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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님께 !
우리아파트 뒤에
익산영등시민공원이 있거든요
그곳에 인라인트랙을 잘만들어
놓았어요
여름한철이용하는것같아요...
저는 사계절이용하거든요
인라인배운지는 20여년되거든요
눈비만 오지않으면
탈수있어요
무릎에 부하가 덜걸리지요
하체운동으로는 좋아요
인라인트랙이 300m 가 조금넘거든요
첫눈내린다음날 담아놓은 영상입니다
심심풀이로 봐주세요...
배경음악 :10월의 어느멋진날에
악 기 :소프라노색소폰
연 주 자 :최병춘 (皓齒)
배경음악 : 봄처녀
악 기 : 소프라노색소폰
연 주 자 : 최병춘
배경음악 : 남몰래흘리는 눈물
악 기 : 소프라노색소폰
연 주 자 : 최병춘(皓齒)
송년회때 연주할 곡입니다
지금 연습중이거든요...
심심풀이로 들어주세요.....
다른 표기 언어 (Domenico) Gaetano (Maria) Donizetti
출생 | 1797. 11. 29, 알프스 남부 치살핀 공화국 베르가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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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48. 4. 8, 베르가모(죽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하나인 롬바르디아 공국에 속함) |
국적 | 이탈리아 |
요약 많은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오페라를 작곡하여, 로시니와 베르디를 연결하는 오페라의 발전에 다리를 놓았다. 그의 오페라 세리아에는 독특한 극적 중량감과 감정적 내용이 잘 표현되고 있으며, 희가극에서도 특유의 재치와 명랑함이 돋보인다. 전당포 관리인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나 볼로냐에 있는 리체오 필라르모니코 음악원에서 푸가와 대위법을 공부했다. 평생 큰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인기는 19세기까지는 계속되었지만, 1914년경부터 베르디와 리하르트 바그너의 걸작들의 빛에 가려져 연주 레퍼토리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1950년대에 와서 도니체티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게 되었고, 이후 〈람메르무어의 루차〉·〈사랑의 묘약〉·〈돈 파스콸레〉와 같은 몇몇 오페라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사랑을 널리 받고 있다.
그가 작곡한 많은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오페라는 로시니와 베르디를 연결하는 오페라의 발전에 다리를 놓았다.
작품들 중 특히 〈람메르무어의 루차 Lucia di Lammermoor〉(1835)·〈연대의 딸 La fille du régiment〉(1840)·〈라 파보리테 La favorite〉(1840) 등이 유명하다. 그의 오페라세리아(:비극적 혹은 기타 진지한 주제에 의한 이탈리아 정통 오페라)에는 독특한 극적 중량감과 감정적 내용이 잘 표현되고 있으며, 희가극에서도 특유의 재치와 명랑함이 돋보인다.
시(市) 전당포 관리인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나 바이에른의 신부 요한네스 지몬 마이어(베르가모의 주요한 성당인 산타마리아 마지오레의 음악감독이자 성공적인 오페라 작곡가)에게 음악을 처음 배웠다.
합창단원으로서는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그의 잠재된 음악 재능을 높이 산 마이어 신부가 그를 볼로냐에 있는 리체오 필라르모니코 음악원에 입학시켰다. 이곳에서 푸가와 대위법을 철저히 공부했으며, 아버지의 소원대로 교회음악 작곡가가 되기 위해 상당히 많은 양의 종교음악을 작곡해보기도 했지만 천성은 오페라 등 극음악에 적합했다.
최초의 성공작은 〈보르고냐의 엔리코 Enrico di Borgogna〉로 1818년 베네치아의 테아트로 산 루카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이후 12년 동안 작곡한 31개가 넘는 오페라들은 대부분 나폴리에서 공연되었는데 현재 거의 공연되지 않는 상태이다.
