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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에서 1956년까지 56승 9무 6패.
4년간 32경기 연속 무패.
역사상 최강의 팀.
바로 50년대 헝가리 대표팀, AZ ARANYCSAPAT(THE GOLDEN TEAM)의 이야기입니다.
이 팀, 우리와도 관계가 깊습니다. 원조 태극전사의 월드컵 데뷔전에서 0대9란 참혹한 패배를 안겨준 바로 그 자들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비슷한 시기 세계 정상급 팀들이 우리와 비슷한 수모를 다 겪어 보았으니까요.
얼마 전 ‘월드 사커’지는 이 팀을 역사상 60년대 브라질 대표팀에 이어 두 번째로 강한 팀으로 뽑은 적이 있습니다. 거의 동시대 이지만 이들은 펠레의 브라질 팀과 격돌한 적이 없었지요. 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이들은 정말 브라질 팀보다 저 평가 받아 마땅한 팀이었을까요?
이 과정에서 당국의 의욕 과다로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대표팀의 전력강화를 위해 대표급 선수들을 모두 한 클럽에 몰아넣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 정권은 국방부 산하 혼베드(Honved)팀을 창설하고 국내 A급 선수들을 싹쓸이하여 축구 인들의 반감을 산게 됩니다.(20여년 후 대한민국 중정
셰베시가 끌어 모은 뿌시까시(Puskas. 흔히 푸스카스로 잘못 부름), 코치시(Kocsis. 역시 콕시스라고 잘못 부름), 치보르(Czibor) 같은 선수들은 기량은 뛰어나지만 경기 경험이 적은 20살 갓 넘은 젊은 선수들로 이는 많은 전문가들의 우려를 삽니다. 또 반체제 성향이 강한 선수들의 대표팀 제외도 정권의 후원 아래 있던 셰베시의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우려는 곧 현실로 들어나, 49년 봄 열린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감독 데뷔전에서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는 셰베시가 감독 지휘봉만 잡았을 뿐이지 기존에 헝가리 대표팀 멤버들과 전술이 그대로 사용된 경기였습니다. 한 달 뒤 벌어진 경기에서 새 감독은 자신의 수제자들을 경기장에 풀어 전통의 라이벌 오스트리아를
당시 단순히 수비와 공격진으로 나뉘는 W-M 시스템(3-2-5)이 주를 이루던 축구계에서 헝가리팀이 선보인 4-2-4는 그야말로 혁명이었습니다.
셰베시는 기존 방식대로 5명이 최전방에 포진 될 경우 공격수들의 빠른 수비 지원이 어렵다 판단하고 그 약점을 보안하기 위해 수비를 한자리 더 보강합니다. 그 대신 스위퍼라는 포지션을 만들어내 공세 때는 스위퍼만 남기도 모두 공격지원에 동원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70년대 네덜란드의 이름을 드높인 토탈 축구의 원형인 것입니다. 골든팀은 수비수도 골을 넣는 당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상한 팀이었습니다.
셰베시 본인은 이 방식이 포지션에 상관없이 평등하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식 축구라는 괴변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어쨌든 간에 다른 나라 대표팀들은 헝가리와 맞서는 족족 추풍낙엽으로 쓸려나가기 시작합니다. 52년 7월 헬싱키 올림픽 이전까지 약 3년간 골든팀은 단 1패만을 기록했고 18경기 중 9경기를 5점차 이상으로 압승합니다.
물론 새 전술 하나만으로 헝가리의 독주가 가능했을 리는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4-2-4는 골든팀 이전에도 잉글랜드의 몇몇 클럽 팀들이 사용했던 방식이었고 셰베시 감독 본인도 이를 차용했음을 밝히곤 했습니다. 다만 몇몇 세부 전술에서 차이가 있을 뿐으로 그 핵심 중 하나는 이미 언급한 스위퍼의 이용이며 그보다 중요한 하나는 바로 ‘플레이 메이커’의 개념이었습니다.
