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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52> 윤씨·파평윤씨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3-07-08 22:08:59 수정 : 2013-07-08 22:08:59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벼슬 이름에서 유래한 토착 성씨… 파평 윤씨가 80% 차지
한자로 다스릴윤(尹)을 쓰는 윤씨의 유래는 벼슬 이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추론하고 있다. 그것은 윤(尹)이라는 글자가 깍지낄 차(叉)와 삐침(사물)을 결합시킨 글자로 곧 ‘사물을 손아귀에 쥔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스릴윤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윤(尹)은 벼슬의 이름에서 유래한 성씨로 보인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종종 벼슬 이름에 윤(尹)이라는 글자가 붙었다.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윤씨 성의 유래는 조금씩 다르다. 가장 먼저 윤씨 성으로 보이는 이는 칠원윤씨의 시조로 태종무열왕의 태자태사(太子太師)였던 윤시영(尹始榮)이다. 그 외에도 ‘삼국사기’에는 윤빈이라는 사람이 있고, ‘삼국유사’에는 윤경(尹卿)이라는 이름도 나오지만, 후백제의 무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윤단·윤봉·윤전(尹全) 등의 이름이 보인다. 그런 것을 보면, 윤씨는 조씨같이 중국 쪽에서 건너온 성씨라기보다는 통일신라 이후 생성된 토착 성씨로 판단된다.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의 탄생신화가 서린 파주시 용연.‘조선씨족통보’ 등의 문헌에 따르면 윤씨의 본관은 149본이나 되는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현재는 파평(坡平) 해평(海平) 남원(南原) 칠원(漆原) 무송(茂松) 함안(咸安) 해남(海南) 해주(海州) 예천(醴泉) 야성(野城) 기계(杞溪) 양주(楊州) 현풍(玄風) 죽산(竹山) 고창(高敞) 평산(平山) 영천(永川) 여주(驪州) 신녕(新寧) 덕산(德山) 등 20여본이 있다.
하지만 해평·해남·무송·칠원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들도 모두 파평윤씨에서 분적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이들 가운데 남원윤씨·함안윤씨·야성윤씨·신녕윤씨 등이 파평윤씨와 합보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윤씨의 80%는 파평윤씨이거나 파평윤씨에서 분적된 가계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파평윤씨 외에는 칠원윤씨·해남윤씨·해평윤씨 등이 있다.
조선시대 윤씨는 민씨·조씨와 함께 왕비를 많이 낸 가문(모두 6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세조의 왕비로는 정희왕후(파평윤씨 윤번의 딸)가 있으며, 성종에게는 두 명의 왕비가 윤씨이기도 했다. 그중 하나는 윤호의 딸인 정현왕후(파평윤씨)가 있고, 연산군의 어머니였던 폐비 윤씨(함안윤씨 윤기견의 딸)도 있다. 그리고 중종의 왕비였던 장경왕후와 문정왕후도 모두 파평윤씨였다. 해평윤씨에서는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가 있다.
전체적으로 윤씨는 조선시대 592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다. 그중 상신 18명, 문형(文衡, 大提學) 6명, 왕비(폐비 1명 포함) 6명, 부마 7명, 봉군 7명을 배출하였다. 윤씨의 대표적 인물로는 윤관·윤증(尹拯)·윤봉길(이상 파평윤씨), 윤두서·윤선도(해남윤씨), 윤치호·윤보선(해평윤씨) 등이 있다.
현재 인구는 29만4708가구에 모두 94만8600명(2000년 국세조사)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김·이·박·최·정·강·조씨 다음으로 많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 전체 인구 구성비로 보면 약 2.1%가 되는 셈이다.
◆파평윤씨(坡平尹氏)는
파평윤씨의 본관인 파평(坡平)은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파평면이다. 파주는 본래 고구려 장수왕 때 파주사현이었는데, 조선 태조 때 서원군과 파평현을 병합하여 원평군이라 하였다. 1461년 파주목으로 승격(昇格)하였고, 1895년 군이 되었다.
