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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생각하기(2021.11.26)
손과 몸을 쓰며 사는 삶이 주는 그 풍요로움에 대하여
매튜 B.크로포드 /윤영호 옮김
사이
매튜 B. 크로포드 Matthew B. Crawford
철학자이자 모터사이클 정비사다. 캘리포니아 대학 샌터바버라 캠퍼스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던 중 철학의 매력에 빠져 야간학교에서 철학의 언어인 그리스어를 공부했으며 시카고 대학에서 정치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동대학의 사회사상위원회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워싱턴에 위치한 싱크탱크의 책임자로도 일했다. 현재는 버지니아 대학 고등문화학술원의 연구원이자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에 위치한 모터사이클 정비소인 쇼코 모토를 운영하고 있다.
대학원 졸업후 지식노동자로서의 삶에 대한 부푼 기대감을 안고 시작한 일에서 저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노동의 정신적 영역에 깊숙이 침투한 자본의 공격으로 인해 자신이 넥타이를 맨 노예가 된 심정이었다. 결국 높은 연봉과 지위 등 모든 혜택을 뿌리치고 모터사이클 정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소도시의 쇠락한 곳에 언제 물이 샐지도 모르고 보험에도 들지 못하는 창고에서 자신만의 정비소를 연 저자는 그곳에서 행해지는 작업이 칸막이 사무실에서의 노동과는 달리 생각과 행동을 함께 요구한다는 점 때문에 이전의 일에서 느꼈던 직업적 공황감을 달래주는 위한을 얻게 된다. 또한 직접 손과 몸을 쓰는 것이 지적으로도 더 많은 능력을 요구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저자는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활기를 잃어버린 현대사회에서 육체적 몰입이 주는 치유와 위안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묻는다. 우리는 어쩌다 손과 몸도 맘껏 쓰지 못하게 되었을까?라고, 21세기는 현대인이 그 어느 때보다 무기력해지고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는 정보화 덕에 만질 수 없는 시스템에 갇혀 세상과 맞닿은 생생한 앎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보드 위에 갇힌 삶에서 벗어나 인터넷, 스마트폰을 끄고 자신의 몸과 손을 써서 직접 무언가를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생각은 훨씬 창의적이 되고 또한 이 세상과 보다 더 풍부하고 지적인 교류를 시작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서문
우리는 왜 직접 손과 몸을 움직여 일할 때 더 만족감을 느끼는 걸까?
쓸 만한 중고 전동공구를 찾는 사람이라면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에서 딜러로 활동하는 노엘 뎀프시를 찾아가야 한다. 어수선한 노엘의 창고는 금속선반, 밀링머신, 테이블 전기톱으로 가득하며 그 중 상당수는 한때 학교에서 사용되던 것들이다. 이베이에도 역시 학교에서 넘어온 중고장비들이 넘쳐 난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중고시장에서 15년 정도 굴러다녔을 것이다. 기술수업이 한물간 구식 취급받기 시작한 때는 1990년대로 당시에 교육자들을 학생들을 지식노동자로 육성하려고 했다.
우리의 교육에서 도구들이 사라진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인공물들의 세계에 대한 무지가 심화되는 그 첫 단계다. 실제로 최근에 구조를 숨기는 것을 목표로 삼은 엔지니어링 문화가 부각되면서 우리가 날마다 사용하는 수많은 장치들을 육안으로 쉽게 살펴볼 수 없게 되었다. 당장 자동차, 특히 독일제 자동차의 후드를 들어 올려보면 엔진은 마치 영화 2002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도입부에서 원시인들을 완전히 매료시켰던 은은한 광택이 나는 단조로운 석판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후드 아래에는 또 다른 후드가 있다. 이런 식의 구조적인 은혜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작은 장비들을 결합시키는 잠금장치를 해체하려면 종종 흔하게 구할 수 없는 정교한 스크루드라이버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는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나 화난 사람들이 내부에 손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목적이다. 반면 아니가 있는 독자들은 수십 년 전만 해도 시어스(1970년대 미국 최대 유통업체) 카탈로그에 모든 가전제품들과 다른 많은 기계제품들의 부분별 확대도면들과 설계도면들이 실려 있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에는 그런 정보가 아주 당연하게 소비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도구의 사용이 줄어든 것은 물건에 대한 우리의 성향이 더 수동적이고 의존적으로 변했다는 징후인 듯하다. 