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맛이 폴폴, 노랑 감김치내가 자란 강릉지방에는 감나무가 많다. 가로수도 감나무이고 감나무 한 그루씩 자라지 않는 집이 없을 정도이다. 여름 장마철 쏟아지는 빗줄기에 덜 여문 감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내는 소리는 굉음에 가깝다.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을 정도니까.
잘 익어서 말랑말랑한 홍시는 황홀할 정도로 달콤하고 씨 주변의 과육은 쫄깃해서 식감이 좋다. 완전히 익지 않은 감은 깎아서 주렁주렁 매달아 곶감을 만들기도 한다. 가을이면 식구들이 둘러앉아 광주리에 한 가득 담긴 감을 깎았고 몇 개 깍다보면 손이 아프고 힘들었다. 우리가 툴툴거리기 시작하면 엄마는 꾀를 냈다. 감 껍질 빨리 깎는 내기도 시키고 누가 더 길게 깎았는지 대보는 재미를 주어 지루함을 덜었다.
한솥밥을 먹고사는 식구여도 식성이 다 같을 수는 없어서 감을 먹을 때도 홍시파와 단감파로 나뉘었다. 아빠와 나는 홍시, 엄마와 동생은 단감을 좋아했고 먹성 좋은 오빠는 치사한 실속중립파였다. 엄마가 단감을 깎으면 “홍시가 최고지 딱딱한 단감이 뭐가 맛있담” 하고 나는 투덜거렸다. “홍시는 이빨 빠진 할머니나 좋아하는 거지” 늘 엄마 편인 동생이 혀를 내밀며 날 놀렸다. 틀니도 없이 쪼글쪼글한 입을 오물거릴 내 먼 훗날의 모습이 그려지면 단감파로 슬쩍 옮겨갈까 고민을 하곤 했다.
집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살 때 유난히 가을을 기다리던 이유가 있었다. 동네 과일가게에서 커다란 대봉감을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북유럽에는 없지만 기후가 따뜻한 이탈리아에서는 당도 높은 감을 맛볼 수 있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홍시여서 스푼으로 조금씩 떠먹으며 향수를 달래곤 했었다.
홍시를 좋아하는 건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달라진 건 홍시를 볼 때마다 눈물이 앞선다는 거다.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당장 달려올 수 없는 거리감에 절망하며 밤새 울었다. 이튿날 아침 퉁퉁 부은 눈으로 집을 나서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나서야 강릉에 도착했다. 내 서러움과 상관없이 시월 중순의 가을 하늘은 얼마나 푸르던지. 그 하늘을 배경으로 빨갛게 익은 감들이 주렁주렁 달린 모습은 어찌나 슬프도록 아름답던지. 지금도 푸른 가을 하늘의 프레임 속에 감나무가 들어오면 내 눈시울은 익은 감처럼 붉어진다.
가을이 제철인 단감. 잘 익은 단감은 달콤하고 아삭한 맛이 일품이다. 비타민 C가 풍부하고 항암효과도 뛰어나다는 단감,
꼭 과일로만 먹어야 할까?
집밥 여왕인 박경아 요리샘은 딴생각하는 데 타고났다. 지난여름 출간된 그녀의 요리책 <집밥에 대한 딴생각>에서 발췌하여 단감을 이용한 노랑 감김치를 소개하고자 한다. 요즘 해 먹으면 좋은 제철 김치이다.
[내가 단감의 계절인 가을을 기다리는 이유는 노랑 감김치를 만들기 위해서다.
몇 년 전부터 만들어 온 감김치는 식재료의 색깔을 맞추다가 우연히 탄생했다. 여러 색깔의 파프리카를 한 봉지에 넣어 팔기에 사 왔는데 요리에 쓰고 나니 노란색만 남았다. 나는 물김치를 담글 때 고춧가루 대신 붉은 파프리카를 즐겨 쓴다. 남아있는 노란 파프리카로도 김치를 담가보려고 잘 어울릴 색깔의 과일은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마침 선물로 들어온 단감이 눈에 띄었다. 오호 횡재라.