파평윤씨의 시조는 윤신달(尹莘達)이다. 그는 고려 태조(왕건)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올랐다. ‘조선씨족통보’와 ‘용연보감’ 등의 문헌에 따르면, 윤신달은 파주 파평산 기슭에 있는 용연지라는 연못 가운데에 있던 옥함(玉函) 속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날 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과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을 윤(尹)으로 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기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벽상삼한익찬이등 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의 관작을 받아 후손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파평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윤신달의 5세손에는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윤관(尹瓘)이 있다. 그는 고려 선종 때 합문지후와 좌사낭중을 지내고, 여진정벌에 원수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출전, 함주와 영주 등 9지구에 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벼슬이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에 이르렀고, 7형제를 낳아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그래서 파평윤씨에서는 윤관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이렇게 윤신달과 윤관을 거치며 명문가의 반열에 올라선 파평윤씨 가문에서는 ‘잉어’를 먹지 않는 전통을 갖고 있다. 그것은 시조인 윤신달이 연못의 옥함에서 나왔을 때 81개의 비늘이 나 있었다는 것과 윤관이 적에게 쫓길 때 잉어의 도움으로 탈출했다는 전설 때문이다. 그래서 파평윤씨에서는 자신들이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파주(坡州)라는 명칭도 파평윤씨 가문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세조는 계유정난 이후 점차 시국이 안정됨에 따라, 정변 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세조비 파평윤씨(정희왕후)의 고향을 파평윤씨의 파(坡)자와 고을 주(州)자를 따서 파주(坡州)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할머니(태종비, 여흥민씨)의 고향인 여흥(驪興)을 여주(驪州)로 개칭하였다.
윤관의 7형제 아들은 다시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로 분파되었다. 현재 파평윤씨의 분파로는 함안파(咸安派) 남원파(南原派) 덕산군파(德山君派) 문정공파(文定公派) 신녕공파(新寧公派) 대언공파(代言公派) 봉록군파(奉祿君派) 판서공파(判書公派) 야성파(野城派) 전의공파(典儀公派) 소정공파(昭靖公派) 원평군파(原平君派) 소도공파(昭度公派) 판도공파(版圖公派) 소부공파(小府公派) 태위공파(太尉公派)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서 판도공파(版圖公派)와 소정공파(昭靖公派)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이 두 파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조선조에서 파평윤씨는 모두 1424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그중 문과가 340명, 무과 86명, 사마시 934명, 역과 41명, 의과 11명, 음양과 2명, 율과 10명 등이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모두 22만1477가구 총 71만39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파평윤씨의 연혁과 인물
파평윤씨는 조선시대 들어와 가문이 크게 번성하면서 명문세도가의 반열에 올랐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6명(함안윤씨였던 폐비윤씨도 합본했기 때문에 파평윤씨로 보아야 할 것이다)의 왕후를 배출했으며, 수많은 과거급제자와 고관대작들이 나왔다. 그중 중종 대에서는 파평윤씨에서 두 명의 왕비(장경왕후와 문정왕후)가 나와 한 가문에서 대윤과 소윤으로 갈려 싸우는 비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판도공파의 파조는 윤승례(尹承禮)인데, 그는 시조 윤신달의 13세손으로 윤척(尹陟)의 아들이다. 그는 공민왕 때 요승인 신돈(辛旽)의 살해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유배되었다가, 신돈이 주살된 후 풀려나 응양군 상호군(鷹楊軍 上護軍)이 되어 왜국의 침입을 막아냈다. 창왕 때는 권근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명나라의 명에 의해 공양왕을 즉위케 하고 판도판서를 역임했지만, 공양왕이 폐위되자 은거하였다.
윤승례의 아들이 세조의 장인인 윤번이고, 윤번의 딸이 정희왕후(세조 비)이다. 판도판서공파는 윤승례의 아들 대에서 제학공파(提學公派) 부윤공파(府尹公派) 정정공파(貞靖公派)로 갈라진다. 그중 정정공파에서 두 명의 왕비가 나와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싸움이 빚어졌다.
