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20)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순례] * 제8구간 (풍산→삼강) ④ [풍천 구담정사-삼강]
2020년 10월 15일 (일요일) ▶ 이상배 동행
(부용대)→ [구담정사]→ [구담교]→ 제방길→ [풍지교]→ 제방길→ [삼강나루]→ [점촌]
구담정사(九潭精舍)
☆… 부용대를 중심으로 한 옥연정사와 겸암정사 그리고 화천서월을 둘러보고 난 후, 택손이 차를 몰아 예천으로 향했다. 예천의 맛집 '백수식당'에서 육회비빔밥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 예천에서 927번 지방도로를 타고 경상북도 도청 외곽도로를 경유,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 459번지에 있는 구담정사(九潭精舍)를 찾았다. →
‘구담정사(九潭精舍)’는 앞에 낙동강(洛東江)과 연해 있는 강변 마을 구담리에 있다. 구담정사는 조선 초 광산(光山) 김씨 김무(金務)가 안동 풍천의 구담에 입향하여 살았던 집이다. 그러므로 원래 구담정사는 담양에 본거지를 둔 안동의 광산 김씨 구담지파의 종택(宗宅)이었다.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감싸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 자리에 터를 잡은 고택으로, 초록의 잔디가 곱게 깔린 넓은 대지에 날아갈 듯한 기와집이 푸른 하늘로 향해 있었다.
이렇게 구담정사는 광산 김씨 안동파((光山金氏 安東派) 가문이 대대로 살았던 종택이었는데, 이 지역 출신 권오춘(權五春) 님이 인수하여 아름답고 기품 있게 가꾼 고택이다. 권오춘 공은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이다.
기존 한옥 형태인 'ㅁ'자 구조를 유지해서 뜰집 원형을 보존했으며, 마루와 마루를 이어 실내에서 여러 방을 옮겨 다닐 수 있도록 지어졌다. 안채 앞마당과 사랑채 앞마당 사이에 꽃담을 두어 안과 밖을 나누고, 정원에 소나무와 야생화와 정원석으로 조성하여 전통과 현대에 어울리는 멋스러운 모습이다. 구담정사의 뜰집구조는 앞마당, 안채, 바깥채, 뒤뜰로 이어지며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싱그러운 초록의 잔디가 깔린 너른 정원, 고택과 현대식 정원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고즈넉한 곳이다. 일반인이 고택을 체험하며 유숙할 수 있다.
구담정사 앞뒤의 정원
獨也靑靑! … 정원 가장자리의 노거송(老巨松)
☆… 구담정사(九潭精舍) 바깥채에는 손님맞이 풍류의 공간인 정자형의 높은 마루가 있고, 안채에는 가족들의 생활공간인 안방, 건너방이 있다. 건물들 안에 자리한 안마당은 지붕이 없는 사각 형태로, 탁 트인 하늘 아래 안채의 채광도를 높이고 공기를 순환시킨다. 이렇게 안채 공간은 외부와 소통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어 항상 자연과 호흡하는 구조이다. 구담정사는 문화재로 건물만 보존하는 다른 고택과 달리 실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다.
¶ 그래서 구담정사(九潭精舍)는 ‘경북 명품고택’으로 인증을 받았고, 한국관광공사로부터 ‘한국관광 품질인증(KOREA QUALITY)’을 받은 한옥이다. 그러므로 일반인에게 늘 개방되어 있다. 누구든지 예약을 하면 ‘고택체험’으로 유숙할 수 있다. (054-853-2009)
사랑채
안채
부귀에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빈천에도 뜻이 변하지 않고 위협과 무력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 이날 우리가 찾은 구담정사에는 권(權) 여사가 고택을 지키고 있었다. 권 여사는 당주(堂主) 권오춘(權五春) 공의 누님 되시는 분으로, 여동생과 함께 이 고택을 지키며, ‘한옥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오늘, 살림을 도맡아 하는 동생은 잠시 출타 중이었다) 아! 그런데 권 여사는 우리 ‘택손’[오정택]과 같은 마을(안동시 남후면 검암리 대실마을)에서 함께 자란 분이란다. 그래서인지 처음 만나는 품새가 아주 남다르다. 인정이 넘친다. 더불어 우리 일행도 아주 각별하게 대해 주었다. 권 여사는 권오춘 공을 비롯한 7남매 중의 한 분이다. 오랜동안 보고 싶었던 형제자매를 맞이하듯이 반가워하면서, 따끈한 차와 정갈한 쟁반에 청포도까지 내놓았다. … 택손(澤孫) 내외와 권 여사는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안부를 묻고 많은 정담(情談)을 나누었다.
