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땅이 된 근대화의 상징
군산은 얼마 전 다녀 온 목포와 느낌이 너무나 비슷하다. 인구는 목포가 25만, 군산 28만 명으로 군산이 약간 더 많지만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두 도시 모두 서해안 항구도시로 일제 때 호남의 질좋은 쌀과 광물 등 한반도에서 수탈한 물자를 일본에 실어나르기 위해
건설된 항구라는 점도 같다. 그 때문에 두 도시는 일제시대 관공서와 많은 일본식 가옥 등 아직까지도 왜색이 짙게 남아있다. 이밖에도 목포에는
유달산 공원, 군산에는 월명산 공원이 시내 한복판에 있어 도시의 상징인 점도 비슷하다. 나는 월명산을 걷는 동안 여기가 유달산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전날 저녁 군산에 도착한 나는 우연찮게 장례식장
경험부터 했다. 나는 전주에서 군산 오룡동 성당 주임인 최용준 신부께 미리 전화했었다. 버스 정류장에 마중나온 최 신부는 신자집에 초상이 났는데
장례식장부터 들르면 안되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이 기회에 한국의 변화된 장례문화도 체험하고 고인을 위해 연도바칠 수 있으니 감사하다고 했다.
변두리에 있는 장례식장은 5층 대형건물 전체로 규모가 대단했다. 우리는 게시판에 적힌 이름과 번호를 대조해 빈소를 찾았다. 고인의 시신을
공개하는 서양과 달리 한국에서는 시신을 냉동실에 안치한 상태에서 조문을 받는다. 나는 신자 일행과 빈소에 향을 피우고 조문한 뒤 함께 연도를
바쳤다. 기도가 끝나자 상주가 우리를 음식상으로 안내한다. 음식도 주문에 따라 장례식장에서 제공된다. 상주 입장에서는 다소 편리해진 것 같으나
밤샘 풍습은 여전해 한편에서는 화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또한 조문시간에 제한이 없어 상주가 장례마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 내가 이민떠날
당시에는 장례식장이 드물었다. 대부분 집에서 초상을 치루었다. 그래서 아파트에서 관을 옮길 때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지 않아 크레인까지 동원되던
기억이 난다. 또한 레지오 단원이던 나는 직접 시신을 염하는 것을 거들기도 했었다. 아무튼 요즘 한국에서는 지방 곳곳에 장례식장이 있어 여간
시골이 아니면 대부분 장례식장에서 초상을 치룬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없었다.
이날 밤 성당 사제관에서 지낸 나는 이튿날
아침 최 신부와 해장국을 먹고 월명공원 입구에서 작별했다. 나는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아준 최 신부께 감사했다. 군산의 명소 월명공원은 월명산을
중심으로 장계산, 설림산, 점방산, 석치산으로 이어진 잘가꾸어진 산책로와 점방산과 설림산 사이에 월명호수가 풍치를 더해 준다. 또한 공원
입구에는 일제시대 한반도 수탈 물자를 항구로 운반하기 위해 뚫은 해망굴 터널이 뼈아픈 역사를 상기시켜 준다. 나는 비구니 사찰인 흥천사 법당을
끼고 계단길을 따라 나즈막한 월명산 정상에 올랐다. 공원은 입구부터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만발해 봄의 향연을 이루고 길위에는 빨간 동백꽃잎이
흩어져 있다. 정상에는 28미터 높이 수시탑(守市塔)이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1966년 극심한 경제침체를 벗어나겠다는 군산시민들의 바램을 모아
세워진 수서탑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돛이 바람에 나부끼는 형상으로 군산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군산시가 바다를 향해 불꽃같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뜻이라고 한다.
공원에는 해병대 승전탑과 채만식 문인비,
3.1운동 기념비, 개항 35주년 기념탑과 '생각하는 시민상' 등 시대의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세워진 많은 기념물과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건국 초기 무소불위의 세력으로 역사에 상채기를 남긴 대한청년단 충혼불멸비도 남아 어지러웠던 역사의 흔적을 보여 준다. 전망대에서는 군산 시가지와
서해는 물론 금강하구둑, 외항, 비행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하구 건너 높다란 굴뚝이 보여 옆에 지팡이를 짚고 앉은 노인에게 물었더니 한숨을
내쉬며 장항제련소 굴뚝이라고 한다. 그는 묻지도 않는데 저곳이 고향인데 2년 전 토지보상금을 받아 군산으로 이사 왔으며 멀지 않은 고향땅에
미련이 있어 매일 아침 이곳에 와서 바라본다고 했다. 장항 제련소가 있는 장암리에서 대대로 살았다는 그가 들려준 이야기가 내게는
충격적이였다.