노란 파프리카와 오렌지 빛이 도는 단감의 색은 서로 잘 어우러진다. 단감의 달콤한 맛이 물김치 국물에 우러나와 국물까지 맛나게 먹을 수 있다. 김치 잘 안 먹는 아이들이 먹기에도 좋다. 과일의 당질만으로도 발효가 일어나므로 굳이 설탕이나 찹쌀풀을 넣지 않아도 된다. 단감의 맛과 향을 제대로 즐기려면 향이 강한 파, 마늘은 과감히 빼는 것이 좋다. 단감을 깍두기처럼 빨갛게 버무리면 강한 양념맛 때문에 단감 고유의 맛이 줄어든다. 천연 단맛을 폴폴 풍기는 노랑 감김치는 보기에 예뻐서 더 맛난 것 같다.
재료 :
알배추 2개 (약 2kg), 딱딱한 단감 500g, 무른 감 100g, 노란 파프리카 3개 (약 600g)
콜라비와 무 각 200g, 소금물[물 4리터, 소금 400g (10:1 비율)], 국물[무 아랫부분 500g, 양파 200g, 생강 30g, 갈아서 즙으로 낸다(마늘은 생략하는 것이 좋으나 굳이 쓰고 싶다면 3톨 정도 즙으로 사용). 여기에 배즙 2컵과 물 4컵을 넣는다]
만드는 법 :
과일 넣은 김치는 오래 묵혔다가 먹는 김치가 아니라서 알배추를 사용하는 게 좋다. 알배추를 반으로 갈라 소금물에 4-5시간 절인다. 배추와 소금물은 1:2 비율로 한다. 절인 배추를 바로 씻으면 오히려 쓴맛이 난다. 다 절여지면 씻지 말고 그대로 소쿠리에 건져 1시간 정도 물기를 뺀다. 그렇게 해야 고소하고 단맛을 유지할 수 있다. 물기가 빠지면 한 포기씩 씻어 건져둔다. 무 윗부분과 콜라비를 반달 모양으로 썰고 그 위에 소금 2큰술을 솔솔 뿌린다. 오래 절이면 아삭거림이 줄어드니 약 30분 정도만 절인다. 아삭거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덜 절여도 좋다. 무만 사용해도 되지만 콜라비는 아삭거리는 식감이 좋고 단맛도 있으므로 반반씩 사용하면 더 맛나다. 딱딱한 단감은 반달 모양으로 썬다. 파프리카 1개는 채썬다.
나머지 파프리카 2개와 무른 감 100g을 믹서에 갈아서 국물에 섞는다. 물 4컵에 소금 2큰술을 녹인 후 국물에 섞는다. 절여진 배추를 다시 한번 가른 후 썰어 놓은 재료를 켜켜이 넣은 후 국물을 부어서 자작하게 한다.
* 메모 : 재료가 물 위로 뜨지 않도록 김치 맨 위에 묵직한 그릇이나 돌을 놓아 눌러준다. 발효가 되기 전에 냉장고에 넣으면 맛이 없다. 봄가을에는 상온에 하루 정도 두었다가 냉장고에 넣는다. 혹시 집에 석류가 있다면 김치를 꺼내 먹을 때 석류 알갱이를 김치 위에 뿌려 주어도 좋다. 그러면 김치 색깔이 더 예뻐지고 맛도 더 상큼해진다]
=> [행성비 출판사에서 출간한 <집밥에 대한 딴생각> 38-41 페이지 발췌함.]
** 노랑 감김치 응용
소면 또는 베르미첼리를 삶아 감김치 국물에 말아먹으면 좋다. 속이 답답할 때 감김치 국물을 마시면 그야말로 속이 뻥 뚫린 듯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