49년 말부터 골든팀에 합류한 MTK 소속 히데그쿠티(Hidegkuti)는 세베시 감독이 원하던 축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핵심 플레이어였습니다. 최전방에 당대 세계 최고의 두 골잡이 뿌시까시와, 코치시를 세우고 양 사이드에 개인 돌파에 이은 크로스 능력이 뛰어난 치보르와 부더이(Budai)를 배치한 셰베시 감독은 히데그쿠티에게 중원에서 이들을 총지휘 할 것을 지시합니다.
히데그쿠티를 잡기 위해 상대 수비수들이 중앙으로 몰리면 곧바로 양 날개를 펼쳐 사이드를 유린했고, 사이드를 잡기 위해 수비가 넓게 벌어지면 중앙의 공격수들에게 송곳 패스가 이어지거나 히데그쿠티 본인 혹은 수비형 미드필더들의 오버 래핑으로 골을 만들어냈습니다.
골든팀 축구의 핵심 중에 핵심 키워드는 바로 변칙 축구입니다. 진법에 딱히 무슨 틀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포메이션은 결코 전술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4-2-4를 원칙으로 서되 선수들은 상황에 따라 계속 포메이션과 포지션을 바꾸며 경기를 치렀고 멀티 포지션의 개념이 없었던 상대팀들은 정신 없이 자리를 바꾸는 이 괴상한 팀에게서 공을 뺐을 수가 없었습니다.
흔히 히데그쿠티는 최초의 쳐진 스트라이커로 잘 알려졌으나 엄연히 말하면 그의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였으며 주 임무는 공격 지휘였습니다. 순식간에 미드필더와 포워더가 자리를 바꾸는 변칙 운영 시스템으로 많은 골을 기록한 덕에 골잡이로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뿐입니다.
*세베시 감독이 그린 포메이션 그림 (여기서는 3-4-3 형태를 보인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골든팀의 연승 이유는 역시 선수들의 경기력이었습니다. 변칙 축구라는 것 자체가 선수들 기량과 풍족한 선수층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뛰어난 지도자와 전술, 국가적 지원은 동시대 다른 나라들도 할 수 있었고, 또 실제 하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 잘난 4-2-4는 얼마 안가 대부분의 나라에 도용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헝가리에게 많은 골 세례를 받는 딱한 처지였습니다.
1차, 2차 세계대전 연속 패배로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소련에 점령까지 당해야 했던 헝가리 젊은이들은 그 한을 스포츠로 폭발시켰습니다. 세계 대전 시대 소년기를 겪은 젊은 축구 인프라가 헝가리에는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경제공항과, 정치적 격동기에 축구가 팔자를 고치기 매우 유용한 수단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골든팀 경기에서는 개인돌파가 유독 많았습니다. 자기 포지션을 지키는 것이 미덕이었던 당시 축구에서 이런 개인플레이의 난무는 최소한 유럽에서만큼은 생소한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골든팀 멤버들은 넘치기 개인끼(?)를 주체하지 못하고 각개전투를 벌이며 쳐들어가기를 즐깁니다.
스위스와 원정 경기에서 일부러 먼저 2점을 내주고 감독으로부터 보너스 지급 요구를 받은 뒤 바로 4골을 꽂아 넣었던 일화는 골든팀 선수들이 얼마나 자신감에 넘쳤으며 골든팀과 기타 팀들과의 수준 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당시 헝가리 정부는 골든팀의 수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듯합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앞서 셰베시 감독은 섭섭하게도 윗분들로부터 동메달이나 건져 오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결과는 간단히 금메달. 올림픽은 아마추어 대회라고 평가절하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때는 아마와 프로의 구분이 애매하던 시절이었고, 무늬만 아마추어인 공산권 국가들이 축구판에서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하간에 헝가리 공산당은 이제 골든팀을 좀 색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전쟁 등으로 이념 대결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절. 극악무도한 자본주의 국가들을 상대로 KO 행진을 벌이던 골든팀이야 말로 체제 홍보에 첨병으로 안성맞춤임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 올림픽 환영 퍼레이드
올림픽 이후에도 골든팀의 질주는 멈출 줄 몰랐습니다. 52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를 5-0으로 두들기고, 53년 5월 이태리의 심장 로마 올림픽 경기장 9만 관중 앞에서 뿌시까시와 히데그쿠티의 세 골로 이태리를 완파하는 등 1950년 5월 이후 3년 반 동안 단 1패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무패 행진은 이제 24경기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이태리와 경기 이후 당시 골든팀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가 막 출발하려고 할 때, 선수단은 월드스타 뿌시까시가 자리에 없음을 발견합니다. 순간 선수단은 긴장에 휩싸입니다. 뿌시까시가 망명을 했다고 확신한 것이었습니다. 다 같이 남아 찾아볼 것인가, 그냥 돌아가 징계를 당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할 때 뿌시까시가 뻔뻔스럽게 나타났습니다. 단순 지각이었답디다.
