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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1862.10.2. ~ 1931.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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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한학과 경학에 뛰어났던 조병준 선생은 젊어서는 고명한 유학자들을 찾아 학문의 세계를 논하던 선비였다. 그러나 국모가 시해 당하고, 나라가 없어지는 국치를 겪자 붓을 꺾고 분연히 총칼을 잡아 의병의 길로 나섰다. 이후 그는 만주로 망명하여 조국 광복을 위한 항쟁의 전면에 나선다. 남만주 대한독립단 총참모를 지냈으며, 민국독립단 도총재, 평북독판부 독판, 광복군 참리부 참리부장, 내몽고지역 의민부 총재로서 조국 독립의 기운과 불길이 만주와 몽고에서 타오르도록 만들었다.
조병준(趙秉準, 1862~1931)선생은 1862년(任戌) 10월 2일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면 채마동 배양리에서 아버지 조승규(趙承奎)와 어머니 경주 김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후에 의주군 월화면 주음동으로 이주하였다. 자는 유평(幼平), 호는 국동(菊東)이다. 본관은 풍양으로 고려 개국공신 조맹(趙孟)의 후예가 된다. 그의 집안은 8대조인 조시태, 7대조인 조군옥, 6대조인 통정대부조충선, 5대조인 중추원 동지부사 겸 한성좌윤 조성유가 대대로 한양에서 세거하였다. 5대조인 조성유가 경종 때 신임사화의 변을 당하여 평안북도 구성군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죄가 풀려 신원(伸寃)된 후에도 그곳에 그대로 눌러 살게 되었다. 4대조인 조득, 조부인 조정, 부친인 조승규는 대를 이어 학식이 높은 선비로 이름을 알렸다.
조병준은 1864년 3세 때 부친으로부터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7세 때는 이미 오언시를 짓는 수준이 되었는데, 향리의 노인들이 ‘벌 봉(蜂)’ 자를 출제하여 시험하자 즉석에서 시재(詩才)를 보여 그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0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13세인 1874년 의주군 월화면 진음동에 사는 평산 신씨 신병옥과 혼인하여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성품은 강하고 위엄이 있되 자상하였으며, 천문지리와 음양수학에 도 이름이 높았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오로지 경의학(經義學) 공부에만 전력하였다.
평안도 의주에서 학문으로 고매한 권익형과 교유하면서 경의학의 연구와 토론을 거듭하였다. 점차 명성이 인근에 높아져 동학 가운데 비현면의 최석하, 용천군의 장정식 등이 함께 공부하기를 청하여 2~3년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철산군의 부호 오학민의 초빙으로 전임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에게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이 날로 늘어났다. 그는1892년 태천에 거주하는 운암(雲菴) 박문일(朴文一) 문하생이 되어 학문을 닦았는데, 스승으로부터 “기품이 청수하며 학문이 넓고 뜻이 돈독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선생은1895년 10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는 ‘국수보복(國讐報復)’의 대의를 품고 유인석의 의거에 호응하여 유학자인 장원섭, 신우현 등과 함께 평북 창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평안도 일대의 산포수를 모집하여 의병단을 조직하고 일제에 항전하였다. 선생은 일제의 헌병에게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그 후 고종의 특별사면으로 출옥하였다.
1898년 평생의 동지이자 처남인 신우현이 의주군 월화면 증곡에 새로 학당을 건축하여 ‘증곡재(曾谷齋)’라 칭하고 조병준을 초청하였다. 조병준은 증곡재에서 박문일 선생의 초상을 모시고 경의학을 가르치면서 문하생 수천 명을 배출하였다. 증곡재에는 서북 각도의 청년 학도 7~8백 명이 모여 유학을 연구하면서 국사(國事)를 토론하기도 했다. 이 때 조병준은 날로 기울어져 가는 국정을 통탄하면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도이(島夷, 섬나라 오랑캐)인 왜적과 4백 년 동안 원수인데 지난 을미년 우리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하였으니 우리 국민은 왜적과는 불공대천지 원수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 선비들로서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멸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다. 그러므로 삼남지방의 학자들은 의병을 일으켜 혈전을 마다하지 않은데 우리 지방의 선비들은 묵묵 부동하니 이런 수치가 어디 있는가.”
