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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강해 제 2장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 가정
사무엘의 출생 언급에 이어 사무엘의 영적 우수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본장은 세 단락으로 나누는데 먼저, 한나의 찬양, 두 번째로 사무엘의 경건성, 세 번째는 사무엘과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의 모습을 날카롭게 대조시킨다. 한나의 찬양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의 주권자가 되시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새로운 왕의 출현을 예고하고, 장차 이스라엘 왕을 세우는 중요한 임무를 사무엘이 맡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동시에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경건한 사무엘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다는 것과, 장차 엘리 제사장의 가문은 멸망할 것이지만 대신 사무엘이 새롭게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엘리 가문과 사무엘을 대조시킴으로 사무엘의 소명이 지극히 당연함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1. 한나의 찬양 (2:1-10절)
한나의 노래는 단순한 감사, 찬양을 넘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우주적인 메시야의 통치를 언급하는 구속사적 대 예언시라 할 수 있다. 1-8절에 한나는 경제, 출산, 신분 등과 같은 개인적인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노래한다. 이어서 9-10절에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이상적인 지상 왕국이 건설될 것을 노래한다. 이것은 머지않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왕이 세워질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지상 왕국을 건설하는 주역이 바로 사무엘이라는 것이다.
한나의 찬가는 ‘내 마음이’로부터 시작하여 ‘뿔을 높이시리로다.’까지 이어진다. 한나는 진정 마음이 슬픈 여자였다.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를 기억하셨고 아들을 주셨으며, 그 아들을 서원한 대로 여호와께 드린 후에 한나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내적 감정을 토로한 이 기도는 단순한 감사의 찬양을 넘어 예언적이고 구속사적 성격을 띤 찬양의 노래요, 성령의 감화로 된 시였다. 따라서 이 노래는 기도라기보다는 차라리 주께 대한 감사의 증거요, 주의 영광의 계시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외에 ‘찬가’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한나의 기도의 특성은 세 가지이다.
첫째, 개인적인 은혜의 체험으로부터 시작하여 장차 신적 경륜 하에 진행될 신정 국가 역사로 확대 발전한다.
둘째, 현세적인 은혜와 구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장차 그리스도의 나라와 교회의 승리를 예언하는 미래적 영역으로 확대 발전한다.
셋째, 구약의 ‘교회의 송가’라고 불리는 이 노래는 후일 ‘마리아 찬가’의 예표가 되며 ‘사가랴의 예언’의 배경이 된다.
한나는 3중 대구법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자신에게 베풀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벅찬 감격으로 표현하는데 기도의 응답으로 사무엘이 출생하자 그녀의 마음은 괴로움과 슬픔에서 즐거움과 기쁨으로 바뀌었다. 먼지 가운데 짓밟혔던 그녀의 뿔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입은 처량한 신세에서 원수를 향하여 다시 열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마음껏 알릴 수 있었다.
한나는 이 세 가지 감격과 희열이 ‘주의 구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한나가 표현하는 ‘구원 즉 ’예수아‘는 일차적으로는 무자할 때 당한 수모와 멸시로부터 구원이겠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속사적 의의 즉 사무엘을 통한 타락한 종교적 상황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이며,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류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한나는 먼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인 ‘거룩’에 대해 찬송한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한 이가 없으시니.’ ‘거룩’이라는 말 ‘코데쉬’는 단순한 도덕적, 윤리적으로 온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절대 완전성과 절대 구별성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한나의 두 번째 찬송은 하나님의 절대 존재성, 곧 유일성이다.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이 유일성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속성이며 거룩의 근거이다. 당시 이방신을 겸하여 섬기는 사사 시대 말기의 타락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고백한 한나의 신앙은 놀라운 것이었다.
*시86:10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마지막 찬양은 하나님의 신실성이다.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반석’이라는 말은 언제나 변함없이 성도의 구원을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상징적 명칭이다. 이 반석은 급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언제나 가장 손쉽게 피할 수 있는 도피처요 안식처인 것이다.
