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기 수료 후기> 그에게 귀를 기울이면
※ 글에서 존칭은 생략했습니다.
비가 내린 밤이었다. 목요일 초급 밀롱가에서 나온 우리는 밤늦도록 불이 켜 있는 국밥집을 들렀다. 주인 할머니는 밤샘 장사에 잠을 못 잔듯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탁자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초급 수강생 앙탈, 소피아, 딥자 등 6명이 자리에 앉았다. 진진은 그날 사뭇 진지하게 해부학 얘기를 꺼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몸으로 연습을 하면 되지, 해부학까지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너무 머리로 춤을 추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내 이런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작은 충격을 받았다. 그가 해부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춤을 출 때 파트너를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파트너가 하는 몸의 쓰임새를 이해해야만 편안하게 함께 춤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파트너의 움직임, 발걸음에 계속 집중해야 해요.” 123기 초급 수업 품앗이 벨르가 나에게 준 귀중한 가르침이다. 파트너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말을 듣고 또 들으면서 수업과 밀롱가에게 땅게라의 작은 움직임을 듣고자 노력했다. 파트너의 작은 삐걱거림을 느껴질 때엔 아랫배에 다시 힘을 주었다. 어느 순간 땅게라가 양발로 서 있다는 느낌이 들 때엔 잠시 음악을 들으면서 기다렸다. 품앗이 유월청과 초급밀롱가에서 춤을 춘 적 있었다. 땅게라를 맡은 그는 조용히 내 무언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느낌을 주었다. 다소 어색한 리드마저도 귀신같이 듣고서 능숙하게 춤을 만들어줬다. 그게 그의 엄청난 마력(魔力)이었다.
아마도 탱고는 함께 춤을 추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일지 모른다. 라무르는 거의 20년 가까이 발레를 춘 동기 땅게라이다.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 데에선 전문가일지 모른다. 그런 그와 목요일 초급 밀롱가에 춤을 추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의 움직임에만 집중했다. 그가 “난 지금 이 음악이 너무 신이 나서 어깨를 살짝 움직이고 싶다”고 하면, 나 역시 어깨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또 “난 바깥의 LOD가 너무 갑갑해. 이 음악에선 조금 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어”라고 하면, 난 안쪽의 빈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모든 대화는 서로에게 집중했을 때만 들을 수 있었다. 탱고는 문법과 형식에 다소 어긋나더라도, 함께 할 때 알 수 없는 따뜻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춤일지 모른다. 동기 땅게라 ‘란’과의 한 곡도 마찬가지였다. 난 그와 화요일 정기 밀롱가 첫 모임에서 춤을 때에 그가 보다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도록 기다렸다.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둘만의 춤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지난 7월 8일 초급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술자리를 가졌다. 밤 12시 우리는 3차로 치킨집을 찾았다. 춤을 출 때 표정이 너무나 매력적인 품앗이 나다, 그리고 동기 찰리, 노마드, 딥자, 라무르가 함께 했다. 이날 노마드는 흥미로운 화두를 하나 꺼내 들었다. “탱고는 여전히 1930년대, 1940년대 음악으로 춤을 춘다. 그렇다면 탱고는 그 이후로 발전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이를 두고서 우리들은 상당한 격론을 이어갔다. 클래식 고전파 음악에 대한 미학적 해석이 비교되었고, 바흐와 스트라빈스키가 소환되기까지 했다. 인상파와 현대의 미술 사조에 대한 비평을 넘나들었지만, 노마드가 제기한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답을 찾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날 우리는 그의 별칭처럼 사유의 ‘유목민’(Nomad)이었을지 모른다.
다음날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어쩌면 그것이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일 것이다. 내 대답은 다음과 같다. “탱고 음악은 아주 오래 전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밀롱가에서 춤을 통해 언제나 새로운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탱고는 오늘 우리의 대화를 통해 언제나 새롭게 태어난다.”
마지막 토요일 수업을 앞두고, 발표회 파트너 샐리와 ‘걷기안기’를 연습했다. 우리는 서로 아브라소를 맞추고, 음악에 맞추어 걸었다. 대화의 방식을 찾기 위한 우리만의 노력이었다. 안는 듯한 프레임 유지, 바닥을 딛는 방식, 몸의 중심을 살짝 앞으로 하는 것, 무릎의 사용, 상체의 안정 등 탱고가 축적한 대화의 기술들을 활용했다. 그렇게 우리만의 대화법을 찾아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품앗이 벨르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자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음악에 맞추면서 걷다가 식스 살리다를 연결해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샐리와의 춤에서 작은 감동을 느꼈다. 탱고는 단순히 춤만은 아니었다(살사, 바차타, 스윙으로 채울 수 없는 그런 게 존재한다).
