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배설(裴楔)은 교만하고 패악하여 군율을 어겨 이순신(李舜臣)에게 죄를 얻자, 자기 마음대로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여 성주(星州)의 본집으로 돌아가니, 이순신이 즉시 죄목을 갖추어 아뢰었다. 배설은 도망하였다가 그 뒤에 체포되어 주벌을 받았다.
15일 곡성의 왜적이 철수하여 구례ㆍ순천으로 향하여 왜교(倭橋)에서 진영을 합하였다.
○ 명군 30여 명이 남원으로부터 곡성으로 향했다. 이 때에 창평(昌平)의 왜적은 하동(河東)으로 철수하여 가면서 민패를 받은 사람을 모아서 쌀과 콩을 싣고 끌고 가다가 섬진(蟾津)에 이르러 놓아 돌려보냈다. 사람들이 적의 괴수에게 고하기를, “일본 병사가 끊임없이 왕래하니 중도에서 피해당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괴수는 인솔한 왜군 수십 명으로 하여금 압송하게 하여 남원의 남촌(南村)에 이르렀는데, 명군과 서로 만나게 되었다. 명군은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오는 사람들로 생각하고 막 적의 정세를 물으려 하는데, 왜적이 칼을 뽑아 들고 맞부딪쳐 명군을 살해하니, 명군이 활을 쏘아대어 적 두 놈을 베자, 나머지 왜적과 민패를 찬 사람 수백 명이 모두 달아나 흩어졌다. 명군은 그대로 압록(鴨綠)으로 해서 강을 따라 내려가 구례의 잔수역(潺水驛)에 이르러 잠복하여 망을 보니, 순천의 왜적 40여 명이 강을 건너 왔다. 명 나라 기병 수명이 먼저 나아가 약점을 보이니 적병이 칼을 휘두르며 일시에 돌입하였다. 뒤에 있던 명군이 고함치며 달려들어 돌격하며 난사하니 적병이 패하여 흩어져 모두 강물로 들어가므로 20여 급을 베었다. 기세를 타고 곧장 구례성으로 들어가 고함치며 달려드니, 적병이 사방으로 나와 포위하므로 명군이 후퇴하여 달아났다. 조신(調信)은 전날 산동(山洞)의 밤 습격에 놀랬고 또 이날 낮에 돌격할 때에 놀라서, 적의 대진(大陣)이 잇따라 올까 염려하고 즉시 철수하여 섬진을 향하였다가 이어서 남해도 들어가 군대를 유산도(流山島)이 현의 동문 밖 5리의 지점 에 주둔하여 섬을 빙 둘러 성을 쌓고, 호를 파서 배를 다니게 하였다. 평의지(平義智)는 한산도(閑山島)로부터 이리로 나와 이곳에서 합진하고 본현의 인민을 유인하여 민패를 주어 편안히 살게 하였다. 그리고 서울 사람 손문욱(孫文彧)을 본현의 원으로 삼고, 하동(河東) 출신 김광례(金光禮)를 하동의 원으로 삼아 본읍의 일을 관장하게 하고, 민패를 발급하여 쌀을 받게 하고, 또 왜놈을 시켜 여러 진에 나누어 보내어 본현의 사람을 찾아서 하나하나 데려 오도록 하였다. 문욱(文彧)은 임진년에 왜놈에게 사로잡혀 가 다년간 왜국에 있었기 때문에 왜말을 잘했다. 남해에 있을 때에는 살생과 노략질을 엄금하게 해서 침해를 받은 사람이 많이 보전하여 살게 되었다. 그 뒤에 조선으로 살아 돌아오니 포상하고 만호(萬戶)의 직을 제수했다.
○ 적의 괴수 의홍ㆍ윤직무ㆍ청정 등이 이것 또한 한때의 소문이 이 같았고 사실에 있어서 그 진위(眞僞)는 자세하지 않다. 각각 3ㆍ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께 남해 등지에 머물렀다. 한 번 명량에서 패전함으로부터 와야 할 배가 이르지 않자 윤직무(允直茂) 등은 우로(右路)를 경유하고, 의홍 등은 좌로(左路)를 경유하여 모두 남원으로 향하여 내려왔다. 21일에 선봉 30여 명의 왜적이 소와 말과 포로된 사람 등 40여 바리의 짐을 몰고 남문 밖에 이르렀다. 명군 6기(騎)가 인천(忍川)으로부터 성 아래에 가서 망을 보다가 적을 삽령(鍤嶺)에서 만났는데, 적병은 우리 나라의 옷을 입고 갓을 쓰고 속여서 명군을 부르며 말하기를, “재상님! 재상님!”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명군을 부를 때 재상님이라 하는 것을 적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니, 명군은 그들이 왜놈인 줄은 알았지만 형세가 서로 맞서 싸울 수 없어 후퇴하였다. 적병은 인천(忍川)까지 따라와 산에 불을 지르고 돌아갔다. 날이 어두워서 동문 밖의 토성 안에 주둔했다. 이때에 나는 마침 일 때문에 산에 있으면서 양형과 같이 용추동(龍湫洞)으로 옮겨 내려간 까닭에 일이 많아 못 갔다. 다만 박언량 등 4ㆍ5명을 보내어 정탐하게 하였다. 박언량 등이 적병이 토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엿보고 나서, 야밤에 숨어서 성 위로 올라가 화살과 돌을 마구 퍼부으니 적병이 가지고 있던 짐을 다 버리고 동문으로 들어가 달아났다. 박언량은 그들의 점유물과 소ㆍ말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왔다. 박언량은 용감무쌍하지만, 지식이 천박하여 병가의 기정(奇正)의 계책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왜적이 도망하여 탈출하게 되었음.
