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뉴스]
2005년 여름, 저는 아주 특별한 여행을 두 번이나 다녀오는 행운을 누렸습니다(직장인으로 꿈만 꾸던 일이 실현된 셈이죠). 물론 한 달 월급 이상의 비용이 들기는 했지만 모두 잊을 수 없는 여정이었습니다. 몽골의 울란바타르와 영국의 런던이 바로 그 곳입니다.
두 나라는 세상의 양끝에 존재하는 서로 별 상관없는 땅이지만, 억지로 유사점을 찾아낸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우선 이 두 나라는 천하를 지배해본 아주 특별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몽골은
칭기스칸 시대(13세기 초) 이후 200년간에 당시 세계의 전부인 유라시아를, 영국은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200년간 전 지구를 경영했습니다.
또한 드넓은 초원을 갖고 있어 양과 소를 기르는 목축업이 발달한 것도 비슷합니다. 물론 이 두 가지를 빼고는 정반대의 나라랍니다. 한쪽은 바다가 없지만 한쪽은 섬나라이니까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궁금하시죠? 저는 몽골 울란바타르 시내를 배회하다가, 수많은 동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몽골은 혹시 모르시는 분이 계시겠지만, 지구상에 두 번째로 등장한 마르크스-
레닌주의 일당독재국가였답니다.
1924년 소련의 붉은 군대와 힘을 합쳐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면서 공산주의 국가가 됐지만 1990년도에 몽골에 ‘신칠렐(개혁)’의 기운이 불어 닥치자 공산주의 일당독재체제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건설했던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의 동상입니다.
"아! 이게 그 유명한 레닌이라니...!"
말로만 듣던 레닌의 동상을 몽골에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롭더군요. 솔직히 오랜 옛 친구를 만난 느낌이 들었습니다.
과거에 접했던 레닌의 당이론,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의 과정들에 대한 기억에 떠올랐습니다.
제가 사회주의 국가를 처음 방문하는 거라서 그런지, 아니면 지난 10여 년간 그를 잊고 지내서 그런지, 정말 특별한 느낌이더군요. 그래서 내친 김에 짬을 내서 옛 공산주의 풍운아들의 동상들을 순례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것도 세상의 양 극단인 몽골과 영국에서 말입니다.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 불리는 정치 사상이 이 양극단의 두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면서 말이죠.
과연 19세기말, 20세기 초반, 전 세계 지식인들을 열병에 빠뜨린 공산주의의 영웅들은 이 두 나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었을까요.
8월21일 영국 런던에 도착한 저는, 대개의 여행객들과 비슷하게
대영박물관을 향했습니다( 이미 많은 배낭여행객들이 이 곳을 들리셨겠죠). 해가 지지 않았다는
대영제국의 상징인 대영박물관은 이름에서 풍기는 제국주의 냄새가 역시 대단하더군요. 잡설은 빼고 바로 마르크스(1818~1881) 선생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대영박물관 정문에서 바라본 모습(왼쪽)과 대영박물관 도서관 모습마 선생은, 이곳 대영박물관 도서관에서 대영제국이 모아 놓은 전세계의 최신 자료를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른바 자본의 심장에서 자본의 심장을 겨누는 저작물을 쓴 셈이지요. 1883년 3월14일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64세로 일생을 마칠 때까지 대영박물관에서 30여 년간 책과 씨름을 멈추지 않았다고 하네요.
△대영박물관 도서관.1842년 2월 파리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마르크스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출퇴근 하며 불후의 명저인 ‘
자본론’을 집필했다.
마 선생에 대해서는 혹시 오해가 많을 수도 있겠지만, 대단한 학자이자 혁명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그분 사상에 대해서 깊은 통찰이나 이해가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21세기인 오늘에도 그를 넘어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론을 제시한 사람이 없다는 점 하나만으로 그의 높이 평가받아야 합당할지 모릅니다.
그가 공부했다던 대영박물관 도서관을 접하니, 그가 30년 이상 살았다던 런던의 자택이 궁금해 지더군요. 그래서 관광책자에 나온 지도를 따라 런던의 소호 거리로 향했습니다.
