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위로를 받았다. 1975년 오늘(1월 4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명의로 동아일보에 실린 의견 광고를 보고 그랬다. 수많은 '촛불'들의 등장을 예고하기라도 한 듯, 광고 제목은 '암흑 속의 횃불'. 그리고 부제를 읽는 순간에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행복하여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1975년 1월 4일자 동아일보 PDF
가히 혁명적인 사건, 군데군데 일렁이는 '오늘'
'언론史'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는 광고다.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광고탄압을 당하던 동아일보에 시민들의 격려광고를 쏟아지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이 광고로부터 비롯됐다. 동아투위가 2005년 펴낸 '자유언론'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의견광고는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비롯해 74년 7월부터 75년 1월 3일까지 열린 64차례의 인권회복기도회에서 발표된 결의문, 메시지, 선언문 등의 요지를 수록해 매우 충격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일단 봇물이 터지자 격려광고는 금세 홍수를 이루어 1월 10일 무렵부터는 지면 전체가 격려광고로 도배된 듯한 느낌마저 갖게 했다."
동아투위 출신 정연주 전 KBS 사장 역시 2002년 발행한 '서울-워싱턴-평양'을 통해 "동아일보를 목졸라 죽이기 위해 광고를 죄다 없애버렸는데, 광고가 사라져버린 유령 같은 그 하얀 공간이 민주주의의 꽃이 활짝 피는 축제의 광장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라며 "격려광고의 봇물을 터뜨린 결정적인 것은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전면광고였다"고 적고 있다.
또한 "그것은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고, "엄청난 뉴스가 격려광고의 모양으로 터져 나갔던 것"이라고 회고한다. 정말 그랬다. 그 엄혹한 시기에 한 면 가득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고 있었다. '과거'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원고지 75매 분량을 단숨에 읽어 내릴 수 있을 만큼, '오늘'이 군데군데 일렁이고 있었다.
1975년 동아투위 침묵시위 Photo 동아투위
"사실보도와 현실비판을 방해·억압하는 것이 암흑권세의 본질"
1974년 9월 11일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인권회복기도회에서 발표된 전국평신도 협의회 결의문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 자유의 의미를 "진실을 진실 그대로 보도함으로써 국민 스스로의 판단에 의하여 국민 모두가 자발적인 애국심을 국력 배양에 참여시킬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한다.
독재정권 언론관의 본질을 꿰뚫는 목소리도 발견할 수 있다. 같은 해 12월 30일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 '자유언론회복기도회'에서 안충석 신부는 동아일보 무더기 광고해약 사태와 관련, "사실보도와 현실비판을 방해·억압하는 그 목적인(目的因)이 암흑권세의 본질임을 우리는 경각해야 한다"고 못박는다. 2009년 오늘, '자본권세'에 언론을 내주려는 정권의 본질이 무엇임을 일깨우는 글이다.
'오늘'이 살아있는 글은 이 뿐만이 아니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제1차 시국선언, "정보정치라는 파렴치한 수단으로 반공전선에 전념하여야 할 정보기관을 동원하여 국민을 협박하고 그들의 개인생활을 침해하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 공포분위기와 불신 풍조를 조장하고 있다"는 마치 지금을 말하는 듯 하다. 이어지는 다음 글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정책의 빈곤은 양식 있고 실력 있는 지식인들의 해외도피를 결과적으로 방조하고 미래 지향적인 정책적 비전의 부재는 학생들을 비롯한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 보람찬 내일에의 희망과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는커녕 실의를 강요함으로써 퇴폐풍조를 부채질하고 있다...중략...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80년대에 번영과 풍요를 구가할 복지국가건설을 표방하는 정부의 경제제일주의는 계수경제의 마술로 국민을 기만하고 현혹시키고 있다."
작년 7월 1일 서울시청앞 광장 앞 정의구현전국사제단 Photo 오마이뉴스 권우성
박정희 정신 상태까지 운운...오늘도 유효한 '어제'의 전면광고
박정희의 정신 상태를 운운하는 대목도 있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기만과 공갈 그리고 조작적인 위협의 연속으로 한 해를 일관하여 누구도 원치 않는 파국의 와중으로 다가서고 있는 위정자의 정신건강 상태를 우리는 경악과 연민의 정으로 적시한다"며 "모두가 횃불을 높이 들어 암흑을 쫓고 을묘년을 광명전취(光明戰取)의 해로 기필코 만들어야 한다"는 '새해의 다짐'까지 공언하고 있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지학순 주교의 옥중 메시지에서는 '촛불'도 등장한다. 그는 "우리 모두 괴로움이 가득한 이 어두운 현실에서 촛불을 밝혀 들고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맡겨진 양떼들의 길을 비춰가자"고 역설하고 있다. 다음 대목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사랑은 유혹하는 사람에 대한 호감도 아니요, 위협하는 사람에 대한 맹종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헐벗고 버림받은 사람을 잊지 못하는 눈물이어야 하고 정직하고 두려움 없이 양심껏 말하다가 투옥되어 고통 중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저버리지 못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해도 마찬가지로 강한 사람에 대한 양보도 아니고 거짓이나 불의에 대한 침묵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화해는 진실과의 화해이어야 하고 독선에 반대하고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아량이어야 하며 화해는 전횡을 일삼아 온 억압에 찌들은 약자에게 먼저 청해와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사랑은 헐벗고 버림받은 사람을 잊지 못하는 눈물. 화해는 거짓이나 불의에 대한 침묵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어둠 속으로 다시 꺼져 들어가는 듯한 '오늘' 더욱 크게 와 닿았던 사랑과 화해의 정의였다. 그리고 '오늘'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그 방향을 1975년 '오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전면광고가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