23일 의홍의 군사 4만여 명이 옥과ㆍ곡성을 경유하여 순진(鶉津)ㆍ홍령(鴻嶺)으로 갈라져 진군하고, 윤직무 등의 군사 수만 명은 순창(淳昌)으로부터 비홍령(飛鴻嶺)을 넘어 진군하여 이언(伊彦)ㆍ가방(加方)ㆍ방장(方丈) 등지에 결진하였다. 다음날 의홍 등의 군대는 구례로 향하여 원천(原川)ㆍ원평(院坪)ㆍ연화산(煙花山)의 상하에 이르고, 윤직무 등의 군대는 운봉으로 향하여 호산원(虎山院)에 이르러 진을 쳤다. 도처의 왜적이 종일 산을 수색하며 인명을 살해하고 재산을 노략질하였는데, 그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날 이른 아침에 왜적이 대거 쳐들어 온다는 말을 듣고 그들의 후방을 도모하려고 5ㆍ6명을 거느리고 성부(城府)로 향하다가 길에서 대적을 만나 달아나 산막으로 돌아와, 양형과 같이 노모를 업고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달아나 무상굴(無上窟) 용추동 북쪽에 있는데 철벽(鐵壁)이다. 로 올라가 한 곳에 앉히고, 나는 요충지에서 적병을 바라보니, 종일 온 산에 가득 찼으나 오직 이곳에는 오지 아니하니, 스스로 다행으로 여겼다. 잠깐 동안 있는데 마을 친구 박대호(朴大虎)가 가족을 거느리고 구등령(九等嶺) 위에 숨어 있다가 졸지에 몇 놈의 왜적을 만나 조개와 황새의 형세로 서로 버티고 있는데, 또 7명의 적이 뒤에 있어 형세가 매우 위급하게 되자 내가 가까이 있는 줄 알고 살려 주기를 청함이 매우 긴박하였다. 나는 노복에게 말하기를, “적이 만일 와서 범하거든 봉우리로 올라와 나를 부르라.” 하고, 바로 활줄을 한껏 당겨가지고 달려가니 적이 바라보고 도주하는데, 사람마다 모두 구우(口虞)를 가졌다. 박대호와 같이 꼭대기에 앉아 관망하면서 떠날 때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6명의 왜적이 내 말의 발자취를 밟아 벼랑으로 기어올라 이르니, 노복이 나를 부르지 못하고 도망쳐 달아나자 왜적은 앉아 있는 여러 사람을 보고 사면에서 에워쌌다. 늙은이와 어린이가 놀라고 두려워했으나 도망할 곳이 없어서 나를 비록 급하게 불렀으나 멀어서 잘 들을 수가 없었다. 문득 한 놈의 왜적이 큰 소리를 치며 봉우리를 지나가므로 내가 비로소 적이 노약자들이 있는 곳에 들어온 것을 알았다. 달려가면서 박대호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하러 여기에 왔겠는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뒤에 처지지 말아라.” 하고 그와 같이 활을 당겨 적진중으로 돌입하였다. 그들 왜적은 내가 둔하고 겁쟁이인 줄을 알지 못하고 후퇴하여 산봉우리 위로 올라가 모였다. 나는 사람을 구하기에 급하여 왜적과 교전을 하지 않고, 굴속으로 달려 들어가 두 집의 가족을 불러 모으니 한 사람도 상해가 없었다. 나를 보자 흐느껴 울며 죽었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기뻐했다. 적병은 오랫동안 서서 우리의 허실을 탐지하다가 칼집에 칼을 꽂고 내려가버렸다. 어두울 녘에 높은 데로 올라가 바라보니, 30리 내에 적병의 불들이 낮과 같이 밝았다. 연화(煙花)ㆍ원평(院坪) 상하의 장수가 있는 군막들에는 붉은 담요 휘장을 치고, 큰 깃대를 세우고 큰 호각을 불어 여러 군인으로 하여금 흩어졌다가 모이게 했다가 하는데 거의 10여 곳이 되었다. 내가 헤아리기에 적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있는 줄을 알고 있으니 내일 만일 대거 탐색하게 되면 화단을 예측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즉시 두 집의 노약자를 거느리고 밤에 고촌(高村)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에 각처의 왜적이 불을 밝히고 호각을 불며 일시에 출발하여 갔다. 원천(原川)의 왜적은 구례로 향하여 가 화정(花亭)에 이르러 유둔하고, 호산(虎山)의 왜적은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인월(引月)에 이르러 결진하여 사면의 산골짜기를 밤새도록 수색하였다. 이날 나는 정령성(鄭嶺城)으로 향하였는데, 몇 대의 빠른 인마가 월운령(月雲嶺)으로부터 달려와 나에게 고하기를, “적병이 벌써 산과 들에 가득 찼고, 살상과 노략질이 한창 혹심하여 우리들은 피해 달아나왔습니다.” 하였다.
나는 즉시 돌려서 무산(毋山)으로 향하니 적병이 또한 가득하므로, 판왕령(板王嶺)으로 올라가 부운령(浮雲嶺)모두 지리산 서쪽 기슭의 재 이름. 을 지나 도로 고촌으로 내려왔다. 이튿날 용추의 산막으로 돌아오니 본촌 사람으로 화패(禍敗)를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인월(引月)의 왜적은 다 영남으로 들어갔다가 이어서 좌도(左道)의 옛 소굴로 돌아갔다. 구례의 적은 길을 하동으로 잡아 이어서 사천(泗川)으로 들어가 법도(法島)에 주둔하여, 섬을 빙 둘러 성을 쌓고, 엄하게 기계를 설비하여 오래 머무를 계책을 하며 군대를 나누어 포진하니, 곤양(昆陽)ㆍ진주(晉州)ㆍ단성(丹城)ㆍ산음(山陰)의 지방 각 촌락에서 벼를 거두어들이는 왜적의 그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하동(河東) 유학(幼學) 하응구(河應龜)를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임명하고 가까운 고을의 일도 아울러 관장하게 하였다. 또 왜놈을 남해(南海)ㆍ거제(巨濟) 등의 진으로 나누어 보내어 사천 고을 등의 인물을 찾아 돌아오게 하니, 다른 곳에서 포로가 되어 섬 가운데 있으면서 도망칠 기회를 얻지 못한 자들이 거짓으로 사천ㆍ진주 사람이라 둘러대고 육지로 탈출하였다. 그래서 달아나 돌아오게 된 자가 다수였다.
○ 명 나라 조정에서 남원의 패전을 듣자, 수길(秀吉)이 조정의 대은을 져버리고 관병을 무찔러 죽이고 조선에 해독을 주었다 하여, 황제는 크게 성을 내어 정전(正殿)을 피하고 수라를 줄이고 주악을 철폐하였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을 하옥하고, 심유경(沈惟敬)을 나포하여 국문하는 한편 급하게 군대의 양식을 발송하고 정벌에 전념하여, 제독 동일원(蕫一元)ㆍ유정(劉綎)과 수병제독(水兵提督) 진인(陳璘)으로 제장의 병마를 통솔하게 하여 각도로 나누어 동정(東征)하게 하였다.
29일 나는 박언량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구례로 향했다. 다음날에 진주와 하동으로 향했다. 지난 24일에 본촌 사람중 포로된 자가 매우 많았는데, 나는 그 집의 사람들이 울며 서로 사실을 늘어놓고 소리를 듣고 모두가 다행히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구례와 진주에 이르러서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져 돌아왔다.
11월 4일 내가 섬진에 이르러 높은 데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왜적이 놓은 불이 산을 태워 곳곳에서 연기가 일어났다. 잠깐 동안 있는데 몇 놈의 왜적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내가 별안간 습격하자 왜적은 말을 버리고 도주하므로 그 말을 거두었다. 초저녁에 하동현으로 들어가 숲속에다 군대를 숨기고 박언량과 같이 나아가 성중을 탐색하니, 성중이 고요한데 단지 금오산(金鰲山) 북쪽 한 곳에서 불빛이 밝았다. 박언량이 말하기를, “성중에 도적이 없으니 산 북쪽의 적을 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므로, 나는 그를 제지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있어도 없는 듯, 찼어도 빈 듯이 한다는 기묘한 병법을 알지 못해서이다. 대낮에 멀리서 본성을 바라보니 살기가 등등하고 밥짓는 연기가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숨을 싹 감추고 영영 인기척을 끊었으니, 이것은 반드시 교활하고 속임수 잘하는 왜놈이 우리를 속이려는 계책이다. 내일 자세히 망을 보아서 거사함이 옳겠다.” 하였다. 새벽이 되어 성의 서산으로 올라와 정탐하여 보니, 과연 성에 머무른 적이 그 수효가 대단히 많고 인가와 왜군의 군막이 성내에 그물코처럼 연락되어 소ㆍ말ㆍ닭ㆍ개ㆍ거위ㆍ오리 등의 소리가 진동하였다. 박언량이 혀를 내두르며 말하기를, “아마 우리 장군님이 적을 예측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어육(魚肉)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즉시 군인과 같이 물러와 숲속에 매복하여 소수의 왜적을 도모하려고 했으나 적병이 많이 흩어져 손을 쓸 도리가 없었고, 겸하여 날이 오래되니 양식이 떨어져서 군사를 거느리고 물러 돌아왔다.
