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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카메라로 찍는 시
1. 디지털 멀티 언어와 시적 상상력의 변환
1) 문자 언어에서 디지털 멀티 언어로
지금은 디지털 문화예술 시대라고 일컬을 만하다. 디지털 정보통신 혁명이 일상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성하고 문화 예술도 이미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최근 디카시 보급하기 위해서 고등학교 특강을 몇 차례 가진 적이 있는데, 김해의 모 고등학교에서는 강연 형식으로 하고, 진주의 모 고등학교에서는 강연 형식과 더불어 디카시 동영상 시청을 병행했다. 그런 과정에서 느낀 것은 고등학생들에게 문자나 음성 언어만으로는 그들의 시선을 끌기가 힘든다는 것이었다. 강연과 더불어 디카시 동영상을 함께 보여주니까, 훨씬 호응이 좋은 것은 물론이다. 이미 고등학교의 수업 방식에도 문자나 음성 언어 외의 디지털 멀티 언어를 활용하기 위한, 인터넷망의 영상 시스템이 교실마다 구축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수업 시간에 인터넷을 활용한 디지털 멀티 언어로 학생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21세기는 디지털 정보 통신의 혁명적 도래와 함께 의사 소통 방식이 급변하면서 시도 새로운 몸 바꾸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20세기 시는 언어 예술로 한정된 것이었다. 그래서 시는 언어 예술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문덕수 시인은 “시는 언어 예술”이라는 생각에서 “시는 언어 예술이면서도 언어를 넘어선다”라는 시에 대한 인식 전환을 피력한 바 있다. 주1) 이 같은 지적은 문자언어에서 디지털 멀티 언어로 급격한 변환을 보이는 디카시나 멀티시 같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개념의 시를 염두에 것은 아닐지라도 20세기 시학에서 21세기 시학으로의 전환을 시사는 매우 중요한 명제가 아닐 수 없다. 주2)
20세기 시는 언어 예술로서 할 수 있는 실험은 거의 다한 셈이 아니던가. 우리 현대시가 그것을 웅변해주고 있다. 우리 시는 주지하다시피, 개화기 이후 고유의 전통적인 시론에만 머무르지 않고 서구 시론까지 도입하여 “시가 언어 예술”이라는 명제를 초점화하여 시의 지평을 한껏 넓혀 왔다. 전통 서정시에서부터 해체시, 그리고 메타시 등의 다양한 시도를 통해서 “시가 언어 예술‘이라는 명제는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제 “시가 언어 예술”로써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고 생각될 즈음, “시는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선다”는 새로운 명제까지 나오게 된 것이 아닌가.
이 같은 현상은 “시는 언어예술을 넘어선다”는 명제를 디지털 멀티 언어로써 실현해야 할 명실상부한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도래를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2) 사물․자연 상상력의 극순간 포착
필자는 디지털카메라로 시를 찍는다는 관점에서 ‘디카시(dica-poem)’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디카시는 언어 예술의 한계를 넘어서는 디지털 시대의 시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다. 디카시의 출현 경위와 당위성에 대해서는 이미 몇 차례 주3) 밝힌 바 있다.
디카시는 날시(raw poem)를 찍어 문자 재현하는 것인데, 디카시에서 ‘날시’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날시’는 시인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사물이나 자연의 상상력, 즉 신의 상상력을 함의한다.
