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은 1927년 10월 24일에 부산광역시 기장군에서
아버지 박봉관(朴峯貫, 1906 ~ 1981)과 어머니 김소순(金小順, 1906 ~ 1994.10.17.) 사이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세 때 일본으로 떠나서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하여 2학년 과정만 마치고 귀국하였다.
1947년 육군사관학교 6기로 입교하여1948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사관생도 시절 제1중대장이자 탄도학 교관을 담당하던 박정희 당시 포병 대위와 인연이 시작되었다.
박정희는 탄도학 강의를 진행하다가 문제를 막힘없이 풀어내던 박태준을 눈여겨본다.
박태준이 소위로 임관한 후에도 인연을 유지하면서 박정희와 박태준은 서로를 믿으며 의지한다.
이후 5.16 군사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만약 일이 잘못되면 자신의 가족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하였다.
임관 후에는 6.25 전쟁에 참전하며 초창기 대한민국 육군의 일선에서 활동하였다.
휴전 이후에는 제5보병사단 작전참모, 육군사관학교 교무처장, 국방부 인사과장, 제25보병사단 참모장 및 연대장을 지냈다.
1954년 장옥자 여사를 만나 슬하 1남 4녀를 뒀다.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장으로 취임한 박정희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된다.
정작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에는 경제인으로 활약했을 뿐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걸 고려하면 다소 묘한 부분.
동시에 경제 분야의 최고위원으로 임명되어 경제 분야에서 활동하게 된다.
1961년 단국대학교에 편입, 1963년 8월 정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육사 6기이던 그를 비롯해 당시 국군 장교로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부의 조치로 4년제 정규대학교의 학사 학위과정을 이수했다고 한다.
이것은 해방 이후 국군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규 학위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채 현역으로 복무했고,
또 정규 학사과정 육군사관학교(설립 당시 남조선경비사관학교)가 뒤늦게 신설(11기 이후) 되어
정부차원의 학사 학위과정 위탁교육이 필요해서 취해진 조치였다.
1963년 소장으로 전역하고 국영기업인 대한중석의 사장에 취임하여 1년만에 흑자기업으로 전환한다.
2년 후인 1965년에 진행한 한일수교에서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일본 정부에게서 얻어낸 배상금의 상당 부분을 투입하여 포항제철을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한다.
군수품을 몰래 빼돌리는 일이 만연하던 시절에 복무한 군인임에도 박태준은 군수품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부사관 이상의 간부라면 자택에 군용 모포를 하나 이상은 갖고 있던 시절임에도 박태준은 그러지 않았다.
박태준이 유일하게 가져온 군수품은 반창고인데 이유는
오래도록 농사를 짓느라 갈라진 어머니 김소순 여사의 손에 감아드리려는 목적이었다.
김소순 여사가 갈라진 자신의 손을 보고는 "군대에서 쓰는 반창고를 감으면 잘 낫는다던데..."라고 혼잣말을 하였는데
어머니의 혼잣말을 들은 박태준이 다음 날에 반창고를 가져와서 감아드린 것이다.
그리고 군인 시절에 세들어 살던 집의 주인이 박태준의 형편을 둘러보고는
아내인 장옥자에게 "군 장교가 왜 이렇게 초라하게 사는가? 저 아래 다른 집은 없는 게 없던데. 청렴결백 지켜봐야 헛일이니
새댁이 남편 설득 좀 하시오."라고 질타할 정도로 이때만 해도 청백리 스타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납비리를 저지르던 군수업자를 추방하고 정직한 군수업자와 다시 계약한 일화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톱밥 고춧가루 사건.
박태준이 제25보병사단의 연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병사식당을 순찰하는데,
병사들이 김치를 아예 먹으려고 하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보급 장교를 호출한다.
박태준은 양동이에 물을 부은 다음 보급장교에게 창고에서 고춧가루를 가져와 물에 풀으라고 지시했고,
빨간색 색소가 빠지면서 하얀 톱밥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를 보고 분노한 박태준은 톱밥이 섞인 뻘건 물이 든 양동이를 보급장교의 머리에 부어버리고는 "너는 민족의 반역자다!"라고 일갈하였다. 이후 상부에 군납비리를 보고하지만 적극적인 조치는커녕 군수업자를 바꾸는 선에서 좋게좋게 마무리하라는 지시만 왔다.
문제의 고춧가루, 아니 톱밥을 납품한 군수업자도 나중에 찾아와 돈봉투를 내밀며 일을 무마하려고 하자
분노가 폭발한 박태준은 죽여버리기 전에 당장 꺼지라며 군수업자를 쫓아냈다.
믿음직한 납품업자를 찾은 박태준은 "3일 내로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도록 고춧가루를 가져오시오."고 지시했고
그제야 먹을 만한 김치를 부대에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군납비리 이야기는 이대환 작가가 서술한 박태준 평전에도 등장한다.
또한 박태준은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여서 결혼한 후에도 당번병을 두지 않았다.
다른 장교들은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당번병을 늘리는데 박태준은 반대로 한 것이다.
당시 존재한 야간통행금지를 지키느라 병에 걸린 맏아이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개인적인 사유로 부대의 차를 사용할 수는 없고 통행금지가 적용되는 시간이라 조금만 기다리려고 한 것인데
결국 아이는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박태준이 귀가할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사망한다.