8일 화정(花亭)에 이르렀다. 선전관(宣傳官) 김식(金軾)은 정장(鄭將)의 종제인데 피란했다가 처음 돌아와 의병대에 입속하였더니, 내가 적진으로 싸우려 나갔다는 말을 듣고, 군사 40여 명을 거느리고 뒤따라와 나를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나와 같이 일하기를 요구하였다. 나는 정장과 김식과 다 같은 재종간이다. 비록 오랫동안 무인지경으로 들어와 곤란과 고생이 막심했지만 다정한 벗의 두터운 바램을 홀로 저버릴 수 없어 적을 토벌함에 성심껏하여 조금이라도 게으른 적이 없었다. 바로 군사를 연합하여 다시 구례로 향하여 노전촌(蘆田村)에 이르렀다.
11일 본현의 자모장(自募將) 강보기(姜甫起)와 합군하여 80여 명을 거느리고 순천으로 향하여 삽령(鍤嶺)에 이르러 앉아 쉬면서 먼저 박언량 등 10여 명에게 정혜사(正惠寺)ㆍ강청(江淸)ㆍ죽전(竹田) 등지로 들어가 염탐하라 하였다. 왜놈의 권농(勸農) 왜놈은 지진리(止珍里)라 부른다.유수복(劉守福) 등 3명이 왜교(倭橋)에 부역(赴役)할 승군(僧軍)을 일으켜 보낼 양으로 말을 타고 절에 왔다가 박언량 등에게 포박되었다. 내가 휘파람 소리를 듣고 달려서 절에 가니 김식(金軾)이 유수복 등을 보자 불문곡직하고 그들을 죽이려 하였다. 내가 그것을 말리며 말하기를, “이놈들이 왜적에게 가 붙어서 심부름을 하였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하오. 그러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것이니 다스리지 아니 한다.’는 말은 옛사람이 경계하였고, ‘살인을 즐기지 않는다.’는 아성(亞聖)의 교훈도 있소. 비록 난리 속에 있다 하더라도 인명은 지극히 소중한 것이니, 어찌 함부로 다시 살아나지 못할 형벌을 써서야 되겠소. 원수부(元帥府)로 붙잡아 보내어 죄상을 끝까지 심문한 뒤에 그를 죽여도 늦지 않소.” 하였다. 김식(金軾)은 잔인한 사람이라 듣지 아니하고 무부(武夫) 박만귀(朴萬貴)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유수복 등은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며 말하기를, “곤궁하여 왜적에게 부역하였지만 본심은 아닙니다. 우리들에게는 각각 소와 말이 10여 마리씩 있으니 의병에 바쳐서 목숨을 대속받기 원합니다.” 하였다. 나는 지극히 그들이 죽음에 나아감을 민망하게 여기고, 김식한테 말하기를, “군수품을 보충해 쓰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니, 마땅히 그들의 말을 들어 피차의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 무방하겠소.” 하니, 김식이 말하기를, “소와 말이 비록 만 마리라 하더라도 지금 왜적 가운데 있사온데 누가 그것을 잘 가져 오겠소.” 하므로, 나는 쾌히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담당하여 끌고 오겠소.” 하고, 그 자리에서 절의 중에게 명하기를, “너희들은 형세가 급박하여 민패를 받았으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가련하다. 숨어 있어도 소용 없으니 모두 와 내 명령을 들어라.” 하자, 중들이 말을 듣고 달려 나와 울면서 배알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지금 수복 등 세 사람이 바야흐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소와 말이 많이 있다 하여 그것을 바칠 터이니 생명을 살려 달라고 한다. 너희들 가운데 이 사람과 서로 절친한 자가 있으면 군인을 인솔하고 들어가 소와 말을 끌어 오라.” 하니, 한 중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바로 저와 절친합니다. 제가 명령에 따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박언량 등 8명을 중과 함께 내려보냈다.
이때에 순천 광양 외촌에 주둔한 왜적이 우리 나라 사람과 이쪽 저쪽에 나뉘어 막을 치고 있었다. 중은 박언량 등을 인솔하고 인가(人家)에 몰래 들어가서 우마 27두를 몰고 돌아왔다. 그런데 박만귀는 김식의 밀부(密符)로서 벌써 세 사람을 절 아래에서 베어 죽였다. 나는 김식과 같이 일할 수 없음을 알고 한참 동안 통탄하였다. 다음날 나와서 노전(蘆田)으로 돌아와 소를 잡아 군사를 먹이고, 박언량 등을 모두 김식에게 넘겨주고 단지 5ㆍ6명과 같이 우마를 몰고 돌아와 정장(鄭將)을 만나니, 정장도 역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잘못으로 여기고, 또 나한테 말하기를, “우리 군대의 공은 전적으로 그대가 일을 먼저 시작함에 있는데, 그대는 공을 헤아리지 아니하니 무엇으로써 그것을 보상하겠소?” 하였다. 정장과 양덕해가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아무개는 중추(中秋)로부터 왜적 토벌에 마음을 다하느라고 가사를 돌보지 아니하였고, 얼마 안 되는 가을 곡식도 거둬들이지 못하여 노모와 처자가 앞으로 굶주림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후부터 싸워서 얻은 우마를 그에게 두어 의사(義士)의 많은 식구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기 바랍니다.” 하니, 정장이 흔연히 그것을 허락하고 또 즉각 표창하도록 원수부에 보고하려 하므로 나는 모두 굳이 사양하고 따르지 않았다.
○ 이광악(李光岳)과 원신(元愼)이 본도에 이르러 불탄 나머지를 수습하며, 부(府)의 주포촌(周浦村)에 유진(留鎭)하였다.
24일 나는 왜적을 함양 음리(陰里)까지 추격하여 17ㆍ8명을 사살하고 데려온 사람과 짐승이 20여 구(口)나 되었다. 이때에는 내가 평소에 데리고 다니던 왜놈과 싸워온 경험이 있는 자 10여 명을 구례에 있을 때 김식에게 전부 이속시켰기 때문에 내 수하에는 한 사람의 병사도 없었다. 산음(山陰)과 사천(泗川)의 왜적이 함양ㆍ운봉을 분탕질하고 찾아다니며 살생 노략질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맨주먹을 흔들어 봤자 어찌할 수 없어 미칠 듯이 분격한 마음이 다시 일어나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감히 단신으로 몇 명의 하인을 데리고 출발하여 운봉으로 향하니, 양ㆍ박 두 선비도 또한 의기가 솟아서 위험을 무릎쓰고 나를 따랐다. 길을 떠나 함양 산내(山內)에 이르니, 어떤 사람이 훌쩍 날듯이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앉아서 기다리니 그는 바로 고향 친구 안선달(安先達) 사제(嗣悌)였는데 부모가 모두 오차산(於差山) 싸움에서 죽었기 때문에 항상 왜적을 죽여서 조금이라고 원통함을 풀고자 하였으나 맨손뿐이라 계책을 쓸 도리가 없었는데, 내가 왜적과 싸우려 나간다는 말을 듣고 뒤따라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피차에 기뻐하고, 그와 같이 동행하여 당벌촌(唐伐村)에 이르니, 온 마을이 텅 비어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둘 녘에 한 사람이 와서 알리기를, “왜적 50여 명이 오늘 낮에 두류암(頭流菴)으로 들어와 이내 흩어져 산을 뒤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나는 인원을 나누어 적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망을 보게 하였더니, 저녁 때에 정탐한 사람이 알리기를, “왜적은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마천곡(馬川谷)으로 들어가고, 한 패는 음리(陰里)로 향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날 밤에 이동하여 등구현(登丘縣)에서 잤다. 함양의 남면 산내에 창고가 있다. 산음 사람 배의중(裴義重)은 날래고 건장함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병란을 피하여 이곳에 와 있다가 향도가 되기를 자원하므로 나는 기꺼이 허락하였다.
