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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두아르도 왕, 증거자 (10.13)◀
1. 가톨릭 굿 뉴-스 성인록 ▷
성인명: 에두아르도(Edward)
축일: 10월 1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왕, 증거자
활동지역: 영국(UK)
활동연도: 1003-1066년
같은이름: 애드워드, 에두아르두스, 에드아르도, 에드아르두스, 에드와드, 에드와르도, 에드워드, 에드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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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설명 :
• 영국의 왕 에텔레드 2세(Ethelred II)와 그의 아내 노르망디(Normandie)의 리카르두스 1세(Richardus I)의 딸인 엠마(Emma)의 아들로 태어난 성 에두아르두스(Eduardus, 또는 에두아르도)는 영국 옥스퍼드(Oxford)의 이슬립(Islip)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덴마크의 스벤(Svend)과 그의 아들 카누트(Canute)가 영국을 침공했을 때 그는 어머니와 함께 노르망디에 있는 그의 형제 알프레드(Alfred)에게 가서 머물렀다. 전쟁이 끝나 어머니 엠마는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그는 노르망디에 그대로 남아서 노르만인으로 성장하였다.
· 그 후 1042년 크누트 3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성 에두아르두스는 왕위에 오르라는 부름을 받고 영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물려받고, 야심적이며 세도가이던 얼 고드윈(Earl Godwin)의 딸 에디트(Edith)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는 에디트와 결혼할 당시 자신은 정결을 서약했으므로 자신과 오누이처럼 동정을 지키며 살겠다는 동의하에서만 결혼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 그의 재임 기간에는 참으로 평화스러웠다.
사실 그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드윈의 강력한 반대를 비롯하여 수많은 난관에 봉착하였다.
싸움의 불씨가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노르만인들을 좋아했고, 또 그가 노르망디에서 데리고 온 사람을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로 임명한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그는 장인인 고드윈의 무력 봉기를 분쇄하여 평정을 되찾았다.
성 에두아르두스에게는 자식이 없었는데, 고드윈의 두 아들이 왕위에 눈독을 들이고 또 다시 반기를 들자, 그는 그들도 유럽으로 추방하였다.
· 이 사건 후부터 그는 신앙생활에 깊이 빠져들었고,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에 성 베드로(Petrus) 대수도원을 짓는 등 그의 신심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대한 큰 사랑으로 나타났다.
왕과 왕후는 매우 엄격한 금욕 생활을 하였으며, 마치 오누이처럼 지냈다는 것이다.
자식이 없다는 사실로 많은 고통을 받았으나, 이것이 오히려 그들의 신심을 더욱 굳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증거자’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얻었다.
그는 런던에서 서거하여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 내에 있는 성 베드로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1161년 2월 7일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성 에두아르두스는 앵글로 색슨족의 마지막 왕으로, 중세 시대 영국의 성인들 중에서 가장 공경받는 성인 가운데 한 명이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XI)는 10월 13일을 보편 교회에서 기념하는 성 에두아르두스의 축일로 제정하였다. 그의 문장은 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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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 성인록 ▷
< 10월13일 성 에드워드 국왕 >
....... (안젤라 | 2009.10.10 Ud.)
▷ 축일: 10월 13일
< 성 에드워드 국왕 >
- Saint Edward the Confessor
- Born: 1003 at Islip, Oxford, England
- Died: 5 January 1066;
interred at the Abbey of Saint Thomas Becket; body incorrupt
- Canonized: 1161
• 성인은 영국의 에드워드(에드와르도) 왕이었다.
이 왕은 ’착하신 왕’ 로 별명이 붙을 정도로 좋은 일을 많이 했다.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대수도원을 재건하였다.
현재까지도 국왕 성 에드와르도 무덤은 그 사원안에 있다.
성인은 웨스트민스터의 주보성인이며 고아들과 방랑자들의 주보성인이다.
• 그는 에텔레드 왕과 왕후 엠마의 아들로 잉글랜드의 이슬립에서 태어났다.
