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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완벽하게 보존된 미라상태의 436년전 사대부 부인 사체 발굴 공개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 파평 윤씨 묘역에서 436년만에 환생한 `미라여인` 발굴 모습.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 파평 윤씨 정정공파 묘역에서 태아와 함께 미라가 된 사대부 부인의 사체가 발굴돼, 2002
년 9월 8일 처음 공개됐다.
미라여인은 첩의 딸로 태어나 첩으로 시집간 것으로 추정됐다.
묘역 발굴을 담당한 고려대 박물관은"인종(1515~1545)의 후궁이었던 숙빈이 극존칭으로 쓴 한글편지가 미라 주변에서 발견됐다"며,"이 편지와 족보 등을 검토한 결과 미라 여인은 문정왕후의 오빠인 윤원량의 아들 윤소가 첩에게서 얻은 외동딸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태아는 사내아이이며 부인은 20대 초·중반인 것으로 보이며 436년전 출산 도중 사망해 추운 날씨 때문에 거의 부패
하지 않은 채 체내의 수분이 말라 태아와 함께 미라가 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 했다.
부인은 당시로서는 큰 키인 155cm이고, 막일을 한 흔적이 없는 고운 손을 갖고 있
었다.
고려대 박물관측은 미라 여인의 흉배(관복의 가슴과 등에 붙이던 장식)는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백한 무늬였지만, 이 품계에 해당하는 사대부의 아내에게 주어지는`숙부인(淑夫人)`이라는 품계가 명정(죽은 사람의 관직과 이름 등을 쓰고 관 위를 덮는 천)에 없는 것으로 보아 정부인이 아니라 첩으로 출가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미라 여인`의 관에서는 이 밖에도 대마도와 관련한 상소문체의 편지 등 한자 초서체로 쓴 편지 2통이 발견됐다.
▶️ 2010년 오늘,
학생들 지켜보는데…교장이 ‘교사 엉덩이 체벌’
https://n.news.naver.com/article/052/0000314990
➡️2004년 9월 8일 1909년 일본이 제작한 지도에서 ‘간도는 조선땅’ 증거 발견
국사편찬위원회 1909년 일본이 제작한 지도서 두만강이북 '간도는 조선 땅'
증거 찾아내 공개
일본이 간도(間島)지역을 중국에 넘겨준 ‘청·일 간도협약’의 바탕이 됐던 ‘토문강=두만강’설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지도가 발견됐다.
‘토문강(土門江)’을 두만강(豆滿江)이 아닌 별개의 송화강 지류로 분명히 밝힌 이 지도는 1909년 ‘청·일 간도협약’ 당시 일본측이 만든 것으로 ‘조선과 청의 국경인 토문강은 두만강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줄곧 주장해온 중국에 대한 중요한 반박자료일 뿐 아니라 간도가 조선 땅이었음을 밝히는 결정적 자료로 주목된다.
이상태(李相泰)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이 최근 서지학자 고 이종학(李鍾學)씨의 소장자료 중에서 찾아내 8일 공개한 이 지도는 ‘제9도(第九圖) 백두산 정계비 부근 수계(水系) 답사도’라는 제목 아래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두만강·송화강(토문강)과 그 지류의 흐름을 상세히 그려 놓은 것이다.
지도에는 ‘메이지(明治) 42년(1909년) 10월, 축척 40만분 1’이라고 제작연도와 방식을 밝히고 있다. ‘조선총독부 도서’ 직인과 ‘아홉 번째 지도’라는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일제 통감부나 군부대가 전략적인 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는 백두산 부근에서 동북 방향으로 흐르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여 송화강과 합류하는 하천에 ‘토문강’이라는 이름을 명기해 놓았고, 동쪽으로 흐르는 강에는 ‘두만강’이라 적어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강의 다른 이름일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1712년(숙종 38년)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는 ‘압록강과 토문강을 조선과 청의 경계로 삼는다’고 적었으나 ‘토문강’을 송화강의 지류로 해석한 한국과 달리 중국은 ‘토문강=두만강’설을 내세워 간도지역이 청나라 영토였다고 주장해 왔다.