이튿날 출발하니 근처 사람이 모두 괴이히 여겨 말하기를, “저 사람들이 몇 개의 활을 가지고 50여 명의 적을 당할 수 있겠는가? 어찌 경솔하게 적과 싸우러 나간단 말인가? 운운.” 하였다. 음리(陰里) 건너편의 냇가에 얼음이 살짝 얼어 붙어 군사가 건너갈 수 없었다. 앉아서 망을 보니, 왜적 20여 명이 음리로부터 사람과 짐승을 몰고 군막을 불사르고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군사를 시켜 고함을 치게 하면서 계속 이어서 그들을 추격하여 탄구지(炭九之)에 이르니, 개울은 좁고 산은 험준한데, 우리와 놈들과의 거리가 서로 가까워서 개울을 사이에 두고 교전하였다. 적은 대부분 총을 소지하여 그칠 사이 없이 연달아 쏘아대므로, 나와 안선달ㆍ박군이 돌을 의지하고 마구 쏘아 연달아 6명의 왜적을 맞추니, 적은 사람과 가축을 버리고 엄천촌(淹川村)을 향하여 달아나고, 나는 사람을 시켜 물을 건너가 거두어 오게 하였다. 돌아오다 등구현 앞에 당도하니, 포성이 가까이 들리고, 고함치는 소리가 진동하므로 급히 달려가 망을 보니 본현의 원 남간(南侃)이 내가 왜적을 토벌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스스로 편치 못하여 아병(牙兵)과 산장이 수십 명을 산내로 보내어 성세(聲勢)를 돕게 하였는데, 적병 30여 명이 마천곡(馬川谷)으로부터 나와 의탄(義灘)에서 서로 만나 방금 접전을 하고 있었다. 나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합세하여 크게 싸웠다. 날이 저물자 우리와 놈들이 각각 동서로 후퇴하였다. 황현촌(黃峴村)에서 자려고 하였으나 적의 야습을 염려하여 물러나 백장사(白丈寺)로 올라갔다. 그러나 화살이 다 떨어진 고군(孤軍)이 머물러 있어봐야 무익하므로 새벽이 되기를 기다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에 적은 수백 명의 군사를 합하여 곧 황현에 이르러 수색하며 약탈하고 불지르며 우리편 사람을 보면 반드시 의병이 떠난 곳을 물었다. 드디어 운봉을 지나 몰래 남원의 동촌(東村)ㆍ번암(蟠岩)ㆍ견천(肩川)으로 들어가서 장수(長水)에 이르렀다. 병사 방어사(防禦使)와 원수부의 별장(別將) 조신옥(趙信玉)ㆍ홍대방(洪大邦) 등이 왜적이 온다는 경보를 듣고서 군사를 인솔하고 운봉에 이르렀다가 왜적이 간 곳을 놓치고 바로 진으로 돌아왔다.
○ 진주와 사천 등 여러 곳에 주둔하였던 왜적이 길을 나누어 침범해 오는데, 1대는 1백 50여 명으로 함양을 경유하여 장수로 향하고, 또 1대는 2백여 명으로 안음ㆍ거창을 향하여 수색하며 살육하였다.
○ 경리 양호(楊鎬)와 제독 마귀가 대군을 거느리고 영남으로 내려갔다. 이때에 원수 권율은 명을 받들고 서울에서 돌아와 이곳에 이르러 수행하였다. 양호가 우리 임금이 같이 일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알고자 하여 어느 날 청하여 말하기를, “제가 대군을 거느리고 남쪽에서 도산(島山)의 적을 토벌하려 하옵는데, 국왕께서는 의당 같이 가 주십시오.” 하니, 임금께서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응락하였다. 이튿날, 명군이 진을 이동하여 남하하는데, 경리는 주상과 같이 말고삐를 나란히하여 성을 나와 강가에 이르자 말을 채찍질하여 달리는데 형세가 바람과 번개 같았다. 임금께서도 빨리 달려 뒤지지 아니하였다. 부교(浮橋)를 건너서 준령(峻嶺)으로 올라가는데 벼랑 꼭대기에는 길이 없어서 말발굽이 미끄러지는데도 능히 말고삐를 당겨 위태롭지 아니하고 옥용(玉容)이 편안하여 여유마저 보이니, 경리는 돌아보고 입을 크게 벌렸다. 이어 말에서 내려앉자 경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위로하여 말하기를, “왕께서는 같이 일을 할 만하옵니다.” 하였다. 이때에 백관과 호위들이 모두 임금 계신 곳을 잃어버리고 한 사람도 행진하여 따라온 자가 없었는데, 오직 선전관(宣傳官) 유승서(柳承緖)만은 말 뒤에 있다가 임금이 말에서 내리려 하자 앞으로 나가서 고삐를 붙들어 드렸다. 한 순간의 위급한 찰나에도 능히 체모를 잃지 아니하시니 저 큰 숲에서 열풍(烈風)과 뇌우(雷雨)를 만나고도 혼미하지 않았던 순(舜) 임금과 무엇이 다르랴. 며칠 후에 경리는 바야흐로 군대를 정돈하여 남정(南征)하는데 임금께서 같이 동행하기를 청하였으나 경리(經理)는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양호는 군사를 이끌고 경주(慶州)에 이르렀다. 이때에 청정이 여러 장수를 나누어 두모(豆毛)ㆍ서생(西生) 등의 진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도산(島山)에 머물러 있다가 대병이 온다는 말을 듣고 복병을 나누어 보내어 요충지대를 차단하고, 또 각진에 왜병을 파견하여 위급함을 고하며 구원을 청했다.
○ 이덕필(李德弼)을 남원 부사로, 유승서를 판관으로 삼았다. 유승서는 특명으로 교지를 받음.
7일 아군이 적 1백 23명을 산음의 사촌(蛇村) 현 서쪽 30리에 있음. 에서 죽였다. 이때에 정이길(鄭以吉)은 친상에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하여 병사(兵使)에게 보고하고 병권을 내놓았다. 내가 당초에 모집한 박언량의 무리는 모두 관군에 이속하였고 음리(陰里)의 싸움에는 단지 새로 얻은 약간의 군대로 적을 추격하였는데, 집에 돌아가자 그마저 모두 흩어졌다. 의분을 떨쳐 왜적을 치려는 정성은 지금도 변함 없으나 척수공권(隻手空拳)으로는 계책이 서지 아니하니, 처음에 같이 도모하던 사람들은 통탄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내 또한 어느 것이 복이 되며, 어느 것이 화가 되랴 하여 비록 스스로 마음을 달래기는 하나, 왜적을 죽이려는 마음은 언제나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다. 마을 노인 진사 유인옥(柳仁沃)이 나의 뜻을 알고 박ㆍ양 제군과 같이 동리 사람을 뽑아 내니 장정이 거의 60여 명에 이르러서 단결시켜 편대를 만들었다. 나보고 거느리고 가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기로 행하라 요구하므로, 본래부터 정한 계책이 있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다시 그 군대를 관장하기로 하였다. 이때에 산음과 진주의 땅에는 왜적의 주둔처가 바둑같이 포진되었고, 함양ㆍ운봉ㆍ안음ㆍ거창ㆍ장수 등의 고을에 남아있는 백성들은 여러 번 약탈을 당했고, 관군은 먼 곳으로 물러가 큰 화가 만연하여 우리 동촌(東村)도 위험이 조석에 다달았으므로, 여러 동지들은 내가 적을 막아 주기를 원하였다. 이달 3일에 나는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재를 넘어 운봉으로 향하니, 박대호(朴大虎)ㆍ유정진(柳挺震)ㆍ홍충갑(洪忠甲)이 다 의분을 떨쳐 이 일에 따랐다.
