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
심장이 떨린다.
이렇게 궁이라는 거대한 장경을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을 치고
가슴이 꽈악 막혀 답답한데..
어떻게 이렇게 평생을 살아가란 말이지..
궁으로 들어가는 관문에서 망설이는 연아다.
꾀 늦게 도착한 바람에 뒷쪽에 서있던 연아가 동동 발을 굴렸다.
"조용히 계십시오"
그러한데.. 이 나인은 뭐람.
마치 연아는 절대 통과할 리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처럼 아까부터
대놓고 연아를 무시하고있다.
다른 나인들은 자신이 모시는 사람의 머리도 다듬어주고 힘내세요 하고
웃어주는 이 버르장머리 없는 나인은 눈을 내리깔고 묘한 웃음만을 짓고있다.
기분나뻐.
연아의 차례가 되기 까지는 아직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자신이 통과해야 하는 그 관문이 자세히 어떤 걸지 설명을 해 주지도 않는 이 나인은......
이 것이 미워서라도 꼭 궁에 들어야야 겠다고 생각하는 연아다.
하지만 잘 할 수 있을련지..
눈만 깜빡이면 눈물을 흘리며 발길을 돌리는 여인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발길을 돌리는 여인들이 널리고 널렸다.
널리고.. 널렸다.....
그 자리에 우뚝 선 연아가 고운 비단을 꾸욱 잡으며 눈을 굴렸다.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 작은 문에는 상궁 여럿과 곱게 단장한 여인들이 단아하게 상궁들의 말을 듣고 있
었다..
그 중에는 아예 상궁의 말을 채 반도 다 듣기 전에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줄이 짧아질 수록 연아는 나인이 말해주지 않은 관문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었다.
그 나무를 밟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쓸데없는 관문은.........
끈기를 시험하는 듯해보였다.
양 아깨에 사기 그릇을 올리고, 머리에 도자기를 올리고 사푼히 걷는 그 관문은.
그냥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되는 듯해보였다.
그릇을 떨어뜨리거나, 넘어졌는데 상궁이 아무 말 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어떤 일이 생기든 앞만 보고 가자.
연아가 모든 걸 혼자 터득 해 내었다는 걸, 이 미련한 나인은 알고있는지 없는지
그냥 연아의 옆에서 빈둥거리고만 있다.
흥, 니가 누구던 난 처음 마음먹은 것과는 다르게 잘 해낼거다 이것아.
그리고 널 제일 처음 벌할것이야.
이 못~된것.
***
"대의정 따님이시옵니다.
이름은 연아이고 성은 이 이옵니다.
올 해 열 일곱 되시옵니다."
드디어 연아차례가 되었다.
무지 건방진 나인은 상궁 앞에 가서야 고개를 조아리고 조목조목 모든 것을 말했다.
그리고는 이제서야 옷을 탁탁 털어주고 어깨를 교정시켜 주고는
다시 상궁에게 머리를 숙였다.
"이 관문은, 들으신대로 여기 있는 그릇을 몸에 올리고
저기 보이는 대문까지 나무 위를 걸어가시면 되옵니다.
그럼."
들으신대로라니. 들으신대로라니!!
이보세요, 상궁아주머니. 전 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나쁜것한테
아무런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무얼 들었단 말씀이세요~!!!!!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연아였지만,
입을 열려는 찰나 상궁이 그녀의 어깨에 꾀 묵직한 접시 두 개를 얹어 주었다.
그리고 엄청난 무게의 항아리까지!!
목이 부러질 지경이었지만 그 것에 신경 쓸 새도 없이 그녀는 모든 것을 빨리, 침착하게 처리해야한다.
시간을 끌면 정말 궁에 들어가기도 전에 머리가 부러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 마다 심장이 떨어지고 간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서늘서늘 한 것이.
어두운 문 밑을 빠져나가자 따스한 햇살이 그녀의 어깨너머로 쏱아져 그릇과 항아리
한 가득 담겼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황량한 돌로 된 땅 뿐이었다.