한나는 악인의 경솔한 처사를 꾸짖고 있는데 그들의 교만한 말과 오만한 말을 책망하였다. 브닌나는 하나님의 심오한 경륜과 섭리를 무시한 채 자신의 소견대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멸시하며 자신을 높였던 것이다. 브닌나의 이러한 교만과 오만은 마음이 슬픈 여자를 더욱 짓밟으며,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의 심령에 못을 박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고 훼방했기 때문에 마땅히 금지되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나는 그러한 악인들에게 경고장을 날리며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악인의 행동을 저울에 달아보신다고 한 것이다. ‘지식의 하나님’이라는 말 ‘엘 데오트’는 하나님의 전지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연 법칙과 인간 사회의 이성적 법칙, 그 법칙에 의해 벌어지는 원인, 과정, 결과까지 완전히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전지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행동과 내면까지 철저히 파악하고 판단하고 계시는 것이다. 브닌나는 한나가 불임한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오판하여 그녀를 얕잡아 보고 격동시켰으며, 그 승리에 도취되어 교만하고 오만한 말을 발설했지만 하나님은 공평하고 의로운 기준에 따라 그녀를 판단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그리고 악인의 심판에 대해 노래한 한나는 세 번째로 4-8절까지 인간의 흥망성쇠를 홀로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해 찬양한다.
첫째,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노래한다.
고대 사회에서 ‘용사의 활’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자 무기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귀중하게 생각하는 신뢰의 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그 용사의 활이 꺾였다는 것은 사람이나 국가가 철저히 붕괴되어 도저히 회생이 불가한 상태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자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완전히 쇠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힘이 없고 연약하여 힘센 악인들과 용사들에게 무참히도 짓밟혔던 넘어진 자들은 이제 힘으로 띠를 띠는데 즉 이제 일어나 전쟁을 준비하고 출전할 수 있는 자신의 힘을 회복하고 활기차고 강건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찬양한다.
호구지책으로 품을 팔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참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다. 반대로 먹을 것이 많음으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고 만홀히 여기던 유족하던 자들은 때가 되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될 것이며, 반대로 지금은 비록 가난하지만 하나님께 신실한 자는 마침내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유족한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을 가리킨다.
셋째, 무자했던 여인의 겸손과 다산으로 교만했던 여인을 비교하여 노래한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한나 자신이 체험한 기쁜 감격을 노래한 것이며, 특별히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녀 출산과 관련해서 한나가 받아 누린 하나님의 최대 축복을 상징하는 것이다. 비록 사무엘 한 명을 낳았지만 이 아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살핌 가운데서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마치 ‘일곱 아들’을 낳은 듯한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반대로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다.’고 했는데 이는 브닌나에 대한 언급이다. 브닌나는 한나가 아들을 낳음에 따라 더 이상 교만한 말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첩의 신분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사라졌고 쇠약해진 것은 틀림이 없다.
넷째, 인간의 생사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한다.
동의적 대구법을 사용하여 동일한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데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이 두 가지 내용은 사실상 동일한 것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하여 언급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생사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하고 있다.
*신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시30: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다섯째, 인간의 빈부, 귀천의 문제에 대해 전적으로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으로 빈부나 귀천을 전적으로 주장하시는 분임을 증거한다. 한나는 극도의 수치와 천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진토’ ‘거름더미’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비천한 자들을 일으켜 세워서 영화로운 면류관을 씌워 주시는 것이다, 실례로 모세나 요셉, 다윗과 같은 인물들은 노예 상태에서 귀족으로, 궁궐로 인도하셨고, 보잘 것 없는 목자의 지팡이 대신 영광스러운 왕의 홀을 쥐어 주셨던 것이다.
여섯째,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한다.
땅의 기둥들‘이라는 말은 거대한 산이나 바위를 뜻하는 것으로 히브리인들은 이것을 땅의 초석으로 생각하였다. 그 초석을 놓으신 분이 여호와시오 또 관리하는 분도 여호와이시다. 이것은 우주 만물에 대한 여호와의 절대 주권을 나타내는 말로 곧 여호와께서 이 세상 만물에 주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음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기초를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 기초 위에 만물을 조성하셨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두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감이라.‘고 하였다.
