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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2. 묵상글 (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 제소리는 개소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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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제소리는 개소리
우리는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처럼 누구인지 질문을 받습니다.
질문을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묻지 않고 물음도 받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며 살게 되겠지요.
그래서 하인인데도 주인처럼 행세하며 살다가 나중에 큰코다치고,
주인인데도 종처럼 일생을 슬프고 불쌍하게 심지어 불행하게 살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아니, 누구로 알고 살아야 합니까?
이 물음에 정답은 있습니까?
있다면 그 답은 무엇입니까?
그 답이 오늘 세례자 요한의 대답이 아닐까요?
아니, 틀림없이 요한의 대답이 정답이고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우리는, 외치는 분의 소리랍니다.
그런데 소리라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개소리이기도 하고,
시끄러운 스피커 소리이기도 합니다.
무의미하거나 남에게 괴로움만 주는 소리일 뿐이라는 얘깁니다.
시끄러운 스피커 소리라고 하니 가끔 차에 큰 스피커를 달고 다니며
‘예수 천국, 불신 지옥’ 류의 선교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의 소리는 아무리 커도 사람들이 듣지 않아
시끄러운 소리 곧 소음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아무튼 소리는 아무리 그 소리 커도 소리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고
말을 만나야지만 의미를 지니고 말씀과 만나면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과 같이 말씀을 전하는 소리는 의미가 있고,
성당의 종소리도 그 소리가 예수님을 실어 나르기에 의미 있지요.
그런데 성당의 종소리도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큰 의미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말이랍시고 하지만
제소리를 내기에 의미가 없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에게 제소리는 개소리입니다.
반대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낮추고,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며 주님을 높일 때
우리의 소리는 주님께 영광 드리는 말이 되고 의미 있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왜 많은 사람이 당신을 따르느냐고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 많은 은총을 자기에게 주셨기 때문이라고,
같은 은총을 강도에게 주셨다면 그는 자기보다 더 훌륭했을 거라고,
자신은 낮추고 하느님 은총은 드러냈기에 우리는
그를 성인이라고 하고 그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듭 얘기하지만
제소리는 개소리입니다.
제소리는 아무리 커도 아무 의미가 없는 개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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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21.22)
요한은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고,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나 자신을 외치는 이인가? 아니면 내 안에서 외치는 이를 드러내는 소리인가?
사실,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곧 요한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있는 화살표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피리를 부는 이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를 담아내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는 진정 비워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은 참으로 비워진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 말입니다. 그러기에 비워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추하게 보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이들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것처럼 추한 모습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을 보십시오! 요한은 자신의 발밑에 다른 이를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발밑에 내려갈 자격마저 없는 몸이라 고백합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운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도 요한이 받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21.22)
이 질문에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나는 어떤 이인가요?’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닌 존재로 살고 있는 이인가요?’ ‘예수님과는 어떤 결속을 맺고 살아가고 있는 이인가요?’
저는 이렇게 대답해 봅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새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벗이요.’ 라고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주님!
화살표 같은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붓이 되어 당신의 말씀을 삶으로 쓰게 하소서.
피리가 되어 당신의 노래를 온몸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만을 드러내게 하소서.
저 자신이 아니라 주인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생명의 춤이 되고, 당신 축복의 강복이 되게 하소서.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 당신의 귀염둥이 아들, 당신의 사랑이니,
당신께만 속해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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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가 자랑해야 할 분은 예수님입니다.
