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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4-7 아비멜렉이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가정이 파괴되려 했던 일에 대하여 그랄 왕 아비멜렉을 혼내시고 계십니다. 이런 과정에서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도 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예를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택하신 후손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과 아비멜렉의 교통은 아브라함의 상황과 같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과도 같지 않습니다.
1. 본문 4-5절은
“④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⑤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여기서 자기 아내를 빼앗겼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당분간은 직접 간섭하셔서 피해를 받지 않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라는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모세가 이전에 바로가 그녀를 빼앗아갔다고 기술할 때 그는 그녀의 정절이 피해를 입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여호와께서 지금 수치를 당하지 않게 보호해 주신 그녀의 옹호자로 그분 자신을 선포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그 두 사건에서 그녀의 순결을 지켜 주셨다는 것은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이 애굽에서 아비멜렉은 자기 자신을 소돔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자세하게 구별된 것인 듯합니다.
아비멜렉이 했던 말의 의미가 우리에게는 보다 더 간단하게 보입니다. 즉 ‘오 주여 당신이 간음한 사람을 엄격하게 처벌하시지만 그래도 그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당신의 진노를 쏟으려 하나이까? 고의적으로 죄를 진 것이 아니고 잘못 실수한 사람에게 그렇게 하시렵니까?’ 라는 표현입니다. 더욱이 아비멜렉은 자신이 전혀 혐의가 없다는 것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변명을 시인하셨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가 어떤 방법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에까지 그의 마음과 손들이 죄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주목해야 합니다. 아비멜렉이 말하고 있는 “의로운 백성” 이라는 말과 “온전한 마음”이라는 말이 과연 어떤 수준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비멜렉의 차원이고 이 세상 차원일 뿐입니다. 그는 전적으로 흠 없는 순결을 그 자신이 자랑하고 있지 않고 오직 그 자신이 정욕에 이끌려 계획적이나 폭군적인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아내를 욕보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묵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범죄’ 와 ‘잘못’ 과의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자신을 모든 종류의 혐의에서 면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같이 혹심한 형벌을 받을 만큼 악한 짓이라는 것을 전혀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언급하고 있는 ‘마음의 소박성’은 죄를 의식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되는 무지 이외에 그 이상의 전혀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깨끗한 손’이라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고 단지 자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같은 자제력으로 불의의 세력과 행동으로부터 절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아비멜렉이 말하고 있는 의문은 종교적인 공통 감정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자연 그 자체는 하나님이 형벌을 내리시는 가운데서 공정한 분별을 유지하고 계시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본문 6절 상반절은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답변에서 아비멜렉이 자기의 순결을 거짓으로 증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추론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변명이 사실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계시지만 그래도 그를 징계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판단으로는 순결할지라도 절대로 잘못의 책임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잘못이 용서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가치를 저하시키는 혼합물이 없다고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라는 말씀도 하나님께서 친히 수준을 낮추셔서 인간의 어법으로 아비멜렉이 알아 듣도록 말씀하신 경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판단으로 자신을 죄 없다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도 오히려 우리 모든 행위를 하나님의 표준에 가져가야 합니다. 솔로몬은 이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헛된 말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21:2)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전혀 어떤 잘못도 의식하지 못하는 자들이 혐의에서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양심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죄의식에 구속되어 있다면, 과연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겠습니까? 주의 은혜를 인하여 심령에 평강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긍휼을 의지하고 그분께 감사하며 그분을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3. 본문 6절 하반절은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입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왕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의 아내를 불결하게 하려는 의도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긍휼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이 그분의 간섭으로, 잘못으로 기울어져 가는 자들을 제재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너를 막아” 라는 말씀과 “가까이 못하게 함이”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분이 타락한 감정들과 정욕으로 다 알면서도 죄를 범하고 있는 무모한 자들을 계속 몰아 붙여 잘못된 일에 몰두하게 하며 무감각한 정신으로 지배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의적인 죄를 범하지 않은 이방 나라의 왕에게 적절한 치료방법을 가져다 주셔서 그의 허물이 더 이상 증가되지 않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택하시고 부르신 백성에게도 날마다 신실하신 경호자가 되셔서 하찮은 잘못에서 절망적인 범죄로 질주해 가는 것을 예방해 주시는 것을 입증해 주고 계십니다.