원시 시대는 신의 상상력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현실 공간이 곧 신화의 공간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차츰, 인간의 상상력이 신의 상상력을 추방하기 시작한 것이 다. 과학의 발달과 예술의 발달은 같은 궤를 달렸다. 과학의 발달이 인간의 인지 발달의 결실이라면 예술의 발달 역시 인간 상상력 발달의 결실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21세기 공해와 전쟁과 테러의 위협 앞에서는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도 이제 한계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근자의 ‘웰빙'이니 '느림의 미학'이니 하는 담론은 곧 20세기 사유 방식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암시하면서 인간의 과학적․예술적 상상력의 한계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의 상상력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시는 언어 예술로서 언어를 조탁하고 때로는 해체하고 온갖 기교와 기법을 추구해왔지만, 앞서 지적한 바대로 이제 시의 언어도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디카시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사물의 상상력, 자연의 상상력, 즉 신의 상상력으로 돌아가는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상상력보다 더 위대한 상상력을 엿보는 것이 디카시의 새로운 상상력이다. 인간의 인지 발달이 극에 도달한 지금 다시, 원시의 상상력, 신의 상상력으로 돌아가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디지털카메라는 인간 인지 능력, 곧 과학적 상상력의 정점에서 발명된 것으로써, 아이러니칼하게도 이것은 신의 상상력을 엿보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디카시는 인간의 상상력보다는 사물이나 자연의 상상력을 단지, 발견 포착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디카시론은 발견의 시학인 셈이다. 물론, 이 발견의 시학에도 인간의 상상력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수석과 조각의 비유를 들어보는 것이 효과적일 것 같다. 수석은 수많은 이름 없는 돌들 가운데서, 가령 비너스 형상을 한 돌을 발견하여 그것을 일반인들에게 비너스라고 보여주는 것이다. 수석가가 이름 없는 돌맹이에서 비너스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 즉 포착하는 것이 예술 행위인 셈이다. 이에 비해서 조각은 원석인 돌덩이를 조각가의 상상력으로 조탁하여 비너스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수석가의 상상력과 조각가의 상상력은 다르다. 수석가는 사물의 상상력, 신의 상상력을 포착하는 것이고, 조각가는 조형적 상상력으로 새롭게 빚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자시가 조각의 상상력이라면 디카시는 수석의 상상력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디카시인의 상상력은 수석가의 상상력을 훨씬 능가하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미, 사물, 신의 상상력으로 빚어진 수석을 수석가는 단지 인식하는 것으로써 그의 예술 행위는 대부분 끝나지만, 디카시의 상상력은 수석보다 더욱 다채로운 예술적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수석은 단지, 작품 제목을 명명하는 정도의 창작 행위에 머무르지만, 디카시는 사물의 상상력을 대언하는 기능을 할 수 있기에 매우 다양한 미적 표현 획득이 가능한 것이다. 즉, 디카시에는 수석과는 달리 시적 화자가 보다 명확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디카시의 화자는 사물과 서정적 자아가 일치되는 경우가 우세하게 드러나면서, 사물의 예술적 상상력을 대언하는 것이다.
한편, 디카시는, 문자시가 사물을 시인의 상상력으로 새로운 사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인이 주체적 작용을 하고 사물은 객체적인 것이 되지만, 사물의 상상력을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사물이 주체이고 시인은 객체가 된다.
사물이나 자연은 인간에게 전달할 입이 없다. 그것은 신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신은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말씀을 전한다. 디카시의 화자는 사물과 자연의 입이고 때로는 신의 대언자로서 전달의 통로가 되는 셈이다. 그런 과정에서 디카시의 주체는 화자이기보다는 사물 자체가 되는 것이다.
디카시는 사물의 예술적 상상력을 포착하는 극순간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디카시는, 문자시가 시인의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사물을 재조합하고, 재창조하여 새로운 사물로 드러내는 것에 비하여, 자연이나 사물의 상상력, 즉 신의 상상력을 그대로 언어화(기록, 전달)하는 것이다. 즉, 시인의 상상력 이전에 신의 상상력으로 이미 시적 상상력이 확보되어 있는 것을 포착하여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포착하는 작업은 디카시에서 매우 중요한 예술적 행위가 된다. 왜냐하면, 자연이나 사물에 이미 내재한 시적 형상, 즉 시인이 사물 혹은 풍경과 부딪쳐 발생하는 감동의 형상이 곧 날시가 되기 때문이다. 주4)
따라서 디카시는 극순간의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순간적으로 디카로 찍어서 역시, 가능한 빠른 시간에 문자 재현한다는 점에서 극순간성, 극현장성, 극사실성, 극서정성을 지니는 극순간 포착 예술이 되는 것이다.
