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조명
즐거운 몰락 외 4편
주영란
1961년 충남 공주 출생. 2011년 「시와 산문」 등단. 시집 「즐거운 몰락」.
9월 어느 강가를 걷는다 발자국 말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물 속 깊은 당신 속, 비가 오지 않아 물이 마르고 가재, 다슬기 바닥까지 드러날 때쯤 알까, 모르면서 그냥 스쳐 지나가고 아는 척, 눈인사도 아직 말도, 강물에 띄우지 않았는데 강물이 손 한 번 흔들어 주지 않았는데, 지나칠 때 슬쩍 손끝이 닿는다 갈대밭 지나 댐, 이분음표 숨, 수문에 붙어 발목까지 시리다 까치발 들고 고개 내밀다 길게 쓴 문장, 아무 말 던지지 못한 그림자 떨고 있다 갈대는 마른 몸, 씻어내고 다시 말린다 저 건너 날아오는 눈멀고 귀먹은 새, 내민 입을 삼키고 숨죽이고 선 채로 잠든다 갑자기 다가오는 먹구름, 비바람 휘몰아치자 솟구치는 강물, 튀어 오른 물고기 그 누구 위해 잔(盞) 넘치는가
나비 눈동자
- 영등포역에서
세로가 우뚝 선 가로로 누운 선 따라 걷는다.
유리관에서 세어 나오는 네온, 꺾인 목트림 냄새
달리다 날다 멈추지 않는 타임스퀘어 신세계,
나비를 닮은,
보도블록을 따라 말없이 다리를 저는 염 씨 장의사 지나, 기와지붕 낮게 깔린 홍등가 창문 고개 내민 몇 개의 꽃송이, 늙은 왕벚나무도 꿈틀댄다 흔들린다 얼굴 붉힌다 필사적으로 몸 다 할 때까지 맞서 싸우는 눈썹이 울고, 제 살 태우고, 반쯤 가린 얼굴로 버티고, 머무르는 오늘밤 사이, 무엇을 보고 아파해야 할까, 웃어야 할까 전철역 13번 입구, 하늘을 본다 빙판이다 저 벚나무가지 귀먹은 새, 미끄러진다 머리카락사이 거부당한 말, 날지 못한 날개, 논개 얼굴, 소리, 발가락으로 땅강아지 되어 헐떡인다
출렁이는 계단 앞 따라와 툭, 떨어지는 꽃송이
나비 몰래 장대 높이 매달려 간다 입술이 열릴 때
새벽 3시에
창문을 열자 골목길이 한 눈에 들어온다 기침소리에 앞, 뒷집 잠들지 못한 노인들이 고개를 든다 당구장 담벼락에 붙어 담배꽁초를 짓이기는 낯익은 얼굴, 기우는 전봇대 늘어진 전선가닥, 쌓이는 쓰레기, 기웃거리는 고양이 헛발질하고 너덜대는 문으로 들어오는 한 줄짜리 주소, 휜 등에 붙어 있는 짐, 다리 없는 그들이 유령처럼 골목을 오간다 느티나무 말없이 이파리만 떨어뜨린다 버스종점 순두부 한 그릇에 숨죽이며 첫차에 오른다 어디선가 들리는 입 다문 뉴타운 이야기 쓰러져 운다
시(詩) 만들기
구석에 코 박고 앉아 이렇게 쓴다 시라면 온 몸으로 싹을 키워야 하는데 백지에 손 놓고 연필 돌리다 씨앗을 말리고 있다 화살을 쏘며 백지를 채우는 일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시로 비를 내리게, 눈을 내리게, 불을 지피게 할 뿐이다 커피나 담배를 얻을 수 없다 수십 개의 시구(詩句)로 밥을 얻을 수는 없다 한 남자를 한 여자를 얻지 못 해도 넝쿨 말아 올리는 글 속으로 기어들어가 한 줄 시를 위해 껴안는다 발끝에서 뿌리가 뻗어 나올 때까지 구석에 코 박고 앉아 이렇게 쓴다.
