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47]씁쓸한 아버지의 ‘빈 방’
‘허물어지고’ 계신 아버지를, 어제 오전 드디어, 결국 <요양원>에 모셨다. 여동생과 함께 돌아서는 데, 발길이 한없이 허든했다. 허든한 발길. 아아-, 아버지의 한 생은 이렇게 가시는 건가? 어쩌면 이제 당신이 아흔 해 동안 사셨던 고향집을 살아서는 다시 못오시는 걸까? 지난 1월까지 총기도 여전하고 보행도 가능하여 ‘주간보호센터’를 주 6일 다니셨다. 노인들은 하루를 모른다더니, 설 직전에 몸에 ‘큰 고장’이 생겼다. 오줌을 며칠간 누지 못하여 고통스러워했다. 전립선이 정상인보다 세 배가 더 비대한 게 원인. 초고령 수술할 수 없기에 전립선동맥 색전술 시술을 했으나, 효험이 있다해도 서너 달 후라니, 오줌줄을 끼고 살 형편(어쩌면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그에 따라 단기기억 치매가 달라붙었다. 센터를 다니고 싶어하나 갈 수 없는 일. 보름에 한번은 오줌줄 세척 때문에라도 뺐다 껴야 하는데, 집안에서 당신을 케어하기는 쉽지 않은 일. 무엇보다 정신은 온전하시기에 창창히 남아도는 시간을 무료하여 홀로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형제 모두 '이제는 요양원에 갈 수 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익숙한 내 집에서 죽고 싶다며 “너그가 애쓰지만 안가면 안되냐” “죽어지지도 않고/죽어지지도 않고”를 연발하며 어제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홀로 우시는 우리 아버지. 그 모습을 보는 나의 마음이 어디 온전하겠는가. 정황은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도 막상 소지품 몇 개 챙겨 낯선 환경에 들어선다는 것이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2020년부터 나하고 둘이 고향집에서 살았으니 4년 하고도 석 달이 되었다. 어제 처음으로 큰집에서 혼자 잠을 청하는데 잠이 올 리가 있겠는가. 다행인 것은 인근에 사는 ‘엉겅퀴 박사’ 친구가 내 심정을 헤아려 저녁을 사주며 반주도 한 잔 한 덕분에 눈은 조금 붙였지만, 아버지의 빈 방을 바라보니 속은 여전히 두엄자리이다.
보훈처에서 운영하는 <보훈요양원>, 전국에 8곳 있고, 전주는 2년 전에 생겼다한다. 국가유공자(한국전쟁 기간 경찰서 단기근무)이기에 입주 자격이 있고 시설도 좋았다. 요양원 로비 작은 전광판에 ‘새 출발을 응원한다’는 문구와 함께 아버지 성함이 적혀 있으니, 희미하게나마 웃으신다. 4인실, 100세 어르신이 얼마 전 잔치를 했다는데, 독립유공자라 했다. 일단 또래 말상대가 있으니 다행이다. 사회보호사가 활자중독 아버지가 챙긴 책 몇 권을 보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반긴다. 부디 적응을 하여 잘 계시기만을 빌 따름.
효녀 동생이 “왜 천금같은 아들을 빨리 안데려가고 이런 고생을 시키냐”며 할머니가 원망스럽다고 해 웃었다. 할머니는 5대독자 남편이 서른 살에 가버리고 27살에 두 아들(8,2살)을 데리고 청상과부가 되었다. 여덟 살 아버지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집안을 일으켜세우겠다는 처음 마음을 단 한번도 잊지 않았다. 초지일관. 일곱 명의 총생을 낳아 기르고 가르치며 ‘제금’(결혼시켜 내보냄)까지 내주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순전히 땅만 파 이뤄낸 '위대한 결실'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 뜻을 한번도 거스르지 않고 받드는 천상 효자였다. 그렇게 고생한 큰아들이 저리도 힘들어하는데, 왜 안데리고 가시냐는 맏손녀의 투정인 것이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72년이나 동고동락 해로偕老를 하셨으면, 그리고 당신의 소원이 “한 날 한 시에 짜란히 죽는 것이고, 다시 태어나도 같이 만나 사는 것”이라고 하더니, 당신만 5년 전에 가시더니, 꿈에도 한번 나타나지 않으시고 왜 그렇게 초대를 하지 않으시는 걸까. 이웃동네 친구 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부인에게 “딱 2년만 더 살다 내 뒤를 따라오라”고 했는데, 정말로 딱 2년만에 그렇게 됐다며 부러워하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 제 사돈은 98세에 당신 발로 요양원에 들어가 106세까지 크게 아프지 않고 천수를 누리다 돌아가셨어요. 아흔이 넘어서도 저와 바둑을 뒀는데요. 아버지도 그렇게 되시길 빕니다. “목숨이 왜 그렇게 기냐?”는 푸념없이 고통없이 사시면 얼마나 좋아요. 어제 끝난 <인간극장> 5부작 제주 서귀포에 사는 ‘102세 할머니의 봄’처럼 말입니다. 할머니는 2남7녀를 낳아 물질(해녀)을 하여 자식들을 기르고 가르쳤다지요. 64세의 교수출신 딸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돌아온 봄을 만끽하는 어르신의 삶도 머지 않아 마침표를 찍게 되겠지만, 아버지의 삶의 끝은 언제일까요? 아버지의 ‘빈 방’을 보며 우글쭈글한 기분을 글로 적어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까지나 ‘큰 산’이었던 아버지, 곧 뵈러 갈게요. 잘 계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