조병준은 눈물을 흘리며 제자들에게 때를 보아 거의할 것과 해외에 나가 군대를 양성할 것을 간곡히 권유하였다. 이러한 권유를 들은 제자들 가운데는 실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병준은 스스로 솔선하여 서간도로 망명한 후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조병준의 문하생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한 인물은 백여 명에 달하며 건국공로훈장을 수상한 자만도 유여대, 양전백, 김승학, 백기준, 김승엽, 최지관, 홍주, 이세현, 김경하, 김시향, 김익곤, 김창곤, 정이형, 신언갑, 백의범, 한인권, 김승만, 고득수, 박이열, 배준호, 장학구, 최일엽, 김시황, 최영호, 홍식 등 수십 명에 달한다.
조병준은 자신의 학문이 아직 미진하다고 생각하고 1902년 당대 유학의 제1인자로 알려진 충남 태안의 거유(巨儒)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들었는데, 귀향하던 길에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선생을 서울에서 만났다. 이때 국사를 논의하던 의암 선생이 이완용을 소개하자 조병준은 “의주의 조모”라고 인사했는데, 이완용이 서북인이라고 멸시하는 듯 “의주? 의주? 의주라?” 짐짓 반복하기에 조병준은 크게 화를 내며 “공은 일국의 대신으로서 선조대왕이 몽진한 곳도 모르냐?”며 옆에 있던 목침을 집어 던졌다. 의암 선생의 만류로 겨우 화해되었으나 조병준의 기개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끝내 나라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조병준은 결사보국할 일념으로 산포수 대장 최원길 등과 재차 거의하여 평북 창성의 일본헌병대를 습격하며 항전하였다. 의병진은 처음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으나 점차 일제의 병력이 증강됨으로 국내에서의 의병 활동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조병준은 의병진을 정비하여 망국의 한을 품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조병준은 봉천성 관전현과 환인현 등지에 근거를 두고 의병장 전덕원, 박장호, 이진용, 조맹선, 백삼규 등과 함께 농무계와 향약계 등을 조직하여 식산(殖産)과 교육에 전력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의병 단체를 중심으로 재만 동포 자제의 교육과 생계 보장의 계책을 세우고 각 시가지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교습하고 농촌에는 서재(書齋)를 두어 구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또한 사창(社倉)을 설치하고 농가의 형편에 따라 수 두(斗)에서 일 석(石)까지 곡물을 헌납 받아 비축하고 유사시에는 군량미로 쓸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일제의 압박을 피해 남만주로 모여드는 애국청년들의 수가 수만 명에 달하자 조병준은 이들을 규합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항일사상을 고취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도록 하였다. 그 해(1919) 음력 3월 15일 단군 어천절을 기하여 만주 각지에 분산되어 산발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유림영수와 보약사 대표, 의병 수령, 향약계 대표, 농무계 대표, 포수단 대표 등 560여 명이 유하현 삼원포 서구 대화사에 모여 각 단체를 해산하고 항일투쟁의 통합 단일 기관인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단은 서간도 지역 대다수 독립운동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무장 독립운동 단체였으며, 초기부터 방대한 규모를 형성할 수 있었다.
대한독립단의 경고문.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조선 민족이 강력하게 항일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국한문 혼용체로 쓰였으며, 끝부분에 대한독립단 총단장 조맹선 등 간부들의 이름이 잇달아 적혀 있다.
조병준은 대한독립단의 총참모에 선임되어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 등과 힘을 모아 항일투쟁의 방안으로 만주 각 현에 독립단 지단을 조직하였다. 특히 관전현 지단에는 윤창수, 강용오, 김평식, 조종서 등으로 사무를 분담하게 하고 실천 방략으로 우선 국내에 있는 일제의 행정기관을 파괴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를 위하여 김승학을 상해에 파견하여 무기를 구입해 왔다. 구입한 무기로 청년들을 무장시키고 이들을 국내로 잠입시켜 일제의 경찰기관을 습격하는 한편 부유한 자들에게 군자금을 제공하도록 조처하였다.
