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 93권, 선조 30년 10월 3일 경신 3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충청 병사 이시언이 사로잡은 왜적 복전감개의 공초
충청 병사 이시언이 사로잡은 왜적 복전감개(福田勘介)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아비는 전 국왕의 장수였는데 관백(關伯)이 찬탈할 때 피살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를 혐오하여 쫓아내서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군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처음에는 서생포(西生浦)로부터 청정을 따라 전라도로 향했습니다. 당초에는 남원을 치기로 약속하고 수륙(水陸)으로 함께 나갔는데, 소서행장(小西行長)은 평수개(平秀介)·도진(島津)과 함께 중로(中路)로 경유해서 먼저 남원에 이르러 독자적으로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청정은 장정(長政)과 함께 굽은 길로 경유했기 때문에 미처 이르지 못했고, 관백의 별차(別差)는 수로(水路)로 경유해 와서 모였습니다. 수로로 온 장수인 가이등좌(加以籐左)·마조동등(馬助東籐)·우위문(右衙門)이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비전 재상(備前宰相)과 평수개가 2만 명을 거느리고 용조사(龍造寺)가 1만을 거느렸으며, 중로로 온 장수로는 소서섭진수(小西攝津守)와 행장이 1만을 거느리고 도진이 5천을 거느렸으며, 굽은 길로 온 장수로는 가등주계전(加籐主計殿)과 청정이 8천을 거느리고 흑전갑비수(黑田甲斐守)와 장정(長政)이 5천을 거느리고 장종아부(長宗我部)가 3천을 거느리고 모리중납언(毛利中納言)이 3만을 거느렸으며, 부산에 머물고 있는 장수 금오(金吾)의 군사가 1만 4∼5천이 되고, 서생포에 머물고 있는 장수 천야좌경 대부(淺野左京大夫)의 군사가 5천입니다. 남원이 무너진 뒤에 전주가 그 소문을 듣고 따라서 흩어지니 행장이 들어가서 분탕질하였습니다.
당초에 행장과 청정의 뜻은 세 길로 나누어 직접 서울로 올라가려 했는데 관백이 사람을 보내어 전령하기를 ‘서울은 침범하지 말고 9월까지 닥치는 대로 무찔러 죽이고 10월 안으로 서생포나 부산 등의 소굴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까지 3일 길밖에 안 되는데 곧바로 돌아간 것이며 전라도에도 머물 뜻이 없었습니다.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걸을 수 있는 자는 사로잡아 가고 걷지 못하는 자는 모두 죽였으며, 조선에서 사로잡은 사람들은 일본에 보내서 농사를 짓게 하고 일본에서 농사짓던 사람을 군사로 바꾸어 해마다 침범하고 아울러 중국까지 침범하려 하고 있습니다. 10월 안으로 청정은 울산에 새로운 진지를 만들 것이며 올해와 내년 사이에 다시 출동할 뜻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관백의 명령이 있으면 출동할지도 모릅니다. 대개 지방을 조금씩 침식하여 항복하는 자는 부려먹고 저항하는 자는 모두 죽여서 토지와 인민(人民)이 점점 그들의 소유가 되면 자기들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청정과 행장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것은 행장이 평양에서 패배한 일을 청정이 늘 말하고 행장은 강화를 하려고 하는데 청정은 불가하다 하므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입니다. 당초 강화할 때 행장이 속여서 말하기를 ‘천조에서 장차 일본의 소원대로 해 줄 것이다.’ 하였으므로 허락했는데, 봉사(封使)가 돌아간 후에 다만 봉왕(封王)한다는 일만 있었을 뿐이고 실지의 이익이 없으므로 마침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강화를 하고자 하면 반드시 실지의 일을 가지고 청정에게 말해야 이룰 수 있습니다. 또한 직산(稷山)의 싸움에서 갑비수(甲斐守)의 군대가 많이 죽었으므로 부끄러워서 숨기고 있다 합니다마는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이미 사로잡혔으니 항복한 왜인과 같이 대해 주면 죽도록 힘쓰겠습니다. 칼이나 창 쓰는 재주와 포 쏘는 기술은 남의 모범이 되지는 못하지만 몸을 방어할 수는 있습니다. 그 중에도 조총의 묘기는 잘 압니다."
선조실록 93권, 선조 30년 10월 4일 신유 7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포로 복전감개를 우리 편으로 만들어 보도록 지시하다
비망기로 이르기를,
"복전감개(福田勘介)는 경리의 분부에 따라 이제 처결해야 하겠으나 다만 그가 ‘자기의 종 1백여 명을 이끌고 오겠다.’ 하니, 이제 마땅히 좋은 얼굴로 대해 주고 후하게 술과 밥을 먹이고 달래어 그 무리와 왜졸들을 데리고 와서 충성을 바치게 하라. 만약 공을 세운다면 높은 벼슬을 주고 종과 말도 주어서 우리 나라 사람과 같이 대우하겠다고 자상스럽게 타일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약 왜적을 이끌어낸다면 비록 몇 명의 왜적이라도 어찌 소홀히 취급할 것인가. 이를 비변사에 말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복전감개는 비록 경리의 분부가 있었으나 급하게 처리하면 아예 사로잡아 데려올 수 없게 될 것이며 만약 여유를 가지고 달래서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면 혹시 스스로 힘쓰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상의 하교가 매우 마땅합니다. 별도로 훈련 도감으로 하여금 자세히 살펴 시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다만 교활한 왜적이어서 도망칠까 염려되니 별도로 무사(武士)를 정해서 엄중히 지키도록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93권, 선조 30년 10월 6일 계해 4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사로잡은 왜적 복전감개를 처형하다
선전관을 보내 사로잡은 왜적 복전감개(福田勘介)를 처참(處斬)하였다.
첫댓글 쓸모가 없으니 그냥 죽인것 같네요...장수라고 해도, 다이묘급은 아닌것 같고 .
자기 부하들을 투항시키겠다는 말에 혹해서 받아들일까 했지만, 사형시킨 것을 보아 그것도 잘 안된것 같습니다.투항건도 잘 안되니 그 왜장이라는 장수를 항왜로써 써먹기에 가지고 있는 가치도 형편없으니 그냥 죽인것 같네요.
싸움 기술도 뛰어나지 않고 다만 조총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 항왜로써 역할도 쓸모가 없겠죠.
그런 수준 이상의 애들이 조선군의 항왜부대에 엄청 많 을 것겠죠.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저도 저 왜장이 왜 죽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모코님 해설을 들으니 이제야 답을 얻었습니다. 좋은 의견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한 하루 보내시고 건강히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