당국의 집중 관리를 받던 젊은 선수들에게 언젠가부터 대표팀 자리는 영광과 즐거움이 아닌 부담스럽고 숨 막히는 위치로 변화되기 시작했고 상부에서는 오히려 이런 선수들의 관리 수준을 계속 강화해 나갔습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망명을 생각해 볼수 밖에 었습니다.
*이태리전, 득점 후 기뻐하는 헝기리팀과 패배 후 락커룸으로 향하는 이태리팀
1953년 11월 초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 라코시(Rakosi)는 대표팀 감독 셰베시를 호출했습니다. 그리고는 런던 원정을 멋대로 결정한 것을 질책합니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심볼인 영국에게 질 경우 대망신이니 경기를 취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62년 월드컵 예선에서 북한에 질 것 같으니 출전을 포기한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스포츠가 이념 경쟁의 도구로 이용되던 슬픈 시대였습니다. 80년대 말까지 죽 그랬지요.
그러나 셰베시 감독은 오히려 이겼을 경우 챙길 수 있는 선전 효과를 강조했고, 필승의 약속을 받고서야 서기장은 경기를 허락합니다. 겉으로는 자신만만했던 셰베시였지만 패배가 가져올 파장에 밤잠을 못 자고 고민했음을 그의 일기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불과 1년여 전, 올림픽 우승의 여세를 몰아 잉글랜드와 한판 붙어보길 바라는 목소리가 높을 때 만해도 셰베시가 앞서서 경기를 반대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골든팀에게는 축구의 성지 웸블리에 침투해 90년 무패 전적을 자랑하는 종가 잉글랜드의 목을 따오는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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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기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 마치 잉글랜드가 헝가리를 우습게 알고 방심하고 있다가 된통 당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글들이 많습니다만 잉글랜드는 분명 떨고 있었고 또 골든팀을 철저히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는 경기 시작과 동시에 나타납니다.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 수비수로 추앙 받는 빌리 라이트가 이끄는 수비진은 처음부터 히데그쿠티에게 공이 전해지는 것을 원천 봉쇄했습니다. 히데그쿠티가 골든팀 공격의 총지휘자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골든팀은 순식간에 진법을 바꾸며 잉글랜드 수비진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습니다. 투톱 뿌시까시와 코치시가 미드필더로 내려오고 히데그쿠티가 원톱 자리로 치고 나갑니다. 날개 공격수들은 엉뚱하게도 그라운드 중앙에서 얼쩡거리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수비 선수들이 사전에 맨투맨으로 전담하기로 한 헝가리 공격수 중 단 한 명도 원래 위치에서 경기를 하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경기시작 불과 2분 만에 헝가리의 첫 골이 들어갑니다. 그것도 잉글랜드 수비진에 에워싸여 있어야 마땅한 히데그쿠티가 노 마크로 활개를 치며 넣은 것이었습니다.