수상한 화첩
- 만개하지 못한 봄, 그대, 지나갔는가
1
뾰족지붕을 세운다 밤새 무덤을 밀쳐내고 깨어난다
콘크리트기둥에 매달려 정원을 만든다 창문이 없는
방안에 곰팡이가 핀 빵조각이 서로 엉켜 있다
죽은 몸을 밟고 흘러나오는 약수를 마신다
지하 물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언덕을 넘어가는
발자국 소리에 머리 위 심어진 벚나무가 흔들린다
물관을 타고 풀씨들이 잎으로 꽃으로 움튼다
어두워지다가 타오르는 꽃불이 반짝이다 사라진다
다리 건너 그대 머릿속에 활자로 읽어 주기를
꽃잎이 떨어져 날릴 때 보이지 않는 눈물이라고
만개하지 못한 봄, 그대, 지나갔는가
2
거미가 나뭇잎에 매달려서 꽁무니를 연신 흔든다
개미 떼가 몰려와 낙화(洛花)를 거두어 사라진다
나는 순식간에 사라진 화관(花冠)을 찾으려 나선다
또 다시 무엇을 짓기 위해 무엇과 또 싸워야 하나
대지 위해 머무르지 못하고 시들어 가는 정원,
무성하게 흔들리고 무지하게 무너져버린 하룻밤,
새어나오는 빛은 직진을 멈추고 둥글게 흩어지는,
그 틈을 향해 무한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가뿐한 알갱이들 날아간다 천장에 낮게 엎드려
신작시
불, 붙여 볼까 외 4편
-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그림자를 토하고 달린다 자동차가 눈을 움켜잡고 점령군처럼 지나가다 계절병을 앓는지 방향을 잊은 채 주저앉아 고개를 치켜든다 그 사이 고여 있는 눈송이가 눈(目)앞에 매달린다 녹지 않는 눈물일까, 눈길인가 길들여지지 않는 속, 비우며 동이 트고
바퀴가 꽃을 모은다 트럭이 지나간 메마른 모서리, 햇빛이 쏟아지고 제비꽃 싹이 튀어 나온다 바퀴에 끌려 콘크리트 바닥 옮겨 다닐 때 씨앗을 퍼트린다 이삿짐 내리는 낯선 골목 어디쯤 우리 손 맞잡고 흐드러지게 꽃, 피워 볼까
누군가 꼭 온다 노을 속에 버스가 멈춘다 창문에 달라붙는 하루살이가 붉다 한 무더기씩 내려오는 알 수 없는 이름들, 발소리 날린다 꿈을 감싸 안고 잠시 표류하다 하체에 불, 당긴다 떠난 아스팔트 위 이탈된 어린 새 한 마리 나뭇잎처럼 굴러가고, 오고
툭, 떨어지는 원피스
방바닥에 뒹구는 마른 얼굴 위로
걸어 놓은 꽃무늬 원피스 떨어진다
방안이 환하다 꽃이 천 조각인지 모르고
화단을 만들고 나비를 유혹한다
더듬이가 한 장 한 장 꽃잎을 넘긴다
입 언저리에 묻은 꽃가루 달고
하루치의 단어를 끌어 모은다 꽃길 맴돌다
촘촘히 짜인 거미줄에 왼쪽 날개가 낀다
동면의 시절 배고픈 필생의 이야기가 줄을 탄다
시를 포기하고 허공에 떠도는 문장을
오른쪽 날개에 구겨 넣고 꽁무니 흔든다
기록에 연연하지 않는 마지막 언어가 이슬처럼
줄 끝에 맺힌다 낙하하는 나비의 눈물을 본다
잠 덜 깬 몸이 둥글게 말린다
외줄 타다 멈춘 듯 지워지지 않는 한 낮의 이탈,
고춧가루 태우기
- 리스트·4
향 피우는 사제처럼, 이사 가는 날
고춧가루 보란 듯 태워 매운맛을 보여준다
집안, 단단하게 뭉쳐져 넘기지 못한 먼지
고추 같은 그녀, 맹금류 부리를 달고
입 안 가득 담아 공중에서 쪼아댄다
부풀어 나오는 밥솥에 넘친 밥물처럼
주검들이 허옇게 천정에 널브러진다
눈물, 콧물까지 흘리며 웃는다
머리에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부적을 벽에 꼬불꼬불 그린다
후끈 달아오른 붉은 먼지 헛발질에
창 밖 골목으로 달아난다
학대하듯 독즙을 맨단 화살을 쏘아 댄다
물고 씹을수록 비대해지는 사냥의 말
모서리에 엎드린 날개 잃은 퍼런 먼지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한 겹씩 흩어진다
대문 밖 먹구름 속, 새처럼 날아간다
건강한 집은 철새가 둥지를 짓고
문에 박힌 수많은 지문들이 버티고 있다
고춧가루가 탄다 검은 연기가 자욱하다
그보다 더 매운 그녀의 혀를 타고
거짓인 명제가 맹독을 품어댄다
사자밥에서 찾다
- 리스트·5
담벼락에 개가 고기 덩어리를 뜯고 담장 위 고양이가 북어 대가리를 할퀴고 있다 살덩어리와 마른 대가리로 던져진 이 도시, 상점에 자판기, 무인 주차장, 무인 숙박업소 누르기만 하면 얻기 편한 거리, 밥값을 위해 붙어 있는 일터와 밤새 싸운 그 여자의 속내를 찾아 헤매는 이른 아침, 눈꺼풀이 바닥에 떨어진다
뉘 집 대문 밖 쓰러진 쓰레기통 잘 차려진 밥 한 그릇, 덩그러니 남아 허기가 휘적휘적 다가간다 드러난 뼈다귀와 가시를 뱉어 낸 빈 속 들여다보는 순간 비웃듯 비가 내린다 골목, 나무 가지마다 입언저리 축축해지고 흩어진 밥알들 깨진 보도블록 모서리 따라 뭉개져 흘러간다
허연 나무뿌리가 돋아나기 시작하고 움직이지 않는 지하의 문지방 등에 업고 건너고 있는 저승사자의 발길, 오른쪽, 왼쪽 끌려가는 데로 팔랑거린다 오래전 걸어 두었던 관습에 곰팡이가 핀다 하얀 이 들어내고 비가 쏟아진다
