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압검사지 한 장
빗새
현장감독 일을 하던 시절이었다.
건설현장의 아침은 늘 비슷하게 시작된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시간, 인력회사 차량이 먼지를 일으키며 들어오고 작업자들이 하나둘 내려선다. 안전교육을 하고, 보호구를 확인하고, 건강 상태를 점검한 뒤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산속 깊은 곳에 있는 현장이어서 주변에는 상가도 없고 사람도 드물었다.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외진 곳이었다. 작업자들이 줄을 서서 혈압을 재고 있었는데, 한 중년의 인부가 눈에 들어왔다.
혈압계 수치가 높게 나왔다.
다시 재 보았다.
여전히 높았다.
혹시 긴장해서 그런가 싶어 잠시 쉬게 한 뒤 한 번 더 측정했다.
결과는 같았다.
수축기 혈압이 150을 훌쩍 넘었다.
현장 규정상 그대로 작업을 시킬 수 없는 상태였다. 만약 높은 곳에서 작업하다 쓰러지거나 어지럼증이라도 생기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감독자인 나는 규정을 지켜야 했다.
결국 그에게 말했다.
“오늘은 작업하시면 안 되겠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억울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사정이 어렵다는 하소연도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하루 일당이 얼마나 절실한 돈인지.
어쩌면 오늘 저녁 식탁에 올라갈 반찬값일 수도 있고, 자식 학원비일 수도 있고, 병원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작업을 하지 못하게 된 것도 속상한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현장은 너무 외진 곳이었다.
그를 다시 태워다 줄 차량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그는 긴 산길을 걸어 나가야 했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걸음은 무거워 보였다.
그 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규정은 지켰지만 사람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나는 혈압검사지 한 장을 다시 출력했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그에게 다가갔다.
“이거 가져가세요.”
그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검사지와 함께 짧은 말 한마디를 건넸다.
“오늘 절대 사고 내시면 안 됩니다.”
그 말에는 여러 뜻이 담겨 있었다.
무리해서 다른 현장에 가서 일하지 말라는 뜻도 있었고, 건강을 먼저 챙기라는 뜻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손에 쥔 검사지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 사람의 눈가가 갑자기 붉어졌다.
그리고는,
정말 짧게,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평생 수많은 작업자들을 만났다.
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눈물이 없다. 아니, 눈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울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가족을 위해, 생계를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현장에 나오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은 웬만한 말보다 더 큰 울림을 남긴다.
지금도 가끔 그날이 생각난다.
그 사람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는지, 건강은 괜찮았는지,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현장을 지탱하는 것은 철근도 콘크리트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날 내 손에서 건네진 것은 혈압검사지 한 장이었지만, 어쩌면 나는 그에게 서류가 아니라 “당신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마음 한 장을 건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도 그날의 검사지보다 더 무겁게 기억되는 것은, 종이 위에 찍힌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 뒤에서 조용히 눈물을 삼키던 한 노동자의 삶이다.
첫댓글 으늘아침마음이지쳐출근했었는데마치이글이저에게건네는따뜻한악수처럼느껴젔습니다구절구절마다마음을위로하는힘이있어많은위안이되었습니다귀한글을공유해주셔서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유리상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