☆… 사랑채 대청에 걸린 액자를 보니, 오른쪽에 '思無邪'(사무사) 전각이 걸려 있고, 그 옆칸에 한학자 한송(寒松) 성백효(成百曉) 선생의 친필 ‘詩禮故家’ 액자가 걸려 있다. 그리고 그 아래 ‘和而不流’ / ‘貞不絶俗’ 두 개의 액자가 세로로 걸려 있다. ‘詩禮故家’(시례고가)는 ‘시(詩)의 풍류와 예도(禮道)가 살아있는 고택(古宅)’이라는 뜻이요, ‘和而不流’(화이불류)는 ‘서로 화락하되 천박하게 흐르지 않는다’는 뜻이며, ‘貞不絶俗’(정부절속)은 ‘올곧게 살아가면서 미풍양속이 끊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뜻이다. 구담정사의 가풍(家風)과 분위기를 잘 말해주는 필적이다.… 성백효(成百曉) 선생이 구담정사에 와서 머물며, 고택의 주인 권오춘 님에게 써 준 글씨라고 했다.
사랑채 대청
아, 그런데 사진을 보니 권오춘(權五春) 공은 나도 면식이 있는 분이다. 한학자 성백효(成百曉) 선생이 주석(主席)하여 저술과 강의를 하고 있는 서울 돈화문 앞 <해동경사연구소>(이사장 권오춘)가 내가 운영위원으로 있는 <동인문화원>(원장 이기동 박사)이 같은 건물(운현 信和타운빌딩), 같은 층에 입주해 있기 때문에 성백효 선생이나 권오춘 공은 자주 뵙기도 하였다. 특히 2014년 나는 성백효 선생의 역작『孟子集註 附 按說』출판기념회(인사동)에서도 만난 적이 있었다. 아, 여기가 그 훤출한 키에 늘 우아한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며, 특유의 ‘선비춤’을 추는 그 권오춘 공의 한옥이라니! 그리고 권오춘 공과 권 여사의 형제자매들은 우리 택손과는 한 마을에 살았던 절친의 이웃사촌이란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이렇게 이어지고 만나는구나, 새삼 경이로움을 느낀다. 누군가 이야기했듯이 '우리나라 사람은 몇 다리만 건너면 다 사돈에 팔촌'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
구담정사의 솟을 대문(안쪽)
대문 바깥까지 나와서 배웅하는 권 여사
☆… 우리는 밝은 햇살이 내리는 정원과 집안을 둘러보고, 사랑채 대청에 앉아 차를 마시고 환담(歡談)을 나누었다. 그렇게 한참을 머물다가 우리가 떠나올 때, 권 여사는 솟을대문 문밖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따뜻하다!
초은(招隱) 권오춘(權五春)
¶ 권오춘 님은 지금 북한강 서종리에 아름다운 한옥 '초은당(招隱堂)'을 지어서 산다. 학자와 예인들을 초청하여 공연과 강연회도 연다. 그는 초은당에서, 안동 고향의 구담정사(九潭精舍)와 자신의 이력에 관한 인터뷰를 했다.