가끔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을 씁니다. 경중이나 선후가 서로 바뀌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요한을 메시아로 착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서슴지 않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메시아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엘리야’인지 묻습니다. 이 질문에 역시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시 ’예언자‘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 곧 메시아가 계시는데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자신을 한껏 낮추며 곧 다가오실 예수님의 신원을 알립니다. 만약 요한이 인기에 영합하여 자신을 내세웠다면,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고 있었기에 항상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도 요한의 모범은 감동을 줍니다. 내가 누구인가? 를 알면 겸손해집니다. 우리도 겸손으로 자신을 인정하는 가운데 주님께 대한 갈망과 사랑이 커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분, 전해야 할 분은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연장으로 쓰임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면서도 내심 칭찬과 인정을 바라는 모습들을 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이니 그것으로 만족하여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가운데 더욱 빛납니다.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드러내고 높아지려 합니다. 남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다툼을 일으키며 상처를 주고 잇속을 챙깁니다.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때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역할이 더욱 크게 필요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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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행동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기꺼이 배우는 것입니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도 있습니다. 3명이 길을 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문홍보를 다니면서 미주 한인 공동체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들의 모습을 봅니다. 신부님들의 사목에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미사 전에 신자들과 함께 성무일도를 하고, 성체현시를 하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미사의 분위기가 한층 엄숙하고, 정갈하였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신자들과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창틀을 구입해서 신자들과 함께 성당의 창틀을 교체하였습니다. 구역을 찾아가서 미사하였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낮은 자세로 신자들과 함께하니 공동체가 한층 밝고, 따뜻해 보였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분위기를 활기차게 하였습니다. 미사 후에 인사할 때 아이들에게는 스티커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신부님께 인사하면서 스티커를 받았습니다. 스티커를 포도송이에 붙이면 나중에 선물과 교환해 준다고 합니다. 주보에도 짧은 글과 그림을 넣어서 그 주일 복음 말씀을 묵상하게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함께하는 공동체는 활력이 넘쳐보였습니다. 저는 2012년부터 특수사목을 하였습니다. 본당을 떠난 지 어느덧 12년이 되었습니다. 저의 사목이 다른 사제들의 ‘타산지석’이 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2024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라고 생각할 정도로 존경 받았습니다. 요한은 따르는 사람이 많았고,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요한은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겸손하였습니다. 자신은 하느님께서 보낸 메시아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겸손한 요한은 참된 메시아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자신의 역할은 메시아를 위해서 길을 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였습니다. 교회는 겸손한 요한을 교회의 스승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알았던 요한에게 사랑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요한의 ‘겸손’을 따르는 2024년 새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빛을 됫박으로 가리는 사람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이웃을 환하게 비추는 빛이 되면 좋겠습니다. 소금은 녹아서 음식에 풍미를 더해주고, 맛을 내줍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소금이 되어 공동체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소금이 되어 공동체가 더욱 성장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202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된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 주교의 삶과 가르침으로 교회를 빛내셨으니 저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진리를 배우고 사랑으로 충실히 실천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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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기억나는 광고 중에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아니오’ 할 때 ‘예’하는 사람. 모두가 ‘예’할 때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
어떤 광고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위의 문구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다시금 알게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요한에게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이상합니다. 사람들은 ‘누구요?’라고 물었는데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라고 대답하니 말입니다.
요한의 대답에서 사람들이 요한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었음을 우리는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신성함과 그의 삶과 그의 말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다가 아닙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그리스도의 자리에, 왕의 자리에 올려 놓으려 했지만 그는 그것을 거절합니다.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요한의 모습에서 다시금 겸손을 배우고 또한 저의 모습을 반성해 봅니다.
혹시 살면서 예수님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혹시 주님께 의탁해야 할 것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저의 삶도 또 여러분의 삶도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해야 하는데 자존심 때문에, 또는 체면 때문에 우리는 ‘예’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또는 ‘예’해야 하는데 ‘아니오’라고 말하고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을 숨기기도 합니다.
가끔은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내 일로 여기고 하는 우리의 모습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냥 나를 맞겨 드리면 되는데, 또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저 제가 할 일을 할 뿐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하는데, 내가 조금더 나아보이려고 하고 내 일이 더 잘 된것 처럼 보이려는 욕심이 자꾸 고개를 드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바라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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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의 모자이크
미국에 나가 있는 특파원이 이렇게 인사하며
뉴스를 마칩니다.
인종의 모자이크인 이곳 미국에서
000이었습니다.
‘인종의 모자이크’라는 말이 제게는 이렇게 들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단 한사람도 같은 사람을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서
웃고, 떠들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순간들이
혹은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고뇌하는 그 순간들이
주님 보시기에는 살아 움직이는 아름다움이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치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모여 있다면 그 모습만으로도 세상 어디에도 없는
모자이크 작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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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보다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가는 글을 쓸 때 쾅쾅 울리는 시끄러운 옛날 노래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작가들은 어떤지 궁금해서 검색해 보았습니다. 빗소리를 들으면 글이 잘 써져서 빗소리 ASMR을 듣는다는 분, 클래식을 듣는다는 분, 벌거벗은 채로 글을 쓴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거의 조용한 곳에서 글을 쓰지만(주로 제 방입니다), 잘 써지지 않을 때는 백색 소음이 있다는 카페를 이용하곤 합니다.