그리고 가끔 후회할 때가 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떠오를 때가 있다. 그때 그 사람의 말을 내가 들었더라면.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면. 작은 표정 하나하나에 소홀하지 않았다면. 그런 그리움들이다. 그러다 그런 생각을 해본다. 모든 탱고의 한 딴따가 그러하듯, 모든 사랑에는 헤어짐이 없다. 그저 음악이 끝나자 우리의 춤도 멈춘 것처럼.
2023년 7월 10일
준
벨르, 유월청, 나다, 토린이 사부님들과 아름다운 123기 동기들에 대한 감사함을 글로 대신 전한다.
첫댓글 와~~~ 비내리는 밤 수필집을 읽는듯 해요~~ ㅎ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도 재미난 시간 많이 같이 가져요^^
와우~.무협지를 휘리릭 읽은듯
어쩜 이리 필력이 좋으신지~
저의.탱고 초급때부터 품앗이 두달
오늘까지의 기억이 새록 떠오르는
감사한 글.
잘 읽었습니다^^
나다 삽을 만난 건 큰 행운인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Wow.. ^^
유월청 삽의 따뜻한 인품에 언제 감동 받습니다^^
저는 스트라빈스키 음악 애정하는 사람으로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적 인생처럼 팔색조로, 준님이 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신 것처럼 어떤 땅게로와 추더라도 그 소리에 귀기울이면서 다양한 모습을 그대로 품는 그런 춤으로 추도록 연습해보겠습니다. 마지막 문단이 아름다워서 이 시간들이 더욱 그립게 기억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 탱고는 오늘 우리의 대화를 통해 언제나 새롭게 태어난다”는 말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라무르님과 춤 추는 것 재밌어요^^ 앞으로도 재밌는 추억들 많이 만들어요 ㅎㅎ
그리고 초급 마지막 3차 술자리에 딥자님도 함께 있었어요~
네 수정했어요^^
우와 멋진 글이네요! 비오는 날 읽기에 더 어울리는 글~~~^^
제가 물때 삽한테 배우는 게 참 많습니다. 심화 수업도 기대하겠습니다!
유월청님의 짧은 "와우" 가 정말 모든것을 포함하는듯 합니다...준님..조용하고 박식하신데 늘 겸손하셔서...제가 많이 배웁니다..우리 123기 든든한 기둥이세요...존경합니다..
앙탈님 춤 실력은 매주 달라지는 게 느껴져요, 저는 부러울 뿐입니다. 항상 그 순수한 열정도 감동입니다.
캬아~ 좋네요. 모든 사랑엔 헤어짐이 없다. 우리의 춤이 잠시 멈췄다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 그 사랑들도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작은 불꽃으로 남아있다.
탱고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는 촉촉한 수필 잘 읽었습니다 ^^
첼로님의 따뜻한 마음씨가 탱고에서도 느껴져요^^ 함께 도와가면서 오래오래 즐겨요!
와우 이렇게 멋진글로 눈물나게 하기 있긔없긔요 준~님! ㅎㅎ
역시 123기에는 출중한 다재다능한 분들이 정말 많으시단걸 새삼 느끼면서, 그런분들의 품앗이라서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해준 말들을 놓치지않고, 머리에, 가슴에,몸에 새겨주셔서 넘나 감사하고,
맞습니다 땅고는 그런것이지요..
그래서 땅고를 두고,, 3분간의 연애..라고도 표현하지요😊 앞으로 쭉쭉 더 멋져지실 준님 그리고 123기 모든분들의 발전을 믿어의심치않습니다~ 나아중에 밀롱가에서 제 까베 거절하시기 없깁니다ㅎㅎ
벨르 삽 만난 것도 큰 행운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말씀들 부탁드려요^^ 좋은 인연 오래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아니...무슨 왜이렇게 글을 심각하게 잘 쓰십니까. 너무 잘 쓰셔서 존경심마저 듭니다. ㅎ
그리고 첨언하자면 보아야한다가 아니라 보아야 하지 않을까입니다. ㅎㅎ 그렇게 쎄게 말하지 않았어요. ㅋㅋㅋ
노마드님과 3차 뒷풀이 너무 잼 났어요. 다음에 또 좋은 자리에서 재밌는 대화 나눠요^^
발표회 기대할게요~멋진글 잘 읽었구요 베지밀 자주 방문해주세요^^
네 베지밀 분위기 너무 좋습니다. 매주 도장 찍을께요^^
원래 긴~ 글을 안 읽고 스킵하는데... 이 글은 감명이네요~브~라~보~
도우미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뵐께요^^
크으- 한 편의 짧은 소설을 본 것 같은 느낌입니다! 너무 멋진 후기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