도 가까이 가보고, 인도(入道)라는 것도 해보고, 그리고 그 해 나는 공무원시험을 쳤다. 원래는 통신공사 시험을 준비했는데, 준비기간 중에, 공무원 중에 기능직이라는 게 있다고 해서 응시를 하게 되었다. 요즘도 그렇지만 하위직 공무원 시험인데도 불구하고 경쟁률이 수십 대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절은 제대로 못하고 시험준비를 하면서 계속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관세음보살님! 붙게 해주이소! 합격시켜주이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다른 생각이 못 들어오게 계속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합격이었다! 정규학력이고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내가 공무원이 되었다.
아버지도 기뻐하셨다. 그 무렵 아버지는 술주정뱅이라 할 정도로 술독에 빠져 사셨다. 그렇게 나의 공무원 생활은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나는 방황하던 진리의 문제를 불교쪽으로 돌려 불교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PC통신에 가입해 불교관련 파일작업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 불교관련 자료는 너무 미미했다. 하이텔과 유니텔 자료를 다 뒤져도 찬불가는 MID음악 몇 개가 고작이었다. 원(願)을 세웠다. 내 인생에 전환점을 만들어준 부처님께 음성파일로 공양하자!
시중에 나와 있는 염불(독경)소리를 다 파일로 만들어 통신에 올리자, 새롭게 눈에 보이는 염불테이프나 CD는 마구잡이로 샀다. 그러나 파일로 만드는 게 너무 어려웠다. 요즘에야 CD에서 MP3파일 뽑는 것이 너무나 쉽지만 97,98년도만해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프로그램도 없고 컴퓨터 사양도 안 따라 주었다.
PC통신망을 수없이 뒤져 녹음프로그램과 파일변환 프로그램으로 수많은 시행착오와 반복을 거쳐 나름대로 터득을 하여 그 당시 대중적인 파일인 ra(리얼 오디오 파일)로 만들어 각 통신망에 뿌렸다. 그 파일들이 밑거름이 되어 아직도 인터넷상에서 내가 만든 파일들을 만날 때면 무척 반갑다.
그렇게 공무원생활이 타성에 젖어 가는데…, 처음에 들어올 때는 기능직 공무원이 무슨 기술직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건 일반직 공무원보다 사람대접을 못받는 단순 업무만 하는 직급이 아닌가?
부디 이 직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지만 나이도 많고 학력도 없고 속칭 빽도 없었다. 그래도 기도했다. 넘어진 그 땅을 딛고 일어서게 해 달라고, 부처님은 이러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IMF사태로 공무원 정원 수를 줄이면서 실로 십수 년만에 전직시험이 부활했다. 국어, 영어, 행정학 이 세 과목을 치러서 일반직으로 전직하라는 것이었다.
시험 실시 15일 전에 발표가 났다. 이미 공부에서 손을 놓은 지 10여 년,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 같은 직급에 수십 명인데…, 2주만에 어떻게 세 과목을 대비해서 성적순으로 뽑겠다는 것인가? 이 때는 내가 영남불교대학에서 초반을 두 번이나 다니고, 천수경을 끝내고, 금강경을 들으려다가, 너무 부처님께 빠진다고 집사람이 만류 해서 집에 있던 시절, 여름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부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8월의 찜통더위 속에서 최소한의 수면만 취하며, 오매불망 전직시험의 합격을 생각하며 공부를 했다.
아니, 무조건 속독으로 읽고 문제를 외웠다. 예의 검정고시 9과목을 한 달에 해치우던 그 시절로 돌아갔다.다른 것이 있다면 그 와중에 짬짬이 하루 오백 배씩 절을 하기로 했다. 좋은 인연 출판 ‘삼천배 삼천부처님’ 책을 펴놓고 한 부처님 명호를 읽고 절 한 번하고, 절체 절명의 2주일이 그렇게 갔다. 시험을 쳤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합격이었다.
첫댓글 수고 많이하셨네요 간절한기도가 님의 맘속에서 통하셨네요 더더욱 고군분투하셔 다음소원 또이루세요 나무 관세음보살!
성불! 달리 성불이겠습니까 바로 그간절한 심정이 이루어질때 성불이지... 성불하시옵소서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