➡️2003년 독일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 사망
➡️2002년 한국전력, `파워콤` 우선협상대상자로 하나로통신 컨소시엄 확정
➡️2002년 ‘오아시스’ 이창동 감독 베니스영화제 감독상 수상
➡️2001년 윤천주 전(前) 문교부 장관 별세
➡️1999년 KT, 포털서비스 `한미르
(http://www.hanmir.com)` 오픈
➡️1998년 ‘메조소프라노 대모’ 성악가 이정희씨 별세
➡️1997년 진로그룹 화의신청
➡️1989년 전자파 반사 시설 준공
➡️1986년 도이 다카코, 일본 최초의 여성 당수(사회당)로 선출
➡️1982년 부산대, 경남 합천군 쌍책면 사양리서 세계최대 이암(泥岩)자연동굴
(길이260m) 발견
➡️1981년 리비아, 소련에 항만 개방
➡️1981년 미국, 최초로 동물유전자 이식에 성공
➡️1973년 소련 반체제 물리학자 사하로프가 기자회견을 통해 "다수의 반체제인사가 정신병원에 격리돼 약물투약으로 지적능력이 위험해지고 있다"고 폭로
*2020년 요즘,
독일 정부 "#푸틴 정적 #나발니, 러시아 생화학 무기에 중독돼"
혼수상태로 독일 병원으로 옮겨진 러시아의 반체제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가 신경작용제인 ‘노비촉'에 중독됐다는 독일 정부의 발표에 러시아가 "독일과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독일 정부는 이날 독일 연방군 연구소의 검사 결과 나발니가 신경작용제인 노비촉(Novichok)에 중독됐다는 '명백한 증거'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노비촉은 러시아에서 개발한 생화학무기로 매우 강력한 독성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대표적인 정적으로 꼽히는 나발니는 지난달 20일 러시아 국내선 기내에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나발니 측은 독극물에 중독된 것이라고 주장했고, 나발니는 독일의 시민단체가 보낸 항공편을 통해 지난달 22일 베를린에 도착해 샤리테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노비촉은 2018년 초 영국에서 발생한 전직 러시아 이중간첩 독살 미수 사건에 사용된 물질로 영국 솔즈베리의 쇼핑몰에서 러시아 출신 이중간첩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 율리야가 노비촉 중독 중세로 쓰러졌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진 바 있다.
➡️1970년 잠비아서 제3회 비동맹제국 수뇌회의 개막
➡️1966년 MRA(Moral Re-Armament) 아시아대회 서울서 개막
➡️1958년 국제올림픽위원회, 올림픽서 중공 제외를 발표
➡️1955년 아데나워 서독 수상, 2차대전 후 처음으로 소련 방문
➡️1954년 동남아 반공군사동맹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발족
➡️1953년 천문학자 허블 사망
허블 [Hubble, Edwin Powell, 1889.11.20~1953.9.28]
1953년 9월 8일 '우주팽창론'을 확립한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파월 허블이 사망했다. 허블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활동했으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천문학으로의 열정을 이기지 못하고 천문학에 빠져들었다. 성운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아 1914년부터는 여키스천문대에서 천체관측에 몰두했다.
1919년부터는 지름이 252cm나 되는 초대형 반사망원경을 막 설치한 윌슨山천문대의 연구원이 되어 성운을 관찰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는 이곳에서 M31과 M33 성운을 연구한 결과, 우리 은하 밖에도 수많은 '섬 우주'가 있음을 밝혀냈다.
우주가 팽창한다는 주장은 슬라이퍼 등의 천문학자들도 주장했으나, 허블은 은하들이 움직이는 속도와 거리를 집요하게 측정하여 우주의 어느 지점에서 보더라도 멀리 떨어진 천체일수록 더 빨리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른바 '허블의 법칙'을 도출하고, 우주가 팽창한다는 첫 증거를 제시했다. 그는 또한 우리 은하계가 우주의 전부가 아니며 단지 수백만 개의 이름 모를 은하의 하나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타임'의 표지인물로 장식되기도 한 허블은 1948년 팔로마산천문대에 지름 508cm 반사망원경이 설치되자, 본격적으로 우주탐사에 열중하다 이날 세상을 떠났다.