그녀 주위에는 빨간색과 군청색으로 된 옷을 입은 군관들이 각자 창을 차고 서 있었으며,
그 뒤로는 차분한 청색 옷을 입은 궁녀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서 있었다.
자신을 보고있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하고.. 무언가....
민망하기도 하고.....
그런데.... 저 게 뭐지.......
눈 앞에 보이는데, 사람같은 것이 날아가는 걸 보고 그녀가 오른 쪽 어깨에 있는 그릇을 떨어뜨렸다.
하마터면 눈물을 왈칵 쏟을 뻔 했으나,
그에 상관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발의 폭과 꼬 맞는 너비를 가진 나무를 찬찬히 밟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연아야.
열심히 하자.
하는 다짐을 계속하며....
***
"의판조 대감의 따님이시옵니다.
이름은 주리이며, 성은 강 이옵니다.
올해 열 여덟 되시옵니다."
"흐흐음. 정신을 딴 대로 돌리지 마세요."
늙은 상궁의 단호한 말에 주리가 정신을 차리며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눈이 잘 못 된 것일까.
분명... 어릴 적 자신의 몸종으로 있던 현이를 본 듯 한데...
어렴풋하지만, 늘 자신이 질투하고 시기하고 미워했던..
부끄럽지만 아직도 싫어하는 현이의 모습이었다.
더 이쁘고 얌전해 진 듯 하지만 현이가 맞았다.
자신이 뺨을 때려도 재빨리 도망가며 밖에서 보기 좋은 미소를 짓던 그 아이.
아직도 꿈에 나와서 자신을 괴롭히는 그 꼬마아이.
현이가 맞다.
그런데.... 아니라니.
이렇게 똑같은데 연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왕 다음의 직책에 있다는 대의정의 딸이라니.
믿을......수................... 없어..
"주리아가씨"
자신이 처음 먼 길을 떠나 궁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반겨주던 나인이 귀에 자신의 이름을 나직히 불렀
다.
한 눈 팔고 있을 사이에 상궁이 자신의 몸에 무거운 것들을 얹어 놓았다.
이런 것따위. 식은 죽 먹기였지만 왠지 그 아이를 보고 나서부터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무언가..... 싫어.....
설마 현이가 아니라고 해도.
그 아일 닮은 사람은 모두가 싫다.
갑자기 왜이러지.
정신차리가 강주리.
어머니가, 아버지가 널 위해 들인 공이 얼만데.
그따위 아일 닮은 것때문에 조바심 낼 필요는 없어.
-쨍그랑!
바로 자신의 앞에 가던 '연아'라는 이름의 얄미운 것이 접시를 떨어뜨렸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 주리였지만 곳 씁쓸한 맛을 보아야 했다.
헛발길을 하고, 접시를 깨뜨렸지만 어느 상궁 하나 그녀를 끌어내는 이 없었다.
그런건가.
그냥... 포기만 하지 않으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인가...
현이가 아닌 게 틀림없군.
현이란 것은.
멍청했어.
때려도 웃고 놀려도 웃고 웃고 또 웃고.
한일자도 몰라서 늘 가르켜달라고 조르고..
하지만.....
한 번 가르쳐 주면 절대 잊지 않고...
뭐지.
이상한 생각 하지마 강주리.
그냥 왕세자비만 되면 모든 게 다 해결되.
그래. 주리야. 주리야.
이상하게도 마음이 찹찹했다.
왜 갑자기 과거의 생각에 사로잡혀 이렇게 중요한 관문에서 허둥거려야 하는지.
모든 그릇을 다 깨뜨리고 흥이 난 연아를 지켜보던 주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모든 그릇을 다 깨고 즐거워서 흥에 겨워 덩실덩실 걸어가는 게 다 보이는
것이 왕세자비가 될 리야.
그리고 저게 현이겠어?
현이는 종이야. 종이었어.