△대영박물관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레스토랑 ‘쿠오바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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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 쿠오바디스를 찾는 것은 쉬웠습니다. 마 선생의 옛 집이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레스토랑의 이름조차 범상치 않게 다가왔습니다. ‘예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란 의미의 쿠오바디스. 꽤 비싼 영국 정식 집이었습니다.
어렵사리 지배인을 만나 물었습니다. 마 선생이 살았다는 4층(영국식으로는 3층이죠)을 볼 수 있겠느냐고 말이죠. 그 지배인 왈 “3~4년 전까지는 마르크스의 책상이나 방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찾아오는 사람도 줄어서 이제는 치웠다”고 하더군요. 더 이상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보여줄 수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도 이 비싼 영국까지 와서 돌아설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온 관광객인데, 마 선생 만나러 왔기 때문에 그냥 갈 수 없다, 꼭 좀 확인하고 가야겠다”고 떼를 썼답니다.
△마 선생의 서재가 있었다는 방. 이제는 레스토랑의 단체석으로 바뀌고 말았다
△마 선생 가족의 침실이 있었던 자리. 인테리어가 바뀌어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어렵사리 4층에 올라서니 그 지배인 말대로 아무것도 없더군요. 그냥 레스토랑만이 덩그랑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식사라도 할까 했지만 값비싼 감흥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싫어 포기했습니다. 이 방에서 그의 아내 제니가 죽었고 그의 딸들도 가난 속에 죽었었다는 생각을 떠올려보니 약간 어색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영국인들의 저 놀라운 보존 정신입니다. 100년인 넘은 인물이 살던 집도 거뜬하게 보존돼 있는 나라가 바로 영국입니다. 대개 영국 집들은 2~300년 이상을 내다보고 짓는다니 놀랍기만 하더군요. 이 방에 마 선생은 물론 엥겔스 선생이나 그 외 수많은 지식인들이 드나들었다는 생각을 해보니, 역사라는 것이 실제 물질로 남아있을 때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하이게이트 역에서 북쪽으로 도보로
20여분 떨어진 하이게이트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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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김에 마 선생의 시신이 안치됐다는 런던 시내 북쪽의 하이게이트 묘지로 향했습니다.
하이게이트 역은 런던 지하철 노던 라인(Northern line) 하이게이트 역에서 내리면 쉽게 걸어 갈 수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시메터리(Cemetery)라고 물어보면 누구나 다 쉽게 알려줄 것입니다(솔직히 저 단어 쉽게 떠오르지 않더군요).
아침 일찍 입구에 도착하니 저 혼자 뿐 이더군요. 놀랍게도 입장료를 내야 했습니다. 3파운드, 우리 돈으로 5700원 가량입니다. 약간 비싸 보이지만 영국에서 살아보면 허용가능한 수준입니다.
왜 묘지에 입장료를 받는지 물어보니 답이 간단하더군요. “마르크스 때문에 외부인들이 자주 방문하기 때문에, 관리를 해야 하고, 관리를 하기 위해서는 사람 손길이 필요하다”는 대단히 명쾌한 교환논리가 등장하더군요.
△마 선생 묘역의 첫 인상.
꽤 거대하면서도 초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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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선생 관련 책자와 엽서도 팔고 있었습니다. 속으로 마 선생 자신도 상품화 되는 현실이 묘지 속의 마 선생도 속으로 웃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봤습니다. 또한 독일정부는 마 선생이 독일을 빛낸 위대한 철학자이기 때문에 하이게이트 묘지에 대해서도 특별 관리를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마 선생 동상은 꽤 선량한 표정으로 묘사돼 있었습니다. 풍성한 수염과 카리스마도 잘 살아 있었습니다. 제가 어디서 마 선생 묘지사진을 봤을까 생각해 보니, 아마도 비봉출판사간 '자본론'과 강금실 전 장관의 전 남편이 대표로 있던 이론과 실천사의 '자본의 이해'가 아닐까 합니다.
흑백 사진만으로 감상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대하니 감회가 새롭더군요. 역시 여행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이 묘지를 찾은 한국 사람들도 얼마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90년대 초반까지 마 선생(제게는 마르크스 보다는 맑스가 더욱 친근합니다)는 우리 대학에서도 꽤 강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 정치권의 386들의 이론적 기반이 마르크스와 레닌인 점을 감안하면 80년대의 마르크시즘 붐은 단 10년 만에 사그라들었던 셈입니다.