먼지와의 동거
- 어느 호텔 청소원의 굳은 손가락
먼지가 구른다 커튼 뒤 햇빛이 비치고 총천연색 영화가 유리창에 상연된다 어디서 왔는지 남녀 주인공이 되어 부둥켜안고 체위를 바꾸며 엉겨 붙는다 커튼이 열리고 울고 웃다 부풀리고 서로 부딪쳐 흩어지는
침대 밑 지문을 심는다 술병뚜껑 지나 팔 뻗어 책을 뽑는다 펼쳐진 책갈피에 손을 얹는다 소식 없이 떠난 낯익은 단어가 돌아온 것처럼 손끝이 찌릿하다 잊어버린 중심문장이 먹구름 먼지에 쌓여 보이다 안보이다
장롱 안 바람이 인다 지퍼를 열어 놓은 가방타고 옷걸이에 매달린 넥타이의 목조인 노래가 시소를 탄다 지퍼를 쓸어내리는 나선형 먼지, 심장 돌아 나오는 음표들이 톱니바퀴 달고 떨어져 나가고
천정에 날개가 꽂힌다 이불사이 접힌 깃털 펼치느라 들썩이고 부풀리는 거위, 손가락 발가락 마디마디 휘젓는다 에어컨 구멍에 까맣게 매달려 온종일 애태운 속내 말린다 천정까지 뚫고 점으로 이어가는 솜털먼지, 세상의 경계를 마주하며 지구의 안팎 넘나드는 보이지 않는 힘,
체험적 시론
허공은 언제나 낯설음을 불러일으킨다
문학 얘기를 하다 보면 특히 시를 말 할 때는 새로운 언어로 시를 써야한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말의 일상적 사용, 지시적 사용을 낯설게 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이다. 기존의 관념과 질서의 상투적 사고에 갇힌 우리의 의식을 깨워서 그것을 넘는 새로운 것을 지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불빛을 불빛이라 하고 오징어를 오징어라 하고 희망을 희망이라 하는 기존의 상투적 관념에 시인의 상상력을 불어 넣는 것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 할 수 있게 표현하는 것이다. 상상력을 통해 시적 낯설음을 표현하고 새롭게 만들어 내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다. 그것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끊임없이 확대하고 온갖 억압으로부터 해방의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것. 그런 점에서 나는 시의 언어를 어떻게 만들어 사용해야 되는지 시를 쓰면서 과연 잘 사용하고 있는지 늘 부끄럽기만 하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낯설게 일상을 바라보기에는 힘들다. 억지로 사물이나 자연 현상을 비틀어 낯설게 맞춘다면 사설로 끝나 버린다. 그런다고 기다릴 수는 없다. 듣고 보고 아니 귀와 눈, 몸을 이용한 그때그때 사물이 내게 낯설게 보여 주는 순간을 기록해 둔다. 그리고 구름, 바람, 새, 뱀, 꽃 등의 소리, 냄새, 표정 등을 통해 자기 식으로 쓰고 고치고 버리고 내가 아는 그런 반복이 시를 쓰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라고 다 말 할 수 있을까? 내 몸 안에 깃들어 살면서 울고 웃는 그 순간을 기록하는 것뿐이다. 그 중에서도 내게 시가 되는 것은 허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사물과 공감을 일으키는 장소에서 눈빛이 만나고 수정이 이루어지는 보이지 않는 많은 공간의 이야기에 시가 맴돌며 헤매고 있다. 그 곳에서 보는 얼굴, 또 그 곳에서 사라지는 숱한 얼굴들 언제나 내게 못 다한 애인들이 깃들어 머물고 있는 곳이다.
얼마 전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인 프레드 머큐리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음악에 대한 도전을 한다. 자기만의 음악성을 가지려는 열정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중앙 문단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들어가려는 소수의 문인들이 그들만의 소수자를 만들려는 시인들이 지금 문단을 지배하고 있다. 지배자 보다는 또 다른 소수자로 슬픈 동성애자로 남고 싶다. 현재의 내 위치가 바뀌더라도 이중의 소외를 느낀대도 스스로 약자가 되어 살아가고 싶다. 내가 나를 잘 모르고 살 듯 시도 모르면서 시라고 할 만한 시도 없으면서 시라고 읽고 시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