4일에 본현의 남면 가장동(加藏洞)에 이르니, 어두울 녘에 어떤 사람이 왔으므로 탐문하니
바로 본현의 원 남간이 보낸 사람인데, 전언하여 말하기를, “나으리께서 북촌에 머물러 계시는데, 오늘 낮에 적병 수백 명이 장수로부터 돌연히 이르러 각 촌을 수색 약탈하고 산막을 분탕하니, 나으리도 역시 쫓김을 받아 겨우 몸만 부지하여 달아나 삿점[簟店]에 와서 생원님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간절히 면담하고자 하오니, 내일 꼭 만나 보신 후에 떠나가십시오.” 하므로,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남간이 편비 몇 사람을 거느리고 왔다. 내가 전날 군대를 거느리고 현을 지날 때에 현하(縣下)의 아전들이 왜적을 토벌하는 사람을 업신여기므로 나는 군령으로써 곤장 수십 대씩을 치게 한 일이 있었는데, 남간이 나와 만나 안부와 왜적에 대한 이야기를 물은 다음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나를 허물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왜적을 토멸하는 일은 공사요 국사인데, 본 고을 사람들이 이것을 사사로운 일로 간주하고 오만 무례하므로 그 죄에 대해 죄를 준 것인데, 영감은 어찌 그것을 탓하시오?” 하니, 남간이 그 말을 그만 두고, 아병(牙兵) 3명을 붙여 주며, “적의 정보를 탐지하는 대로 그들을 시켜 연락해 주오.” 하고, 또 말하기를, “왜적이 성하고 날래어 형세를 당할 수 없으니 진퇴를 헤아려 하시고 부디 경솔하게 대적하지 마시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영감의 말이 진실로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병법에 어렵고 쉬운 형세가 있는데, ‘어려움을 범하면 패전하고, 쉬운 것을 이용하면 이긴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나를 알고 남을 아는 기틀이니, 많고 적음은 논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말이 끝나자 1지대의 군사가 구등령(九等領)으로부터 오는데, 바로 본부 서면의 자모장(自募將) 박경춘(朴景春)이었다. 달려와 절하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합(烏合)의 졸병을 가지고, 왜적을 치고자 하오나 의뢰할 곳이 없어 여러 달을 지내오다가, 마침 의병장께서 군대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기뻐서 목숨을 버릴 마음을 가지고 달려왔습니다.” 하였다. 나는 그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킨 것은 오로지 왜적을 치기 위한 것이고, 왜적을 치는 것은 오로지 나라를 위한 것이다. 너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을 줄 아니, 이른바 철(鐵) 가운데서도 쟁쟁한 것이 아니겠느냐? 나의 지휘를 따라 전진이 있을 뿐이요. 후퇴는 말아라.” 하였다.
박경춘이 말하기를, “오직 명령에 따라 생사를 결판 짓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이에 사람을 황산(黃山)의 봉우리 위로 보내어 적병을 정찰하게 하니, 적병이 벌써 산내로 들어가 원효(元曉)ㆍ실상(實上) 등 마을을 분탕질하였다. 두 대의 군사를 인솔하고 진군하여 비도현(非道峴)에 이르러 적의 행방을 정탐하니, 적병은 황현(黃峴)으로 내려가 함양의 등구현(登丘縣)을 향하여 갔다. 나는 제군들에게 말하기를, “적을 뒤밟아 여기에 이른 것은 진실로 적을 죽이고자 함이요, 적을 죽이는 요결은 싸움이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다. 이제 적의 형세를 자세히 살피니, 강성하고 날래어 범하기 어려우니, 승패의 형세를 싸우지 아니하여도 결단할 수 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반드시 어렵고 쉬운 형세를 가려서, 적을 제어할 만한 형세를 타서 화(火)로 할 만하면 화로 하고, 경(驚)하게 할 만하면 경하게 하고 이것은 화공(火攻)과 야경(夜警)을 말한 것인데 글을 생략함은 군기(軍機)라 비밀로 함. 혹은 낮에 혹은 밤에 하여 반드시 옛사람이 많은 적을 대적하던 기계(奇計)를 내 연후에야 거의 희망을 있을 것이오.” 하니, 제군이 말하기를, “그러하온데, 적병이 곧장 내려와 대병이 점점 가까이 오니, 야경(夜警)이나 화공(火攻)을 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므로, 나는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날이 저물자 백장사(白丈寺)로 들어가기를 의논하는데, 문득 1대의 군사가 본사로부터 나오는데 바로 본부 북면의 자모장(自募將) 출신 구희로(具希老)였다. 그는 보고하기를, “제가 오늘 일찍부터 적을 추적하여 여기까지 이르렀으나, 적의 형세가 너무 강성하므로 서로 교전하지 못하고 군사를 거두어 귀환하였다가 다시 출동할 생각입니다.” 하므로, 나는 기뻐서 말하기를, “기약하지 아니하고 모인 군사가 3군(軍)이 되니 오늘의 일은 하늘이 진실로 도운 것이다. 각각 마땅히 힘써서 전진하며 후퇴하지 말라.” 하니, 구희로는 대단히 난색을 하며 말하기를, “왜놈의 자취가 벌써 멀어졌는데 물러나지 않고 무엇하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적병이 벌써 다 바다를 건너간 줄 아느냐? 산음과 함양 땅에 적진이 바둑처럼 깔렸다. 이 왜적이 비록 멀리 갔다지만 중지하지 않고 깊이 들어가면 수일 내에 반드시 그놈들을 만날 것이다. 오직 힘을 다하여 싸우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요, 물러나서는 안 된다.” 하자, 구희로는 말하기를, “저는 비둔하기 때문에 행보를 잘하지 못하고, 군사 역시 마구 긁어모은 것이라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니, 죽음을 각오하고 멀리가 싸우는 데는 같이 따르기 어렵습니다.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 한번 죽음을 늦추려 합니다.” 하므로, 나는 그를 책망하여 말하기를, “백면서생으로 의를 들고 일어나 왜적을 치느라고 여러 달 분주하게 다니며, 험한 고생을 꺼리지 않고 바람과 서리와 굶주림을 골고루 맛보며 오늘날까지 구사십생(九死十生)하여 온 것은, 상을 바래서도 아니고 벼슬을 바래서도 아니다. 국가가 위급하여 임금께서는 소간(宵旰)의 근심이 있으시고, 생민은 어육(魚肉)이 되고, 원수 왜적은 세력이 성하게 뻗었다. 이때를 당하여 진실로 신하와 백성된 자가 참으로 몸을 버리고 목숨을 바쳐 조그마한 힘이라도 다해야겠기에 마침내 피를 땅에 바르기로 결심하고 불공대천의 원한을 풀려고 생각한 것이다. 하물며 너는 명색이 없는 데서 뽑혀 이름이 홍지(紅紙)에 드러나 은혜가 지중하니 의리상 어떻게 해야겠느냐? 정예를 소집하여 왜적을 추격해서 여기까지 온 것을 보고서 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떳떳한 이치는 속일 수 없는 것이라 믿었는데, 어찌하여 한 번 적병을 만나자 바로 은혜를 저버릴 꾀를 내느냐? 