2. 디카시의 대중성과 앞으로의 전망
1) 디지털 시대의 대중적 장르 가능성
디카시 담론을 나누다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상에서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작업을 이전부터 해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사진과 시, 혹은 그림과 시의 병치는 이전부터 매우 친숙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래서 필자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시의 한 모습으로 제시한 디카시가 새로울 것도 없는 구태의연한 것으로 파악하여 냉소하는 네티즌도 없지 않았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합은 몇 백년 전부터 있어왔던 개념 아닌가. 옛 우리의 선조들 역시 시화를 즐겨 그렸었고, 조금 다른 개념이지만 유럽의 다다이스트들이나 선구자들 시를 이미지로 표현하곤 했는데, 저 사람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짓이라는 생각이다. 새삼 "디카시"라는 웃기지도 않는 명칭을 가져다 붙인 것도 그렇고.
이 글 주5)은 <<DAUM 미디어다음>>의 <사건화제포트>에 재게재된 <<오마이뉴스>>(2004. 10. 8) 기사인 <디카시'라고 들어보셨나요?>(디카시집 <<고성가도固城街道>> 출간 기사)에 대한 꼬리말이다. 그런데 필자의 디카시에 대해 매우 혹평한 글이 아이러니칼하게도 디카시의 존재 의미를 선명하게 부여한다.
그렇다. 디카시는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닌 셈이다. 디카시는 이전부터 시가 언어 예술이라는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수많은 실험 정신의 기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특히, 문자를 넘어서고자 한 실험시의 시 형태인 구체시concrete poetry(형태시shaped poetry, 입체시cubist poetry, 문형시紋型詩pattern poetry)는 주목을 요한다. <<그리스 사화집 Anthology>>(980경)에 실려 있는 시가 도끼 모양을 하고 있거나 달걀 모양으로 하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16세기 영국의 형이상학파 시인인 조지 허버트가 쓴 날개 모양의 〈부활절 날개 Easter Wings>와 제단 모양의 〈성단 The Altar〉이라는 시 등과 함께, 19세기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인 스테판 말라르메가 다양한 크기의 활자 실험을 보인 것이나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시인은 기욤 아폴리네르가 쓴 시각적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시도와 일부 구체 시인들이 쇠를 비롯한 자연 재료를 이용해 만든 시적 시도는, 시가 전통적 의미의 언어 예술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던 노력들이었다. 주6)
이런 관점에서도 디카시는 필자가 그 개념을 새롭게 창안한 것이지만 전혀 생소한 개념은 아닌 것이, 시가 문자 언어에만 매일 수 없다는 오랜 인식의 토대 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시가 언어 예술이라는 전통적 관념을 넘어서려는 구체시 운동 같은 실험시들은 대부분 주변부에 머무르고 말았고, 한때의 해프닝으로 끝난 감이 없지 않다. 그것은 물론, 대중성 확보에 실패한 때문이다.
그런데, 디카시는 대중성 확보가 매우 용이하다. 최근에 디지털카메라와 인터넷 홈피나 블로거가 상용화되면서 사진을 올리고 간단하게 메모하는 형식의 글쓰기는 이제 매우 익숙한 표정이 되었다. 이 같은 일반적 글쓰기를 예술의 형식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가 디카시라는 개념이라고 보면, 디카시는 이 시대의 새로운 주류적 시 쓰기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다.
근자에 들어와서는 문자시가 상당한 위축을 가져오고 있다. 지금도 많은 시전문지들이 속속 창간되고 있고 시를 지망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문자시로는 독자를 확보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흔히, 냉소적으로 일컬어지는 시인과 독자의 숫자가 같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정말, 이제 문자시는 시인들끼리 돌려읽는 것으로 그치는 듯하다. 필자가 고등학교에서 디카시 특강하면서, 고등학생들에게 올해 미당문학상 수상자인 문태준 시인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유감스럽게도 한 학생도 문태준이라는 시인을 알지 못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문자시가 더 이상 디지털 멀티 언어로 소통하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주류적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디카시가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주목을 요한다. 디카시는 일본의 하이쿠처럼 짧은 형식으로 일순간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디카시는 창작적인 면과 감상적인 면 모두 극순간의 예술로서 매우 짧은 순간에 독자를 매혹할 수 있다.