➡️1951년 대일강화조약ㆍ미일안보조약 조인
➡️1949년 뇌염으로 각급학교 휴교
➡️1949년 20세기 초 대표적인 독일의 작곡가 슈트라우스 사망
➡️1946년 불가리아 왕정 폐지 국민투표, 공화제 채택
➡️1945년 조선인민보 창간
➡️1945년 미 제24군단 인천 도착
➡️ 1944년 9월 8일 독일, V2 로켓 첫 발사
1944년 6월 12일부터 고성능의 폭탄이 무차별로 런던 곳곳을 파괴해도 영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도무지 발사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곧 독일어 ‘보복(vergeltung)’의 이니셜에서 이름을 딴 ‘V1’ 로켓인 것으로 밝혀졌다. 다행히 발사 추정지를 알아내 맹폭을 가하고 레이더와 방어장치 개선으로 요격률이 높아지면서 영국군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6200여명이 죽고 1만8000여명이나 부상한 뒤였다.영국이 비로소 V1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발표한 이틀 뒤인 9월 8일 이번에는 요격할 틈도 없이 새로운 로켓이 런던으로 날아들었다. 영국인이 ‘악마의 사자’라고 부른 장거리 로켓 ‘V2’였다. 길이 14m·중량 13t에 항속거리도 300㎞나 되는 고성능의 신무기가 음속의 3배나 되는 빠른 속도로 발사 3∼4분 만에 런던에 떨어져 영국군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종전 때까지 1360발이 발사돼 1190발이나 목표물을 맞힐 정도로 명중률도 높았다. 런던에만 500발이 떨어져 2700여명이 죽고 6500여명이 부상했다. V2 발사에도 불구하고 패색이 짙어지자 히틀러는 “4년만 더 일렀더라면…”이라며 발을 굴렀다고 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기억되는 독일의 혁신 무기 중 하나가 V2 로켓이다. 잠수함 U보트와 함께 독일 무기를 대표하는 아이콘인 V2 로켓은 복수 무기라는 의미를 가진 Vengeance Weapon의 첫 글자를 따 이름 붙여진 세계 최초의 탄두 미사일이다.
그 당시 폭격의 개념은 폭격기가 다량의 폭탄을 싫고 적진으로 날아가 타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톤 가량의 폭탄이 탄두에 탑재된 V2가 음속의 4배가 넘는 시속 5,760km로 330km 떨어진 도시 및 적진까지 스스로 날아가 떨어진다는 것은 전력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큰 충격을 줄 수 있었다. 실제로 V2 로켓은 벨기에에서 6분 만에 날라가 영국의 심장인 런던을 초토화시킬 수 있을 만큼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1942년 일제, 금속 회수령 공포
▶️ 1941년 독일군, 소련 레닌그라드 900일 포위개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오늘 나치스 독일군의 기나긴 레닌그라드 포위가 시작된다.
레닌그라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당시 이름이다.
독일군은 이날부터 1944년 1월 18일까지 무려 900일 동안 레닌그라드를 둘러싼 채 공격을 계속했다. 육상은 물론 인접한 라도가(Ladoga)호수의 수상 통로도 완전히 차단해 모든 물자의 수송을 끊었다.
소련 붉은군대는 1943년 1월 12일에야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해 엿새 만에 라도가 호수 쪽의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이듬해인 44년 1월에야 독일군들을 이 도시로부터 멀리 쫓아낼 수 있었다.
소련 정부는 9백일 동안 레닌그라드 시민과 군인 67만여 명이 굶어죽거나 동사했다고 발표했다.
이보다 훨씬 많은 150만여 명이 숨졌다는 비공식 집계도 나왔다.
소련 정부는 독일군에 맞서 싸워 주권을 지킨 레닌그라드에 '영웅도시'라는 호칭을 내렸다.
레닌그라드 포위전(Siege of Leningrad) 혹은 레닌그라드 봉쇄(Leningrad Blockade)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중 하나이다.
독일군은 소비에트 연방 제2의 대도시 레닌그라드를 900일 가까이 포위하였으나, 레닌그라드는 포위를 견뎌내어 훗날 스탈린에게서 영웅도시라는 칭호를 받는다. 기아 및 포격전으로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생겼는데, 소련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67만 명, 일설에는 100만 명 이상의 시민이 사망했다고 한다.