△“Workers of All Lands Unite"
전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 문구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글을 쓰는 필자는 90년대 초중학번입니다. 80년대 초반 학번인 시사평론가 진중권 씨가 대학 1학년 시절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고 “눈이 번쩍 뜨였다”고 했지만, 90년대 학번들에게는 사실 약간 감이 먼 얘기였습니다. 스스로 돌이켜봐도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서 한 의무적인 원전 읽기였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마 선생을 만나지 않고는 사회과학을 시작할 수도 없다는 생각을 반복해서 했더랬습니다. 이제는 사회과학과 관련된 학과가 아니라면 마 선생을 접하기도 쉽지 않아졌습니다.
90년대의 마 선생은 매우 어렵고 복잡한 얼굴로 다가왔습니다(다른 말로는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현대 공산주의의 딜레마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복잡해지니, 그에 대응해서 공산주의도 초기 간단했던 경제학과 혁명이론에 그치지 않고, 심리학 철학 언어학 문화이론 등을 받아들이며 복잡 해졌더랬습니다.
90년대 학번들은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이 해석한 마르크스를 만나야 했던 거죠. 때문에 후학들은 더 복잡한 이해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마르크스는 구식 철학자가 됐고 무대 뒤로 조금씩 잊혀져 갔네요.
△"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however is to change it.
“이제껏 철학자들은 세상을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하는데 그쳐왔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이 문구가 <자본론 >에 쓰여 있는 어구인지, <공산당 선언>에서 나온 문구인지 헛갈릴 정도가 됐습니다. 저도 한 10여년 마 선생을 잊고 살았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읽어도 참 감동적인 명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 선생의 철학을 명확하게 나타내 주는 표현은 “누가 머라든 제 갈 길을 가라” 라는 말도 있습니다. 세상사에서는 패배했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승리했던 그였습니다. 그의 자본론을 한 줄이라도 읽어봤다면 동의하실 거로 믿습니다.
그러고 보니 붉은 장미꽃 한 송이라도 사갈 것을 하고 후회했습니다. 묘지에는 누군가 높고 간 장미꽃이 덩그러니 흩뿌려져 있더군요. 혹시나 하이게이트 묘지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미리 꽃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역 주위에는 꽃을 팔이 않더군요.
혹시 묘지의 크기가 궁금하신 분을 위해. 혼자 찍었던 사진 살짝 공개합니다.
비가 흩뿌리는 전형적인 영국 날씨 덕분인지, 마 선생과 헤어지는 것이 참 어려웠습니다. 혼자 왔기 때문에 그 만큼 감상도 컸기 때문일 겁니다. 10년 전 서클실 구석에서 마 선생의 저작을 끙끙거리며 읽던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일 겁니다.
아마도 자본주의가 더욱 고도화 될수록 마 선생의 진가는 그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가 말한 자본주의에 대한 혜한은 너무도 진지하고 정확하다는 생각은, 단지 저만의 생각일까요?
레닌의 동상은 아직도 전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 선생은 정치가보다는 철학자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동상은 쉽게 볼 수 없지만 여전히 학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렇다면 또 한명의 풍운아인 ‘스탈린(1879~953)’은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요.
전 세계적으로 공공장소에 전시된 유일한 스탈린 동상은 그루지아에 있다고 합니다. 그루지아 고리라는 도시는 스탈린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아직도 동상이 파괴되지 않고 있답니다.
1990년대 초반 스탈린의 동상이 집중적으로 파괴된 이유는, 그가
소련 공산당의 영웅이기도 했지만 20년간의 독재자로 강제 이주 정책과 공포정치로 수천만의 희생을 자행한 인물로 역사에 히틀러와 비견되기도 하기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사실 무덤 속의 스탈린은 그의 최대 적이었던 히틀러에 비견되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가 구 공산독재 체제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90년대 초반에도 히틀러와 공산주의를 동일시 하는 경제학과 학생도 있었습니다. 스탈린의 과오죠. 전체주의 라는 점에서 극좌와 극우가 비슷해지는 오류를 범한 셈입니다.)
