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1894
백성들이 '보국안민(輔國安民)' 과 '제폭구민(除暴救民)' 을 외치며 '자주성을 위시한 대대적 정치개혁' 을 요구
1차 봉기 이후 '집강소' 가 설치, 백성들의 자발적인 정치참여 요구가 수용되기도 했음(현대로 치자면 지방 의회)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마다 주장하는 근대화 적정 시기는 다르다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때도 늦지 않았다고 봄
근대화 시기를 논할 때 '정조가 죽기 전 세도정치가 열리기 이전 근대화를 시작했어야 한다.' 고 하는 사람도 있고
'병자호란 직후에 소현세자가 보위를 이어받아야 했다.' 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당시에는 조선이 아니더라도
동아시아의 어디에서나 완전히 유교적 보수성을 탈피할 수 없었음(일본도 무사도에서 성리학적 태도를 중시했음)
아니, 그걸 따져도 생각외로 동시대 조선의 국가운영이 당대의 유럽국가보다 선진적이고 안정적인 부분도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아니, 그래서 근대화를 하지 말았어야 하냐?" 란 얘기는 절대 아님
암만 봉건적 인식에서 비롯된 정치적 - 사회적인 틀이 잘 잡혀 있어도 그걸 근현대 체계랑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니까
하고싶은 말은 주도적으로 행하는 개혁적 의지, 지속성이야 말로 근대화의 필수조건이란 거, 시기의 문제는 절대 아님
예를 들면 일본도 근대화의 계기가 될 법한 첫 사건이라 할 수 있는 1854년 미국과의 충돌 이후 체결한 '미일화친조약'
대대적 개혁을 단행한 메이지 유신의 개시 시기는 1868년, 미일화친조약 이후와 그 사이 있던 봉건적 간극을 생각하면
꽤 빠른 시기에 근대화의 방향을 잡았다고 볼 수 있음
다만 엄연한 한계도 존재했음, 메이지 유신이 이뤄지는 과정을 생각해본다면 그게 과연 '절대다수 민중' 이 바란 방향인가?
까놓고 보자면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에 밀려 그동안 실권을 잡지 못했던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의 '무사들' 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배계층 간의 계파 싸움' 이 그 발단이었지 '민중사회의 전면개선' 은 아니었음, 그들이 내민 구호가 '존왕양이' 라는 것부터
'명분' 을 위시한 전통적(유교적) 가치관에서 비롯되었지, '백성(民)' 의 삶들이 중심이 된 가치관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음
서양 문물들의 도입 의지도 막부군과의 싸움에서 서로가 경쟁적으로 체득한 서양 군기체계의 우수성과 실전성을 실감하며
형성된 것, 민중의 삶을 개선한다는 목적에서 도입된 건 절대 아니었음(그래서 '존왕양이' 를 내세운 이중성이 비판받는 거)
형식상 의회가 형성되어도 '천황권' 부터 헌법에 내세웠기에(일본제국 헌법, 1889) 정상적인 민중 의견이 반영될 수 없었음
그래도 막부체제가 장기화되면서 중앙집권적 정치체계가 오랫동안 정착하지 못했던 일본의 사회상 '천황' 이 중심이 된다는
'중앙집권체계' 는 그것만으로도 정치적 개혁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매력적 요소가 됐을 거임, 장기적으로는 좋은 게 아닌데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메이지 유신 고평가 안함)
반면에 조선은 정치적 토양이 완전 달랐음 이미 고려때부터 중앙집권 체제가 익숙해졌고 조선 때는 그 완성을 보았기 때문에
정책적 변화와 적용 속도는 빠르게 사회 전반에 이뤄질 수 있었음, 본격적인 개항이 이뤄지기 시작한 강화도 조약(1875) 이후
중앙 정부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신식 군 제도를 도입하고(별기군, 1881), 아시아 국가 최초로 백열 전등을 도입(1887)하는 등
따지고 보면 기술적인 부분에서 근대화 움직임을 느리게 가져간 것도 아니었음... 근데 이건 참고사항이고 중요한 건...