글 쓰는 것은 똑같은데 그 상황은 모두가 달랐습니다. ‘같은 일도 다르게 한다’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렇다면 다르게 한 것을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각자에게 맞는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다를 수도 있는 부분을 틀렸다고 하면서 자기 방식만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까지 잃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라면서 획일화시키려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에게 ‘같은 일도 다르게 할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르게 하는 그 과정 안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결과도 가져올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더 큰 발전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는 것과 남이 찾아주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같은 일도 다르게 할 수 있음’을 주님께서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일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성장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려고 할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점을 인정하지 못하고 의심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고도 그러했습니다. 자기들과 달리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나가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닌, 엘리야의 모습으로 극기와 겸손의 삶을 산 것입니다.
자기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서 바리사이들은 따지듯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라고 묻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답인 ‘나는 그리스도다.’라고 말했으면 편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남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선택하면서, 스스로 낮춥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얼마나 겸손의 삶을 살고 있을까요? 교만과 이기심으로 다르게 할 수 있음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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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은 너무 짧아서 다투고 사과하고 가슴앓이하고 해명을 요구할 시간이 없다. 오직 사랑할 시간만 있을 뿐. 하지만 그 시간마저도 순식간에 지나간다(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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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항구합시다
-참 아름다운 선물-
동방의 4대교부는 성 아타나시오, 성 대 바실리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네분입니다. 바로 그 네분중 오늘 기념하는 두분이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입니다. 태어난 햇수는 330년 똑같은데 성 대 바실리오는 49세까지,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60세까지 살았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임을, 또 성덕은 얼마나 살았느냐의 ‘삶의 양’에 있는게 아니라, 어떻게 주님 사랑에 치열했느냐 ‘삶의 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 성인의 대한 간략한 소개입니다. 두분 다 소아시아(오늘의 튀르기에) 태생에 절친이었고, 함께 아테네에서 공부했고, 두분 다 주교이자 유명한 신학자였습니다. 바실리오는 아리안이단과 싸운 조직자이자 수도자였고, 그레고리오는 관상적이자 시적인 분이었습니다. 콘스티노플의 주교로 지명된 그레고리오는 곧 사임후 나지안조에서 참 신심깊은 삶으로 인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두분의 절친관계의 우정입니다. 말그대로 주님 안에서의 우정이요, 이에 앞서 두분의 주님과의 우정도 깊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서로간의 우정도 깊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부터는 저는 우정에, 영적우정에 대해 많은 사례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동서방을 막론하고 참 아름다운 우정의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아마도 인간관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우정일 것입니다. 우정역시 선물이자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선물이면서 평생 성장, 성숙과정에 있는 우정의 여정이라는 것이지요.
어제 저녁식사중 선물받은 40만원짜리 양주를 약간 서로 주고 받으며 나눴습니다. 고급양주는 부드럽고 색깔, 맛, 향이 깊고 그윽하고 뒷맛이 좋다는 느낌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깊어가는 우정도 이런 고급양주처럼 날로 색깔, 맛, 향기도 깊고 그윽하며 뒷맛 또한 좋고 날로 부드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성인가족으로 하면 교회 역사상 성바실리오 가정을 능가할 성인은 없을 것입니다. 조부모, 부모, 형제자매들이 거의 대부분 성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우정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참 다양함을 봅니다. 스승과 제자, 동료간, 부부간, 남녀간, 남매간, 선후배간 참 다양합니다. 우리나라로 하면 조선시대 동방의 18현에 속하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우정이, 또 정약용과 그의 둘째형으로 자산어보를 썼고 흑산도에서 한많은 생을 마친 정약전의 우정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또 세대 차이를 넘어 수십년 아들뻘, 손자뻘의 제자들과 우정을 나눈 퇴계 이황의 겸손한 인품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친구는 또 하나의 분신과 같습니다.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우정의 본보기를 볼 수 있는지요. 저는 이미 작고하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과 아랫집 서 마리레몽 수녀님간의 영적우정도 주목합니다. 성서만 해도 다윗과 요나단, 엘리사벳과 마리아, 또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에다, 수도생활역사중에도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 프란치스코와 글라라, 십자가의 요한과 대 데레사가 있고 최근만 해도 가톨릭 교회의 전임 베네딕도 교황과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이런 아름다운 우정은 수없이 목격합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오 여사의 우정도 그렇고 제 결혼 주례 1호 부부도 24년 동안 익어가는 우정관계도 참 아름답습니다. 어제 방문하여 함께 식사후 부부 모습이 참 평화로워 사진에 담았고 사진과 더불어 메시지도 전달했습니다.
“정말 멋지고 행복해 보입니다. 환상의 커플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늘 오늘처럼 이렇게 사세요!”