그런 애가 이런 중요한 자리에 나올 리가 없어.
그래.
주리가 마지막 한 걸음을 옮겼을 때 도착한 곳 문 앞에는 활짝 미소짓고 있는 연아 이외는 그 누구도 없
었다.
모두가 포기 해 버린건가....
"저기....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까지 그릇 하나도 안깨고!!
으하하!! 저 자랑은 아니지만요, 제가 이 관문 통과 한 제일 첫 번째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분은 그릇 안깨고 여기 도착한 첫 번째 사람이구요!!"
"아.... 그래요............"
웃는 게 닮았다.
자신이 싫어했던 현이라는 아이랑 무지 닮았다.
닮은 사람이.. 여럿 있단 소리는 들었지만..
현이는... 쌍둥이가 아니었어.
"저, 이름이 뭐에요?
제 이름은 연아에요. 이 연아."
"아..... 제 이름은 주리입니다. 강주리"
"아.. 그래요? 주리. 응!! 이름 이쁘다!! 한자가 뭐죠?"
"珠구슬 주, 璃유리 리에요. 구슬같이 이쁘고 유리같이 투명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에요"
"우와~! 이쁘다. 저는요.. 으히히
緣인연 연, 그리고 娥예쁠 아에요.. 으하하!! 참 민망하네.
예쁜 인연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그런 뜻이래요. 우리, 사이좋게 지내요~!"
"예....."
이상하다.
현이가 아닌가....
현이는 항상 자기 이름의 뜻을 말해주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이름도 그렇게 이뻤으면 좋겠어요 아가씨.
아가씨도 구슬같이 이쁘시잔아요!! 좋겠다..
하고 감탄하곤 했었는데, 이 사교성 좋고 활발한 사람은 기분이 좋아 자신의
이름을 덩달아 말해주고 있다.
"어!! 저기 또 왔다."
진하게 화장한 게 이쁘면서도 청순해 보이는,
하지만 옅은 화장이 더 어울릴 것 같이 순진한 미소를 하고 있던 연아가 자신을 지나쳐
이제 막 관문을 통과 한 다른 사람에게 달려갔다.
뭐야.
괜히 어림잡지마.
강주리. 미쳤어.
어림잡지마.
저 사람이 어떻게 현이야.
***
"연아님, 자리에 조용히 계세요."
"예..."
들떠서 이리 저리 방방 뛰어다니던 연아가 상궁의 말을 듣고 어떤 건물 마당에 배치 되어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의자가 푹신하다.
그럼, 여기 있는 의자 수만큼만 사람을 뽑는건가?
"아.. 주리? 주리.. 이름이 주리 맞죠!!"
"예...."
이 수줍은 미소를 짓는 사람이 마음에 든다.
얼굴도 이쁘고, 이름도 이쁘고.
예전에 본 듯한 얼굴인데.
그런 인상을 받는 사람과는 좋게 엮인다 하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미신이 있으니 미신이라도 잘 지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연아다.
"듣자하니, 여기 뽑힌 모든 사람들이 연아씨 덕분이 뽑혔다고 하던데.."
"예에?"
"연아씨가 관문의 요점을 잘 파악했다고 상궁들이 칭찬 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아.. 그렇습니까?"
"네. 만일 제가 처음으로 갔으면 몰랐을 테지요."
"음.. 하지만 그러진 않을거에요....."
기분이 좋다.
절대 기쁘지 못할 것 같은 궁에서 이렇게 웃고 떠들 수 있는 친구를 만나다니.
자신이 관문의 요점을 파악한 첫 사람이라는 것 보다
친구가 생겼다는 그 사실이 연아의 마음을 더 기쁘게 했다.
하지만, 연아가 이 관문이 어떤건지 알려줬데도 그릇을 깨뜨리면 멍청하게 울면서
스스로 관문 통과하기를 포기하고
관문에 도전하기도 전에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만일 이 사실을 알았다면, 연아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 대놓고 '바보'라고 해 주는 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