디카시는 극적 감동 순간을 디카로 찍고, 그 감동의 실체를 해석하여 문자 재현함으로써 극순간의 미학을 표출하기 때문에 한 줄 혹은 두 줄의 짧은 시행도 가능한 매우 기능적인 장르가 된다.
이런 점에서 디카시와 문자시의 미학은 매우 다른 국면이다. 디카시에서 문자시적인 상상력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즉, 디카시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디카시는 단지, 극순간의 아름다운 감동, 그 하나만을 전달하는 것으로 만족해도 좋다.
현대인들은 너무들 분주하다. 그런 현대인에게 디카시 한 편이 생수 한 병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서적 갈증을 한 순간에 해소하는 디카시가 디지털 시대의 대중성을 지니는 새로운 시 장르로서의 존재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2) 대중 매체의 반응과 디카시의 발전 방향
지난해 9월 ‘문학의 전당’에서 디카시집 <<고성가도固城街道>>를 출간하고, 올 8월 16일부터 21일가지 경남문학관에서 디카시전을 개최한 바 있다.
디카시전에서는 19점을 출품했는데, 1점에 10만원씩 18점을 판매하고, 1점은 필자가 소장품으로 판매하지 않은 것이니, 모두 판매가 된 셈이고, 그만큼 디카시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도가 높았던 것이다. 또한 이례적으로 디카시전에 대한 지역 방송에서 큰 관심 주7)을 보인 것은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다. 창원 KBS 텔레비전 문화공감 주8), 진주 MBC 라디오 ‘아침을 달린다’ 주9)를 비롯하여 여타의 라디오 및 케이블TV방송 등에서 인터뷰 및 취재 요청이 쇄도한 것은 디카시의 대중적 장르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앞으로 아래 <첨부>의 인터뷰 마지막 질문에 답한 바대로 디카시 운동을 전개해나간다면, 디카시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시의 장르로서 우뚝 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끝>-
주)
1) <<오늘의 詩作法>>(시문학사, 2003) 서문에서 시관의 변화된 인식의 근거로 ‘언어 이전의 사물’과, 그러한 ‘날것’에 대한 순수 직관의 중요성을 제시한다. 여기서 언어 이전의 사물이란 언어로 요리(料理)되지 않는 ‘날것’(raw thing), 사유(思惟) 이전의 ‘사물’을 의미하는 것인 바, 이 책의 ‘언어 이전의 탈관념시’라는 단원에서 오진현 시인이 ‘디지털리즘의 시’의 기법으로 제시한 ‘염사(念寫)’ ‘접사(接寫)’ 등이 ‘날것’(raw thing), ‘사유(思惟) 이전의 사물’을 포착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소개되고 있다.
2) 시가 문자 언어의 카테고리를 넘어서고자 했던 시도는,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주변부에 머물렀을 뿐이었지만 의외로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이에 대한 것은 본고의 ‘1) 디지털 시대의 대중적 장르 가능성’ 참조 바람.
3) 필자는 국제어문학회 2004 가을학술대회 발표 논문(장소: 목원대학교 일시: 2004. 10, 16) 디카시의 가능성과 창작 방법>과 월간 <<시문학>> 2005년 4월호에 <디카시(dica-poem)의 쟁점과 정체성>라는 평론을 통해서 디카시에 대한 기본적 논의를 진행한 바 있다.