한편 관전현 지단으로 하여금 매일 국내로부터 들어오는 수십 명의 청년들을 독립단 본부로 이송하여 독립군에 편입시키고 일제의 밀정기관인 일민단, 보민단, 강립단 등을 모두 숙청 박멸하기에 힘썼다. 대한독립단은 창단된 지 1년 만에 급속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압록강 일대에서 일제에 동조하여 헌병보조원 또는 면서기 등으로 근무하던 친일의 무리들이 일제의 관복을 벗어버리고 탈주하여 대한독립단의 독립군으로 가입하는 경우가 속출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국경의 경비를 더욱 강화하고 중국 정부에 대하여 대한독립단을 비롯한 서간도의 독립군단들을 해체시키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일제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만 독립군단의 해체를 요구할 뿐이었다.
대한독립단에서는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독립군을 양성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총단장 조맹선은 하얼빈에 주둔하고 있던 백계 러시아군과 교섭하여 그 군대 안에 한인청년부를 특설하기도 했다. 1919년 말경에 이르러 당시 독립단 총재부 안에서는 서로 엇갈린 두 가지 의견이 대립되었다. 하나는 복벽주의파로 조선 왕조의 부흥을 꾀하였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파로 민주 정권의 실현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서로의 의견이 대립된 것이다. 전자는 주로 완고한 노장층이었고 후자는 새로운 사상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인 소장층이었다. 서로의 의견을 달리하던 두 파는 결국 연호 문제로 분열되고 말았다.
복벽파는 ‘단기’ 또는 ‘융희’를 고집하고 민주파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연호인 ‘민국’ 연호를 주장하게 되었다. 이로써 기원독립단과 민국독립단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민국독립단은 조병준을 비롯하여 신우현, 유응하, 김승학, 변창근 등의 비교적 소장파였고 기원독립단은 박장호, 백삼규, 전덕원, 이웅해, 김평식 등의 유생과 의병장 출신들이었다. 민국과 기원의 양파는 이념 대립으로 간혹 마찰이 있기는 하였으나 항일운동에 있어서는 서로 협조와 협력을 아끼지 아니 하였다.
민국독립단 도총재로 추대된 조병준은 상해 임시정부와 유기적인 연락을 가지며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1919년 10월 10일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연통제를 실시함에 따라 조병준은 그 해(1919) 12월 5일자로 임시정부 연통제 기관인 평북독판부 독판에 선임되었다. 독판에 취임한 조병준은 신우현, 김승학, 홍식, 백의범 등을 통해 독립단 국내지단 설치와 임시정부 연통제 실시를 위하여 노력한 결과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일대에 모두 89개소의 지단조직과 연통제 조직을 설치하였다.
1920년 2월 항일전선의 통일을 절감한 대한의용군사협회, 한족회, 민국독립단, 대한청년단연합회 등이 통합하여 임시정부 직할의 대한광복군으로 개편하였다. 대한광복군은 남북 만주 교민들의 통치기관인 광복군참리부와 남북 만주 군사기관인 광복군사령부로 나뉘어 설치되었다. 조병준은 민정기관인 광복군참리부 참리부장에 임명되어 협찬 김승만, 내무사장 신우현, 법무사장 신언갑 등과 함께 교민들의 생업과 교육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조병준은 남만주 통의부통의부장에 피선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이 때 조병준은 일제가 머지않아 만주 침략의 계획을 실현할 것을 예견하고 우선 동지 신우현, 김승학, 백기준 등 10여 가호 80여 명을 인솔하고 내몽고 수원성 포두현 중탄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의 이주는 안창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아일보》1923년 11월 28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내몽고 포두진은 황하의 상류방면으로 (중략) 평안도 출신의 신우현 외 네 명의 조선 사람이 이르러 삼천여 명의 자금으로 부근의 토지를 사고 살림을 벌리는 동시에 수백 명의 조선사람 단체를 이주케 할 계획이라는데 그들은 본시 조선독립단의 수령 안창호 씨를 통하여 미국에 있는 조선인에게 자금을 얻어다가 포두진에 근거지를 삼는 중으로…’