실제로 우리가 직접 손으로 물건을 고치거나 만드는 순간에 생겨나는 활기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직접 물건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만들어진 물건을 구입한다. 예전에는 직접 고쳤다면 이제는 새로 구입하거나 전문가에게 수리를 맡기는데 간혹 전문가조차 몇몇 사소한 부품의 고장 때문에 전체 시스템을 교체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나는 현재에는 거의 외면을 당하지만 시대를 초월한 이상을 옹호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손기술과 그 손기술로 구조와 물질의 세계를 지향하는 데 필요한 자세다. 노동자로서든 소비자로서든 이제 우리는 대부분 그런 기술을 그리 많이 활용할 필요가 없으며, 단순히 손기술을 개발하고 권유하는 행동은 자칫 실리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다. 실리적인 경제학자들은 돈으로 충분히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을 시간을 들여 직접 만드는데 소요되는 기회비용을 지적할 것이다. 또 현실적인 교육자들은 청년들에게 한물간 구닥다리 직업을 가르치려는 시도를 무책임하다고 질책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가정이 청년들을 지극히 정체가 불분명한 직업으로 이끌려고 하는 이상한 관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1985년 경에 교육잡지들에는 급부상하는 테크놀로지 혁명, 첨단기술과 미래의 세계에 대비한 아이들의 교육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미국의 미래주의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 새로운 것이라면 미래주의가 소위 버추얼리즘과 접목된 것뿐이다. 버추얼리즘이란 일종의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장차 우리는 물질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순수한 정보경제로 진입하게 된다고 전망한다. 새롭지만 그리 새롭지도 않다. 이제까지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탈공업화 사회를 향해 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제조업 일자리들은 불안할 정도로 많이 미국 내에서 사라졌던 반면 숙련공 일자리들은 그렇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마루판을 제작하거나 자동차를 수리해야 한다면 중국인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중국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건설업계와 자동차 정비업계는 모두 만성적인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숙련공 직종과 제조업은 오랫동안 학자계층에서 블루칼라로 여겨졌고 그런 직업들의 진혼곡이 울리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이런 여론에 균열이 일어나는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2006년에 월스트리트 저널은 숙련된 손기술을 활용한 노동이 윤택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극소수의 확실한 진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다.
이 책은 경제학보다 직접 무언가를 만들고 고치는 경험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또한 우리의 생활에서 그런 경험이 줄어들면 어떤 문제가 일어날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고자 한다. 이런 추세가 인간이 최대로 번성할 가능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도구의 사용은 우리 본성의 영구적인 요구에 합치하는가? 손기술의 개발을 옹호하는 주장이 일과 소비에 대한 처방과 상충하기 때문에 이 책은 어느 정도 문화적 논쟁이기도 하다. 나는 점점 더 손작업을 기피하는 행태를 불기피하거나 바람직하다고 여기도록 유도하는 이런 가정들의 출처를 밝히고 그에 대해 파헤쳐 보려 한다.
정치철학 박사에서 모터사이클 정비사로!
나는 가장 최근에 모터사이클 정비사로 직접 일했던 내 경험을 자주 참고사례로 언급할 것이다. 픽업트럭에 실려온 지 며칠 만에 모터사이클이 힘차게 내 정비소에서 달려 나가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나는 아무리 콘크리트 바닥에서 하루 종일 서 있었다고 해도 이내 피곤함을 잊어버린다. 한동안 바이크를 몰지 못했던 남자는 헬맷 속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든다. 한 손은 스로틀을 쥐고 다른 한 손은 클러치를 쥐고 있기 때문에 그는 손을 흔들어 내게 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껏 신난 그가 경쾌하게 스로틀을 당기면서 부와이아앙! 부릉부릉! 하는 우렁찬 배기음으로 인사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기계음에 실린 복화술이며 그 대화의 요지는 간단하다. 오예!