또 병법에, ‘적에 임하여 군사를 후퇴시키는 자는 목 베이고, 싸움에 임하여 구원하지 않는 자도 목 베인다.’ 하였다. 네가 비록 무식하여 이것을 잘 모르지만 나는 대강 들었으니, 조금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 하니, 구희로는 이에 항거하여 말하기를, “주장(主將)은 제가 당신 군사에 소속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당연히 진퇴의 자유가 있는데, 어찌하여 망령된 말씀을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병법에 물러나는 것을 곧다 하고 전진하는 것을 굽다 하였느냐? 진퇴의 사이에서 곡직(曲直)이 판단되는 것이다. 나는 공(公)과 직(直)을 가지고 논할 뿐이니, 주장의 소속이고 아니고는 따질 것 없다.” 하니, 구희로는 말이 수그러져 마침내 백장사(白丈寺)로 따라 들어왔다. 이날 밤에 그는 병을 핑계하여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척하고 슬그머니 군인으로 하여금 모두 도망가게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구희로를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의 심장은 개 돼지와 다름이 없다.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너 같은 무리에게서 바랄 것이 못 된다. 마음대로 해라. 너 같은 놈을 어찌 책하겠느냐.” 하였다. 구희로는 하직하고 물러갔다. 다음날 새벽에 아군이 등구현(登丘縣)에 이르니 적병이 이미 지나갔다. 배의중(裴義重)이 또 산골짜기로부터 와 나를 보고 기뻐하며 다시 전도(前導)가 되었다. 박경춘(朴景春)은 깊이 들어가는 것에 겁을 먹고, 양식이 떨어졌다고 핑계대어 굳이 돌아가기를 청하므로 나는 의리로서 회유하여 말하기를, “현군(縣軍)으로 깊이 들어와 보거(輔車)처럼 서로 의지하며 마음에 맹서하고 힘을 합하여 함께 나라를 위해 죽기를 기약하였는데, 어찌하여 생각이 잘못 들어 구희로의 그릇된 자취를 밟고자 하느냐? 당초에 기병(起兵)한 것은 바로 적을 죽여야 한다는 의를 떨친 것이니, 오늘 적을 대하는 것은 선등(先登)의 용맹을 부릴 만한 기회이다.” 하고 즉시 아군이 운반하는 양곡 10여 두를 그에게 주면서 다시 격려를 하니 박경춘은 하는 수 없이 따랐다. 이튿날 엄천촌(淹川村) 앞에 진군하니, 박경춘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억지로 고군(孤軍)을 이끌고 깊이 적의 소굴로 들어갔다가 혹 불리함이 있게 되면 누가 그 허물을 지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그를 꾸짖기를, “무기란 흉기요, 전쟁이란 위험한 일이다.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함은 인지상정이니, 너 같은 용렬한 사람이 어찌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할 줄을 알겠는가? 다만 네가 여기까지 온 것은 본래 왜적을 토벌하기 위함이니 왜적을 탐지하여 힘껏 싸우다가 다행히 살아나면 살 뿐이지, 어찌하여 기가 꺾여지고 또 군대를 철수할 뜻을 나타내느냐? 아! 마음대로 하라. 우리 군사는 너 같은 놈들에게 의뢰할 것이 못 된다.” 하였더니, 박경춘이 즉시 이끌고 돌아서려 하다가 적군을 중도에서 만날까 두려워서 산골짝에 들어가 숨어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나는 고군(孤軍)으로써 죽음을 무릅쓰고 더욱 전진하여 모곡촌(毛谷村)의 뒤에 이르니, 척후병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건너편에 적이 있습니다.” 하므로, 나는 군사들을 일제히 입에다 재갈 물리고 엎드리게 하고, 박생과 같이 자취를 감추어 엿보니 왜놈의 기병 6ㆍ7명이 막 산음의 자례촌(子禮村)에서 수색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을 박경춘에게 급히 보내어 부르니, 박경춘이 즉시 산골짜기로부터 나오므로 나는 아군 10여 명을 박생에게 주어 박경춘과 군대를 합쳐 대진(大陣) 사이에 매복케 하고, 이때에 산음의 방곡ㆍ저품(宁品)ㆍ흑석(黑石) 등 마을에 모두 적이 주둔하였는데, 여기와의 거리가 10리도 안 되었고 방곡(方谷)은 4ㆍ5리쯤 되었다. 나는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모곡의 앞 못을 거쳐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가 적 앞으로 바로 들어갔다. 적병이 달려 흑석으로 향하는데, 이때 여울에 살얼음이 얼어 박생과 박경춘은 건너지 못하였다. 나는 추격하여 쌍현(雙峴)에 이르렀으나 따라 잡지 못하고 돌아와 군사를 모곡의 뒷산에 주둔시켰다. 얼마 있다가 정찰하니 미시(未時)에 적병이 함양의 남촌 유등포(柳等浦)로부터 나와 바로 아군을 향해 오고 있었다. 사람마다 그 수효를 세었는데, 혹은 1백 25명이라 하고 혹은 1백 23명이라 하였다. 군사들이 중과(衆寡)가 현격하게 차이나는 것을 보자 위태롭게 여겨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박경춘의 병사는 아직도 왜놈과 전투한 경험이 없어서 두려워함이 더욱 심하였다. 나는 군정(軍情)이 이와 같음을 살피고 용인(龍仁)의 사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거짓으로 큰소리로 말하기를, “궁장(弓藏)에서의 싸움에 우리들 세 사람이 50여 명의 왜적을 다 섬멸하였는데, 오늘은 아군이 70여 명이라 각각 한 놈씩만 당하게 되면 그 가운데 또 어찌 10명을 당하고 20명을 당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다만 힘을 다하는데 달려 있으니 너희들은 힘쓰라.” 하고 재삼 효유하니, 군심(軍心)이 약간 안정되었다. 여러 군사와 같이 활을 가득 당긴 채 기다렸다. 군사 가운데 김대호(金大好)란 자가 있어 정예라 자칭하면서 항상 싸우고 싶다고 말하며 여러 차례 군사를 나눌 때, 반드시 선봉이 되기를 원하더니, 이번 왜적을 만나서는 넋이 벌써 나가 활을 끌고 살을 던지고 산으로 달아났다. 유생(柳生)이 은밀히 말하기를, “김대호가 도망쳤습니다.” 하므로, 나는 급히 그 입을 막으며 말하기를,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하자, 유생은 말하기를, “왜 그러십니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가 도망가는 것을 알고도 죽이지 아니하면 군사는 반드시 해체될 것이고, 그 죄를 다스려 형률에 처하게 되면 군사 기밀이 반드시 탄로될 것이니, 보고도 보지 못한 척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공과 죄를 따질 날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마침 적병이 산밑으로 돌아 내려와 바로 큰 개울을 건너 사촌(蛇村)으로 흩어져 들어가 수색하면서 왁자지껄 하였다. 이윽고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자 사방이 어둑하게 되니 여러 왜적이 머뭇거리면서 밤을 지낼 계획을 했다.