윤승례의 아들 윤번은 세조의 장인이고, 윤번의 맏아들인 윤사분(尹士昐)은 우의정, 둘째인 윤사균(尹士?)은 예조판서, 셋째인 윤사흔(尹士昕)이 우의정이 되어 형제간에 정승을 지냈으며 7∼8대에 걸쳐 국구부원군과 공신부원군, 정승 판서와 당상관들이 배출되어 조선시대 최고의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윤사분과 윤사흔 두 집안에서 각각 중종의 왕비(장경왕후, 문정왕후)가 배출되어 왕실 및 왕위계승을 놓고, 대윤과 소윤으로 갈라져 싸우는 비극이 일어났다.
윤사균의 손자인 윤여필(尹汝弼)의 딸이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이고, 그의 오빠가 윤임(尹任)이다. 장경왕후는 세자를 낳고 곧바로 죽었다. 장경왕후의 뒤를 이어 윤사균의 동생인 윤사흔의 증손 윤지임(尹之任)의 딸이 제2계비로 책봉되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되었다. 먼 친척뻘인 고모와 질녀가 같은 왕비가 된 것이다.
문정왕후는 아들 경원대군(慶源大君, 후에 명종)을 낳은 뒤로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을 끌어들여(소윤)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중심으로 한 일파(대윤)와 정치적 암투를 벌였다. 이를 대윤과 소윤의 싸움이라고 한다. 대윤과 소윤의 싸움은 문정왕후의 아들이 왕위(명종)를 계승함으로써 소윤의 승리로 끝났으나, 소윤 역시 문정왕후가 죽자 몰락하였다. 결국 대윤과 소윤의 싸움은 파평윤씨 판도공파의 몰락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파평윤씨의 판도공파가 몰락한 후 소정공파, 특히 장령공계(노성윤씨)가 번성했다. 소정공파는 윤승례의 형 윤승순(尹承順)의 아들인 윤곤(尹坤)의 후손이다. 윤곤은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손자 윤호(尹濠)는 성종의 장인으로서 딸이 성종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그 후 그는 돈령부영사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윤곤의 후손 중에는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윤필상(尹弼商)이 있다. 그는 문종 때 추장문과에 급제했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도승지로 왕명을 신속하게 처리하여 우참찬에 특진하였다. 성종 때 영의정에 오르고 부원군에 봉해졌으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폐위를 막지 못하였다는 죄로 진도에 유배되고 사약을 받았다.
그의 증손인 윤현(尹鉉)은 명종 때 호조판서를 지내고, 선조 때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돈령부영사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밖에 소정공파의 윤사로(尹師路)는 세종의 딸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하여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지고, 세조 즉위년 좌익공신에 책록되고 좌찬성, 중추부영사에 이르렀다.
소정공파는 판도공파가 몰락한 후에, 더욱 번성했다. 특히 이조판서를 역임한 윤강(尹絳)의 후손들에서 위세를 떨쳤다. 윤강은 윤지미(尹趾美) 윤지선(尹趾善) 윤지완(尹趾完) 윤지경(尹趾慶) 윤지인(尹趾仁) 등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중 특히 윤지선과 윤지완 형제는 형제 정승으로 유명하다. 윤지선은 현종 때 병조·이조와 공조판서를 거쳐, 숙종 때 우의정·좌의정에 올랐으며, 윤지완은 어영대장·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또한 소정공파에서는 숙종 때 호조참판을 지낸 윤비경(尹飛卿)의 후손 중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다. 윤비경의 손자인 윤봉구(尹鳳九) 윤봉오(尹鳳五) 윤봉조(尹鳳朝), 그리고 증손인 윤심형(尹心衡) 등이 유명하다. 윤봉구는 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숙종 때 집의(執義)·찬선(贊善) 등을 지내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윤봉오는 영조 때 대사헌·우참찬 등을 지냈으며, 윤봉조는 암행어사와 대사간 등을 지내고, 영조 때 부제학이 되고 대제학에 이르렀다. 또 윤심형은 영조 때 부제학·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53> 파평윤씨, 해남윤씨, 칠원윤씨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3-07-22 19:13:58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통일신라 이후 생겨난 토착성씨… 칠원윤씨 가장 오래돼
파평윤씨 근세 현대 인물과 연혁
파평윤씨 중에서 노성윤씨로 알려진 장령공계는 노성(魯城, 충남 논산)에 세거한 윤돈(尹暾)의 후손을 가리킨다. 이 가문은 학자 집안으로 유명하다. 윤돈의 손자 중에서 윤황(尹煌)과 그의 아우 윤전(尹?)이 유명하다. 또 윤황의 여덟 아들 중 윤순거(尹舜擧)·윤문거(尹文擧)·윤선거(尹宣擧)가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윤문거는 효종 때 동래부사를 지내고 경학·성리학·서예에 뛰어났고, 윤선거는 송시열 등과 교류하던 거유로서 예송을 둘러싼 대립에서 중립을 지켰다.