이 기사에 따르면 조병준 일행은 적어도 1923년 11월 이전에 포두에 이주하였으며, 이들의 이주 자금은 안창호가 미주 교포들에게서 마련하여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들의 이주 배경에 임시정부 안창호가 있었다. 안창호와 조병준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내몽고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조병준이 안창호가 주도하는 연통제 조직인 평북독판부의 독판으로 활동하였고, 임시정부가 남만주에 민정기구로 설치한 광복군참리부의 수장인 참리부장을 역임했다는 것, 그리고 조병준의 제자인 김승학이 거금을 출자하여 정간되었던 <독립신문>을 맡아 운영한 점 등을 통해 안창호와의 긴밀한 관계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안창호는 연해주나 북만주 등지에 농장건설을 물색한 사실이 있었고, 흥사단이라는 조직을 갖고 있었다. 농장건설의 의지와 자금을 갖고 있던 안창호가 내몽고의 포두 지역을 주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외에도 내몽고지역에는 일찍부터 한인들이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1920년 5월 22일자 <독립신문>에 ‘당시 몽고지방에 거주하는 호수가 67이요 인구가 340명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심산 김창숙의 [자서전]에 의하면, 1925년 심산은 중국 전 외무총장 서겸(徐謙)의 주선으로 풍옥상 장군을 통해 수원성 포두에 있는 3만 정보의 개간 가능한 땅을 허락 받았다. 끝내 개간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무위로 그치고 말았으나 내몽고 지역은 일찍부터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곳이다.
대한독립단의 군자금 영수증
1923년 무렵의 일제 조사 자료에 의하면 포두는 지리적 자연적 환경이 좋은 지역이었다. 황하의 상류에 위치하는 인구 3만 명 정도의 도시로 땅은 비옥하고 물가는 북경의 절반 정도였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교통도 편리하여 1922년 경수철도가 개통되면서 대동, 장가구를 거쳐 북경과 직접 연결되었다. 조병준 일행이 포두 지역에 정착하면서 백기준, 신언갑, 신용철 등 일부 인사들은 포두 시내에 거처를 마련하였고, 나머지 인원은 조병준 인솔하에 포두에서 서쪽으로 120km 떨어진 색등호로두(色登葫蘆頭)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이곳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주선으로 농지 3백여 향, 약 60만 평을 15년 기한으로 임차하고 이를 개간하여 생활 터전을 삼았다. 개간한 땅에는 ‘배달농장’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배달농장 외에도 배달학교와 대종교 수광시교당(綏光施敎堂)을 설립하고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대종교를 신봉하게 함으로써 배달민족의 얼을 심어 주었다.
포두 시내에도 거점을 마련하였다. 조병준의 아들 조종서와 제자 백기준, 신언갑, 신용철 등은 모두 시내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이들은 교통이 편리한 시내를 중심으로 대외 연락과 통신 등의 업무를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용철은 병원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이들이 건립한 한인촌의 규모나 모습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 한인촌을 다녀간 황학수의 회고록에서 당시 포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차처는 한인 수백 명이 자작 일촌하야 황지를 개척하고 규모 있게 생활하는데, 황토로 삼위의 제단을 건축하고 춘추로 동중 남녀가 회집하여 제사를 드리는데 제1위는 단군황조이시고, 제2위는 고구려 태조 주몽이시며, 제3위는 이조충신 임경업 장군이시더라.’
황학수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1934년경 이었다. 이때는 조병준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인 조종서가 중심이 되어 이들을 이끌고 있었다. 기록을 통해 볼 때 포두지역의 한인촌은 그 규모가 작지 않았던 것 같고 민족의식이나 질서도 정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인촌을 건설한 조병준 일행은 이곳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것이 임시정부 직할의 의민부로서, 조병준은 총재를 맡았다. 의민부의 인사들은 조병준의 인척과 지연 및 학연관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대부분 평북 의주 출신이었고, 김승학, 백기준, 신언갑 등 대부분이 조병준의 제자들이었다. 부총재 신우현은 조병준의 처남이었다. 그는 일찍이 증곡재를 건립하고 조병준을 초빙하여 평안도 일대의 수많은 청년들을 지도한 이래 평생 함께 활동한 동지이기도 했다. 조종서와 조운명은 조병준의 아들과 딸이며, 오용덕과는 사돈관계가 된다.