전열을 가다듬은 잉글랜드가 한 골을 만회하지만 경기는 오히려 완전히 골든팀에 의해 지배되기 시작했습니다. 히데그쿠티와 뿌시까시의 추가골로 20분 만에 3-1로 경기를 앞서던 헝가리는 자신감을 얻었는지 대량 득점을 욕심내기 시작했습니다. 느닷없이 이전의 짧은 패스에 의한 침투 방식을 상대편 영국인들의 특기인 킥엔러시로 변환합니다. 활짝 핀 양 날개는 그라운드 전체를 전후, 대각선으로 마구 돌파했고, 헤딩 천재 코치시의 고공 폭격과 뿌시까시의 강슛들이 불을 뿜었습니다. 말 그대로 총공세!! 축구 종가는 마치 아무 생각 없이 공만 따라 뛰어다니는 동네 꼬마 축구단의 모양새였습니다.
전반 29분, 드디어 20세기 최고의 골이 뿌시까시에 의해 작렬됩니다. 세계 최초로 신발 밑창으로 공을 안쪽으로 잡아 끄는 ‘드래그 백’에 의한 수비수 제치기가 선보여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골로 연결되기까지 일곱 번의 길고 짧은 화려한 패스가 이어지는 동안 FC슛돌이들은 별 저항도 못하고 당하고 있음을 아래 동영상을 통해 볼 수가 있습니다.
자칭 뿌시까시의 신봉자인 독일의 축구 영웅 베켄바우어는 유소년들을 상대로 강연할 때면 이 골 장면을 꼭 보여준다고 합니다.
후반전 역시 헝가리의 일방적 공세 속에 경기는 6-3으로 끝이 납니다. 이어서 전 세계 언론은 골든팀을 극찬하기 시작했지요. 가장 적극적인 곳은 의외로 영국 언론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당한 패배는 결코 전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외계의 축구 괴물들에게 당한 불가항력이었음을 연일 떠들어 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무림의 고수가 실전 경험 많은 길거리 양아치를 상대로 실수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이날 헝가리 팀원들이 보여준 플레이를 통해 세계는 축구에서 승리하는 두 가지 공식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 패스는 사람이 아닌 빈 공간을 향해야 하며 둘째, 선수들은 그 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때까지는 지켜지지 않고 있던 승리 방정식이었습니다.(생각해보니 지금도 잘 못 지키는 팀이 많네요. 대한민X 등등)
골든팀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드림팀으로 우뚝 솟아올랐습니다. 여러 팀들이 헝가리의 V넥 티셔츠와 목 없는 축구화를 따라 입기 시작했습니다. 골든팀의 경기를 직접 한번 보기 위해 헝가리 여행 계획을 짜는 사람들이 생겼고, 남자 아이들은 골든팀 선수들의 이름과 등번호를 외우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제 골든팀의 남은 목표는 단 하나! 월드컵을 차지하여 명실상부한 세계 챔피언임을 공인 받는 것뿐이었습니다.
한편 복수의 칼을 갈던 무림의 고수는 반 년 뒤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방문해 명예 회복을 노리지만 이번엔 7-1로 뭇매를 얻어맞고 쓸쓸히 산중으로 돌아갑니다
*잉글랜드 격파의 두 영웅 코치시와 히데그쿠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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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 대진이 발표되자 대다수의 정상권 팀들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총 16개국이 4개조로 나뉘어 각 조 1,2위가 8강에 진출하는 것까지는 지극히 상식적인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조1위로 조별 경기를 통과할 경우, 결승까지 계속 다른 조의 1위들과 만나야 하는 기묘한 토너먼트 대진이 나온 것이었습니다.단 1패 아니 무승부 한번이면 명성에 큰 흠집이 나는 상황이었던 골든팀은 목표를 전경기 다득점 대승으로 정하고 모든 경기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결정합니다. 축구를 전혀 모르지 않고서는 당연히 헝가리의 목표가 현실화 될 것이라고 모두들 예상했습니다.