노인은 공장인근 장암리 주민들이 몇해 전부터 집단으로 암에 걸려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고 말했다. 노인은 현재 제련소 부근은 공해물질
오염으로 거주할 수도 농사도 지을 수도 없는 죽음의 땅이 되었다며 한숨을 내쉰다. 그는 토지오염 피해가 심각하자 정부가 가장 오염이 심한
토지를 매입해 몇 년에 걸쳐 정화작업을 한다는데 오랜 세월 망가진 땅이 몇 년에 회복되겠느냐고 반문한다. 제련소는 72년 민영화 후
몇차례 주인이 바뀌어 현재 LS 니꼬 동제련소라는 한일합작 기업이 들어섰다. 노인은 공장이 89년 용광로를 폐쇄하고 전기로로 바꾸는 등 공해가
없다고 하지만 누가 알겠느냐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이런데도 장항과 서천 주민들 가운데는 그래도 장항제련소 시절이 먹고 살만했다며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며 또 한숨이다. 하긴 80년대 1200명이던 직원이 3백 명으로 줄었으니 그런 말도 나옴직하다. 그러나 노인은 제련소 때문에
금강하구가 막혀 옛날 번성했던 수산업도 사라질 지경이라고 말했다. 산업화를 위한 무분별한 공해산업과 환경파괴가 몹쓸병과 죽음의 땅이라는
무메랑으로 되돌아 온 셈이다. 결국 참다못한 자연이 인간에게 복수한 것이다.
장항제련소가 세워진 것은 1936년. 당시 일제는 한반도의 금과 구리 등 지하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제련소를 세웠다. 일본군 대장 출신
우카키 총독은 준공식에서 장항제련소 천혜의 입지적 조건에 감탄했다고 한다. 그가 감탄한 천혜의 조건이란 밀물 때 밀려온 바닷물이 썰물 때
산업폐기물을 싣고 먼 바다로 쓸어가니 그 얼마나 기막히냐는 논리다. 식민지 땅에서 환경이니 자연보호니 하는 것은 애당초 안중에 없었다. 이보다
20년 앞서 건설된 진남포 제련소도 조건이 비슷했다. 해방 후 국영기업이 된 제련소는 생산능력을 크게 확장해 해발 120미터 전망산 정상의 높이
90미터 제련소 굴뚝은 한때 조국 근대화의 상징으로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이 덕분에 장항이 잠시나마 국제 무역항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런데
제련소는 제련 후 남은 광물 지꺼기를 금강 하구와 주변 해안에 그대로 버리고 매립에도 이용했다. 이 폐기물은 구리, 납, 아연, 카드뮴, 비소
등 유해 중금속 덩어리다. 또한 굴뚝으로 배출된 아황산 가스와 중금속, 다이옥신 등은 그대로 주변 가옥과 토지 위에 겹겹이 쌓였다. 특히 인간이
만든 물질 중 가장 위험하다는 다이옥신은 인체에 축적되면 호르몬 조절과 면역체계 이상을 가져와 간암 등을 일으킨다. 카드뮴도 이타이 이타이병이라
불리는 뼈가 물러지고 골절 등 신체조직 이상을 가져오는 독극물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전국 도처에 많은 개발과
건설현장을 목격했다. 이미 끝나버린 4대강 개발도 문제지만 현재 진행 중인 제주도 해군기지부터 초고층 빌딩 그리고 울창한 산을 깍고 뒤집어
만들고 있는 골프장 등 조국강산이 심하게 몸살을 앓고 있다. 강원도에서는 주민들이 핵발전소가 들어설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국가에 꼭 필요한
개발은 해야겠지만 50년, 백년 후 후손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심사숙고하고 주민들 의견도 충분히 반영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장항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좁은 국토에 많은 인구가 몰려있는 한국에서 만에 하나 후꾸시마나 체르노빌 같은 참사가 벌어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상상만해도 몸이 떨란다. 많은 부분을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나는 노인의 가슴아픈 신세타령을
뒤로하고 등나무와 벚나무 그리고 색색의 꽃들로 둘러싸인 산책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2014.6.24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