1830년 〈안나 볼레나 Anna Bolena〉를 밀라노에서 공연함으로써 전 유럽 도시와 이후 대서양을 넘어 미국에까지 그의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년 후 그는 당시 최대의 극작가 펠리체 로마니의 대본에 의한 매력적인 희가극 〈사랑의 묘약 L'elisir d'amore〉으로 또한번 대성공을 거두었다.
역시 로마니가 대본을 쓴 〈루크레차 보르자 Lucrezia Borgia〉(1833)가 또다시 성공하면서 밀라노의 라 스칼라 가극장 등 이탈리아 여러 곳에서 명성을 굳혔다.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와 벨리니가 그보다 먼저 파리로 간 것처럼 그 역시 이탈리아에서 성공한 후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공연한 〈마리노 팔리에로 Marino Faliero〉는 실패작은 아니었지만 몇 주 전에 발표된 벨리니의 〈청교도 I Puritani〉로 인해 그늘에 가린 감이 없지 않다. 이후 그는 뛰어난 비극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차〉(1835. 9. 26)를 작곡하기 위해 나폴리로 돌아갔다.
1828년 로마의 한 친한 친구의 누이 비르지니아 바셀리와 결혼했고, 나폴리에서 가정을 꾸몄다.
1837년 그녀가 아들을 사산하고 죽자 아내를 무척 사랑했던 그는 평생 동안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명의 자식이 태어났으나 1명도 살아 남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가족들의 사인은 매독이었는데, 이 병은 훗날 도니체티에게도 죽음을 가져다주었다.
도니체티는 나폴리에서 계속 작품활동을 하다가 1838년 시 검열관들이 〈폴리우토 Poliuto〉의 공연을 금지하자(그리스도교 순교를 다룬 이 작품은 종교적 주제가 공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금지되었음) 다시 파리로 갔다.
파리는 벨리니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로시니가 은퇴한 후였기 때문에, 도니체티에게 있어 좀더 활동하기 쉬운 무대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몇 가지 성공작을 재공연했지만 빅토르 위고의 희곡에 바탕을 둔 오페라 〈루크레차 보르자〉는 위고의 반대로 공연되지 못했다. 〈폴리우토〉는 외젠 스크리브의 프랑스 대본으로 〈순교자 Les Martyrs〉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었고, 이보다 2개월 앞서 오페라 코미크 〈연대의 딸〉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 작품의 인기는 수년 동안 계속되었고, 예뉘 린드, 아델리나 파티, 마르첼라 젬브리히, 엠마 알바니 등 당시의 뛰어난 소프라노 가수들이 주역을 맡았다. 같은 해에 파리 오페라 극장은 도니체티의 첫 그랑 오페라 〈라 파보리테〉를 공연했다.
〈마리아 파디야 Maria Padilla〉는 도니체티의 동료이자 제자였던 바르톨로메오 메렐리가 라 스칼라 가극장과 빈의 케른트네르토르 극장의 감독으로 일하면서 후원한 작품이며, 1841년 베르디의 〈나부코 Nabucco〉가 초연되기 불과 몇 주 전에 공연되었다. 역시 메렐리가 빈의 케른트네르토르 극장에서 공연할 생각으로 후원한 〈샤모니의 린다 Linda di Chamounix〉는 1842년에 공연되었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황후에게 헌정되었다.
이미 오스트리아 총리 메테르니히의 소개로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관심을 끌고 있던 상태였고, 로시니의 〈슬픈 성모 Stabat Mater〉를 황제 앞에서 지휘한 적도 있었던 도니체티는 이제 오스트리아의 궁정 작곡가로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이 자리에 있으면서 그는 1년 중 6개월을 빈에서 보내고 나머지 6개월은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궁정작곡가로 임명되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그는 로시니로부터 볼로냐에 있는 리체오 필라모니코 음악원의 원장직을 의뢰받았으나,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해 자신이 좋아하는 오페라 창작작업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로시니는 파리에서 언제나 도니체티의 인기를 북돋워주었고, 볼로냐에서 자신이 작곡한 〈슬픈 성모〉를 초연하도록 했다.