내 바지 속에 들어 있는 돈뭉치는 예전 직장에서 현금으로 바꾸던 수표와 느낌이 다르다. 시카고 대학에서 정치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나는 워싱턴의 한 싱크탱크에 소장으로 취직했다. 하지만 늘 피곤했고 솔직히 내가 보수를 받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과연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유형의 상품이나 유용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가? 이런 무익한 기분이 들면서 의욕을 잃었다. 보수는 좋았지만 사실 보상 같은 느낌이었고 5개월 만에 그만두고 바이크숍을 열었다. 어쩌면 내가 단지 사무직 업무에 맞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면에서 내게 이상한 기질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여기에 내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그것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지만 대중의 인정을 거의 받지 못하는 직관을 제대로 다루고 싶다. 이 책은 공식적으로 지식노동으로 인정받는 다른 직업들과 비교해 내가 육체노동을 할 때마다 항상 더 크게 느끼는 행위주체성과 능력에 대한 감각을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종종 내가 육체노동에서 더 지적으로 흥미를 느낀다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이유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내가 제시하는 사례들이 대부분 기계수리와 건축작업인 이유는 한때 전기공으로 일했던 적이 있는 만큼 그런 일들이 내게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주장이 다른 작업들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닌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들이다. 하지만 나는 여자들도 남자들 못지않게 무언가를 직접 만져가면서 하는 매우 유용한 손작업의 매력을 인식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제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 사항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는 장인정신이라는 단어에 따라붙는 신비주의는 버리고 그런 기술이 주는 실질적인 만족감을 제대로 다루고 싶다. 이 책에서는 일본도 장인이나 그런 부류의 명장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 일상적인 본질을 강조하기 위해 가급적 기능보다 기술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이다. 물론 그 두 단어를 엄격하게 구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장인들과 비교하면 내 기술은 아주 초라한 수준이기 때문에 내겐 빈틈없는 장부촉 이음새나 다른 정밀한 결과물들을 만들어내는 고도의 정신력에 대해 언급할 만한 실력은 없다. 개략적인 노동의 방식으로써 우리는 장인정신이 기준을 제시한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우리 사회 같은 거대시장경제에서 경제적으로 실행이 가능한 생활방식을 예시한 사람들은 바로 숙련공들이다. 그들은 어디서나 편하게 이용할 수 있고 여러 면에서 장인들과 비슷한 수준의 만족감을 제공한다. 그런데 우리는 장인을 본인의 쾌적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반면, 숙련공은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집 아래로 기어들어가거나 기둥에 올라가 다른 사람들의 물건을 고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간혹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육체노동의 고상한 이미지를 배제하고자 한다. 더불어 노동자 계층에게 더 잘 어울리고 더 자유롭고 용기 있는 것 같은 단순한 삶이라는 그럴듯한 개념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밝혀둔다. 실제로 그런 기술직에 대해 나는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위상을 회복시키고 싶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그렇게 한다고 해도 여러 골치 아픈 문화적 전형들에 가로막혀 부각되지 않는다. 나와 함께 전기공이나 정비사로 일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블루칼라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일치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틀에 박힌 삶을 거부하는 괴짜들이었고 일부는 나와 마찬가지로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직장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했다.
왜 우리는 갑자기 직접 농사를 짓고, 뜨개질을 하고, 가구를 만드는 걸까?
이 책에서는 진정으로 유용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일을 옹호하는 주장을 펼칠 것이다. 더불어 소위 유지와 수리의 윤리에 대해 살펴보는데, 그럼으로써 나는 기술을 전문적인 직업이 아닌 자립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 많은 물건들을 집중해서 다뤄보아야 한다는 말을 전달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제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물건들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왜 일부 신형 벤츠 자동차 모델들은 오일의 양을 측정하는 계량봉 막대기를 사용하지 않는가? 소비자 문화에 대한 이 기본적인 질문은 일에 대한 몇몇 기본적인 질문들과도 연관되는데 불필요한 사용자으 개입이 줄어들게 되면 장비들도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와 모터사이클이 엄청나게 복잡해지면서 그것들을 수리하는 직업은 어떻게 변했는가? 우리는 종종 기술 변화에 발맞추기 위해 노동인력의 기술향상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즉, 21세기의 정비사가 기계장비에 설치되는 온갖 복잡한 전자장치들을 감당하기 위해 갖춰야 할 자질은 무엇인가?
