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공부하였던 부분(단테, 보카치오, 초서 등등)은 건둥건둥 할 예정이니 한 번 읽고 오십시오
** 단테를 말하기 전에 이태리 초기 문학을 먼저 보자.
기독교 사제나 수도사는 라틴어를 알았지만, 일반 대중은 몰랐다. 특히 수도사는 그리스-로마 고전을 필사본으로 남겼다.
민중들은 문자화된 문학이 아니고, 입으로 구전되는 문학을 즐겼다.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구전형식은 듣기 좋고, 생생한 현장감을 나타내기 위해서 운율과 대화체 양식이었다.
주로 프랑스 쪽은 영웅시가 기사문학이 이태리로 넘어와서 광대나 이야기 꾼이 민중에게 들려 주었다.
지방의 사제들이 신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라틴어 성구보다는 쉬운 이태리 말로 풀어서. 이태리 속어로 설교한 것이 이태리 문학이 태동하는데 한 몫을 했다.
1. 대표적인 인물로 아시시의 탁발 수도승 프란체스코가 있다.
프란체스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유년기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보냈다.
그가 20세 때 깨달음을 얻어서 회개하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이때 아시시 시민이 봉건영주에 봉기하여 승리한 사건, 십자군 원정 등의 사건이 있었다. 여러 번이나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환청을 경험했다고 한다.
프란체스코의 선교 방식은, 신도를 교회에 모아서 설교하는 방식이 아니고, 자신이 일일이 백성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쉬운 이태리 말(속어로)로 설명했다. 이것은 많은 사람과 빠르게 교감과 소통이 일어나면서 프란체스트 교단을 이룰 정도로 추종자가 많았다, 본인도 가난한 성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유명해졌다.
말년에 속어로 ’태양 형제의 찬가‘라는 신을 찬미하는 시를 지었다.(유명하다고 한다.)
속어로 쓴 시, 여기서 이태리 문학이 시작한다는 연구가 많다.
(시는 생략합니다.)
르네상스를 연 화가 조토는 프란세스코외 종교 행위를 그림으로 많이 남겼다.
2. 시실리아 왕국의 궁중 문학
시실리아와 나폴리는 북부 이태리와는 다르게
11 세기에 나폴리와 시실리는 북부 노르만에게 정복 당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피를 받은 페데리코 2세가 지배했다.
페데리코 2세의 궁중에는 음유시인의 기사 문학 뿐 아나라. 속어로 된 서정시로 읊었다.
1200년 대에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에서 전해져 온 서정시가 이태리 속어로 이태리화 되면서, 이 또한 이태리 문학이 태동하는 맡거름이 되었다.
( 한문으로만 되어 있던 조선시대 문학이 조선말에 서민들에게 퍼트리기 위해서(조선말에는 시장이나 연초가게 등에서 (돈 받고)이야기를 해주는 이야기군이 있었고, 이를 대중이 읽을 수 있도록 언문본 이야기책이 나왔다.)
르네상스 작가들
1. 단테(1265-1321)의 신곡 1
(중세 문학에서 상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신곡은 소설 양식이 아니고 거대한 서사시이다. 이야기 형식이므로 기본적으로는 소설 구조이다. 이태리 문학의 중심이 되는 서사시라는 평가를 받는다. 중세 문학에서 뛰어난 작품으로 손 꼽는다. 주인공 단테가 베아트리체(천상을)와 베르길리우스(지옥을)의 안내를 받아서 지옥-연옥-천상의 순서로 여행을 한 기록이다 그곳에서 수 백 명의 신화상, 역사상의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
이 소설의 바닥에는 기독교 신앙과 신학이 깔려 있다. 죄와 벌, 기다림과 구원에 관하여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고찰이 있다. 지금의 사유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당대의 기독교적 사상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재미있는 것은 베아트리체를 금융업자에게 시집을 보낸 아버지를 지옥의 맨 밑 바닥으로 보내서 복수를 하고 있다.
신곡에 등장하는 수 백명의 인물은 실제의 인물이 대상이라고 한다.)