이 중앙집권 체제의 빠른 정치적 작용속도 특성상 그 영향을 가장 빠르게 체감하는 것은 조선 민중들이었고 개화기 이전부터
이미 중앙집권 체제에 적응했던 만큼, 현실 정치에 대한 피드백 요구도 남달랐음(ex. 진주민란, 동학교도들의 교조 신원 운동)
그러한 민중들의 요구가 응축되어 폭발한 동학농민운동은 실제로도 조선 중앙집권 통치의 주요 거점인 전주성을 점령한 이후
전주화약을 체결하며 집강소를 설치하는 실질적인 정치 개선의 방안책까지 마련했음, 이게 중앙정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큰 사건으로까지 진행됐다면 대대적인 정치적 개혁으로도 연결되었을 걸로 보임
* 실제로도 영향이 아예 없진 않아서 1차 갑오개혁(1894) 때 신분제 폐지로까지 이어짐
물론 동학농민운동이 성공적으로 완성되어 민중 중심 정치 체계가 자리잡혔어도 현대까지 유교가 영향을 미치는 사회 특성상
절대군주를 쫓아내고 공화정이 정착한다거나 하는 그런 극적인 변화는 없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어디까지나 민중이 자체적으로
자주적인 민생주도와 정치개혁을 외친 사회적 운동 성격상 기술적인 근대화와도 맞물렸다면 그 시너지가 엄청났을 것으로 보임
이렇게 민중들이 주도적으로 추진한다는 개혁의 방식은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실현, 그 자체이기기에 일본의 메이지 유신보다도
더 완벽한 근대화 사례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봄
그러나...
"얘네 기세 만만치 않네요. 우리는 못 진압해요. 청나라, 좀 도와줘요."
"ㅇㅋ(우와 개꿀, 내정간섭 더 확대해 볼까?)"
"어? 조선 땅에 군대 파견할거냐데스? 그럼 나도 파견한다데스"
"어... 잠깐만 일이 너무 커지는데?"
고종이 스스로 외국에다 자국 내 민중봉기 진압을 요청함에 따라 텐진조약(1885)과 제물포조약(1882)을 근거로 하여
청군과 일본군이 모두 조선땅에 상륙, 곧이어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타국(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하는 비상사태 발생
얼마 안가 조선 땅에서 외국간의 전쟁(청일전쟁, 1894)이라는 희대의 병크가 발생
이에 동학농민운동은 반외세의 기치를 중심으로 하여 다시 2차 봉기가 일어나게 되지만... 일본과 손을 잡은 조선 조정은
공주 우금치에서 이들을 무참하게 진압
이것 뿐만 아니라 민씨 일가의 전횡을 눈감아준 것, 대한제국 선포 이후 있었던 만민공동회 강제해산(1898) 건도 있기에
고종을 비운의 망국군주라고 동정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봄
* 혐짤 쓴 건 죄송함, 근데 역사적 고증이라...
첫댓글 정말 안타깝다.. 외세랑 손을 잡고 우리 백성들을 진압하다니..
제 사견입니다. 다른 의견도 환영합니다.
과거를 현재의 거울이라고 본다면
결국 현재의 사회 변혁과 그 성공은 결국 그걸 얼마나 국민들이 무리 없이 빨리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국가가 빨리, 제대로 해주느냐...로 결정된다?
모든 성장동력들이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데 하나의 요소라도 크게 어긋나면 발전의 시기를 크게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고종도 겁나 멍청한 임금.