일곱째, 거룩한 자를 지키시고 대적하는 자를 심판하시는 재판관이신 여호와를 찬양한다.
‘거룩한 자’라는 말은 ‘경건한 자’를 의미하는데 신분상의 의인이 아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윤리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경건한 자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표현으로 ‘실족’ ‘넘어짐’은 곧 패배나 타락을 상징하는 말이다. 따라서 발을 지킨다는 것은 모든 패배나 타락으로부터 안전한 보호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의인들을 핍박하고 억압하는 악인들은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는데 흑암은 음부나 죽음을 상징하며, 잠잠하게 한다는 것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영원한 흑암에 가두시는 표현이다. 이는 악행자들에게 죽음 또는 멸망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진다고 하였다. ‘대적’이라는 말 ‘라야브’는 법정 용어로서 자신의 무죄를 강력히 항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대적한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그를 향하여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교만함을 말하는 것이다. 교만한 자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은 ‘산산이 깨어지는 것’인데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신다고 하였다. ‘우레’는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현현이지만, 원수들에게는 징벌이나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세에 한 왕을 세우실 것이며 이는 일차적으로 다윗 왕으로 나타낸다. 그 왕은 땅 끝까지 하나님의 심판을 베풀 것인데 다윗을 통해 이방 세력을 정복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통하여 사탄의 모든 세력을 꺾은 후 하나님 나라의 의로 통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실 것인데 일차적으로는 다윗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시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왕의 권위를 높이시는데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는 한나 자신의 뿔이 높아지기를 노래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즉 왕의 강성은 온 백성의 안정과 번영, 그리고 윤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나의 기도, 찬양은 메시야적 사상을 담고 있는 복음적인 예언의 노래요, 성령의 감화송인 것이다.
2. 타락한 엘리의 두 아들과 경건한 사무엘 (2:11-26절)
절대 헌신과 절대 성결을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할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이 오히려 영적 도덕적으로 지극히 타락했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이와 함께 사무엘의 경건한 측면들을 보여 줌으로써 아론의 후손들로 이어가야 할 제사장 직분이 레위 자손인 사무엘에게 승계되는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무엘을 성전에 맡기고 엘가나 가족은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아이는 성소에 남아 여호와를 섬겼는데 ‘섬기다’라는 말 ‘솨라트’는 특별히 제사장적 직분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 아이는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는데 이는 엘리 제사장의 감독 하에서 제사장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양육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로서 ‘베네 벨리야알’이라는 말은 ‘벨리알의 아들들’이다. 곧 사악한 자들, 쓸모없는 자들이라는 의미로 이는 홉니와 비느하스는 사람들이 보기에 사악했으며 하나님 보시기에도 전적으로 백해무익한 존재였다는 것을 가리킨다. 거기에다 제사장 엘리는 자신의 판단력 부족으로 경건한 한나를 불량한 여자로 보았고, 반대로 불량한 아들들을 관대하게 대했던 것이다. 엘리의 아들들은 당시 제사장들이었지만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고 했는데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결국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대적하는 사탄적인 행위를 했던 것이다.
엘리의 두 아들이 제사장으로서 저질렀던 죄악 즉 제사장에게 보장된 법적 권한을 뛰어 넘어 월권을 행한 내용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제물을 강제로 취하여 자기의 사리사욕을 취함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맺은 언약과 구속의 제사 제도를 파괴하고 어지럽힌 신성 모독이라는 심각한 죄를 범했던 것이다.
여기 ‘제사’는 화목제를 말하는데 제물 중 기름 부분을 번제단에 태우고 고기는 제사장과 제주가 나누어 가지게 되어 있다. 이 고기는 삶아서 제사장과 제주에게 각각 율법에 정한 대로 지정한 몫을 분배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제주에게 돌아갈 몫까지 침범하는 죄를 범한 것이다. 레위기에는 제사장은 제물의 가슴과 오른쪽 넓적다리를 취할 수 있고, 신명기에는 앞 넓적다리와 어깨 부분, 두 볼, 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환들을 보내어 솥에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모두 자신들이 취한 것이다. 이것은 율법을 무시한 망령된 행위였다.
