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몇 년 전인가, 나 역시 횡단보도에서의 무단 횡단에 대한 시를 쓴 적이 있다.
아마 그 원고는 고향집에 있을 테지만, 내추럴님의 시를 보며 새삼 그 때의 감정이 떠오른다.
나는 문학전공이 아니라 전문적인 운율의 문제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시를 읽을 때 주로 형식적인 면보다는 과연 이 작가가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가에 주목한다.
거기에 개멋에 가까운 삐딱한 성격이 결합되면 내겐 행복을 노래하는 작품들에선 웬만해선 감동을 받지 못한다.
행복은 하나의 완벽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리고 완벽이란 물질적인 풍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풍요
가 느껴지는,
무엇하나 부족하거나 남부럽지 않은 자기 자신에 대한 충만한 자신감이 생겼을 때를 의미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적인 풍요는 순간적이다.
(물론 언제나 정신적인 풍요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은소수가 아닐까?)
매사에 마음이 풍요로울 수는 없는 것이 세상사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람들의 결핍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결핍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고, 일상의 문제이다.
그 일상의 문제를 드러냄으로서 결핍된 존재를 인식하게 될 때, 느끼는 당혹감 같은 것을 나는 사랑한다.
그런 당혹감은 자기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극히 따뜻한 이야기들도 이런 자기반성의 기회를 주기는 마찬가지다.
문제는 자기반성의 동기다.
너무나도 도덕적인 사람들의 행동을 보며 자신의 도덕적 결핍을 보는 것은 반성이 아니라 환상이기 쉽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지극히 도덕적인 동화속 주인공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애초에 저런 류의 사람이 아니기에, 그들의 얘기가 감동적이기는 해도 막상 내 얘기처럼은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결핍된 모습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정확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런 모습에 대부분은 반감을 가지만, 그 반감은 결핍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결핍에 대한 긍정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잔인한 우리의 모습에서 개선된 우리의 모습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사설이 너무 길었다.
앞에서 말한 결핍된 인간상을 중심으로 내추럴님의 작품을 보자면
'횡단보도 앞'이란 작품은 지극히 결핍된 사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잠깐인 신호등 대기가 귀찮아서 무단횡단을 하는,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한 비판을 의식해서 타인의 동조를 기다리는,
결핍된 도덕성을 가진 사람의 얘기를 이 작품은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내가 중요하게 본 소재 내지는 화제는 회색빛이다.
아리스토텔레스라면 혹 회색을 중용의 색이라며 칭찬할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회색은 검정도 아니고, 흰색도 아닌 어쩡쩡한 색이자,
자신만의 개성을 갖지 못한 결핍의 색이다.
(결핍과 부재의 차이는 중요하다고 본다. 그 둘은 절대 동의어가 아니다.)
그 결핍은 집단속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는다.
회색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만의 개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시킬 수 있는 집단속으로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가 이다.
그렇기에 혼자서는 차마 행동하지 못하고 자신과 동일한 결핍된 사람들의 동의를 통해서 행동을 취한다.
이런 결핍된 사람들의 동의란 지극히 편의주의적이다.
더 멀리멀리, 더 빨리빨리, 더 높이높이..
(주석의 노래가사이자, 결핍된 사람들의 생활모토가 이런 것이라고 본다.)
결핍된 사람들은 모든 사회원이 동의한 사회규범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면 언제라도 규범을 어길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
이 가능성은 이기적이면서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럴 수도 있다는 당위를 부여받는 자잘한 일상을 통해,
쉽사리 현실로 드러난다.
그렇기에 이런 규범에 대한 거부는 결핍된 사람, 즉 회색인에겐 평범함이 된다.
때와 장소, 상황이란 세 박자가 잘 맞아떨어지면 당위는 현실의 문제를 이겨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도덕성의 부재가 아니라 결핍 때문이다.
만약 도덕성의 부재가 원인이라면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동의는 애초부터 필요치 않다.
자신의 부덕을 눈감아주고 동조해줄 수 있는 결핍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추럴님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우리 마음속 회색인의 평범함을 표현한 듯 싶다.
이 작품을 통해 회원분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모르겠다.
'저 사람 아주 나쁜 사람이네, 무단횡단을 했단 말이야' 하는 생각부터,
'어떻게 내 얘기를 하고 있지? 혹 나를 감시하고 다니는 것 아냐" 하는 생각까지 다양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만약 이 작품을 읽고 한번쯤 자신의 무단횡단에 대한 곧 잊혀질 죄책감을 떠올리실 회색인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 작품은 충분히 제 소임을 다한 것이 아닐까 싶다.
중요한 것은 거창한 웅변이 아니라 조그만한 깨달음일테니까...
마지막으로 일상에서 소재를 낚아내시는 내추럴님의 관찰력에 대해서는 마땅히 칭찬을 드려야겠다.
앞으로도 좋은 활동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