반면 같은 조의 서독은 후보들을 내보내 헝가리와의 경기를 버리고 다음 상대 터키를 잡은 뒤 2위들만의 토너먼트에 줄을 서 편하게 결승까지 올라가 숨겨둔 정예들을 동원, 헝가리를 상대했다는 것이 흔히들 알고 있는 스위스 월드컵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세에서 결과만 보고 지어낸 것입니다. 당시 실제 경기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모두 서독이 헝가리 전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독은 터키를 우습게 생각할 만한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시드도 터키가 2번 서독이 3번이었습니다.(그나마 한국이 없었다면 4번 받았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터키를 대파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나 경기 전 서독 입장에서는 터키나 헝가리나 두럽긴 매일반이었습니다. 당시 서독은 1승을 목표로 전 경기를 결승전 치르 듯 준비해야 했던 약체 중 하나였습니다.
조별경기에서 골든팀은 대한민국팀과 서독을 차례로 대파하고 예상대로 조1위를 차지했지만 서독과의 경기에서 뿌시까시의 발목 부상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불행의 서막이었지요.
8강 브라질전. 경기 시작 4분 만에 히데그쿠티의 골이 들어가는데 강력한 몸싸움을 벌이던 브라질 그의 바지를 찢어놓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축구라기보다 패싸움이라는 표현이 적당한 과격한 경기를 치러집니다. 브라질은 전력의 차를 기싸움으로 극복해 보려고 작정을 하고 나온 듯 했습니다. 양 팀 모두 한 골씩을 페널티킥으로 얻었고 골든팀의 보직과 브라질 선수 2명, 도합 3명이 퇴장 당합니다. 당시에는 보란 듯이 치고 받지 않는 한 좀처럼 퇴장을 주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4-2로 승리한 골든팀에게 브라질은 더욱 가혹한 시련을 안겨줍니다. 경기 종료 후 병으로 무장하고 헝가리 락커룸으로 공격을 해온 것이었습니다. 셰베시 감독까지 얼굴에 상처를 입었고 양 팀 선수 중 한 명도 빠짐없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대참사였지요. 후세 사람들은 이 경기를 ‘베른의 전투’로 기억하게 됩니다.
아무튼 싸움은 돌주먹으로 유명한 로란트(Lorant)의 맹활약으로 골든팀의 승리로 끝났다고 전합니다.(자랑이다!)
*브라질전 싸움을 말리기 위해 동원된 경찰들 모습이 보이는 사진.
이어진 강전에서 만난 디펜딩 챔프이며 골든팀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우루과이와는 연장까지가는 명승부가 연출되었습니다. 뿌시까시의 공백을 대신해 왼쪽 날개 치보르를 포워더로 사용하는 등 포지션의 변화를 주었다가 브라질전에서 별 재미를 못 본 셰베시 감독은 펄로따시(Palotas)를 중앙 공격수로 투입하고 다른 선수들은 익숙한 원래 위치에서 플레이를 펼치도록 작전을 짭니다.
2-0으로 앞서나가며 무난히 결승에 오를 것 같이 보이던 골든팀은 ‘베른의 전투’ 후유증이 발병한 것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움직임이 무거워 지더니 종료 4분을 남기고 결국 2-2 동점골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나타난 구세주가 코치시였습니다. 이어진 연장전에서 장기인 고공헤딩슛 두 개를 골로 성공시키며 팀을 결승전에 올려놓은 것이었습니다.
악전고투 끝에 이기기는 했지만 선수들의 피로 누적은 이제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수비수였던 부잔스키(Buzanszky)는 결승전을 앞두고 정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결승 전날 밤, 선수들은 육체적 피로와 패배 후 당국이 보여줄 ‘뒤끝’에 대한 불안으로 극도로 피로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판국에 숙소 앞에서는 스위스 전국에서 몰려든 밴드들이 밤새 콘서트 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골든팀 선수들에게 그나마 위안은 예상을 깨고 유고슬라비아나 오스트리아가 아닌 서독이 결승까지 올라온 점이었지요. 얼마나 위안이 되었으면 그 상황에 밤 늦게까지 술로 긴장 완화를 시도한 선수들도 있었다고 전합니다. 방심이었지요.