윤선거의 아들 윤증(尹拯)은 우계 성혼(成渾)의 사위이다. 숙종 때 대사헌·이조판서·우의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왕과의 배면(拜面)도 없이 상신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처음엔 송준길·송시열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당하자 송시열의 노론에 대항하여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그러한 그의 정치적 행동은 노·소분당과 당쟁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노론의 일방적인 정국 전횡을 견제하였다. 송시열이 숭명의리를 견지한 반면에 윤증은 대청 실리외교를 주장했다. 송시열에게 보낸 신유의서에서 실학적 경륜을 담아 스승(송시열)을 의리쌍행(義利雙行)이라 비판함으로써 노·소간의 격렬한 당쟁이 전개되고(懷尼是非·회니시비), 노론의 지배체제를 비판하는 근거가 되었다. 사후 홍주의 용계서원, 노성의 노강서원 등에 향사되었다. 윤증의 아들 윤행교(尹行敎)는 대사헌이 되었다.
이 밖에도 정승급 인물로는 윤인경(尹仁鏡)·윤동도(尹東度) 등이 있다. 윤인경은 각 조의 판서를 거쳐 인종 때 좌의정·영의정이 되고, 명종이 즉위하자 위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윤동도는 영조 때 대사간·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학자로는 윤정(尹鼎)·윤경남(尹景男)·윤낙(尹洛) 등이 유명하다.
근세 인물로는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등을 폭사시킨 윤봉길(尹奉吉) 의사와 시인이었던 윤동주(尹東柱), 상해임시정부 군무장이었던 윤기섭(尹琦燮) 등을 꼽을 수 있다.
매헌(梅軒) 윤봉길의 본래 이름은 윤우의(尹禹儀)이며, 봉길은 별명이다. 그는 윤승례(尹承禮)의 아들인 윤규(尹珪)를 파조로 하는 제학공파(提學公派)이다. 그의 선조는 충북 청원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증조부 때 당진군 덕산면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세 때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어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짓고, 월진회 등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일제치하 농촌계몽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1930). 청도와 상해 등을 전전한 그는 1931년에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 등 수많은 일본 전범들을 살해하였다. 그 후 체포되어 오사카 형무소로 이송된 뒤, 십자가 형틀에 매여 총살되었는데(1932년), 그의 나이 25세였다.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용정의 명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1년 연희전문(연세대 전신)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立敎)대학과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다녔다. 그러다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건강이 악화하여 1945년 2월에 생을 마쳤다.
그는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대해 심오한 고뇌를 그린 시인으로, 지금도 수많은 젊은이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시집은 하숙집 동료들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시집 형태로 발행한 것이다. 또한 그의 절정기 시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연희전문 졸업 때 발간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광복 후(1948년)에야 빛을 보았다.
윤기섭(尹琦燮)은 보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오산학교 교사, 신민회 활동을 하다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재직했으며, 상해임시정부 국무원 군무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민족유일당 창설 운동을 주도하여 민족혁명당 창설에 기여를 하였다. 광복 후 2대 국회의원에 피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59년 73세의 나이로 북한에서 순국하였으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그 외에도 파평윤씨 문중에서는 독립운동가로 이름난 윤준희(尹俊熙)와 윤창석(尹昌錫)·윤해(尹海)·윤애경(尹愛卿)·윤석구(尹錫求)·윤현진(尹顯振) 등이 있다.