그 다음의 문제는 의미 있는 일과 자립이라는 문구가 암시하는 영역들에서 중복되는 부분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이상은 모두 개인의 행위주체성을 위한 노력에 연계되는데 나는 그것이 현대생활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그런 노력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면 특정한 경험에 더 날카롭게 초점이 맞춰진다. 노동자이자 소비자로서 우리는 아주 강력한 외부적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경로로 들어가는 기분을 느낀다. 우리는 자신이 점점 더 멍청해지고 있다고 걱정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문자 그대로 세계를 접하고 다뤄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직접 채소를 재배하는 법을 배우면서 해답을 찾는다. 심지어 뉴욕 시의 아파트 옥상에서 닭을 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기사가 보도된 적도 있다. 이런 신개념 농부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을 직접 얻을 수 있어 크게 만족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뜨개질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직접 만든 옷을 입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 할머니들의 가정학이 갑자기 최신 유행이 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
경제가 어려워지면 우리는 아끼고 절약하려고 한다. 절약은 자신의 물건을 직접 고칠 수 있는 능력 같은 자립의 수단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자립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불황의 공포가 엄습하기 전부터 시작되었던 듯하다. 절약은, 우리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세계를 책입질 수도 있다고 느끼고 싶어하는 우리 내면의 욕구와 일치하는 추세를 설명하기 위한 얄팍한 경제적 합리화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의 세계를 책임지려면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의 출처를 더 확실히 알아야 할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균형 잡힌 인간적인 시야를 회복하고 세계경제라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 나 자신을 유용하게 만들어 보자!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집 안에서 경험하는 책임감, 그러니까 직접 물건들을 고치는 것에 대한 책임감에 대한 이런 간절한 열망이 개인의 행위주체성을 경험하기 어려워지게 된 직업의 세계에서 일어난 변화로 인한 것인지 생각해 보고 싶다. 사무직 종사자들은 달성해야 할 인위적인 측정기준들이 증가했음에도 종종 목수의 수평기 같은 객관적인 기준이 없어 공과를 선정할 근거가 애매하다고 느끼곤 한다. 팀워크가 대두되면서 개인적인 책임을 찾아내기가 어려웠지만 관리자들은 새롭고 절묘한 방식으로 직원들을 다룰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제 그들은 심리치료사나 인생조언자를 가장한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관리자들 자신도 혼란스러워하면서 반드시 따라야 할 애매한 규정 때문에 불안해한다. 취업에 나선 대학생들은 지식노동 구직면접을 하면서 기업의 면접관이 학교성적에 대해 묻지 않고 전공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사항은 지식이 아니라 특정한 성격, 원만하고 공손한 태도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렇다면 학창시절의 그 모든 노력이 그저 허울뿐인 간판에 불과하단 말인가? 고작 능력주의 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자격증일 뿐인가? 아무래도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것 같고 우리가 직업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들이 거짓이라는 느낌이 강해지는 듯하다.
이제 이 불편한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이 책을 쓰는 동안에도 경제 위기가 얼마나 확산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어쩌면 단순한 소란 정도로 마무리되면서 금새 잊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짧을지라도 우리는 가장 신망 있는 기관들과 직업들에 대한 심각한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은 기본적인 전제를 재고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좋은 직업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어떤 직업이 안정적이면서 인정을 받는가)에 대해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개방적인 태도를 보인다. 무엇보다 월스트리트는 똑똑하고 야심찬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손꼽히던 예전의 명성을 잃었다.
이상이 흔들리고 희망직업이 뒤바뀌는 혼란한 상황에서 생산적인 노동이 모든 번영의 기반이라는 인식이 소리 없이 부각될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성과에서 가져온 잉여물을 거래하는 변종직업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다시금 나 자신을 유용하게 만들어 보자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기본으로 돌아가자. 커버는 부서졌다. 이제 그 커버를 뜯어내고 내부의 상태를 살펴보면서 직접 고쳐봐야 할 시간이다.
1 손과 몸을 움직여, 세상과 자신을 표출하다
자신의 가치를, 손으로 남기다
세탁기 하나 고치지 못하는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의존적이다
지식노동자의 아이러니
고대에는 지혜가 손기술을 의미했다
싱크탱크보다 정비소에서 일할 때 더 많은 지적 능력이 필요했다
우리는 과연 손작업이 필요 없는 사회를 향해 가는가?
인터넷만으로는 못을 박을 수 없습니다
2 우리의 사무실은 어쩌다 공장이 되어가고 있는가
숙련공들마저 밀려나다
화이트칼라 직업은 왜, 지금 쇠퇴를 맞고 있는가
신자본주의는 오래 생각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칸막이 사무실에 갇혀 평생을 살아갈 것인가
3 힘겨운 현실에서 육체적 몰입이 주는 쾌감을 잃어버린 시대
어쩌다 우리는 불편함마저 그리워하게 되었을까
손을 쓰지 않게 되면서, 우리는 의존하는 인간이 되었다
손의 사용, 소비사회의 위안을 상쇄하다.