결승전을 앞두고 셰비시 감독은 조금 엉뚱한 작전을 지시합니다. 부상 중인 뿌시까시를 출전시키고 이제까지 시도해 본 적 없었던 양쪽 날개 치보르와 토트(Toth)의 자리를 맞바꾸는 깜짝 포메이션도 선보입니다. 뿌시까시도 돌아온 마당에 히데그쿠티까지 최전방에 배치되었습니다. 서독을 너무 깔본 것인지 반대로 너무 과대 평가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처사였습니다.
확실한 것은 가능한 모든 공격수를 전면에 세워 경기 초반에 승부를 결정 내겠다는 의지로 풀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헝가리는 화려한 피날레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세프 허버거 서독 감독도 조별 예선 때와 다른 멤버를 무려 여섯 명이나 가동시켜 상대를 당황하게 하고, 골든팀의 공격력을 무력화 시킬 수비형 미드필더 진을 보강하는 전술로 응수합니다. 분명한 한가지, 서독팀에게는 골든팀에는 희박하던 '필사즉생'의 엄청난 투지가 이글이글거리고 있었습니다.
경기 시작 전, 서독 선수들은 완전히 얼어 있었습니다. 마치 군대사열을 하듯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골든팀 선수들은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히히덕거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결승전이 시작되고 시합은 셰베시가 의도한 그대로 진행되는 듯 보였습니다. 시작과 거의 동시에 뿌시까시와 치보르의 슛이 서독의 골망을 흔듭니다.
그런데 전반 10분이 지나자 하늘은 게르만의 편임을 알려주는 불길한 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히데그쿠티가 골문 8m 앞에서 날린 슛이 골대 안쪽에 맞고 튕겨 서독의 투렉 골키퍼 품에 안기더니, 코치시의 헤딩슛마저 크로스바 하단에 맞고 밖으로 튕겨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이 서독은 2골을 넣어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피로누적으로 인해 가뜩이나 몸은 안 따르는데 계속 내리는 비로 점점 갯벌화 되어가는 그라운드를 보며 골든팀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져만 갔습니다. 특유의 자유분방한 변칙 스타일은 서독의 기계라고 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환상적인 조직 플레이 앞에서 점점 무력화되고 있었고 언젠가부터 서서히 중원은 서독에 의해 장악당하고 있었습니다.
후반은 말 그대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었습니다. 연장전으로 들어가면 끝장이라고 생각한 골든팀은 평소에 비해 많이 빈약한 수비진을 돌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뛰어난 개인기를 믿고 일발필살로 경기를 끝내려 들었지요. 여기 저기 구멍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후반 39분 서독의 란이 헝가리의 패스를 가로채 왼쪽에서 중앙으로 드리블해 들어간 뒤 골대 모서리 향해 슛을 날립니다. 그로시츠 골키퍼는 힘껏 다이빙해 보았지만 진창에 약간 미끄러지며 공을 막는데 실패했습니다. 경기가 뒤집힌 것입니다.
곧바로 골든팀의 총반격이 시작됩니다. 보직은 서독 수비수 뒤 공간으로 30m짜리 완벽한 패스를 찔러 넣었고 질주하던 뿌시까시의 템포에 제대로 걸려들었습니다. 서독 수비수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 만회골로 헝가리가 다시 따라 붙습니다.
* 양팀의 희비가 교차된 뿌시까시의 마지막 슛 직전 모습
그런데 이어서 들리는 주심의 휘슬 소리! 오프 사이드가 선언됩니다.(비데오 판독 결과 오심이었음)
바로 이어서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축구제국의 멸망을 노래한 대서사시 ‘베른의 기적’은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이 경기를 ‘라인강의 기적’의 시발점으로 본다고 합니다. 고개도 못 들며 지내온 전범국 국민들에게 이 처럼 환상적인 선물이 또 있을까요? 반대로 헝가리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패배의 대가로 선수전원이 벤츠를 선물 받았다는 등의 루머가 돌았고 결승에서 보여준 셰베시의 파격적 경기 운영이 지탄을 받았습니다. 특히 경기 전날 약주를 자신 것으로 소문이난 몇몇 선수들은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했습니다.