고종 트롤
녹두꽃보니까 그냥 역사공부할때 잠깐 지나가는것보다 훨씬 잔혹했겠구나 싶더군요. 저런 대규모저항과 희생이 있었어서 조선이 독립국이다라고 어필할수있던 분기점이라고 볼수도 있기는 하겠네요. 잘봤습니다.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도 고부현에서는
최악의 욕이
이런 조병갑 같은 놈이죠
소현세자가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하는 생각도 많이 들고 후에 왕자들이 일찍 죽지 않고 왕이 되었더라면 민비 같은 인물이 왕비가 되지 않았을텐데 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네요
사실 그 시절(소현세자, 징조)만 따져보면 서양조차 제대로 된 근대화가 이뤄지기 이전인 것도 많아서 그런 비교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ㅎㅎ
척양척왜를 외치고 행정경험도 없어서
어렵다는 생각
동학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서는 유생 계층도 많아서 행정 지식이 전무하다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선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어야하는데 동학농민운동이 성공했다하더라도 그렇게 진행되었을까하면 그건 아니었을거라고 봅니다. 중립국 독립국가는 구호지 지정학적 특성상 진짜 그게 될 가능성은 없었다고 봐야…
인구가 유입되고(미국의 이민이나 식민인구 이주처럼) 그걸 착취할 체제가 없는 이상 이 시절의 자강이라는건 공염불인데다
성공했어도 왕정 이후의 정치체제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했던 시기라 운좋으면 또다른 유능한 독재정의 출현이고 운없으면 그냥 더 혼돈의 조선말기가 되지않았을지…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권력이라는게 그리 쉽게 놓아지지 않는다는게… 고종 목을 따야 끝나지 그걸 산채로 내려놓는 케이스는 몇없는
영국 같은 경우엔 권리장전의 사례도 있어서.... 물론 전제는 고종이 전제군주권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겠지만요... 희망을 걸자면 민족주의와 시민주의에 대한 세계적 동향을 고종도 접했다면... 이랄까...
@서초패왕 항우 그건도 엄밀히보면 이전에 왕 모가지 따인 여파로 된 것이라… 차라리 강제 개항 시기쯤 반정이라도 한판 했으면 되었을수도. 어차피 역만없이긴 하지만요 ㅎㅎ
유교 정치 사상을 한 줄로 요약하면 ‘민본주의’이 아닌가요?
논어에는 다른 모든 것을 잃어도 민심만은 지켜야 한다고 공자가 말하고,
맹자에도
’먼저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키우는데 부족함이 없게 하고, 풍년에는 배부르게 먹고 흉년에도 굶어죽지 않게 한 후에야 교화할 수 있다‘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존왕양이‘는 유교적 가치관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기적인 욕심이 기반이 되었다고 느껴지고
근대화도 유교 사상을 ‘잘’ 활용했다면 오히려 수월하게 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조선이 근대화에서 뒤처진 것이, 오히려 유교의 가장 기초적인 사항을 안 지킨 결과라고 생각해서요.
전 반대로 근대화의 핵심은 욕망과 욕심, 타인과 피지배계급에 대한 부품화라고 봐서 유교 이념 메인으로는 죽어도 근대화는 못했을거라고 보는…
강신주 교수님 같은 분은 맹자의 혁명적인 발언도 결국 신권 강화에 대한 얘기였지 백성들의 권익을 대변한 건 아니었다고 보더군요. 공자는 더더욱 계급을 중시했구요. 꼭 강신주 교수 의견이 아니더라도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이후 당시 주류였던 묵가나 도가가 아닌 유가가 주류가 된 것도 그 확고한 계급의식이 지배층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인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계급에 대한 신앙과 상업 및 실용학문에 대한 천시, 유교 이외 사상에 대한 배타성을 생각했을 때 유교를 기반으로 한 근대화는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조선적인 민본주의 이념을 '적절히 잘' 활용했다면 그 당시 산업개발의 현장에서도 미비점이라 할 수 있는 복지와 환경에 대한 개선이 이뤄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나... 저도 결국 윗분들 말씀들과 궤를 같이 할 수밖에 없게 되네요. 결국 생존의 무대에서는 계급화, 서열화가 우선시된다는 그 특성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일본에서도 후지와라 세이카나 하야시 라잔같은 사람들이 조선에서 도입한 성리학으로 무사도 철학을 강화하기도 했죠. 그래서 존왕양이와 위정척사도 같은 궤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민본주의는 민심에 기반을 두지만, 결국 통치의 주체는 여전히 군주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근대화로 나아갈 접점을 찾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메르스 저도 이 의견에 공감합니다.