4) 이전 글(<디카시의 가능성과 창작 방법>)에서 디카시를, 언어 너머의 시, 곧 날시(raw poem)을 디카로 찍어 문자 재현한 것이라고 정의하고서, 날시(raw poem) 개념에 대해서 서정적 주체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파악하면서 날시(raw poem)를 협의와 광의의 관점에서 정의한 바 있다. 즉, 서정적 주체가 배제된 순수 사물 자체만을 재현하면 '사물적 디카시'가 되고, 서정적 주체를 포괄하면 '관념적 디카시'라는 관점으로 분리하여 보았다. 후자의 개념은 날시(raw poem)의 외연을 넓힌 것으로, 텍스트 바깥 풍경으로서의 서정적 주체인 시인을 포함시켜서 파악한 것이다. 그렇다면 날시(raw poem)는 협의의 개념으로는 시인이 포착한 사물이지만 광의의 개념은 사물 플러스 주체(사물과 주체의 대화국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날시’ 개념을 파악하면 사물과 화자가 분리되는 국면이 된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디카시의 화자는 ‘화자 자체’가 주체가 아니고 ‘사물’이 주체로 드러나면서 화자는 사물의 대언자로서 대부분 사물과 동일성을 이룬다. 따라서 사물과 화자는 분리되기 힘든 국면이기 때문에, 날시 개념을 사물적 디카시와 관념적 디카시로 구분하여 파악하기보다는, 날시를 사물이나 풍경에 극순간적으로 시인의 정서나 사상이 투영되는 상태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5)
인터넷자료,http://ucc.media.daum.net/uccmix/photo/affair/200410/08/ohmynews/v7498473.html?u_b1.valuecate=4&u_b1.svcid=02y&u_b1.objid1=16602&u_b1.targetcate=4&u_b1.targetkey1=17136&u_b1.targetkey2=7498761
6)최낙원 교수도 <<시와 반시>>2000년 가을호에 발표한 <멀티포엠의 실험성>에서 활자 언어만을 매체로 하는 기존의 시 형식을 거부하고 다양한 표현 양식-시각, 창각 등-을 통해 시적 감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움직임은 과거부터 있어왔다고 전제하고, 그것을 구체시 운동으로 예거하고 있는데, 최 교수는 바로크 시에서 그 원류를 들고 있다. 16세기 중반 세비아 출신 시인페르나도 데 에레라의 시의 형식을 강조하는 흐름부터 시작하여 17세기 대표적인 바로크 시인들인, 공고라, 께베도에 와서는 감각중심의 독특한 바로크 시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20년대 유럽 아방가르드의 한 축을 이루었던 다다이즘 등을 예거하면서 시의 의미가 전달되는 것은 단어만이 아니라 공간, 그림, 소리도 시적 의미를 전달한다는 관점에서 시가 그림이 되고, 음악이 되고 건축이 되고, 이벤트성 퍼포먼스가 되는 이른바 ‘새로운 시’로 총칭되던 이런 움직임이 결국 구체시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구체시 운동은 1차 대전 후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에서 그 명맥을 어어가다 남미(특히 브라질)와 전 유럽에 확산되었으며 포르투칼, 일본 등에까지 그 영역을 넓히는데, 20세기의 기욤 아포리네르의 타이프 문자시, 1916년 후고 발, 1935년 쿠르트 투골스키, 그리고 멕시코 옥타비오 파스 등을 통해 구체시의 큰 족적을 남겼다고 하면서, 결국 구체시가 시각적, 청각적, 공간적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점 하나, 선 하나, 티 하나, 여백 하나마다 의미가 된가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멀티포엠이 비록 멀티미디어 환경에서 생겨났지만 그 뿌리는 구체시에 있다고 보았다. 월간 멀티포엠, 인터넷 자료, http://www.multipoem.com/magazine/200506/home/magazinemain2.htm
7) 중앙 방송 매체에는 디카시전을 알리지 않았다. 만약, 중앙 방송 매체에도 알렸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다.
8) “디지털 시대, 또 하나의 표현수단으로 떠오른 디지털카메라. 여기에 시인의 정서나 사상을 투영해 언어화하면 어떤 풍경이 나올까? <디카詩>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디카시집을 펴낸 이상옥 시인이 경남문학관에서 디카시를 예술 작품화한 전시회까지 가진다. 아주 짧은 순간의 영감을 카메라로 포착, 영상 이미지를 언어화하는 디카시는 시를 문자 언어에서 영상 언어로 확대시키고 있는데.. 이상옥 시인(창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이 국내 최초로 개척한 디카시를 만나본다.” 창원 KBS ‘문화공감’ (올 9월 1일 저녁 11시 방영) 다시 보기, 인터넷 자료 http://changwon.kbs.co.kr/program/pro_tv6_review.htm
9) 올 9월 10일 오전 8시 45분 방송 첨부 자료 참조.