이 음주 의혹은 훗날 사실로 확인됩니다. 골든팀의 패배가 피로 누적, 전술적 문제를 넘어 선수들의 교만함이 부른 화였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부분입니다.
대표팀에 향했던 민중들의 분노의 화살은 곧 정권을 향합니다. 서독으로부터 무상으로 받은 농업용 콤바인들을 뱉어내라는 시위가 발생하고(역시 헛소문인데 아직도 믿는 사람이 있답니다.) 자꾸 쓸데없는 간섭을 해 대표팀에게 부담을 준 고위층들이 주로 민중의 뒷담화에 걸려들었습니다.
가뜩이나 입지가 불안했던 공산 정권에게 골든팀은 이제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변해버렸습니다. 즉각 조사위원회를 구성, 대표팀 운영에 문제점을 캐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까지는 너그러이 봐주던 선수들이 원정에서 돌아오며 벌인 보따리 장사도 문제가 되었고(골키퍼 그로시츠는 구류를 살기까지 했습니다) 뿌시까시는 갑자기 살이 많이 쪘다는 이유로 조사 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토사구팽!
선수단이 할 수 있었던 응수는 단 하나. 다시 연승 행진을 벌이며 여전히 세계 최강임을 보여주는 것 밖에 없었겠지요. 그리고 완벽하게 이를 입증해 보입니다. 20대 후반에 접어든 골든팀 멤버들은 오히려 이전보다 완성된 기량을 선보이며 서독과의 결승전 이후, 1년 4개월간 18경기 연속 무패를 달립니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를 차례로 5-0, 7-3, 6-0, 9-1로 부순 원정 투어는 그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스위스 월드컵 이후 곧바로 골든팀이 끝장난 것으로 보는 주장들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좌절을 통해 더 강력한 슈퍼팀으로 재탄생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국민들의 지지율은 여전히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소련과 두 번이나 무승부를 기록한 일로 구설수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압승할 수 있는 경기를 소련에게 잘 보이려는 정부의 사주에 의해 일부러 비겨줬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수들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요. 당시 ‘신의 손’ 야신을 주축으로 전력이 수직 상승 중이던 소련팀은 헝가리 국민들이 생각하는 이전의 소련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전설의 골키퍼 야신
비빌 곳 없어진 골든팀은 결국 자멸하기 시작합니다. 1956년이 접어들며 언제나 밥일 줄 알았던 터키에게 충격적인 일격을 당하더니 이어 무려 5경기 연속 무승 이라는 참담한 결과가 이어집니다. 축구 협회는 망설임 없이 셰베시 감독을 권좌에서 끌어 내립니다. 너무 오래 최강에서 군림한 탓일까요? 셰베시의 독단적인 대표팀 운영과 일부 톱스타들의 사생활 문란이 빚은 화였습니다.
새 사령탑 부코비 마르톤(Bukovi Marton)의 지휘아래 정신을 차리고 다시 5연승을 내달리며 명예회복을 노리던 골든팀은
혁명이었습니다. 타도 공산당의 물결이 전 헝가리를 뒤덮었고 결국 민중들에게 정권을 빼앗긴 공산당은 소련 탱크부대의 지원을 받아 시민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합니다. 전쟁이었지요. 이 과정에서 골든팀의 일부는 외국으로 망명에 나섰고, 다른 일부는 고향에 남아 정권에 항거하거나 혹은 타협해야했습니다. 세계 최강의 팀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된 것입니다.