4. 본문 7절 상반절은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그의 아내와 함께 참으로 위하실 뿐만 아니라 아비멜렉에게도 살 길을 열어두십니다. 이런 점은 하나님의 두 긍휼, 즉 일반 긍휼과 특별하신 긍휼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을 일반적인 사람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특별히 사랑하는 자로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토록 사랑하는 자를 일종의 특권으로 그들 부부간의 사랑을 보호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상의 명예를 받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은 위대하고 특별히 뛰어난 자를 해쳤다는 혐의로 아비멜렉을 꾸중하고 계신 것처럼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비멜렉이 자기에게 내려진 형벌의 관대함에 당황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선지자란 말은 그 임무에 대한 적절한 명칭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그 말이 여기서 보다 함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선택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친근한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 성경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꿈과 이상으로 알려주셨을 뿐 아니라 희귀하고 월등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분 자신에게 속하게 하여 경건한 자손을 널리 퍼뜨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증거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 세상이 더욱 더 변명할 수 없게 만드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선지자이기 때문에 그는 이를테면 하나님과 아비멜렉 사이에 중재자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그리스도께서만이 유일한 중재자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아야 된다는 이유가 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매우 거룩하고 또한 하나님이 받아들이신 자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 사실은 야고보 사도가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6) 고 가르치고 있는 사실과 일치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우리는 오늘날에도 그런 중재를 무시하다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상실하는 결과에 이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그분에게서 떠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한편 그분의 중재를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카톨릭 신자들은 이런 구실로 사자(死者)의 기도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인생 중에 죽은 자를 그들의 중재자로 여깁니다. 여호와께서 여기서 그랄 왕을 노아에게나 그 밖의 죽은 조상들에게 보내지 않으시고 살아 있는 아브라함에게 가서 만나게 하신 것처럼 이 제목에 관하여 우리가 갖게 되는 교훈은 상호간에 서로를 위하여 기도함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들 가운데 박애정신을 개발시켜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5. 본문 7절 하반절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보호하시는 일을 지체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런 뜻에서 아비멜렉에게는 최후 통첩과 같은 큰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서 하나님의 통치 경내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통고하십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너와 너의 나라를 소멸시키겠다는 엄위로우신 말씀으로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위협하시고 그의 죄를 탄핵하시는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들을 위협하시고 죄를 책망하심으로 놀라게 하는 의도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너무 멀리 뒤로 처져 있는 자들을 강제로 회개하게 하시는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이 대화가 시작될 때에 처음에는 ‘네가 죽으리니’ 라고 절대적으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이라는 조건이 첨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의 표현의 의미는 동일합니다. 비록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보다 예리하게 말씀하셔서 그 범죄자에게 보다 더 큰 두려움을 주입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완전히 복종하고 나니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의도를 보다 분명하게 피력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용서와 구원의 소망을 남겨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매듭이 되고 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자신들을 혼동시키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선언하신 형벌을 그분이 언제나 또는 즉시로 집행하지 않으신다고 여기면서 자신들을 혼돈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하나님이 계획을 변경시키신 것이 아니면 또한 그분이 은밀하게 작정하신 일과는 다른 일을 그분의 말씀으로 위장하고 계신 표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시켜서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위협하셨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욘3:4). 미숙한 자들이 두 가지의 모호한 점들 가운데서 한가지인 어떻게 피하고 있는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그분의 선고를 철회하셨다는 것과 또는 하나님이 실제로는 의도하지 않으셨던 것을 하시려는 척하며 위장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위협들 가운데는 회개에 대한 끈질긴 교훈이 포함되었다는 이 원칙을 굳게 고수하고 나간다면 그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첫 번째 실예에서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려진 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제시함으로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 목적이 고려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그들을 회개하도록 부르고 계신다면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충분히 사죄의 희망은 그들에게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