또한 현대 인물로는 정계에서 윤석구(전 체신부 장관)·윤성순(전 교통부 장관)·윤호병(전 재무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윤택중(전 문교부 장관, 국회의원)·윤건중(전 농림부 장관)·윤천주(전 문교부 장관, 국회의원)·윤성민(전 국방장관), 윤길중·윤담, 윤명운·윤병구·윤영탁·윤인식·윤형남·윤제술·윤재근·윤재욱 등 국회의원과 윤운영(대법 판사)·윤태일(전 서울시장)·윤동석(전 원자력청장)·윤태호(전 충남지사) 등이 있다.
또 학계에서는 윤석중(아동문학가)·윤태림(전 숙명여대 총장)·윤인구(전 연세대, 부산대 총장)·윤해병(의학박사)·윤덕진(의학박사)·윤갑병(경희대 교수)·윤근식(성균관대 교수)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윤석민(대한선주㈜ 회장)·윤장섭(서울농약㈜ 회장) 등이 있으며, 연예인으로는 가수 윤도현씨가 있다.
해남윤씨는…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시조는 고려 중엽 때 인물인 윤존부(尹存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윤존부 이후 7세까지 세계가 실전되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8세손인 윤광전(尹光琠)에 이르러서야 자세한 세계가 전해오고 있다.
윤광전은 공민왕 때, 사온직장(司?直長) 영동정(令同正)을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자 해남으로 내려와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1354년(공민왕 3)의 노비상속문서(보물 483호)의 ‘지정십사년노비문권(至正十四年奴婢文券)’에서이다. 이것은 직장동정(直長同正)인 윤광전이 그의 둘째 아들 윤단학(尹丹鶴)에게 노비를 상속해 주는 증서이다.
이 문서에서도 윤광전은 이전부터 탐진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해남을 본관으로 쓴 것으로 윤광전 이후 12세손인 윤효정(尹孝貞)이 강진(康津)에서 해남으로 옮겨 거주하였고, 이때부터 해남을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파악된다.
어초은(漁樵隱) 윤효정은 당대 거부였던 정호장(鄭戶長)의 외동딸과 결혼해 정호장의 재산을 물려받고 일약 거부가 됐다고 한다. 그는 백성이 어려울 때 사재를 털어 구휼하고 죄인을 방면하는 등 선행을 베풀어 ‘적선지가(積善之家)’라는 칭송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해남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그 윤효정이 바로 송강 정철과 함께 조선시대 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고조부가 된다. 지금도 해남윤씨 집성촌인 해남군 연동리 마을의 70여 호는 윤효정의 후예들이다.
윤효정의 아들 윤구는 중종 때 홍문관부교리를 지내고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윤구의 아들 윤의중은 벼슬이 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는 해남윤씨를 중앙 무대에서 명가의 반열에 들게 한 인물이다.
고산 윤선도는 윤의중의 손자다. 고산은 광해군 4년에 처음 관직에 나아간다. 그의 일생은 짧은 벼슬살이와 긴 유배 그리고 귀향·은둔의 연속이었다. 고산은 그보다 50년을 앞서 살았던 정철과 함께 ‘우리 문학의 쌍벽’을 이룬다. 현재 전해지는 그의 시조는 75수에 이른다.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이 그것이다. 고산은 병자호란 뒤 은둔지로 택한 보길도 앞바다를 막아 농토를 만들고 가난한 백성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다.
고산의 증손 윤두서는 숙종 때 극사실주의 화가로 유명하며 심사정·정선과 함께 3재로 일컬어졌다. 그의 자화상은 국보 240호로이며, 그 외의 그림은 모두 보물 481호로 지정됐다.