뿐만 아니라 희생 제물의 기름은 번제단 위에서 반드시 태워 여호와께 바쳐야 하는데 규정을 무시하고 기름을 태우기 전에 날고기를 가져감으로 율법의 절차와 규정을 정면 부인하고 무시하는 극악한 범죄 행위를 저질렀던 것이다. 제사장의 횡포에 오히려 제주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원칙을 설명하고 기름을 태운 후에는 제주들의 몫까지 포기할 것을 요구했으나 저들은 강제로 고기를 빼앗아 자신들의 탐욕을 채웠다. 이들의 죄악은 제물을 탈취한 강도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언약의 파괴와 제사 제도를 멸시하고 파괴한 신성 모독죄인 것이다. 실로 이러한 성소의 타락상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새로운 지도가가 요청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자한 엘리 자식들의 행동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어린 사무엘은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경건한 봉사를 하였다. 이는 엘리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새로운 지도자 사무엘을 통한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에봇’은 일종의 앞치마로서 조끼 모양으로 생겼는데 제일 겉에 입는 공식 제사 복장이다. 대제사장의 에봇은 갖가지 아름다운 실로 수놓아진 화려한 것이었으나 일반 제사장의 에봇은 단순한 흰색의 ‘세마포 에봇’이다. 사무엘이 에봇을 입었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제사 직무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한나는 매년제를 드리러 성소에 올라갈 때마다 사무엘에게 작은 겉옷을 지어 입혔는데 ‘겉옷’은 머리와 팔 부분만 구멍을 내고 땅에 끌릴 정도로 길게 만든 옷이다. 이러한 겉옷은 왕과 제사장을 비롯하여 일반 평민들까지 입는 보편적인 옷이다. 다만 제사장들은 이 겉옷 위에 에봇을 걸친 것이다. 사무엘이 비록 하나님께 영원히 바쳐졌으나 가족들의 인연까지 단절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엘리가 엘가나와 한나를 축복하였는데 이는 한나의 바램에 대한 엘리의 응답으로 볼 수 있다. 한나는 당시에 ‘당신에게 은혜 입기를 원한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엘리의 응답은 한나가 서원한 것을 변하지 않고 귀한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의 성소에 바친 그녀의 신실성에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우러나온 제사장적 축복이었다. 이 축복 속에는 사무엘을 바친 한나에게 다른 자녀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엘리의 배려가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라고 했는데 이 말은 ‘권고하다’ ‘방문하다.’라는 의미로 이 방문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방문한 것이 아니라 늘 염두에 두고 있다가 때가 이르러 방문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결과 한나는 사무엘 외에 3남 2녀를 더 잉태하게 되었는데 불임과 무자에 시달린 설음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위로와 풍성한 축복이었다. 동시에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란다.’고 했는데 이는 육체적 성장뿐만 아니라 영적 성숙도 아울러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엘리가 매우 늙었으며 이때 엘리의 나이는 98세였다고 전승에 전한다. 이렇게 많은 나이는 자식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기에 충분하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물에 대한 범죄 외에도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죄를 저질렀는데 성소 내에서 일정한 직무를 부여받았던 헌신된 여인들과 비합법적인 성관계를 가졌던 것이다. 물론 이들을 강간한 것은 아니었고 쌍방이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이방 민족의 음란한 제의 풍습이 이스라엘 제사장 사회까지 깊숙이 침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악행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때까지 계속된 듯하다.
*왕하23:7 또 여호와의 성전 가운데 남창의 집을 헐었으니 그곳은 여인이 아세라를 위하여 휘장을 짜는 처소였더라.
엘리 대제사장은 너무나 늙어서 말로 자식들을 훈계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그 책망조차도 엄격하지 못하고 유약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타락과 방종의 길을 걷고 있는 두 아들의 행위를 저지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홉니와 비느하사의 범죄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였다.