“하회마을에서 자동차로 7분 정도 거리의 고향 안동 풍천면 구담리에도 400년 가까이 된 한옥 구담정사(九潭精舍)가 있습니다. 원래 광산 김씨 남한공 종택이었는데, 제가 지난 2000년에 이를 매수하여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복원시키고는 ‘九潭精舍’(구담정사)라고 이름을 붙였지요. 2007년에는 어머님 미수(米壽, 88세) 생신 잔치를 구담정사에서 하면서 국악인들을 초청하여「구담무담(九潭無譚)― 잃어버린 잔치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큰 잔치를 벌였는데, 영남 춤꾼 박경랑 님, 호남 춤꾼 김운태 님, 가야금산조 김무길 명인 등 국악계의 많은 명인들이 오셔서 잔치를 빛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명인들이 온다는 것을 알고, 안동 MBC에서도 창사특집으로 이 잔치를 방송하였지요. 이렇게 구담정사가 알려지면서 구담정사를 찾는 이들의 발길도 이어져, 아예 제 누이동생이 예약을 받아 한옥체험 행사도 하고 있습니다.”
¶ 권오춘(權五春) 님은 서울에서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과 <해동경사연구소> 이사장도 맡고 있다.
“우리의 전통 기록문화는 대부분 한문(漢文)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세대들은 한문을 몰라 전통문화와 단절이 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잘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문도 한글처럼 우리의 국어로 교육하고 써야 합니다. 한자는 원래 한족의 문자가 아니라 황하문명을 이룬 동이족의 문자이므로, 이 또한 우리의 국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우리의 국어와 고전문화를 공부하고 사용하여 전통문화를 계승하고자 <국어고전문화원>을 설립한 것이죠. 그러다가 <한국고전번역원>의 성백효(成佰曉) 교수를 만나 성 교수님과도 뜻이 통하여 같이 <해동경사연구소>를 설립하고 여기도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해동(海東)’은 우리나라를 말하고, ‘경사(經史)’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연구소에서는 경서와 사서를 연구 번역하는 사업을 벌이고, 동시에 이를 번역할 수 있는 번역자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청소년, 어린이들에게 전통 예절을 교육하고 전통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전통 문화를 현대에 접목시킨 의례준칙도 제정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저는 서당에서 천자문, 소학, 명심보감을 배울 정도로 한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기초가 되어 있었다고 하겠죠. 그러다가 제가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를 찾아 나설 때에 성백효(成百曉) 선생과 조순(趙淳) 박사님을 만나면서 제 공부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또 제가 한복, 한옥 등 우리 문화 지킴이로 알려지면서 강의 해달라는 곳도 많아졌는데, 그러다보니 더욱 더 공부를 안 할 수 없게 되었지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안동을 안내하면서 안동에 대해 공부를 하고, 나아가 안동이 낳은 성현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학문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게 되었죠. 이렇게 우리 문화에 대한 공부에 힘을 쏟다보니 술, 담배도 끊게 되고, 골프, 고스톱 같은 잡기(雜技)도 손을 놓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요즈음에는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오로지 고전 공부에 열중합니다.”
¶ 권오춘(權五春) 님은 운동을 할 때나 양복을 꼭 입지 않을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고 늘 한복(韓服)을 입고 다닌다. 기품이 있고, 선비의 멋이 깃들어 있다. 훤칠한 키에 어울리는 우아한 모습이다.
“제 고향이 전통과 유학의 고장 안동(安東) 아닙니까? 제가 또 안동 권(權) 씨 후손이구요. 그래서 평소에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도에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불교, 유교, 도교의 경전과 기독교의 신구약 성경 등을 들고 고향을 찾았습니다. 그리하여 집중적으로 고전을 읽으며 더욱 더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깨달았는데, 그러면서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항상 한복을 입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저도 그때부터 일상생활에서 늘 한복을 입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지요.”
