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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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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첫 원형로터리인 서면교차로는 지하철이 들어서면서 부산의 상징이었던 부산탑이 철거된 후 과거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부산의 교통 중심지로 남아있다. 사진은 부산탑이 있었던 1960년대 서면로터리 전경(왼쪽)과 현재 서면교차로 일대.
국제신문DB
'서면(西面)'하면 지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는 지명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서면이란 지명은 국토지리원이나 공공기관 어디에서도 공식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한, 지명 아닌 지명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서면이란 지명에 대한 유래도 모른 채 그냥 부른다. 서면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인 동래부(군)에 속한 7개 읍·면 중 하나로 '동래읍의 서쪽에 위치한 면'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1740년에 편찬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보면, 동래부 서면은 9개리 (현 온천동·사직동·거제동·초읍동·양정동·연지동·전포동·부전동·만덕동)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동평면(현 당감동·동평동·부암동·개금동·가야동)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행정구역이 되었다. 오늘날 부산진구의 중심이 되는 부전동 일대는 동래부(군) 서면의 면소재지가 있었던 곳이다. 지금도 공식적인 행정지명인 부전동이라 하지 않고 여전히 '서면'이라는 보통명사로 불린다.
■서면과 부산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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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로터리 부산탑 동판. |
1920년대까지만 해도 면소재지가 있었던 부전천 부근은 자갈밭과 논이었고, 지금의 서면로터리 일대는 딸기밭이었다. 주변에는 면사무소, 경찰서, 서면공립보통학교(성지초등 전신)와 몇 채의 농가가 있었고 대부분 파밭이었다. 1915년 11월 부산우체국~서면∼동래온천장 입구를 오가는 전차 운행으로 교통이 편리해졌고, 1923년 4월 부산제2공립상업학교(옛 부산상고)가 영주동에서 이곳(현 롯데백화점 자리)으로 이전해 오면서 사실상 '서면시대'가 시작되었다.
1936년 4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래군 서면이 부산부로 편입되어 부산진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이후 1938년부터 4년간 구획정리 사업으로 5개의 방사선도로가 신설되는 등 한적한 농촌에서 근대도시의 기반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주변에는 군수공장과 정미, 고무, 섬유, 기계공장 등이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이후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귀환동포와 피난민의 유입으로 서면일대가 상업,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1957년에는 그 중심에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원형 로타리인 '서면로터리'가 조성되었다.
1957년은 부산이 처음으로 6개구(중·서·동·영도·부산진·동래구)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구제(區制)를 실시한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1963년 1월 1일에는 부산시가 정부 직할시 승격이 확정(법률 제1173호, 1962년 11월 21일 공포)되었다. 이를 기념해 1962년 12월 1일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기념식에는 박정희 최고회의장을 비롯한 정부요인, 재부기관장, 부산상공인과 시민 2만여 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부산상공회의소에서는 직할시 승격을 기념하여 부산의 위상을 드높이고 시민들의 자긍심을 고취한다는 취지로, 서면로터리에 부산탑 건립을 1962년 12월 25일 기공하여 1963년 12월 14일 준공하였다. 당시 준공식에는 김현옥 부산시장, 강석진 부산상공회소회장을 비롯한 부산상공인, 각계각층의 주요인사와 수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부산탑의 전체 높이가 23m에 동상높이 4.2m인 부산의 상징탑이 탄생하게 되었다. 부산탑의 초석에는 다음과 같은 건립문이 새겨졌다. '이 탑은 넓은 바다와 맑은 하늘의 복과 덕을 입어 자유와 평화에의 굳은 신념으로 새로이 출발한 직할시 부산의 영원한 번영과 자손만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온 시민의 정성으로 모아진 것이다'.
서면로터리 한 가운데 우뚝 선 부산의 상징 부산탑은 위쪽에 부산이라는 머리글자를 상징하는 'ㅂ'자 모양을 형상화하였고, 그 'ㅂ'자 상부에는 '오륙도 형상'을 가로로 본떠 넣었다. 부산탑 중앙에 위치한 자유의 횃불을 든 '남녀 청동상'은 부산의 영원한 번영과 부산사람의 발전을 기원하는 시민정신을 모두 담았다고 한다. 부산탑 중앙에 정의와 전진의 횃불을 높이 치켜든 청춘 남녀의 청동상은 조각가 박칠성 씨의 작품이다.
현재 부산시민들 중 20대와 30대는 서면을 단순히 지명으로 알고 있지만, 40대 이후 세대에게는 부산의 상징이었던 회전형 서면로터리와 그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부산탑 아래로 나 있는 전차 선로를 따라 전차가 통과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지금은 서면로터리가 회전식으로 돌아가는 형태가 아니라, 신호를 받아서 가고자 하는 행선지로 방향을 잡는 '교차로'이다. 하지만 1981년 부산지하철 공사로 철거되기 이전까지 만해도 널찍한 화단을 뱅글뱅글 돌아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로 가야하는 신호등 없는 '로터리'였다.
■'서면로터리'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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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구청 입구에 설치된 부산탑 축소모형. |
그렇다면 회전식 서면로터리에 대한 에피소드는 어떤 것이 있을까? '난생 처음 부산을 찾는 객지 사람들은 서면로터리의 부산탑을 보고, 비로소 말로만 듣던 부산의 중심 서면에 왔다는 것을 알았고, 고향에 돌아가서는 서면로터리에 우뚝 솟은 부산탑을 보고 왔다고 자랑을 늘어놓곤 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서면로터리가 워낙 유명해서 외지에서 구경을 올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또한 '촌에서 올라온 자가용이나, 초보 운전자들은 서면로터리를 빠져 나오지 못해 차를 몰고 한나절을 뱅글뱅글 돌다가 결국엔 어지러워서 쫙 뻗었다'고 하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 당시 '부산시내에서 운전하는 사람이면 서면로터리에서 빠져나와 제 갈 길을 찾아갈 정도가 되어야 운전을 잘하는 것으로 서로 자랑이라도 하듯이 얘기를 나누었다'고 하는 조금은 과장된 이야기도 전해진다.