둘째, 하나님의 성소를 가볍게 여겨 성적으로 타락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셋째,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모범을 보인 것이다.
엘리는 자식들에게 책망하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하면 그를 위하여 간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자식들이 회개하도록 촉구하였으나 그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들의 완고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완악하고 타락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고 방치하셨는데 따라서 이제 그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여호와의 무서운 심판만이 있을 뿐이다. 이들과 반대로 사무엘은 여호와와 사람들에게서 더욱 은총을 받았으며, 버림받은 자와 선택받은 자를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3. 엘리 가문의 몰락 예고 (2:27-36절)
무명의 한 선지자에 의해 선포된 엘리 가문의 두려운 심판이 예언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사무엘은 본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게 된다는 사실도 예고되었다. 먼저 27-30절에 제사장 엘리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 시작된다. 그 다음으로 31-36절에 그처럼 패역한 엘리 가문에 대하여 준엄한 심판을 선고하시는데 그 결과 엘리 가문의 제사장직은 상실되고 그 가문에 속한 자들은 단명할 것이며, 궁핍한 생활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엘리 가문의 철저한 몰락을 의미하는 동시에 아론 계통을 잇는 모든 제사장들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 ‘이쉬 엘로힘’ 은 대부분 선지자라는 말과 동격으로 쓰인다. 하나님은 한 익명의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의 신진 대사를 위한 서막을 열었다.
첫째, 아론의 가문이 제사장의 거룩한 직분을 감당하게 된 내력을 말씀하신다.
엘리의 뿌리요 조상 가문인 아론의 집이 바로의 통치 하에서 노예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먼저 상기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아론의 집안도 구원하셨다는 사실과, 특별히 모세와 아론에게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심으로 장차 제사장 가문으로 삼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특별히 아론의 일가에게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베풀어졌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귀한 은혜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특별히 우림과 둠빔이 든 대제사장의 에봇을 입게 하셨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 있도록 하셨다. 또한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제사의 제물 중에서 제사장에게 일정한 분깃의 응식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레위인들의 십일조를 주어 제사장 가문은 모두 풍족했고 부유했던 것이다.
둘째, 엘리 가문의 죄악을 열거하셨다.
‘너희’라는 말은 두 아들뿐만 아니라 엘리까지도 포함된다. 저들은 제단의 예물을 발로 밟았다. 이는 희생 제물의 기름이 태워지기도 전에 두 아들이 먼저 가로챈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구속 제도를 업신여기는 사악한 범죄였다. 비록 이러한 범죄가 두 아들에게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마땅히 여호와의 전과 제사를 거룩하게 보존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엘리가 이를 방관했다는 것은 그 죄가 더욱 크다 할 것이다. 대제사장 엘리는 신본주의로 살아야 했고 성소의 규례를 지키는데 그 누구보다도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올라야 했다. 그러나 자식들의 죄를 방관하고 처벌하지 않은 것은 그가 직무를 유기한 것이며 자식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긴 인본주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고 백성들의 정성과 신앙을 강탈한 대인 범죄까지 저질렀던 것이다.
셋째, 아론의 가문을 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규정하신 하나님의 맹세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아론의 가문이 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 맹세는 아론 가문의 후손인 비느하스에 의해 갱신되었다.
*민25:12-13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네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엘리 가문도 아론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 약속에 대해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이제 이 약속은 폐기되었다. 좁은 의미로는 엘리 가문의 제사장직을 박탈하는 것이며, 넓은 의미로는 아론 가문의 제사장 직분의 권위를 약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징계는 일차적으로는 죄악과 보응이라는 측면에서 심판적 의미가 있으며, 이차적으로는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아니하고 멜리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세우기 위한 구속사적 의미가 있다.
선지자에 의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는 말씀은 모든 시대, 모든 종들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들에게 공히 적용되는 말씀이다.
넷째, 엘리 가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결국 멸절하게 된다는 예언이다.