자동차 약세러리, 그리고 케이크 가루
우리에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닌, 무언가를 선택할 여지만 남았다
4 철학하는 작업장, 초보 정비사 입문기
견습공 지망생이, 되다
아버지의 신발끈, 그리고 좀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폴크스바겐
멘토의 등장, 드디어 손을 대다
그렇지, 내가 생각했던 대로야!
미숙한 지식으로 더 망가뜨리다
명확하게 혹은 공정하게 바라보기
노동의 영역에 침투하는 자본, 우리를 대본 읽는 기계로 만들다
5 초보자에서 전문가로, 무언가를 직접 고친다는 것
고물 모터사이클 정비사 vs. 넥타이를 맨 노예
드디어, 벽돌창고에서 시작하다
수리비 청구의 딜레마
광기와 절망의 밑바닥에서 냉정을 찾기까지
6 화이트칼라와 지식노동, 그 침울하고 불안한 모순에 대하여
처음으로 지식노동자가 되다, 하지만 모순에 빠지다
노동과 자본의 대립, 그 속에서 학습된 무책임
막간 에피소드, 상징적인 차별을 허하라?
사무직의 팀워크, 개성을 통제하는 제어장치
현장 작업단 vs. 사무팀
7 손으로, 생각하기
옴의 법칙과 진흙투성이 장화
소방관과 체스 명인의 암묵적 지식
컴퓨터가 내리는 진단, 일단 비싼 부품으로 교체하세요!
개인의 감각적인 지식이 갖는 힘
8 즐거운 몰입, 우리 삶을 가치 있게 만들다
스피드숍의 일상, 그리고 소리 없는 강자
행복한 작업공동체
좋은 삶으로 이끄는 우리의 진심 어린 행위
맺음말
자립과 결속을 위하여
이 책은 내 경력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좋게 느껴질 때는 그 일에 내재된 인간의 가능성을 이래하려고 했고 반대의 경우에는 똑같은 인간의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차단하거나 훼손하는 그 일의 특징을 파악하려고 했다. 그런 것들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합리성의 본질, 개별적인 행위주체성의 조건, 지각의 도덕적 측면, 공동체라는 난해한 이상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졌다.
의미 있는 일에 대한 내 주장이 반드시 기술직에 국한되는가? 만약 우리가 앞서 8장에 소개했던 20세기 초의 은행가 토머스 라몬트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직업은 더 좋은 특성과 더 나쁜 특성을 판단할 때 발휘되는 직접적인 인식인 공동체에 대한 폭넓은 시야에 기반을 두었다. 그것은 일종의 가치평가적 주의력으로 우리가 성실한 자세로 일을 수행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뒤이어 은행업의 역사에서 설명한 것처럼 규모가 커질 수 있고, 주관성이 배제될 수 있고, 업무현장과 무관한 영향력에 휘둘릴 가능성이 있는 모든 직업은 쇠퇴하기 쉽다. 심한 경우에는 업무를 실행하는 사람에게 판단력을 억제하도록 강요하기까지 한다.
기술직의 특별한 매력은 본질적으로 상황이 특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처럼 전혀 무관한 영향력에 휘둘리는 성향에 저항한다는 사실에 있다. 최상의 경우는 사용공동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대면 교류가 여전히 규범으로 통용되고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책임지며 명확한 기준은 사무팀의 조작적인 사회관계와 달리 작업단의 결속을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 내가 잘 모르는 영역에서 이런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다른 일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해 주기를 바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모든 인간은 선천적으로 지식을 갈망한다는 문구로 시작한다. 나는 진정한 지식이란 실제 사물과의 대면을 통해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일은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는 철학의 전조를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일의 가치는 보다 고차원적인 경험을 가리키는 데만 있지는 않다. 오히려 최상의 경우에 일은 철학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가까워질지 모른다. 일종의 삶의 방식으로 이해되는 그것은 지식을 갈망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나도 이 일을 해요!
열여섯 살 때 나는 혼자 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비행기에서 내려 무더운 날씨에 뭄바이에 발을 내딛던 순간 나는 낯설고 고약한 냄새를 맡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쓰레기를 태우는 냄새였다. 인도 사람들은 버스정류장에 줄을 서 있지 않고 버스가 정차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지점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나를 거칠게 밀쳐댔는데 그들의 몸에서도 악취가 풍겨났다. 나는 말 그대로 내 몸을 만지고 있는 그 사람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눈은 흐리멍덩해 보였다. 나와 달리 그들의 눈은 의식의 방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는 듯 했다.
