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화가 진상용 원문보기 글쓴이: 국화
간혹 풍경화에 대한 이야기를 쪽지나 덧글로 남기는 이웃 님들이 있습니다.
풍경화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에 관한 것들이 많은데, 사실 저라고 별 뾰족한 수 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아, 좋구나’ 하는 정도죠. 그래서 사람이 있는 작품을 자주 찾게 되는데 요즘처럼 계절이 바뀔 때면
문득 좋은 풍경을 만나고 싶어집니다.
프랑스의 장 몽샤블롱 (Jean F. Monchablon / 1855~1904 – 화가의 이름을 한글로 옮기기 위해서 여기 저기를
뒤져 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연히 일본어로는 몽차블롱으로 표기된 것을 보았는데 시오맘님이 몽샤블롱이
맞을 것 같다고 알려주셔서 수정합니다)은 풍경화로 한 시대를 풍미한 화가입니다.
꽃피는 나무들, 성체를 모신 사람들 Flowering trees, the communicants / 38.1cm x 55.56cm
봄이 온 들판, 나무에 흰 꽃이 흐드러졌습니다. 신부님과 수녀님이 풀 밭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성체를 모시고 가는 길인가 봅니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성체는 예수님의 몸을 나타내는 밀 제병입니다.
원래 성체는 교회 미사 시간에 모셔야 하지만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저렇게 신부님이 직접 성체를
들고 집을 찾기도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봉성체라고 하지요.
파란 하늘 밑, 빛이 가득 찬 언덕의 나무들은 봄의 아지랑이 사이로 모습을 흐릿하게 감추고 있습니다.
화사하고 고요한 봄, 그림 속 인물들을 따라 언덕을 넘으면 그 곳은 평화가 가득한 곳이 있을 것 같습니다.
몽샤블롱은 샤티옹 쉬르 손느 (Chatillon-sur-Saone / 불어만 보면 울렁증이 입니다. 불어의 대가들께서는
발음을 너그럽게 봐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크기는 작았지만 오래 전부터
사람이 거주했고 강과 여러 주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곳이어서 프랑스와 독일의 분쟁 지역이기도 한 곳입니다.
나중에 몽샤블롱은 장 (Jean)이라는 이름을 얀 (Jan)이라는 독일식으로 바꾸기도 합니다.
드넓은 풍경 속에서 추수하는 사람들
Harvesters In An Extensive Landscape / 54.3cm x 73.6cm / 1887
구릉을 따라 밭이 끝없이 펼쳐졌습니다. 누렇게 익은 밀 밭, 부부가 하기에는 버거워 보이는 넓이입니다.
아침부터 시작한 일이지만 해야 할 양이 너무 많습니다.
추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림 속에는 오직 두 사람뿐입니다.
허리가 아픈지 여인은 허리를 숙였습니다. 풍경은 끝없이 시선을 여기 저기로 끌고 가는데 그림을 보는 마음은
밀 밭 앞에 선 두 사람에게서 떠 날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회색으로 걸렸습니다.
몽샤블롱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낭트의 브레통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그의 작품의
주요 무대로 남게 됩니다. 가끔 까마득하게 어렸을 때 기억이 최근 몇 년 전의 기억보다 더 또렷하게 자리를
잡고 그리움으로 다가 올 때가 있죠.
몽샤블롱이 학교를 다니면서 그림에 대한 이야기 대신 글짓기로 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림에 대한 재능은 나중에 나타났던 모양입니다.
존벨르 근처의 작은 물레방앗간 , 손느 Le Petit Moulin, pres Jonvelle, Hte. Saone / 33.3cm x 44.4cm
가을이 깊었습니다. 세상은 붉은 색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고 집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높이 솟아 올라
노란 불을 켰습니다. 이 작품도 화면 높이의 중간쯤부터 하늘을 담고 있어서 시원한 풍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른쪽 하늘, 아직 구름이 덮지 않아서 파란색으로 남아 있는 하늘을 따라 가다 보면
교회 탑에 눈 길이 닿습니다. 문득 가을을 더욱 깊어지게 하는 종소리가 벌판을 건너 오는 듯 합니다.
(쁘띠 물랭은 작은 물방앗간이라고 시오맘님이 알려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몽샤블롱은 열 아홉의 나이에 브르따뉴 깡페르에 있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정도로 학문적인 재능도
뛰어 났습니다. 나중에 아내가 되는 화니를 그 곳에서 만나게 되는데, 화니는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였고
결혼 후에는 그의 많은 작품 속 모델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살아도 한 인생을 잘 꾸려갔을 것 같았는데
그림에 대한 관심이 커가면서 몽샤블롱은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납니다.