이 예언은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서 한 날에 죽임을 당해 일차적으로 성취되었고, 엘리의 후손들인 놉 지역의 제사장들이 사울 왕의 사주를 받은 에돔인 도엑에 의해 대량 학살되어 두 번째 성취되었으며, 엘리 집안의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솔로몬에 의하여 제사장직에서 파면됨으로 완전히 성취되었다.
‘팔을 끊는다.’는 것은 엘리 집안의 권세를 끊고 빼앗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아들이 권세를 남용한 대가요 엘리 자신이 권세를 사용하지 않고 버린 대가이다.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한다.’는 것은 가부장적 제도에서 노인은 그 집안의 힘이요 권세였다. 그러나 가문의 팔이 꺾어진 상태에서 당연히 노인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엘리 자손들이 조사한다는 것이다.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라’는 말은 엘리 집안의 환난과 성소가 피폐될 것이라는 이중적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로 엘리시대로부터 성소가 블레셋의 침략, 각종 대적들로 인하여 재난에 직면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엘리 집안 후손으로 제사장의 직분을 계속하게 하지만 그 세력이 하도 미약하고 비참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슬픈 마음이 들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엘리 집안의 저주가 3중으로 반복되고 있는데 ‘노인이 하나도 없게’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이러한 저주는 실로와 놉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이 예언의 표징은 엘리의 두 아들의 죽음에서 증명되었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한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시는데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사무엘, 사독, 그리스도의 삼중적 예언으로 볼 수 있다.
첫째, 사무엘은 제사장 가문 출신이 아니었으나 제사장 및 제사의 권위를 회복했고, 실제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였으며, 이 예언이 선포된 직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둘째, 사독은 정통적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며, 합법적으로 솔로몬은 왕으로 세우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고, 엘리의 후예인 아비아달 대신 대제사장에 임명되었다.
셋째, 그리스도는 희생 제사를 폐기시키고 완성했으며,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이다.
엘리 제사장의 가문은 파멸되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제사장은 커다란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스라엘은 왕과 제사장에 의해 다스려질 것이라는 예언이다. 실제로 사무엘과 사독, 그의 후손들은 이스라엘 여러 왕들을 도와 직분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반면에 엘리 집안의 후손들은 빈핍하고 처참한 환경에 처할 것이다. 저들은 동전 한 닢, 빵 한 조각을 구걸하여 굶주림을 면하고 비참하게 살아갈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좋은 것을 빼앗아 스스로 살을 찌운 범죄에 대한 대가이다. 저들은 간구하기를 ‘제발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하나 맡겨서 떡 조각을 먹게 해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레위 지파를 부르시고 그 중에서 다시 아론의 집안을 택하여 제사장 가문을 삼으셨다.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은 아론--엘르아살--비느하스 순이었다. 사사시대를 거치면서 엘르아살--비느하스 계열로부터 ‘이다말’ 계열로 옮겨 엘리가 대제사장이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가 왜 생겼을까.
첫째, 엘르아살 계열의 후손이 끊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후일 이 계통의 제사장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둘째, 엘르아살 후손이 너무 어렸거나 사사 시대를 이끌어 갈 능력이나 자질이 부족했을 가능성이다. 바로 이때 엘 리가 대제사장 직에 올랐던 것이다. 엘리 사후에 대제사장직은 명목상 엘리의 손자요 비느하스의 아들인 아히둡이었고, 사울 왕 당시는 그의 아들 아히멜렉이었으며, 그는 사울에 의해 대학살을 당하였고, 그의 아들 아비멜렉은 다윗에 의해 대제사장에 임명되나 엘르아살 계열의 사독이 함께 대제사장에 임명된다. 솔로몬 즉위 시에 아비아달은 아도니아의 반역에 참가함으로 결국 추방을 당하게 되고 사독만이 대제사장의 위치를 굳히게 된다. 이 후로 엘르아살 계열이 대제사장직을 승계하게 되고 엘리 집안은 점차 몰락하여 예언자의 예언대로 겨우 제사장직만 이어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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