그가 아직 어렸을 때에 덴마크 군이 불법 침입해 왕의 일족을 추방했고,
교회와 수도원을 불사르며 약탈을 자행하고, 성직자와 수도자를 학살하며 국민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래서 에드와르도는 어머니와 더불어 어머니 고향인 프랑스의 노르만디에 피신했는데,
신심이 두터운 어머니는 왕자의 마음속에 신덕을 심어 주는 것에 전념했으므로,
그는 어려서부터 경건하게 자라나서 측근자의 입에서 궁중의 천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가 어떤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던 가는 다음 일화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신하들이 "전하는 언젠가는 칼을 빼서 저 몹쓸 덴마크인들을 소탕하고 신성한 조국을 회복하시지 않으면 안됩니다."하니,
왕자의 대답은 "아니다. 나는 피를 흘려서까지 왕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는 것이다.
즉 그는 그런 국난(國難)도 하느님의 섭리인 줄 알고
일체를 하느님의 뜻에 맡기며, 그분 뜻이 계시면 나라의 회복이 있을 줄 알고 기도했던 것이다.
부친인 국왕은 불행한 가운데 세상을 떠났는데,
얼마 안 되어 영국 국민은 덴마크의 학정에 총궐기해 그들을 소탕하고 태자 에드와르도를 국왕으로 모셨다.
그 장엄 화려한 즉위식이 거행된 때는 바로 1042년 예수 부활 대축일이었다.
• 젊은 명군(明君)은 신앙은 만선의 원천이라는 신념으로
신하로부터 모든 국민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을 공경하는 정신을 함양하도록 지도, 노력했다.
이리하여 전에 폭도들에게 파괴된 교회와 수도원은 복구되고 성스러운 예식은 엄숙히 거행되었으며,
주교를 고문으로 두어 법전 편찬과 빈민 고아들의 구호사업을 추진하고,
무엇보다도 가혹한 세금에 시달린 국민의 생활안정을 위해 감세(減稅)의 대 영단을 내렸다.
에드와르도는 그때까지 왕비를 맞아들이지 않았고, 또 결혼할 의사도 갖지 않았으나, 중신들의 권유로 독실한 신자 에디타를 왕비로 맞았다.
그들은 서로 합의해 표면상으로는 부부지간이나 사실인즉 남매지간 같이 동정생활을 계속했다.
노르만디에 피신하고 있을때, 에드와르도는 하느님께서 다시 조국을 회복시키고 자신을 왕위에 올려 주시면 꼭 로마를 순례할 것을 서원했는데,
지금 그 소원이 이루어졌으므로 그는 서약대로 로마로 출발하려 했다.
그러나 국정이 안정되지 못했으니 외유를 할 수 없다는 중신들의 권고에 그는 난처하게 되어,
그 처지를 교황 레오 9세께 전구했던 바, 로마 순례 예산으로 수도원을 세우고 빈민을 구제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회답을 받고,
즉시 웅대한 성당 부속 대수도원을 건립해 왕실의 안식처로 삼았다.
즉 저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바로 그것이다.
• 그의 치세는 하느님께서 축복하셨음인지 지극히 평화로웠다.
사실 그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에드와르도가 무기(武器)를 든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것은 스코틀랜드 왕 말콤이 역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이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에드와르도는 위로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국민을 사랑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짓는 등 그의 신심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대한 큰 사랑으로 나타났다.
국민들은 영명한 군주로 그를 흠모했으며, 1066년 1월 5일 서거했다.
영국이 가톨릭국이었을 동안은 그에 대한 공경심이 대단하여, 역대 왕들은 즉위식 때 이 성인의 왕관과 망토를 사용함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에드와르도의 유해는 1220년 10월 13일에 웨스트민스터 대성전에 안치되었다. 그래서 이 날을 그의 축일로 지낸다.
그는 1161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의 문장은 반지이다.
♬시편22(23)
가톨릭성가 50:야회는 나의 목자(시편 23)
https://youtu.be/m8SPD7VJ1Jc
ㅡㅡ끝.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