샤티옹 쉬르 손느 Chatillon sur Saone / 45.2cm x 62.2cm
샤티옹 쉬르 손느는 몽샤블롱의 고향입니다. 작은 강을 따라 마을이 자리를 잡았고 강을 건너는 작은 다리가
보입니다. 강 옆으로 조성된 풀 밭에는 풀을 뜯는 소가 있고 건물들은 한가로운 모습으로 해바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구성은 ‘이발소 그림’과 비슷하지만 사실감과 안정감이 있기 때문에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죠.
이제 눈치를 채셨겠지만 몽차블롱의 작품 속 하늘은 항상 넓게 열려 있습니다.
때문에 그림 속에 빛이 가득합니다.
파리에 도착한 몽샤블롱은 에콜드 보자르에 입학, 장 로랑스 (Jean Paul Laurens) 밑에서 공부를 시작합니다.
이어 스물 여덟 살 되던 해부터 다음 해까지 카바넬의 지도를 받게 되는데 두 스승 모두 아카데믹 화법의
대가들이었고 역사화에 있어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었지만 몽샤블롱의 관심은 여전히 풍경화에 있었습니다.
퐁텐블로 숲 Forest At Fontainbleau / 55.5cm x 73cm
숲이 이 정도 우거졌으면 어두울 것 같은데 몽샤블롱이 묘사한 숲은 연녹색으로 환하고 서늘합니다.
계절은 아마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그 어디쯤이겠지요. 굵은 나무나 여린 나무나 모두 생명의 색으로
단장을 했습니다. 바위 사이로 난 작은 길을 걷다가 이끼 낀 바위에 앉아 숲을 돌아 보는 느낌입니다.
숲에 가면 고갈 된 몸 속의 에너지 탱크가 가득 차는 것 같습니다. 아마 제 핏속에 있는 DNA가 숲에서 살았던
수 만년 전의 세월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몽샤블롱이 처음 파리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한 것은 1881년, 스물 여섯의 나이였습니다. 데뷔는 무난했었고
그 후 꾸준하게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하지만 비평가들의 관심과 살롱전에서의 수상은 그 뒤의 일입니다.
초기 그의 작품은 파리 주변의 풍경을 묘사했는데 사진과 같은 사실주의와 인상파 화가들이 사용하던 빛이
함께 섞인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두 요소를 섞어 놓자 작품은 분명해졌고 실제로 보는 것과 같은 이미지를
나타냈습니다.
장대한 풍경 속의 있는 어린 양치기
A Young Shepherd In An Extensive Landscape / 65.4cm x 92.3cm / 1888
마을을 지나 온 길이 크게 휘어 나가는 곳, 양치는 소년은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는 둑에 앉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자주 풍경 속 모델로 등장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림 속 소년도 이웃 집 누구 정도 되겠지요.
앞 선 그림들처럼 이 작품에도 사람은 아주 조그맣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사람을 발견하고 나면 뒤따라 오는 것은, 고요함이라고 평론가들은 말을 했지만
제가 느끼는 것은 쓸쓸함과 적막감입니다. 아마 철들면서부터 늘 번잡한 곳과 그런 것들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겠지요. 나이를 좀 더 먹으면 혼자 있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나중에 혼자 있는 것을 못 견뎌 하면, 너무 초라하니까요.
몽샤블롱은 태어난 곳으로 돌아 갈 결심을 합니다. 당시 바르비종파 화가들은 프랑스 전역을 떠 돌며
고향과 같은 이미지를 주는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면 그 곳에 눌러 앉아 그림을
그리곤 했지요. 물론 코로나 도비니처럼 끝없이 떠 도는 화가들도 있었지만요.
몽샤블롱은 자신의 고향 풍경 묘사를 위해 귀향했는데 그의 작품을 본 사람들이 그의 작품 모티브를 보기 위해
자주 고향으로 찾아오자 아예 땅을 빌려 정착합니다.
초원 The Pasture / 91.4cm x 124.5cm / 1888
양을 데리고 풀 밭으로 나온 여인은 무료한 틈을 타 가지고 온 바느질 거리를 들었습니다.
프랑스 풍경화가들 작품 중에는 양을 돌보면서 뜨개질 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몇 점 있습니다.
잠시라도 쉬지 못하는 것은 우리 어머니들과 닮았습니다. 어쩌면 세상 모든 여인들이 겪었던 일이겠지요.