* 작년 뿌시까시의 장례식 모습
단순 무식한 스포츠였던 축구를 진정한 스포츠 아니 예술로 승화시킨 현대 축구의 창시자 헝가리 골든팀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헝가리 축구는 다시는 그때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골든팀 멤버들이 지도자로 변신해 활약하는 70, 80년대 초까지 해도 최소 유럽 중위권 이상의 실력이었던 헝가리는 언젠가부터 스타플레이어의 씨가 마르며 완전한 축구 변방국으로 나가떨어졌습니다. 아름다운 추억만이 존재할 뿐이지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봅시다. 과연 골든팀은 당시 지구 반대쪽에서 욱일승천하고 있던 펠레의 브라질 대표팀 보다 약했을까요? 스페인으로 망명 후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이 된 뿌시까시는 죽는 그날까지 골든팀이 해체되지 않고 남았더라면 브라질도 충분히 이겼다고 주장해왔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는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 기량들은 비슷하다고 보지만 펠레의 브라질은 전술적면에서 골든팀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그래서 그게 뭐가 흉인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유명한 브라질의 4-2-4라는 것이 바로 골든팀의 전술을 모델로 업그레이드한 것인데(브라질은 3-3-4에 가까움) 70년대 네덜란드는 다시 브라질의 전술을 업그레이드 시켰고...
그렇게 축구는 계속 발전해왔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TV만 틀면 22명이 녹색 그라운드에서 벌이는 마술 같은 이야기들 볼 수 있어 저는 행복합니다. 이 이야기들의 뼈대를 제공해준 현대 축구의 창조자 셰베시 구스타브와 그 멤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현재 골든팀 주전 멤버 중 부잔스키(왼쪽 위에서 두번째), 그로시츠(왼쪽 맨위)만이 생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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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현대 축구의 시작이고 뭐고 우리나라는 6.25 때문에 피난 가느라 정신없었다
푸스카스가 날라다니던 시절이 그립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디 스테파노의 그림같은 플레이가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50년대 헝가리 축구를 이끌던 푸스카스 ... 오늘따라 그의 플레이가 그리워지는군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나도 이거보면서 그 댓글이 생각났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950년대 세계축구를 평정하던 푸스카스의 헝가리가 그립다.. 그때의 플레이는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환상적이었는데... 얼른 헝가리가 부활해서 다시한번 유럽강호의 진면모를 보여주었으면 하네요^^)ㅋㅋㅋ 이거를 말씀하시는듯 ㅋㅋ
님들 태어나지도 않았음.. 딱히 그립다고 말할...
꼭 이렇게 눈치없는 사람이 한명씩 있음..
제가 디스테파노의 마지막슛을 실제로본사람중한명인데..정말 대단했죠...그의 훼이크는 현대축구에서도 나올까말까하는
훗,,모두들 디 스테파노의 경기를 티비로 볼때 난 마드리드에서 실제로 보고 있었다오....훗..옛날생각나네..
ㅋㅋㅋㅋ 훗 나도 마드리드에서 레알이 챔스 5연속 우승한거 봤는데 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이댓글 생각남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K-리그 토크 /진짜 눈치없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존 알드릿지/ 저희때는 챔스가 아니라 유러피언컵이었어요 ^^ 레알하면 뭐니뭐니해도 60년 결승전이죠.. 프랑크푸르트를 7-3으로 박살낸 ㅋㅋ 진짜 스테파노 4골 쩔었는데ㅠ 제 옆자리에서 경기본넘 나중에보니 좀 유명해져있더라구요.. 퍼거슨이라던가?
에우제비오가 북한 먼지나도록 털때 정말 그플레이란..
ㅋㅋㅋ
알싸 최고 고령자.jpg
(생각해보니 지금도 잘 못 지키는 팀이 많네요. 대한민X 등등)(생각해보니 지금도 잘 못 지키는 팀이 많네요. 대한민X 등등).....원출처 글쓴이 뭥미...그거 잘지키는 유럽가서 살던지....
...사실 그런 생각들 많이 하지 않았나요? ㅎㅎ; [그나저나 글 쓴 날짜가 2007년이네요. 2007년 무렵 국대 플레이가 어땠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비교는 패스..]
푸스카스가 혁명때문에 스페인으로 망명했었나
그럴겁니다. 스페인 국가대표팀에서도 뛰었던걸로,,,, 칠레월드컵인가??? 거기 나갔다구고 하는거 같아요
뿌시까시 ;;;
;;;;;;;;;; 두분만이 생존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