독일군의 침공
레닌그라드는 1939년 당시 인구 319만 명을 보유한 소련 내 제2의 대도시였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였고, 히틀러는 3개의 집단군 중 하나인 북부집단군에게 레닌그라드 점령 혹은 파괴를 지시했다. 독일과 소련 국경 부근에 배치된 소련군은 순식간에 패배했고, 독일군은 단기간에 발트 3국을 지나 레닌그라드 전면에 육박했다.
6월 27일 레닌그라드의 노동자 평의회에서는 시민을 방어 시설 건설 공사에 동원하기로 결정한다. 독일군의 내습까지 완성된 방어 시설은 목재 장애물 190킬로미터, 철조망 635킬로미터, 대전차호 700킬로미터, 토치카 5,000개소, 참호 25,000킬로미터에 이르렀다.
이때 독일의 동맹국인 핀란드가 6월 26일 소련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고, 겨울 작전 시 소련에게 빼앗겼던 카렐리아 지방에 침공했다. 핀란드군은 9월 7일까지 레닌그라드 북쪽 160킬로미터까지 도달하였으나, 겨울 전쟁 이전 국경선을 넘어 전진하는 것은 멈추었다. 9월 4일 요들은 핀란드군 총사령관 만네르하임을 만나 레닌그라드에 대한 공격을 요청했으나, 만네르하임은 이를 거절했다. 그 뒤에도 독일군과 핀란드군과의 연계는 완성되지 않았다.
독일군의 빠른 진격과 소련 측의 혼란 때문에 레닌그라드 시민의 소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8월 30일 독일군은 네바 강에 도달하였고, 레닌그라드로 통하는 최후의 철도선을 차단시켰다. 9월 4일 시내에 대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9월 8일 독일군은 라도가 호수에 도달하였고, 이윽고 라도가 호수 위를 통하는 경로를 제외한 모든 연결선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같은 날 공습을 받아 시내 178개 장소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된 주코프가 급히 만들었지만 뛰어난 방어 진지를 구축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시가지에 대한 침공은 피하고 포위에 나섰고, 10월 7일 히틀러가 발령한 지령에는 일절 항복을 받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포위전
연결선의 차단으로 인해 레닌그라드에 대한 보급은 완전히 끊어졌다. 9월 2일 시민에 대한 식량 배급이 줄어들면서 육체노동자는 하루 빵 600그램, 노동자는 400그램, 그밖에 시민과 아이는 300그램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9월 8일 공습을 받아 상당량의 곡물과 유지(乳脂), 설탕이 소실되었다. 9월 12일 식량의 남은 양은 아래와 같이 계산되었다.
- 곡물, 밀가루 35일분
- 귀리, 분말 30일분
- 육류, 가축 33일분
- 유지 45일분
- 설탕·과자류 60일분
같은 날 배급은 다시 조정되어 육체노동자는 하루 빵 500그램, 노동자와 아이는 300그램, 기타 시민은 250그램으로 바뀌었다. 육군과 발트 함대는 비축분을 갖고 있었으나 충분하지 못했다. 라도가 호수에 배치된 함대는 장비도 충분치 못했고, 여러 차례 독일군의 공습을 받아 9월에는 곡물 수송선이 격침되었다. 수송선은 나중에 인양되었고, 배에서 발견된 부패한 곡물도 빵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소맥분을 전부 사용한 후에는 셀룰로오스와 톱밥, 목화씨까지 식용으로 사용하였다. 말의 사료용이었던 귀리도 식용으로 돌렸다. 육류도 떨어지자, 내장 및 가죽도 요리하였다. 시내의 빈 공터에는 양배추 등의 야채를 심었다.
9월 말에는 석유와 석탄도 떨어졌다. 유일하게 쓸 수 있는 연료는 나무였다. 10월 8일 도시의 북쪽에 있던 삼림에서 목재의 채벌이 계획되었으나, 기재도 작업 시설도 없어 10월 24일까지 목재 채벌 계획의 1%만이 실시되었다. 전력 공급도 부족해져, 전력 사용은 군 사령부 및 지역 위원회, 방공 거점 등을 제외하고는 전부 금지되었다. 대부분의 공장이 작업을 중지하고, 11월에는 모든 공공 교통 기관이 통행을 정지했다. 1942년 봄에는 일부 노면 전차가 운행을 재개했으나, 트롤리버스와 버스는 종전까지 재개하지 않았다.