당시에는 유교 이념과 근대 자본주의가 섞일 수 없었지요.
현대에 와서 재해석 등을 거쳐
나름대로 섞일 수 있었던것 같아서요.
ㅇㄷ
와드 걸 정도로 좋은 글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서초패왕 항우 ㅎㅎ읽을거리 주셔서 제가 감사하쥬
고종은 우리 역사상 최악의 왕 중의 1명..
고종은 최악! 고종이 잘했으면
후일(1930~1940년대)일본하고 전쟁해서 져서 고통받았을지언정 1910년의 망국까지 가지 않을 수 있었음!
저는 개인적으로는 항우님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ㅎㅎ사실 동학농민운동을 동학 '혁명'으로까지 높이 평가하는 방향도 납득이 잘 안 되더라구요.
어느 정도 목표에 달성했던 1차 봉기도 결국 동학 모두가 참여한 것이 아니라 일부만이 참여한 것이고,
2차 봉기 와중의 양반층에 대한 견해차, 그리고 와해된 그 이후의 모습도 보면 과연 근대 국가로의 발판으로 갈 수 있었을까? 라는 데에는 의문이 많이 남습니다.
근대화의 물결을 거부하려 해도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에 더불어 거국적인 민중봉기가 잠깐이나마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었기에 아 이게 정말 잘 풀리는 방향이었다면 어땠을까 상상을 해 봤습니다. 물론 역사는 만약이라는 게 없으니... 그만큼 다양한 갈래로 상상할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요. ㅎㅎ
동학농민운동이 성공을 한다 해도 조선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나는 의문부호가 붙죠
다만 이 사건이 빡치는건 개화니 뭐니 하면서 백성들 등골 뽑아놓고 고작 농민군 하나 진압 못 할정도로 국력이 약해진걸 세상에 드러내게 했고 청나라 부르면 일본이 올거란걸 예상하지도 못 하는 정신나간 외교정책을 보여준게...
그거 하나만으로도 고종 쉴드칠 이유는 다 날아가요. ㅎㅎ
동학농민혁명->3·1 운동->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촛불혁명->빛의 혁명까지
구한말 의병운동도 넣어주셨으면 합니다. ㅎㅎ
두선생의 역사공장인가 거기 이완용에 관한 영상에 댓글보고 두통이 오고 열받아서 죽는줄.. 구독도 취소함 이완용 덕분에 조선말기 백성들이 고통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또 러시아에 조선이 안넘어가서 다행이다 고종이 잘못 한건데 이완용이 모든걸 뒤집어 쓴거다등 하여간 이완용과 일본 식민지 덕에 조선이 근대화가 빨리 될수 있었다는둥 별에별 댓글들을 볼수 있었음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댓글 분위기였음
뉴라이트 소굴이군요;;
댓글로는 별의별 얘기들이 다 나올 수 있긴 한데... 유투버 당사자도 그 댓글들에 좋아요 눌러주나요?...
@서초패왕 항우 그냥 댓글 달아주는거에 대한 감사의 의미인지 전부 하트가 있었던거 같은데 지금은 모르겠네요 영상을 보려다 열받아서 나와 버렸네요 기억 나는건 이완용으로 인해 고종의 잘못이 덮어졌다거나 고종이 제일 잘못 했는데 이완용의 독박 썼다는 뉘앙스의 글에 동의하는 댓글이나 좋아요 표시가 있었던거 같기는 하네요
@포항레이커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