다음날 내가 타고 가던 인력거가 건설현장 옆의 빨간 신호등 앞에 멈추었다. 그곳에서 샌들을 신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전선이 감긴 원통들을 가져다가 원통 가운데 뚫린 구멍으로 빗자루를 넣고 두 개의 나무상자 사이에 걸어 일렬로 세워놓았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나는 그들이 도관을 통해 전선을 끌어당길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사로잡고 있던 암울한 소외감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나는 인력거에서 뛰어내려 나도 이 일을 해요!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갑자기 그 전기공 집단에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그들이 윤활유로 무엇을 사용하는지 궁금했다. 미국에서는 아이디얼 옐로우 77을 사용했다. 또한 그들이 잡아당길 전선의 헤드를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기술을 사용하는지 궁금했다. 전선의 헤드는 최대한 유선형으로 만들어야 했다. 더욱이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성적 농담을 하는지도 궁금했다. 나는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 전선을 잡아당기는 일을 도맡아 할 건장한 남성이 도관의 반대편 끝자락에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머리에 쓴 터번으로 보아 그는 시크교도인 듯했다. 그들의 일상 속에 내가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외국인들 틈 속에 있는 외국인으로서 내가 느끼는 압박감은 이내 사라졌다. 그들은 지금 내게 익숙한 방식으로 세상과 대면하면서 내가 잘 알고 있는 관심사들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투영된 의식은 내 의식과 똑같을 것이다.
여러 보편적인 윤리체계들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의식을 요구한다. 그것은 배심원 의무 같은 따분한 측면도 지닌다. 칸트주의자들은 이런 책임의식의 근원을 철저한 토론 끝에 찾는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 주장에 동조할 수 없다. 반면 다른 사람들과의 결속은 사랑과 비슷한 긍정적인 매력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명령이 아니라 우리가 이따금 겪게 되는 실제적인 경험이다. 모든 공허한 보편적인 개념에 비하면, 결속은 그 범위가 더 좁을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애정을 사로잡는 장악력은 더 강하다.
실제로 국제전기근로자친선회사라고 불리는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그다지 국제적으로 활동하지는 않는다. 회원은 미국인들과 캐나다인들이다. 하지만 그 명칭은 내가 인도에서 인력거를 타며 겪었던 경험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그 경험은 현대인들의 자기폐쇄를 완화하기 위해 실행되었던 다양한 시도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오늘날 진보적인 인도주의자들은 공통된 인간성에 근거한 인권을 자신과 무관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의식의 기반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숭고한 이상이지만 너무 거창한 탓에 우리의 애정을 이끌어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이 처음으로 분명하게 드러날 때 우리는 바로 그들의 내면에서 무언가 감지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전선을 잡아당기는 행위 같은, 우리가 그들과 공유하는 일상적인 경험이거나 아주 강한 인상을 주며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생소하지만 우수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우수성에 대한 존중은 귀족적 윤리다. 귀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우리 시대에 다소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평등이 귀족적 이상이라는 역설적인 사실에 대해 생각해보라. 그것은 공동체를 초월한 서로를 동료로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교분의 이상이다. 아마도 전문가나 장인이 그런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반면 부르주아의 신조는 평등이 아닌 동등으로, 인간의 계급차이를 숨기는 호환성을 인정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귀족적 직관을 더 확실히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 직관은 우리의 민주적 헌신을 위협하기 보다 오히려 그것을 증진하고 심화한다. 귀족주의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계급과 차이에 민감하며 그런 것들을 지켜보는 것을 즐긴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능을 발견할 때 이런 반응을 보이지만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게리슨 케일러가 레이크 워비건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모든 아이들이 평균 이상인 사회에서 계급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부당한 듯하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수성에 대한 우리의 이끌림 혹은 더 우수한 것을 갈구하는 우리의 관심인데 이런 성향 덕분에 우리는 인간의 활동을 편견 없이 철저히 살펴보면 생소한 것들에서 우월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면, 정비사처럼 지저분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이루어내는 지적 성취가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그런 발견을 통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던 사람들에까지 도덕적 상상력을 확장하고 그들이 존경할 만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보편주의적 평등주의의 요구 같은 도덕적 명령에 따르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존경할 만한 것을 보면서 감동을 받기 때문이다.
첫댓글 두 번째 읽었을 때 덮어버렸는데 대학 교육의 문제점도 잘 드러나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