나는 박생에게 말하기를, “먹는 것이 군사에서는 첫째이니, 그대와 배의중이 여기에서 적을 기다리면 나는 마땅히 이러이러하겠다.” 하고, 즉시 군인에게 명령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가게 하여 밥을 지어 나누어 준 다음 다시 그전 장소로 돌아왔다. 배의중이 말하기를, “적병이 한 곳으로 소집되어 불을 밝히고 왕래하다가 밤이 으슥해서야 불이 꺼졌으니 무엇을 하는지 자세하지 않습니다.” 하므로 즉시 군사를 물가로 진출시켜 군사로 하여금 입에다 재갈을 물리고 달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 모래밭에 군사를 멈추었다. 배의중에게 말하기를, “군사는 기지는 없으나 신속한 것을 귀히 여기고 기지는 있으나 행동이 더딘 것을 숭상하지 아니한다. 다만 모든 일을 미리 서둘면 군색하지 아니하고, 주밀하면 근심이 없는 법이니, 먼저 탐지하고 나중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하지 않은 듯하다.” 하였더니, 배의중은 그 뜻을 알고 두 박씨와 함께 가서 망을 보니, 적병이 세 개의 토막집으로 들어갔는데 같은 담장 안이었다. 돌길은 험악하여 형세가 매우 어려웠다. 세 사람이 와서 보고하자 여러 군사는 마음에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여 나아갈 듯 물러갈 듯하며 두려워하였다. 박생이 말하기를, “깊숙히 이곳에 들어온 것은 적을 토벌하기 위함이다. 이제 만일 적을 버리고 도망하여 돌아간다면 어린애 장난과 같은 것이니, 어찌 남이 보고 들을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내가 군인을 깨우쳐 말하기를, “저놈들은 일찍이 생각지도 못했고, 우리는 기세를 탔으니, 화공(火攻)으로 하고 야경(夜警)으로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의 일이다.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고 마음 놓고 종사하라.” 하니, 군인들이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나는 두 박씨에게 말하기를, “적병이 세 막사로 나뉘어 들어갔으니 일제히 행동하지 아니하면 갑이 을을 구할 것이다.” 하고, 즉시 아군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박생이 거느려 북쪽 작은 막사를 맡고, 박경춘은 남쪽의 작은 막사를 맡고, 나는 서쪽의 큰 막사를 맡았다. 그리고 명령하기를, “시종 행사를 이리이리하라.” 하였다. 그리고 각각 군인을 거느리고 몰래 담 안으로 들어가 맡은 군막을 포위하였다. 내가 휘파람을 세 번 소리내어 부이 3군이 마름과 막대기를 늘어 세우고서 막 안에다 불을 지르고 또 이엉을 말아서 계속 던지니, 막사 안에서 불이 활활 일어났다. 적들은 놀라 뛰므로, 우리는 어두운 곳에 서서 무수하게 난사하며 어쩌다가 뛰어 나오는 자가 있으면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나오건 안나오건 간에 계속 두들겨대고, 또 마름과 막대기 등으로 군막을 둘러싸서 공격하게 하여 구멍을 뚫고 나오는 것을 대비하니, 적이 어찌할 방법이 없이 앉은 채로 재가 되었다. 마침내 불이 화약과 조총에 붙어 토막은 공중으로 날고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큰 고함소리를 한 번 울리고 군인들은 약간 퇴각하여 그 불을 피하였다. 이때에 눈이 얼어 붙고 심하게 추웠는데, 밤새도록 힘을 쓰고 나니 군졸들이 피곤하여 바로 물러가 산골짜기에 숨었다.
이튿날 새벽에 귀를 베어 오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도로 들어가니, 문득 포성이 땅을 흔들고 고함 소리가 하늘로 이어졌다. 적병 수백이 저품(苧品)의 대진(大鎭)으로부터 쇄도하여 오는데, 형세가 실로 범하기 어려우므로 이내 좌차(左次)하여 물러나 실상촌(實上村)에 이르니, 김식(金軾)이 군사를 거느리고 뒤따라 와 나에게 다시 들어가기를 요구했다. 나는 허락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이번 거사에서는 적을 기만하고 가지만 이 뒤에는 적에게 기만당할는지 어찌 알겠는가?” 하니, 김식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나를 따라오다가 중도에서 분산하였다. 김식의 사나운 졸개들이 산막을 출입하면서 숨어있는 사람들의 소와 말과 잡물을 노략질하여 수없이 탈취해 오니 그동안의 해는 왜놈들보다도 더 심하였다.
○ 흥양ㆍ장흥 연도의 왜적이 항상 내지로 들어와 분탕질하며 도둑질하였다.
○ 왜교(倭橋)의 적장 평행장(平行長)이 본진으로부터 연도의 각 진을 순시하고 장흥(長興)에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비록 다른 곳의 사람이라도 순천 사람이라 칭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면 모두 이끌고 왔다.
○ 통제사(統制使) 이순신이 고금도(古今島)로 나와 진을 쳤다.
○ 경기 양호(楊鎬)는 경주로부터 제장을 독려하여 청정을 도산(島山)에서 공격하고, 반구정(伴鷗亭) 등처의 왜적의 소굴을 소각하여 머리를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는데, 청정이 형세가 궁해지니 도망할 꾀를 하였다.
○ 체찰부(體察府)의 장계에 의하여 3도의 수령 60여 명을 잡아다 옥에 가두어 신문하고, 관으로 돌아가 일을 보게 하지 않고 수개월 동안 형틀을 씌우고, 그 중에서 더욱 심한 자를 가려서 처형하니, 안성 군수(安城郡守) 유몽경(柳夢經)ㆍ용인 현감(龍仁縣監) 임충간(林忠幹) 등이 사형되었고, 그 나머지 사람은 쌀 30석을 경창(京倉)에 바쳐서 속죄하였다.
○ 양남(兩南) 여러 곳에 주둔(屯)한 왜적이 도산(島山)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발동하여 달려가 응원하는데, 왜교(倭橋)는 행장이 머물러 지키고 수가(秀家)는 군사를 이끌고 갔다.
○ 명 나라 군문(軍門) 형개(邢玠)가 요동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향하니, 이원익(李元翼)과 윤두수(尹斗壽)를 접반사로 삼아 내보냈다.
○ 본도의 방어사(防禦使)는 광양(光陽)의 왜적이 외롭고 약하단 말을 듣고, 이달 18일에 여러 장수와 같이 군사를 거느리고 곧장 달려 밤을 무릅쓰고 가서 어두움을 이용하여 성을 포위하였는데, 적병이 진에 올라와 방어하자, 아군이 스스로 궤멸되었다. 능성현(綾城縣)의 원과 본현의 원 김응서(金應西) 등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 명 나라 장수 사(司)ㆍ송(宋)ㆍ동(董) 3유격(遊擊)이 각각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서울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이언(伊彦)ㆍ시라산(時羅山)에 진을 쳤다.
23일 왜적 백여 명이 함양ㆍ안음을 경유하여 장계현(長溪縣)을 분탕질하므로 병방어사가 군사를 보내어 잡게 하니 적병이 물러갔다. 관군은 인하여 육십현(六十縣)을 지켰다.
○ 명 나라 장수 절강유격(浙江遊擊) 계금(季金)이 수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호서에 정박하고 상륙한 다음 이내 남원에 이르러 시라산에 진을 쳤다.
○ 형군문(邢軍門)이 서울로 들어와 유진했다.
27일 이광악(李光岳)이 군사를 이끌고 장수(長水)로 향하다가 적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경준(李慶濬)이 마병 수천을 거느리고 남원에 이르러 흑성촌(黑城村)에 진을 쳤다. 이광악(李光岳)ㆍ원신(元愼)은 주포(周浦)로부터 백평촌(白坪村)으로 진을 옮겼다.
○ 양호와 마귀가 도산(島山)을 13일 동안 포위하여 밤낮으로 성을 공격하니, 왜병이 크게 곤궁하였다. 게다가 양식이 떨어지고 우물이 말라서 죽는 자가 날마다 쌓이니 청정이 자결하려 하였다. 그들은 매양 금ㆍ은과 여러 가지 보물을 성 밖으로 던져 우리의 공격을 늦추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비가 와서 날씨가 대단히 추워 아군은 힘이 다하고, 각처의 응원군이 바다를 덮고 몰려와서 학익진(鶴翼陣)을 벌이고 돌진하여 오므로, 좌차(左次)하여 물러났다. 양호는 바로 서울로 돌아오고, 마귀와 본국의 원수 권율은 군사를 거느리고 경주(慶州)에 머물렀다.
[주-D001] 청야(淸野) :
전쟁 때 적의 이용의 편리를 주지 않기 위하여 백성과 곡식을 성안으로 옮기고 들을 비움.