그루지아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스탈린 동상을 저는 몽골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몽골 울란바타르 중심부에서 도보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나이트 클럽 ‘이시무스’
이 곳에 가면 스탈린 동상을 만날 수가 있다몽골의 나이트클럽에 ‘스탈린 동상’이 있다?
사실 저는 이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답니다. 약도를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울란바타르 시가 워낙 좁기 때문에 “이시무스 나이트클럽”하고 말하면 택시비 500원에 그냥 데려다 줍니다. 몽골 시내에서는 이미 명물이 됐다고 하던데 워낙 스탈린이 인기가 없기 때문인지 이 스탈린 사진을 공개한 한국 언론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도깨비에 최초로 공개되는 나이트클럽에 전시된 스탈린입니다.
대단하죠. 높이 5m에 달하는 거대한 청동 주물상입니다. 이 곳에서 일하는 조업원들에게 이 스탈인의 유래에 대해서 물으니 아는 이가 없더군요. 대신 사직을 찍겠다니까, “노 플래시, 노 플래시” 만을 연발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시뻘건 사진이 되고 말았습니다. 조명까지 워낙 시뻘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위쪽에 설치된 나이트 조명들을 보니 나이트 같다는 생각이 좀 드시나요? 실제로 보면 대단하더군요. 어떻게 이 나이트클럽에 스탈린 동상이 세워져 있을지 궁금했는데, 몽골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 설명에 따르면 스탈린 동상이 있던 자리에 건물을 덮어 지었다고 하더군요.
그럼에도 스탈린 동상이 서있는 자리라고 보기에는 조금 외졌기 때문에 이해가 안더군요. 그래서 옛 기사를 찾아보니, 2004년 ‘내일신문’에 안병찬 경원대학교 초빙교수가 쓴 글이 하나 있더군요(안 교수님도 직접 보지는 못한 것 같네요).
“과거에 몽골인민공화국은 중국(청나라)과 일본의 침략을 격퇴하는데 힘이 되고 여러 나라가 승인하도록 지원해준 소련과 스탈린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그런 연고로 소련의 유명한 조각가 메르포로브가 1954년에 제작한 스탈린 동상이 몽골 중앙 도서관 앞에 세워진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스탈린 동상만은 1990년에 일어난 몽골 민주화 바람으로 받침대에서 내려졌다. 이를 어느 몽골 조각가가 인수했고 지금은 13구역에 있는 러시아 풍 식당 이스무스(영웅)의 붉은 9층 건물 지하 기념관에 장식품처럼 서 있다. 이를 식당 홍보에 활용한 것은 한국인 운영자라고 한다. 이스무스 식당은 한국교민회가 배포하는 ‘울란바타르 관광안내도’에 스탈린 동상 사진을 올리고 다음과 같은 한글 홍보문을 싣고 있다. “몽골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이스무스에서는 스탈린 ‘진품동상’(5m)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어로 전화 받습니다. 9117-0232.”
이해가 되셨나요. 기구한 운명이지요?
이 나이트 주인은 스탈린 추종자가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벽에 걸린 사진이 온통 스탈린이더군요. 스탈린을 상품화 한 것인지는 몰라도 대단한 정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탈린 동상 앞에서 춤을 추는 한 쌍의 남녀을 상상해 보세요.
△이시무스 지하 나이트클럽 사진이렇게 레닌에서 시작한 순례가 스탈린을 거쳐 마르크스에서 끝이 났습니다.
두 사람은 아직도 존경은 받고 있었지만, 한 사람은 지하 나이트에서 초라하게 살고 있었네요.
동상을 떠올리니 많은 동상들이 생각납니다. 후세인 동상, 김일성 동상, 혹은 요즘 논란이 되는 박정희 흉상에서 맥아더 장군의 동상도 바로 그러합니다. 그러고 보니 동상은 철저하게 정치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상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인류사를 논할 정도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짧지 않은 글인데 혹시 여행에 참고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정리해 봤습니다.
PS.
공산주의와 인물들에 대한 생각은 일부 독자분들은 저와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글이 공산주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중점이 아니기 때문에 너그러이 봐주셨으면 합니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 서면 예전 감상에 빠지게 된답니다.
울란바토르, 런던 = 도깨비뉴스 리포터 호자이 hojai7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