도니체티는 파리로 돌아와 테아트르 이탈리앵 극장에서 흥겹고 재치넘치는 희가극 〈돈 파스콸레 Don Pasquale〉를 공연했다.
그러나 도니체티는 이미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있었다.
1843년에 스크리브의 대본으로 만든 최후의 걸작 오페라인 〈동 세바스티앙 Dom Sébastien〉이 파리 오페라단에서 공연되던 당시에 이미 만성 두통과 이따금의 정신발작증으로 시달리던 상태였다. 그는 갑자기 늙어갔고 빼어난 용모와 마음의 평정도 잃었다. 〈동 세바스티앙〉은 신문에 의해 시시한 작품으로 평가되었지만 실제로 오페라 청중에겐 성공적인 호응을 얻었다.
나머지 생애 동안 그는 절망적인 정신착란의 늪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그는 파리 근처의 개인 정신병원에 환자로 입원해 있으면서, 프랑스 경찰과 의사들을 애먹였다. 결국 그의 조카 안드레아(맏형의 아들)가 그를 고향 베르가모로 데려왔고, 그곳에서 삶을 연명하다가 1848년 4월 8일 죽었다. 그는 의지력·언어능력·신체조절능력이 상실된 채 대개의 매독환자처럼 정신발작 후유증의 제물이 되었다. 벨리니와는 달리 다른 작곡가들의 성공을 시기하는 법이 없이 언제나 넓은 아량을 지녔던 명랑하고 잘생긴 그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한 최후였다.
그는 프랑스의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주르날 데 데바 Le Journal des Débats〉지에 자신의 음악에 대해 혹독한 평론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빈으로 떠난다고 하자 아주 기꺼이 총리 메테르니히 앞으로 소개장을 써줄 정도로 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도니체티는 언제나 평론가들보다는 청중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평생 동안 그가 거둔 성공은 대단한 것이었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을 받았다. 도니체티의 인기는 19세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1914년경부터 베르디와 리하르트 바그너의 걸작들의 빛에 가려져 그의 오페라는 연주 레퍼토리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1950년대에 와서 도니체티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게 되었고, 이후 〈람메르무어의 루차〉·〈사랑의 묘약〉·〈돈 파스콸레〉와 같은 몇몇 오페라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사랑을 널리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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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경은 보기좋지만...
나무들은 무거워서 가지가 부러지곤합니다...
설경 멋져요. 인라인도사군요. 그서 근육맨이셨구나. 인라인도 하시고 신세대세요 ㅎㅎ
이렇게 연주를 다양하게 잘하시니 얼마나 좋을까!
'10월의 어느 멋진날에' 결혼 축하곡으로 참 좋더라구요
연주들으며 저도 곡을 익혀야겠어요. 감사합니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제목을 모르고 귀에 많이 익은 곡이었는데 새삼 알게되었어요.
열심히 연습해서 멋진 송년회 빛내시고 더 훌륭한 곡 들려주세요
예!
남몰래흘리는눈물은2015년 송년회때
연주했어요...
전마클홈피에. 처음올렸던영상입니다.
전주역에서 아중방면 우측에. 웨딩홀에서
연주했는데요...
결혼식하는. 홀에서 연주자는 신랑입장하는거와같게 걸어나와서연주하는데요.
조명이 좋더군요...
심심풀이로. 한번더. 올려드릴께요.
지금이곳은. 경남밀양입니다.
새벽에 출발해서.화물하차하고.
댓글달고있어요.
집에 도착하면 볼만한영상 올려드릴께요
. 우송님 즐거운하루되세요!!
어머 그리 멀리 다니시고 항상 안전운전 하시길 빌겠습니다.
'라온웨딩센타' 최근 저도 다녀왔어요 ㅎㅎ
연주자도 신랑과 같이 선망의 대상자군요
멋지네요.
옛날에 모습 보다
젊어졌나요.
68세니.많이삭었어요ㅋ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