[주-D002] 아름다운…… 되었으니 :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내용으로, 초인(楚人)인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옥을 얻어 여왕(厲王)과 무왕(武王)에게 차례로 바쳤으나, 옥인(玉人)의 잘못된 판단으로 두 다리를 잃었고, 문왕(文王)에게 바쳐서야 보옥(寶玉)임을 인정받게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후에 화씨벽(和氏璧)은 인재(人才)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주-D003] 섶에 눕고…… 분함 :
월왕 구천(越王句踐)이 오(吳) 나라에 패하여 회계(會稽)에서 욕을 당하고 돌아와서 짐승의 쓸개를 달아놓고 그것을 빨아 쓴맛을 보면서, “너는 회계의 수치를 잊었느냐?” 하고 스스로 깨우쳤다. 섶에 눕는다는 것은 편안한 자리에 누워 자지 않고 섶에 누워 잔다는 것이다.
[주-D004] 의각(犄角) :
“사슴을 잡는 데 비유하면 한 사람은 뿔을 잡고 한 사람은 발을 비트는 것과 같다.” 한 말이 있다. 《좌전(左傳)》
[주-D005] 동타(銅駝) :
진(晉) 나라 장한(張翰)이 천하가 장차 요란할 징조를 보고는 낙양(洛陽)의 궁문(宮門)에 세워 놓은 동타(구리쇠로 만든 낙타)를 가리키며, “네가 장차 가시덤불 속에 들겠구나.” 하였다.
[주-D006] 운벽(運甓) :
《진서(晉書) 도간전(陶侃傳)》의 내용으로, 진(晉) 나라 도간(陶侃)이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으면서 매일 아침이면 벽돌 백 개를 대문밖에 운반해 내었다가 저녁에는 운반해 들이면서, “지금 난세에 나라를 위해 일해야겠는데 너무 편안하면 장차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함이다.” 하였다는 말이 있다.
[주-D007] 백홍(白虹) :
연(燕) 나라 형가(荊軻)가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기 위해 출발할 때에 하늘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주-D008] 일언흥방(一言興邦) :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의 내용으로, 정공(定公)이 공자에게 ‘한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킬 수 있는 일이 있느냐’고 묻자, 공자는 ‘임금노릇하기가 어려운 줄을 안다면, 한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키기를 기약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D009] 원균의 …… 저버렸네 :
송 나라 장군 당진(黨進)이 몸이 비대하고 체구가 커서 많이 먹었다.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는 배를 만지면서, “배야 내가 너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였다. 어느 사람이 옆에 있다가, “장군이 배를 저버리지 않았지만 배가 장군을 저버려서 먹기만 하고 한 가지 지려(智慮)도 내지 않습니다.” 하였다.
[주-D010] 사천왕(四天王) :
동ㆍ서ㆍ남ㆍ북 사방을 지키는 제석천(帝釋天)의 부하,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동,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서,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남,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북이다.
[주-D011] 자기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
비여(匪茹)는 자기분수도 모른다는 말로 《시경(詩經)》〈6월(六月)〉장에 ‘험윤비여(玁狁匪茹)’란 구절이 있고, 육량(陸梁)은 날뛴다는 뜻으로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에, ‘괴수 육량(怪獸陸梁)’이란 구절이 있는데, 그 주석에 ‘동서로 행주(行走)하는 모양을 말한 것이다.’ 하였는데, 즉 말하면 자기 분수도 모르고 날뛴다는 뜻임.
[주-D012] 장순(張巡) :
송 나라 사람. 벼슬은 도종(度宗) 때에 민병부장(民兵部長)이다. 수양이 포위되었을 때에 장귀(張貴)와 같이 겹겹이 둘러싸인 포위망을 범하면서 역전(力戰)하다가 전사하였다.
[주-D013] 하란(賀蘭) …… 제운(霽雲) :
하란(賀蘭)은 하란진명(賀蘭進明), 제운(霽雲)은 남제운(南霽雲)인데 모두 당(唐) 나라 사람임. 안녹산(安祿山)이 난을 일으켰을 때에 장순(張巡)이 수양성(睢陽城)을 지키는데, 이윽고 양식이 떨어지자 남제운은 장순의 부하 장수로서 당시 절도사(節度使)인 하란진명에 가서 군사를 빌려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하란진명은 장순의 성위(聲威)를 시기하여 종시 군사를 내주지 않아서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장순과 같이 적에게 잡혀 순절했음.
[주-D014] 뱃전을 치며 :
《진서(晉書)조적전(祖逖傳)》에서 나온 말임. 조적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벌할 때 강을 건너면서 중류(中流)에서 뱃전을 치며 맹세하기를, “중원(中原)을 맑히지 못하고 다시 건너 오는 날이면 이 강에 빠져 죽겠다고 맹서하겠다.” 하였음.
[주-D015] 초수(楚囚) :
본시 초(楚) 나라의 포로라는 말이다. 좌전(左傳) 성공(成公) 9년에 진후(晉侯)가 군부(軍府)를 관찰하면서 종의(鍾儀)를 보고 유사(有司)에게 물으니, “정(鄭) 나라에서 바친 초수(楚囚)입니다.” 답하였음.
[주-D016] 정위(精衛) :
해변에 사는 까마귀를 닮은 적은 새. 옛날 염제(炎帝)의 딸이 동해에 빠져 죽어 이 새가 되었다 한다. 항상 서산(西山)의 석목(石木)을 물어다가 동해를 메우려 한 전설이 있다.
[주-D017] 노계(魯鷄) :
닭의 일종. 대계(大鷄)ㆍ군계(軍鷄)ㆍ촉계(蜀鷄)라고도 한다. 월계(越鷄)는 알을 낳지 못하나 노계는 병아리를 낳는다.
[주-D018] 방연(龐涓) :
전국시대 위(魏) 나라 사람. 손빈(孫臏)과 함께 병법을 귀곡자(鬼谷子)에게 배움.
[주-D019] 경계(庚癸) :
군량(軍粮)에 대한 은어(隱語)임. 좌전(左傳) 애공(哀公) 13년에 오(吳) 사람 신숙의(申叔儀)가 공손 유산(公孫有山)씨에게 양식을 구걸하니 그 대답이 없고, “추(麤)는 있으니, 네가 수산(首山)에 올라가서 경계(庚癸)라고 외치면 바로 내주겠다.” 하였음.
[주-D020] 파목(頗牧) :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명장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말함.
[주-D021] 충갑(沖甲) :
충갑(沖甲)을 오용(誤用)한 것인데, 갑옷 위에다 평소 입는 옷을 껴입어서 사람의 눈을 가린다는 뜻임. 좌전(左傳) 양공(襄公) 27년에 “장차 송(宋) 나라 서문 밖에서 회맹(會盟)하려는데 초(楚) 나라 사람이 충갑(沖甲)을 했다.” 하였음.
[주-D022] 소간(宵旰) :
소간은 소의간식(宵衣旰食)의 준말.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하여 미명에 일어나 정복을 입고 해가 진 후에 저녁 밥을 한다는 뜻에서 온 말.
[주-D023] 현군(縣軍) :
응원군의 후속이 없이 홀로 깊이 적지에 쳐들어 가는 군대.
[주-D024] 보거(輔車) :
보(輔)는 협보(頰輔)인데 뺨에 붙은 뼈, 거(車)는 아거(牙車)인데 어금니 아랫뼈임. 서로 돕는다는 뜻임. 《좌전(左傳)》 희공(僖公) 5년조에, “속담에 이른바, ‘보거(輔車)가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것’은 우(虞)와 괵(虢)을 두고 이른 것이다.” 하였음.
[주-D025] 좌차(左次) :
행군(行軍)하는 데 쓰는 말임. 《주역(周易) 사괘(師卦)》에 “군대가 후퇴하며 머무니, 허물이 없도다(師左次無咎)”고 하였으니, 좌차(左次)는 후퇴하여 머무는 것을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성낙훈 양대연 (공역) | 19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