당시의 책은 상류층의 언어인 라틴어로 쓰여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테는 카스토냐(피렌체 지역)의 방언으로 쓰여졌다. 이 언어가 이태리 언어의 바탕이 되었다. 신곡의 언어들이 이태리 표준어가 되는 이유이다
(각 나라에서 자기 언어로 작품을 발표한다)
코메디아라고 이름을 붙여서 쓰여진 이 시는 14223행이나 되는 방대한 작품이다. 코메디아 라는 말도 희곡, 희극이라는 뜻이 아니고 ‘처음에는 비참한 운명에서 허덕이다가 나중에 행복한 결말을 맺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여기서 ‘나중에’라는 말은 신의 은총을 기다리고 있는 내세, 현세의 끝이 아니라 현세의 너머에 있는 우주적 천상 세계라고 하는 기독교적인 의미가 있다.
2. 프란체스 페트라카(1304-1374)
토스카나 지방에서 태어나서 아버지를 따라(정치저 망명) 교황이 있는 아비뇽에서 살았다. 교황과 상류층의 보호를 받으면서 시를 썼다. 1341년에 로마의 계관시인이 되었다.
단테와 친했고, 단테에 이어서 이태리 최고의 시인이라 불린다. 라틴어로 시를 썼다.(당시의 라틴어는 속어로 천대를 받았다.) 고전을 연구하여 고전작가의 가치를 수용하였다.
후대의 시인이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시적 운율이나, 소재가 이탈리아 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3.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보카치오(1313 – 1375)는 피렌체의 작가이다.
피렌체에 페스트가 대유행을 하자 여자 7명, 남자 3명이 시골로 피난길를 떠나면서 열흘 간 함께 지낸다. 지루한 시간을 달래려 한 사람이 하루에 한 가지씩 열흘 동안 한 이야기 100편의 모음집이 데카메론이다. 신곡의 100편을 본 받았다고 말한다.
데카메론에는 각계 각층이 화자가 되어서 시대 상황을 잘 보여준다. 100편의 이야기는 보카치오 혼자서 만든 것이 아니다. 고대의 원전에서, 외국의 이야기에서, 또 중세의 연애문학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데카메론은 이야기도 재미 있지만 깊이 있는 의미도 담고 있다. 신곡이 이태리 서사시 문학에서 가지는 중요성 만큼 데카메론은 산문 문학에서 중요하다.
데카메론은 문학의 범위를 넘어서 ‘14세기의 삶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로서도 중요하다.
이야기의 기본적 플롯은 사회고발적이다. 성직자의 성적 욕망과 탐욕, 새롭게 부유층으로 떠오르는 상인과 귀족 간의 갈등, 장삿길에 나선 상인들의 모험담, 여성과 기사의 사랑, 도적, 영웅, 왕, 교황, 수도사 등의 지도층 인물의 이면을 보여준다. 교회에 대한 조소도 있고, 비도덕적인 사회 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여성의 강한 성적 요구를 두고(교회는 금지하는) ‘좋은 구멍은 뚫리고 싶어 한다.’라는 표현으로 재미를 이끌어 낸다.
4.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초서(1343 – 1400)는 ~1400년 경에 캔터베리 이야기를 썼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런던 교외에서 캔터베리까지의 순례를 위해 여관에 모인 순례자들이 지루하지 않으려고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초서가 이들의 이야기 24편을 중세의 영어로 쓴 책이다.
순례에 참여하는 다양한 인물이 그려내는 각계 각층의 인물들(기사와 종자. 여자 수도원장과 사제, 법률가, 탁발 수도사, 면죄부 판매사, 의사, 무역상 등등등등)이 초서의 붓끝에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초서는 인물 묘사, 성격 묘사 그리고 사회적 지위의 3요소를 잘 섞어서 인간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전체의 이야기가 하나의 흐름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24편은 등장하는 인물에 따라서 각각 주제를 가지고 펼쳐진다. 24편은 각각의 줄거리를 가지고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