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 <광야의 성 예로니모>, 1495-96, 패널에 유채, 23x17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성 예로니모(Jerome, 347-419)는 서방 가톨릭교회의 4대 교부학자(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그레고리오, 성 암브로시오) 중 한 명으로 신학교와 수덕생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성인은 현재의 발칸 지역인 스트라도니아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깊었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던 성인은 12세에 로마로 가서 문법학자 도나투스 문하에서 수사학과 라틴어 문학을 공부했다. 라틴어와 그리스 지식과 연구업적으로 알려진 성인은 19세에 세례를 받고, 여러 해 동안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신학자와 학자, 성서 주석자와 교류하게 되었다. 그 후 성인은 수도 생활에 관심을 가졌고,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를 결심했다.
수도생활을 위한 과정으로 성인은 몇 년 동안 칼치스의 사막에서 은수자 생활을 하면서 그리스어를 익히고 히브리어를 새로이 익혔다. 이후 성인은 사제서품을 받고 콘스탄티노플에서 총대주교인 성 그레고리오의 영향을 받아 성경주석 방법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로마로 자리를 옮기고 교황의 비서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수많은 저서를 번역하고 특히 신구약성경 모두를 라틴어로 번역하기에 이르렀다.
명화의 성 예로니모의 모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근간이 되는 라틴어 성경을 번역한 이였기에 화가들은 성인을 단순히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다. 그리고 성인이 사막에서 기도하거나 수행하는 모습이나, 그림 속에서 사자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모습처럼 십자가상과 해골, 올빼미 등이 동반된다.
독일 르네상스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는 도시와 멀리 떨어진 거친 바위와 나무가 둘러싸인 공간에서 성 예로니모가 수행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성인은 도시와 사람의 소음으로부터 떠나 고독과 침묵의 세계로 들어와서 자신의 붉은 망토와 모자를 벗어 놓고, 작은 십자가상 앞에서 가슴을 돌로 치며 속죄하면서 육신의 유혹을 극복하고 있다. 광야의 고행에 대해 기록된 성인의 서신을 보면 로마에서 여자들과 어울리던 기억들이 줄곧 뇌리에 박혀서, 헛된 생각을 떨치기 위해 광야로 나가 수 주일 동안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돌을 가지고 자신의 가슴에 피가 날 때까지 쳤다는 내용이 있다. 성인의 앞에 추기경의 붉은색 망토와 모자는 중세시기에 성 예로니모가 교황의 비서로 일한 추기경으로 해석하여 미술에서 성인이 추기경의 붉은 옷과 모자를 쓴 모습으로 그려졌다. 성인의 왼손에 든 돌과는 대조적으로 오른손에는 펼쳐진 두툼한 책 한 권을 쥐고 있다. 이것은 학자로서의 그의 상징이면서 그가 완성한 책으로 대중에게 읽힐 수 있는 라틴 말 성경인 「불가타」 성경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성인의 바로 뒤에 커다란 사자 한 마리가 조용히 앉아 있다. 보라기네의 「황금전설」의 기록에 근거해서 성인과 사자를 함께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서인이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사자의 앞발에 박힌 가시를 뽑아주었더니, 그 사자가 성 예로니모를 평생 따라다녔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사자 앞발의 가시에 대한 일화에 근거해 성인을 그린 서재 장면이나 광야 장면 모두에 사자가 등장한다. 사자는 성인이 로마를 떠나 베들레헴의 수도원에 정착한 후 그곳에서 죽은 뒤에도 수도원에 머물며 당나귀를 지켰다고 한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성 예로니모)
축일 : 9월 30일
수호성인 : 학자, 신학교, 학생, 번역가
상징 : 사자, 해골, 모래시계, 책, 추기경 복장
뒷면에는 유성 / 운석 또는 혜성으로 보이는 것의 흥미로운 이미지가 있다.
Dürer의 영감은 혜성의 묘사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판화는 매우 양식화되어 있으며 역사적인 혜성을 나타 내기위한 것이 아니다.
반면 Dürer의 이미지는 Dürer의 수수께끼 같은 조각에서 타오르는 별처럼 실제 관찰의 느낌을 가진다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