의민부는 임시정부와 연계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이미 서간도에서부터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내몽고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도 임시정부를 주도하였던 안창호와 협의하고 그의 후원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임시정부와의 관계는 내몽고에 생활터전을 마련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의민부가 임시정부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활동하였는지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김승학의 [망명객행적록]에 따르면, 의민부는 임시정부의 직할 하에 두었으며 농장의 수입금을 임시정부 자금과 교통 연락비로 연 2회씩 제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복을 입은 조병준 선생. 선생의 초상 사진에 관복을 입은 모습을 가상하여 그린 이미지다. 당대 유학의 1인자라 불렸던 전우 선생은 젊은 시절의 조병준을 만나 본 뒤 “타고난 자질이 트였고 지식이 매우 정밀하고 바르다”고 칭찬했다.
의민부가 임시정부와 연계되어 활동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알게 하는 자료가 있다. 먼저 조병준의 문집 원고가 김구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김승학은 북경에서 비밀기관을 설치하고 임시정부와 남북 만주의 비밀연락을 맡았던 일이 있었다. 이때 남경으로 가는 김희남에게 독립운동 비밀문서와 함께 조병준의 문집 원고를 김구에게 보냈다. 비밀문서와 조병준의 문집은 김구에게 전달되었고 환국 후 조병준의 후손에게 전달되었다.
또 하나는 포두에 있던 인사가 남경에서 발행되는 잡지에 글을 기고한 것이다. 김구의 한국국민당에서 발행하던 잡지 <한청(韓靑)>제1권 제5기(1936년 12월 15일 발행)에 ‘몽암(夢巖)’이란 필명으로 [투쟁과 진리]라는 글이 연재되었는데, 이 글은 ‘불 붙어 드러가는 수원 포두에서’ 보낸 것이었다. 조병준의 문집 원고가 인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된 것, 포두에 있는 인사의 글이 남경에서 발행되는 잡지에 연재되고 있는 것 등을 보면, 내몽고 포두 지역과 임시정부 사이에 연락관계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의민부는 중국 국민당과 합작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조병준은 1931년 10월 2일 포두현 중탄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였다. 유해는 제자들에 의해 고국으로 옮겨져 의주군 월화면 주음동에 안장하고 묘비를 건립하였다. 조병준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최진숙(최준), 신언갑, 조종서, 김운봉 등 4인이 의민부를 7년간 계속 이끌었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제가 이 지역에 침입해 해산할 때까지 독립 운동의 구심점으로 역할하였다.
조병준은 독립운동을 지휘하던 영수로서 일하면서도 저서로 [묵초(墨草)] 6권, [광복운동사], [친술소사(親述小史)] 1권 등을 남겼다. 이러한 자료들은 앞서 밝힌 것처럼 중일전쟁 중 제자였던 김승학을 통해 임시정부 김구 주석에게 전달되었다. 김구 주석은 이 자료를 장사, 중경 등지로 전전하면서도 정성껏 보관해 오다가 해방으로 귀국한 후 유족에게 안전하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가족들이 고향에서 월남할 때 북한 당국에 의해 압수당하여 끝내 출판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병준의 유족으로 장남 조종서가 있는데 그는 의병단 시기부터 만주 관전현 대한독립단, 광복군참리부, 포두현 의민부 시기까지 선친인 조병준을 보좌하다가 선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 직무를 대행하였다. 그는 해방 후 환국하였다가 월남하여 1954년 별세하였고, 차남 조명서는 광복군사령부 연락원으로 활동 중 1924년 반대파 공산주의자에게 피살되었다. 장녀 조의명은 수원 백씨 백의범에게 출가하였다. 백의범은 광복군사령부 교통사장으로 임명되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1920년 친일 부호 김종희의 밀고로 의주군 비현면 광상동 조시목의 집에서 일제 경찰이 습격을 받아 동지 고득수 등 4명과 함께 교전하다가 전부 전몰하였다. 차녀 조운명은 신의주에 거주하던 진주 김씨 김운봉에게 출가하였다. 출가 후에는 남편과 함께 만주로부터 포두현까지 부친을 따라와서 의민부 부녀부 차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였다가 1968년 별세하였다. 후손들은 서울과 경기 일원에 거주하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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