<첨부>
진주 MBC 라디오 ‘아침을 달린다’(올 9월 10일 오전 8시 45분 방송) 인터뷰 전문
디지털 카메라가 대중화되면서, 인터넷 세상도 풍요로워졌습니다. 직접 찍은 사진으로 홈페이지를 꾸미는 모습을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는데요, 사진은 그 자체로 커다란 울림을 가지고 있지만, 사진에 걸 맞는 아름다운 시가 곁들여져 있다면 감동은 배로 전해 옵니다. 그런데, 사진과 시가 따로 놀지 않고, 원래 한가족인 것처럼 묶여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작년부터 국내에서 ꡐ디카시ꡑ라는 새로운 시문학 장르를 개척해온 분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디지털 카메라와 시를 결합한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창신대학 문예창작과 이상옥 교수, 이 시간에 만나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Q. 잠시 설명을 하긴 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 부탁 드릴께요. 디카시.. 어떤 걸까요?
기존의 시가 언어예술이라면, 디카시는 언어예술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디카시는 문자언어에서 디지털 언어로 넘어가는 매체 변화에 따른 시의 자연스러운 몸 바꾸기의 한 형태라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디카시는 기존의 문자시와 다른 독특한 미학을 지니고 있습니다. 디카시는 언어 너머의 시, 곧 날시(raw poem)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문자로 재현한 시입니다. 다시 말해, 디카시는 이미 일상성을 넘어서 있는 사물의 상상력, 자연의 상상력, 즉 신의 상상력을 찍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카시는 기존의 시사진 같은 시와 그 시에 어울리는 사진의 조합이 아니라, 사물이나 자연 속에 존재하는 시의 형상을 찍어 언어의 옷을 입혀 보여주는 것입니다.
Q. 요즘 세대를 영상 세대라고 하기도 하는데요.. 디카시의 탄생도 이와 무관하진 않을 것 같아요. 어떻습니까?
네, 앞에서도 잠시 말씀 드렸습니다만, 디카시는 디지털 영상 세대의 상상력을 반영하는 새로운 시입니다. 문학사나 예술사를 보면, 매체의 변화에 따라 문학이나 예술은 자연스럽게 진화해왔습니다. ‘20세기의 시'라고 하는 개념은 문자 매체의 산물이지요. 문자가 발명되고 인쇄 매체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20세기는 문자시의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문자 이전의 음성 언어가 주도하던 시대에는 문자시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민요 같은 짧은 노래 형식이 음성 언어 매체 시대의 시였죠. 바야흐로 이제는 디지털 시대입니다. 디지털 시대는 문자 언어를 넘어서는 디지털 영상 언어 매체 시대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디카시 외에도 멀티시, 비디오시 같은 새로운 시형이 나타나고 있지요. 디카시는 디지털카메라나 폰카 같은 디지털 세대의 새로운 표현 매체의 등장과 함께 드러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시의 장르라고 하겠습니다.
Q. 새로운 문예 사조다. 이런 말도 있지만, 시대에 편승해 잠시 반짝이는 아이디어일 뿐이라는 말도 있어요. 디카시가 영속성을 가질 수 있을까요?
새로운 문예 사조라고 보아야 합니다. 디지털 시대의 의사 소통은 디지털 영상 언어로 이루어집니다. 디지털 영상 언어는 문자 플러스 영상이지요. 곧 디지털 영상 언어는 멀티 언어입니다. 디지털 시대에는 문자시는 문자시대로 발전하겠지만, 역시 대세는 디카시나 멀티시 같은 다양한 새로운 시 형태가 주도할 것입니다. 디지털은 하나의 새로운 문예 사조의 화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멀티시, 비디오시 같은 것이 사이버 공간에서만 소통되지만, 디카시는 사이버 공간과 종이책, 혹은 전시 공간에서 소통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소통성이 폭넓은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디카시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어우르고 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Q. 문예창작과 교수님이시니까 시문학에 대해선 당연히 조예가 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요, 사진은 어떤가요? 예전부터 사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던 건가요?