겨울이 가까이 오자, 사람들이 굶어 죽기 시작하였다. 식물학자 니콜라이 바비로프의 연구원 중 1명은 식용에 쓰일 수 있었던 20만 종의 식물 종자 수집품을 지키다가 아사했다. 레닌그라드 외곽에는 굶주림과 추위로 죽은 희생자의 시체가 넘쳐났다. 이윽고 식료가 끊어진 도시에서는 사체에서 채집한 인육을 먹는 처참한 상황이 일상화되었다. 인육을 파는 상점까지 나타나 사람들은 이것을 먹었다.
11월 20일 라도가 호수가 얼어붙자 말이 끄는 수송 부대가 얼음 위를 통과하여 레닌그라드에 물자를 수송하였다. 그 후 트럭에 의한 수송도 가능하게 되었고, 얼음 위의 연결로를 “생명의 길”(러시아어:Дорога жизни)이라고 불렀다. 호수의 맞은편에서 시내로 물자가 운반되면서 시민의 탈출도 가능하게 되었다. 생명의 길은 1942년 4월 24일까지 152일간 이용되었다. 그 기간 동안 시민 514,000명과 부상한 병사 35,000명이 레닌그라드에서 탈출하였고, 중요한 산업 설비도 운반되었다. 생명의 길은 대공포와 전투기로 방어하였으나, 독일군의 포격과 공습으로 위협이 계속되어 위험은 지극히 높았다. 트럭 운전수들은 이곳을 “죽음의 길”이라고도 불렀다.
1942년 여름에는 라도가 호수 밑바닥으로 29킬로미터의 석유 파이프라인인 “생명의 동맥”이 건설되었다. 겨울이 되어 호수가 얼자, 생명의 길은 다시 열렸다. 12월 20일부터는 말의 왕래가 시작되었고, 4일 후에는 자동차를 이용한 수송도 시작되었다. 빙상 철도의 건설도 이루어졌다.
1943년 1월 12일 라도가 호수 남쪽 부근에 있던 소련군의 반격 작전이 개시되어, 1월 18일 레닌그라드를 연결하는 육상 루트가 확보되었다. 그 후에도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에게 부분적으로 포위되어 폭격과 포격을 받았으나, 1944년 1월 소련군의 공세로 인해 독일군이 철수하자 포위는 완전히 풀렸다. 1944년 여름에는 핀란드군도 개전 시의 위치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영향
독소전의 개시부터 몇 주간 소련군의 패퇴는 연합국 사람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었으나, 레닌그라드의 저항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레닌그라드에 1945년 스탈린은 영웅도시의 칭호를 부여하였다.
포위전의 희생자의 수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다. 전후 소련 정부에 의한 공식 발표는 사망자 67만 명이라고 하였으나, 다른 연구에서는 사망자 70만 명에서 150만 명, 다수설로는 111만 명 정도라는 추산치가 나왔다. 희생자의 다수는 피스카료프 기념 묘지에 매장되었다.
포위전의 기억은 시민들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민들은 그때까지 레닌그라드가 문화 도시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포위 속에서 도서관의 장서 및 18세기 골동품 가구를 불태우거나, 그렇지 않으면 얼어 죽어야 한다는 선택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한편 레닌그라드가 900일 가까이 저항을 계속하였기에 “트로이도 함락되었고, 로마도 함락되었으나,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다.”라는 것은 시민들의 새로운 자랑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레닌그라드 시내에는 독일군의 포격을 피하기 위해 설치된 표식이 수복되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1939년 독일군, 바르샤바에 침공
➡️1934년 독립운동가 양세봉 순국
➡️1920년 뉴욕-샌프란시스코간 미대륙횡단 항공우편 개시
➡️1920년 한국 근.현대문학을 정립한 문학평론가 조연현 출생
➡️1904년 디어도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 당선
➡️1904년 소설가 계용묵 출생
▶️ 1841년 오늘,
체코 작곡가 #드보르작 출생
9번교향곡'신세계로 부터'
https://youtu.be/mJjk7vbVaOY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