맏아이를 보내고 시간이 흘러서 둘째도 병에 걸려 위독한 상황이 찾아오는데 톱밥 고춧가루 사건 이후로
박태준과 계약한 군수업자가 찾아와서 사람의 도리를 하기 위함이라며 박태준의 아내와 아이를 태워서 병원으로 이동한다.
2. 포항제철 창립
그의 진면목(眞面目)은 포항제철 건설 자금 마련을 위한 협상에서 드러났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1965년부터 종합제철소 건설을 추진했고,
이듬해 11월 미국·영국·독일 등 5개국 8개 회사 연합체인
대한(對韓)국제제철차관단(KISA·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발족했습니다.
KISA는 그러나 1969년 상반기 “한국에서 종합제철소 건설은 채산성이 없다”며 ‘최종(最終) 불가(不可)’ 결론을 내리고 붕괴했다.
세계은행(IBRD)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은 제철소 건립 자금을 모을 방법이 없는 ‘고립무원(孤立無援)’ 처지가 됐다.
여기서 청암은 ‘농림수산업 지원 용도’로 정해져 있는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을
포항제철 건설 자금으로 일부 전용(轉用)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자신이 ‘해결사’로 나섰습니다.
이 제안에 완강하게 반대하던 오히라 마사요시 대장상(大藏相·우리나라의 기획재정부 장관)을 1969년 8월 1주일 동안 세 차례 만났다.
청암은 일본 정부간행물보관소를 찾아가 샅샅이 뒤져 일본 사례를 분석한 뒤 “한국에 제철소를 지으면
일본 안보에 큰 도움된다”는 논리를 설파하며 설득해 냈습니다.
전 세계가 하나같이 “한국에서 제철 산업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할 때,
“난국에 빠진 조국을 구하겠다”는 청암의 순정하고 강렬한 애국심이 일본 지도층을 감복시킨 것입니다.
그의 완벽한 일본어와 일본인의 문화적 특성과 심리를 꿰뚫는 실력도 이를 뒷받침했습니다.
당시 그를 만났던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는 “나는 박태준의 단호함에 너무 놀랐고,
그래서 당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감정적인 반일(反日) 데모가 끊이지 않던 1960~70년대, 청암은 “일본을 알고 일본을 활용해 일본을 극복하자”는 ‘지일(知日)·용일(用日)·극일(克日)’의 3단계 일본 대응을 주창했습니다.
청암은 포항제철의 ‘스승’이던 신일본제철을 1990년대 추월해 그 타당성을 증명해 냈습니다.
1978년 중국의 덩샤오핑이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을 만나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하자,
요시히로 회장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라며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이 일화는 박태준이 한국을 넘어 최소한 ‘아시아적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
포항 제철소 건설에 대한 제반 준비에 착수한 박태준은,
자금 원조를 해 줄 모든 외국 기관들로부터 '불가' 판정을 받고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1967년 제철소 건설의 첫 삽을 떴지만,
정작 외국에서 차관 불가 입장을 내려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 한일국교정상화 때 받아낸 대일청구권 자금을 유용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서 상황은 급변하고,
한일각료회담을 앞둔 시점 일본을 찾아가 당시 야와타제철의 이나야마 사장과 후지제철의 나가노 시게오 사장,
일본강관의 아카사카 다케시 사장 등 일본 철강산업의 주역들을 만나 일일이 설득한 결과로
결국 일본은 한국에 기술을 제공하기로 했고, 포항제철로 신일본제철의 기술과 자금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제철 기술을 전수받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신일본제철 기술자들은 어떻게든 적은 내용만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에 박태준은 제철소 기술자 몇명을 데리고 공장 안을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으며 사진을 찍거나 메모도 하지 않는 행동으로 일본 관료들의 의심을 피하며, 자신들이 보는 모든 것들을 외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후에 포항제철이 제철소를 예상보다 빨리 짓자 일본 철강업계, 정계에서는 "너무 많은 것들을 알려줬다"는 불만이 나왔다.
이때 야와타 제철의 이나야마 회장은 “많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워낙 잘한 것”이라며 불만을 일축했다고 한다.
일본으로부터 제공받은 차관과 기술로 마침내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호기 공사가 시작됐다.
박태준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식민지 배상금은 조상의 피의 대가이므로, 제철소가 실패하면 오른쪽으로 돌아 나아가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말을
포스코 직원들에게 자주 말했다.
예정보다 일정을 1개월 앞당긴 1973년 6월 9일 마침내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흘러나왔고
조업 첫해인 1973년 포항제철은 매출액 1억달러, 순이익 1,200만달러(약 46억원)를 달성했다.
이로써 박태준의 리더십으로 포항제철은 세계 철강 역사에서 제철소를 가동한 첫해부터 이익을 낸 유일한 기업이 됐다.
이후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건설해 왔으며,
1992년 결국 양 제철소 8개 고로 건설을 완성함과 동시에 포스코 창업자로서 역사를 마감하였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는 포스코의 명예회장으로 타계하기 전까지 경제계의 원로로 자리했다.
한국 기업인의 전형적인 문제점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강 불모지에서 1968년 16억원의 차관으로 포스코를 이끌어
국가 철강산업의 기틀을 다진 거물 기업가 중 하나는 분명하다.
3. 삼성 이병철과의 인연
4. 정치인 시절
1994년 10월 모친상을 당하면서 귀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