저는 사진에 대한 조예는 아직,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사진을 좋아합니다. 저의 큰딸을 저가 강권하여 사진과에 가도록 할 정도이지요. 저는 운전할 때나 산책할 때 사물의 상상력이 이미, 일상성을 넘어 예술적 상상력을 띠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저것을 순간적으로 포착할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많았지요. 그런데, 디지털카메라고 나오면서 저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디카는 극순간을 사진의 조예와는 상관없이 포착할 수 있지요. 디카시는 극순간 포착 예술이기 때문에, 사진 기술보다는 시를 포착하는 시의 눈(詩眼)을 지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디카시를 쓰기 위해서 사진에 조예가 깊으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상관은 없습니다.
Q. 창작작업은 어떤 식으로 하게 되나요?
디카시는 극순간성의 예술이기 때문에 창작도 순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운전을 하다가 혹은 산책을 하다가, 아니면 연구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시의 형상을 포착하게 될 때, 그 순간 바로 디카로 찍고, 그것을 가능하면, 곧바로 문자 재현합니다. 창작 방법 면에서도 문자시와는 다르지요. 문자시는 시적 소재를 발견하면, 그 소재에 시인의 상상력을 부가하여 매우 고뇌하며 창작을 합니다. 따라서 문자시를 창작할 때는 언어의 조각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언어를 깎고 다듬고 하지요. 그러나 디카시는 조각가가 아니고 수석을 발견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예술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극순간 포착이 이루어지는 발견의 시학으로 귀결됩니다. 비유로 말하면, 이해가 될까요. 문자시를 창작하는 것이, 조각가가 작품 소재인 원석을 가지고 그것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조탁하여 비너스를 형상화하는 것이라면, 디카시는 자연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원석들 중에서 이미, 비너스 형태를 띤 것을 찾아서 그것이 비너스임을 포착하는 것이지요.
Q. 일반인이 디카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조언을 좀 해주세요.
대중 가요와 시의 정서가 다르듯이, 디카시와 문자시의 정서도 다릅니다. 문자시는 고도의 상상력으로 삶의 심층을 다층적으로 드러냅니다. 이에 비해 디카시는 극순간의 삶의 표정, 진실 등을 드러냅니다. 디카시의 역할은 한마디로, 극순간 포착을 통해서 예술적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다들 너무 바쁩니다. 그런 현대인들에게 생 수 한 병과 같은 정서적 갈증을 한 순간 해소해주는 역할만으로도, 디카시는 존재 의미는 있는 것이 아닐까요.
Q. 지난해에 디카시집 ꡐ고성 가도 固城街道ꡑ를 출간하고 지난달에는 전시회도 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반응을 직접적으로 살필 기회였겠는데요, 어떻던가요?
디카시의 대중성을 확인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디카시전에서 19점의 작품을 출품했는데, 저가 소장하는 1점 외는 다 판매를 했습니다. 이례적으로 대중 매체인 TV 라디오 같은 방송에서의 관심도 굉장했습니다.
Q. 끝으로 앞으로 활동 계획이 있다면 좀 전해주세요.
조만간 한국의 대표시인들에게 디카시 청탁을 하여 한국 대표 시인들이 쓴 디카시집을 묶을 것이고요. 이 시집을 텍스트로 디카시론 정립에 더욱 주력할 것이고요. 궁극적으로는 디카시 전문지를 창간하고, 디카시 상설 전시장인 디카시 갤러리 건립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또한 디지털 세대들에게 디카시를 보급하기 위해서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디카시 특강에 주력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김해 중앙여고에서 디카시 특강을 하였고요. 다음 주 목요일에는 진주 삼현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디카시 특강을 합니다. 그리고 하동 금남고등학교에서도 특강이 잡혀 있습니다. 또한 다음 카페에 있는 '디카시동인회 고성가도'에 관심 있는 네티즌들의 참여를 권유하고, 또한 오프라인 모임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창신대학 문예창작과 이상옥 교수와 함께 말씀 나눠봤구요,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