저에게는 수년동안 제 강론을 나누는 한결같이 겸손하고 열심한 교구사제도 있는데 매일 답글을 보내주는 놀라운 분입니다. 한번도 만난적이 없지만 어제의 댓글에서도 보이지 않는 우정이 형성됨을 감지했습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는 이 품위를 놓치지 않고 살아가렵니다. 신부님, 새해도 건강하시구요. 늘 기도 안에서 뵙고 있나이다.”
우리의 공경하올 영원한 현역으로 저보다 16세 연상의 92세 수도선배인 진토마스 신부의 역주인 요한 카시아누스 <담화집> 16 담화 주제는 ‘우정에 관해서’요, 여기 나오는 진정한 우정의 6개 원칙을 소개합니다.
1.이 세상의 재물을 경시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경시하는 태도다.
2.각자 자기 뜻을 끊어버려야 한다.
3.자기가 유익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사랑과 평화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이다.
4.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화를 내서는 안된다.
5.형제가 자기에게 분개할 때, 이유없는 분개라도 자기안에서 일어난 분개와 똑같이 치유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6.악행을 모조리 사라지게하는 틀림없는 원칙으로, 언제든 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날마다 갖는 것이다.
우정에 있어서 대화도 얼마나 중요한지 악마의 유혹도 경계해야 함을 봅니다. 베드로 수제자도 “사탄아 물러가라!”는 주님의 호된 질책을 받았고, 창세기에서 유혹당한 하와와 아담, 광야에서 시련중 악마를 물리친 예수님의 예화를 소개하는 지난해 12월27일 일반알현시간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도 신선했습니다.
“악마와 대화하지 마라. 결코!(never!) 논의도 하지 마라. 예수님은 결코 악마와 대화하지 않았다. 그는 대화로 응답하지 않았고 단지 성경 말씀으로 응답했다. 조심하라. 유혹이다 싶을 때 결코 대화하지 마라...‘마음을 지켜라!(Guard the heart)’. 무수한 교부들이, 성인들이 그러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보물을 지키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마음을 지키는 법을 배우도록 하자.”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적대자들의 질문에 답이 참 간명하며 악마가 유혹할 빌미를 주지 않습니다. 역시 겸손의 대가, 겸손의 달인, 세례자 요한이요 악마도 겸손한 자에게는 결코에게 대적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문득 사막의 성자 마카리오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마카리오를 유혹하다 실패하고 퇴각할 때 악마의 고백입니다.
“나는 네가 하는 것을 다 모방하여 할 수 있다. 그러나 너의 겸손만은 모방할 수 없다. 졌다. 겸손한 너를 결코 이길 수 없으니 나는 떠난다.”
오늘 복음의 다음 대목에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이 빛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우리 가운데에는 우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하는데, 우리는 그분이 누구신지 압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 파스카의 주 예수님의 현존을 의식함이 겸손을 배움에 결정적임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 안에서 자기를 아는 것이 바로 겸손이자 지혜인 것입니다.
새삼 얼마나 주님과 깊은 우정관계에 있는 세례자 요한인지, 우정의 기초에 얼마나 깊이 자리 잡은 겸손인지 깨닫습니다. 주님과의 우정관계를 통해, 주님을 따르면서 닮아감으로 참나의 실현이요, 주님과의 우정은 상호간의 우정의 기초가 됨도 배웁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없이는 참나의 실현도 불가능합니다. 제1독서의 요한이 주님과의 우정에 참 유익한 조언을 줍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하신 약속, 영원한 생명입니다....그분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이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사랑안에 한결같이 머무름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요, 주님과는 물론 이웃간의 영적우정의 여정에 기초가 됨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주시며 형제들 상호간의 영적우정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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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참으로 아는가>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
어둠 가운데에
빛 계심을
어둠은 모르지만
빛 품은 이는 안다네
비록 빛은 아닐지언정
혼돈 가운데에
길 계심을
혼돈은 모르지만
길 걷는 이는 안다네
비록 길은 아닐지언정
거짓 가운데에
참 계심을
거짓은 모르지만
참된 이는 안다네
비록 참은 아닐지언정
미움 가운데에
사랑 계심을
미움은 모르지만
사랑하는 이는 안다네
비록 사랑은 아닐지언정
절망 가운데에
희망 계심을
절망은 모르지만
희망하는 이는 안다네
비록 희망은 아닐지언정
죽임 가운데에
살림 계심을
죽임은 모르지만
살리는 이는 안다네
비록 살림은 아닐지언정
우상 가운데에
하느님 계심을
우상은 모르지만
하느님 닮은 이는 안다네
비록 하느님은 아닐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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