혹시라도 물에 빠지지 않을까, 먼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 고개를 들어 살피는 여인의 모습이 앉은 배경과
부드럽게 어울렸습니다. 여인도 풍경 속으로 녹아 들었군요.
샤티옹 쉬르 손느는 포도 재배 지역이었습니다. 파리에서 식구들을 불러 들인 몽샤블롱도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포도 재배를 했습니다. 완전하게 시골 생활로 돌아 간 것이죠. 그림의 주제를 위해 사온느 강 계곡을
찾아 다니면서 특징적인 풍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고향을 감싸고 흐르는 고요한 강과 넓은 초원,
시원한 숲과 부드럽게 흘러 내리는 언덕들이 작품 속에서 상쾌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샤티옹의 정원, 보쥬 Jardin a Chatillon, Vosges / 37.6cm x 53.8cm
한글 제목이 자신이 없습니다. 쟈뎅 (Jardin)이라는 단어가 정원이라는 뜻도 있지만 지명을 뜻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잘 가꿔진 언덕을 보자 정원이 더 어울리겠다 싶었습니다.
유럽을 갈 때마다 부러운 것은 완만한 언덕 사이로 펼쳐진 벌판입니다. 속 사정이야 잘 알 수 없지만
우선 다가오는 것은 풍요로움과 넉넉함입니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창 밖으로 펼쳐진 우리 산하를 보며
눈물이 났던 경험을 저만 가지고 있지는 않겠지요. 하늘에서 내려다 본 우리 땅은 산으로 꽉 차있습니다.
얼마 안 되는 평지에 도시를 세우고 치열하게 생활해 가는 우리를 생각하면 저절로 울컥하게 됩니다.
몽샤블롱의 작품 묘사가 얼마나 정밀했는지 마치 지형도와 같아서 오늘 날에도 작품 속 무대가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의 작품 속에는 푸른 하늘과 함께 고요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부드럽고 깨끗한 공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옅은 색조의 풍경이 점차 변화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뛰어난 그의 작품은 마치 유리창을 통해서 보는 것 같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리뇽꾸르 우물가의 사랑, Les amoureux au bord du puits à Grignoncourt
그리뇽꾸르는 보쥬에 있는 마을 중 하나입니다.
풀 밭 한 켠, 낡은 우물 곁에 아주 매혹적인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우물 옆에 앉은 여인의 무릎에 남자가 가볍게 손을 올려 놓았습니다. 여인의 고개가 살짝 숙여진 것을 보니
남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두 사람의 앉은 자세만 봐도 알겠습니다.
너무 따뜻하고 평화로워서 마치 꿈속의 한 장면 같습니다.
봄은 꽃도 피워내지만 겨우내 움츠렸던 사랑의 마음도 피워내죠. 여인이 한 손으로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을 해 봤지만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혹시 두레박 아닐까 싶었는데, 그렇다면 남자가 들고 있는 것이
오히려 보기 좋겠죠.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 그의 작품을 성공의 무대로 이끌었습니다. 1889년, 만국박람회에서 은메달을 수상한 후
몽샤블롱의 이름은 파리와 프랑스 전국에 있는 평론가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1895년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은
‘향기가 흘러 나오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얻었을 정도였습니다.
몽샤블롱은 풍경화를 그리는 한편 초상화 제작 의뢰도 받았는데, 인생의 절정기를 향해 달릴 때는 무엇을 해도
잘 됩니다.
아미엥의 봄 Spring, Amiens / 38.1cm x 55.9cm
멀리 보이는 첨탑이 그 유명한 아미엥 성당의 것이겠군요. 나무들마다 꽃이 달렸고 노란 들꽃은 곱게 펼쳐진
풀밭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풀밭 가득 노란 꽃이 올라오겠지요.
왼쪽에 살짝 얼굴을 내민 시내가 없었다면 그저 화사한 봄이었겠지만 몸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물 때문에
봄은 싱싱함을 더 했습니다. 어깨에 농기구를 들고 언덕을 오르는 남자의 모습도 가벼워 보입니다.
붉은 색 지붕과 구름 낀 하늘 때문에 무거울 것 같지만, 아뇨 봄은 말 그대로 스프링(Spring) 처럼 경쾌하고
날렵합니다.
1900년, 드디어 세기가 바뀌었지만 영예는 몽샤블롱 곁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다시 만국 박람회에 출품한
작품으로 은메달을 수상했고 1904년에는 마지막으로 참여한 살롱전에서 3등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마흔 아홉의 젊은 나이로 몽샤블롱은 267점의 작품을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납니다. 단순히 마을의
풍경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그렸다는 세간의 평을 생각하면 너무 이른 나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