“… 그리고 한복(韓服)을 입으면 이 한복과 살아온 조상들과 교감하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렇기에 한복을 입으면 나도 모르게 언행을 조심하게 됩니다. 특히 저는 안동 권씨 부정공파 35대 손으로서 한복을 입으면 더욱 더 조상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에 맞추어 행동을 하게 됩니다. … 요즈음에는 제가 한복 입고 다니는 것이 많이 알려져, 한복 패션쇼 하는 곳에서 저보고 모델로 서줄 수 없겠냐는 요청도 들어오더군요. 그리고 지금과 같은 국제화 시대에 한복(韓服)이야말로 오히려 우리가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우리 고유의 브랜드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광복절 행사와 같은 정부 공식행사에서 정부 요인들이 적극적으로 한복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통령도 외국을 방문할 때에는 우리 전통 한복을 입어 세계에 우리의 한복을 인식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권오춘(權五春)은 ‘춤꾼’이다. 우아하게 한복을 차려 입고 ‘선비춤’을 춘다. 창덕궁 소극장에서 공연도 했다.
“내가 어디 강의를 가더라도 사람들에게 우리 춤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으려면 내가 직접 춤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여 명인(名人) 박경랑 선생한데 ‘선비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춤을 추다보니 마음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옛날에 훌륭한 통치자가 되려면 예(禮)와 악(樂)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알겠더라고요. 지금은 거문고와 서예도 배우고 있습니다.”
¶ 권오춘(權五春)은, 젊을 때 잘 나가던 증권맨이었다. 45세 그만 둘 때까지 승승장구했다.
“처음 증권회사에 입사하여 참 열심히 일하였죠. 제가 삼보증권에서 일할 때, 그때는 아직 컴퓨터가 없던 시절인데, 금고 안에 원장(原帳)이 계좌번호 순서로 되어 있지 않고 뒤죽박죽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제 이를 한번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가, 어느 토요일에 혼자 남아 이를 정리하였습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있는데 저녁 10시 30분쯤에 지점장님이 우연히 사무실에 들렀다가 원장을 정리하고 있는 저를 발견한 것입니다. 지점장님은 젊은 직원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진하여 원장을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는 저에게 만원을 주고 가셨습니다. 당시 제 월급이 4만원 할 때였었죠. 이렇게 잘 보이니까 그 뒤로 지점장님은 저를 특진시켜주시고 가는 곳마다 저를 데려갔지요. 그래서 제가 30대에 중후반에 지점장을 할 수 있었구요.”
“제가 증권회사에서 어느 정도 이룰 것은 이루고 나니까 제 타고난 그릇에 이 정도인데,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다간 증권에서 못 벗어난다는 생각에 증권회사를 나온 것입니다. 거기에는 제가 안동 권씨 부정공파 35대 손으로, 사람들이 저보고 ‘안동양반’, ‘안동양반’ 하는데, 과연 제가 우리 문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생각해볼 때에, 제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자괴감도 작용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 문화가 근대화 과정에서 불과 4, 50년 만에 처절히 부서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뭔가 새로운 정신적 돌파구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인생 후반기를 우리 문화를 찾고 우리 문화 지킴이로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던 것입니다. 당시 제가 사표를 제출하니까 회사에서 사표를 받아주지 않아 내용증명으로 회사에 사표를 보내기까지 하였었죠.”
☞ [양승국 변호사 블로그] 산에서 만난 사람 ▶ [권오춘]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 (인터뷰)
☆… 오늘 아침, 풍산 수동(水洞)에서 출발하여 풍산읍 상리에 있는 ‘체화정’을 탐방하고, 안동 김씨 집성촌인 ‘소산리’와 안동 권씨 세거지인 ‘가일마을’을 탐방한 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하회마을 조감할 수 있는 광덕리 낙동강 '부용대'에 오르고, 부용대가 품고 있는 ‘옥연정사’, ‘겸암정사’ 그리고 ‘화천서원’을 찾아보았다. 이어 예천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한 후, 맑은 하늘 아래 풍천면 구담리 ‘구담정사’를 탐방했다. … 이제 낙동강 구담교 앞에서 본격적인 트레킹에 들어간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