현대 인물은 정관계와 법조계에 윤관(전 대법원장)·윤근환(전 농림부 장관)·윤일영(전 대법관), 윤영선·윤재명·윤만석(이상, 전 국회의원), 윤철하(변호사)·윤전·윤재식(전 부장판사, 변호사) 등이 있으며, 재계에는 윤태현(전 크라운제과 사장)·윤근환(전 농협중앙회장)·윤철(전 한국포장공사 회장)·윤순복(전 삼성제약 사장)·윤규옥(성모병원장) 등이 있고, 학계에는 윤상현(전남대 교수)·윤내현(단국대 교수)·윤훈현(고려대 교수)·윤재걸(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시인)·윤주경(전남대 교수)·윤중호(연세대 교수) 등이 있다.
해남윤씨는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총 1만7366가구에 5만56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칠원윤씨는…
경남 함안군 칠원면을 본관으로 하는 칠원윤씨(漆原尹氏)의 시조는 윤시영(尹始榮)이다. 칠원윤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윤(尹)씨이다. 시조인 윤시영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태사공으로 고명원로 대신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윤시영의 아들인 윤황(尹璜) 이후에 대한 기록이 실전되어 알 길이 없다.
그 후 후손인 윤거부(尹鉅富)가 고려 초에 보윤호장으로 나타나 있어 윤거부를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칠원윤씨가 중앙 정계에 이름은 낸 것은 윤거부의 16세손인 윤수(尹秀)이다.
그는 원종 때 장군으로, 원종의 세자 충렬왕과 함께 귀국하여 대장군에 올랐다. 그는 충렬왕조에서의 군부판서를 지냈다. 그의 아들 대에서 윤길손(尹吉孫)의 전서공파, 윤길보(尹吉甫)의 충의공파, 그리고 윤계유(尹繼柔)의 대장군공파가 나뉘었다. 현재는 전서공파는 후손이 없고, 충의공파에서 나뉜 5개파(충효공파, 대언공파, 칠성군파, 사윤공파, 부원군파)와 대장군공파가 있다.
윤수의 아들 윤길보는 삼중대광 첨의찬성사를 역임하였고, 귀성군에 봉해졌다. 고려 공민왕 때 재상을 지낸 윤환(尹桓)은 윤수의 손자다. 그는 충숙왕 복위 때 일어난 옥사로 원나라로 탈출했으나 충혜왕이 복위하면서 벼슬자리에 복귀한다. 무왕 때까지 다섯 왕을 섬기고 세 차례 재상을 지냈다. 고향 칠원에 큰 기근이 났을 때 가재를 털어 빈민을 구제했다.
정경공 윤저(尹抵)는 조선이 개국 되자 상장군에 이르렀으며,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태종)을 도와 좌명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찬성사에 올라 칠원군에 봉해졌다. 윤석보(尹碩輔)는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에 뽑혔다. 관찰사, 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현령인 윤이(尹伊)의 아들 윤탁연(尹卓然)은 명종 때 춘추관 기사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관여하였다. 그는 형조와 이조판서를 거쳐 광국삼등공신으로 칠원군에 봉해졌으며, 시문에 뛰어났다. 이외에도 한성부 판윤·좌찬성을 거쳐 숭록대부에 오른 윤사국(尹師國), 효자로 향민의 칭송을 받은 윤형은(尹衡殷), 윤치민(尹致珉) 등이 해남윤씨 인물들이다.
현대의 유명한 인물로는 작곡가 윤이상씨와 조류학자 윤무부씨가 있다. 그 외 정관계와 법조계에서는 윤병한·윤종수·윤석순·윤영 전 국회의원과 윤상현 의원(현)이 있으며, 윤창원(전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장)·윤영학(인천지청장, 변호사)·윤우정·윤병각(부장판사, 변호사)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윤병철(전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 하나은행장)·윤원기(전 대한통운 사장)·윤행순(전 한전부사장, 한국남동발전 사장)·윤광순(전 한국투자신탁 사장)·윤윤수(휠라코리아 사장) 등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윤영연(동덕여대 부총장)·윤형원(충남대 총장)·윤병기(부산대법대 학장)·윤성아(싱가포르대학, 고려대 교수)·윤건수(포항공대 교수) 등이 있다.
현재 칠원윤씨는 파평윤씨·해남윤씨에 이어 3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의 조사에 의하면, 총 1만6829가구에 5만426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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