회전식 서면로터리는 5개 방향의 방사선도로 연결되어 있어 운전 미숙으로 인해 크고 작은 접촉사고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고 발생 시 중앙로와 가야로 일대에 연쇄적으로 정체가 일어나게 되자, 부산진경찰서에서는 교통량이 많은 시간대에는 3∼4명의 교통경찰을 배치하여 교통정리에 진땀을 흘렸을 정도로 혼잡했다고 한다.
당시 부산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서면이라는 곳이 어느 정도인지 풍속도를 살펴볼 수가 있다. "오늘 어데가노?" "와! 니가 알아서 뭐할낀데?" "내가 좀 알믄 안되나" "칭구 만나러 간다, 됐나" "어데서 만날낀데?", "서면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이가" 한 친구가 가만히 듣다가 "서면이라?, 야! 일마야 그라믄 그냥 일라 '서면' 되겠네"라고 했다는 우스개 소리의 대화 속에 '서면'이 부산 사람들에게는 친근감 있게 다가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시민과 함께 울고 웃던 부산의 상징 '서면로터리 부산탑'은 1980년 부산 지하철시대 서막과 함께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부산은 서울에 이어 1980년 10월 20일 대망의 부산지하철 1호선 건설 기공식이 서면로터리에서 대역사의 첫 삽을 뜨게 된 것이다. 그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서면로터리 주변에는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길가던 행인들은 발걸음을 멈추었고, 가게를 하는 사람들은 가게 밖으로 목을 빼고 내밀었을 정도였다니 부산교통 변천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시민뿐만 아니라, 당시 손제식 부산시장과 각급 기관장을 비롯한 '내가 낸데' 기침깨나 하는 부산 사람들은 다 모였을 정도였다. 언론도 앞다퉈 부산 지하철시대의 서막을 대서특필 했다고 한다.
■지하철 시대의 변화상
부산의 지하철시대 서막은 당시 부산의 가장 큰 현안이었던 교통 체증 해소를 위한 것이었다. 출·퇴근시간만 되면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중앙로의 교통체증은 지하철만이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줄 묘책이라고 관계자들은 파악하고 있었다. 지하철 건설 기공식 이후 서면로터리를 중심으로 이쪽 저쪽 땅파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정상 더 이상은 서면로터리 공사를 미룰 수가 없었다. 당시 부산지하철 기획단장을 맡았던 임원재 씨, 계획계장 조창국 씨, 설계계장 이재오 씨는 다음과 같이 기억을 더듬었다.
"기공식이 있고, 열 달쯤 흐른 1981년 초가을 특명이 떨어졌습니다. 서면로터리의 부산 상징탑을 들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산지하철 1호선 터파기 공사를 위해 내려진 지상과제였지요. 부산 상징탑을 없애는 것이야 한 시간도 안 걸릴 간단하고 손쉬운 일일 터이지만, 문제는 시민의 정서였습니다. 아무리 지하철 공사가 현안과제라고는 하나 그야말로 부산을 상징하는 탑이니 이를 깨부순다면 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할지가 문제였고, 두 눈 부릅뜨고 이를 감시할 언론의 눈도 피해갈 수 없을 터였습니다. 그러니, 쉽게 부산탑에 손을 대기가 어려웠습니다.……(중략) 몇날 며칠을 잔디밭에 앉아 고민을 했습니다. 건설과, 총무과, 문화공보실 등 혹시 모를 언론보도를 걱정해 협조요청을 해봤지만, 모두 알아서 하라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일단 기록을 남겨야겠다 싶어 사진을 찍어놓고, 일을 내기로 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크레인을 가져와서 아주 큰 추를 달았습니다. 그리곤 한방에 주저앉혔지요. 누가 볼까봐 10분도 안돼 재빨리 현장을 치웠습니다. '건설쟁이'들은 삭막하다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날 현장에 있었던 우리 건설 직원들도 가슴이 짠했습니다." (다이내믹 부산 2011년 11월 2일자 발췌)
당시 부산탑 철거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전하여진다. 부산의 상징, 부산탑을 주저앉히는 데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서면로터리 부산탑은 1981년 초가을 쓸쓸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기억 속에서 남게 되었다.
■시민의 추억, 부산탑
부산 시민들의 기억 속에서 한동안 사라져 있었던 서면로터리 부산탑에 대해, 부산의 한 원로 기업인 협성해운 왕상은(89·부산주재 영국명예총영사) 회장이 지하철공사 때 사라진 '서면로터리 부산탑 동판'을 찾는다는 사연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의 관심이 모아지게 되었다. 이후 서면로터리 부산탑 동판은 부산박물관 지하창고에서 가로 61㎝, 세로 91㎝, 두께 14.2㎝ 크기의 대리석 재질 비석으로 발견되었다. 이 비석이 빛을 보게 된 사연은 이렇다. 왕 회장은 2006년 봄부터 동판 하나를 찾기 시작했다. 60년을 기업인으로 살아온 왕 회장은 외환위기 이후 기업인들이 '경제 위기의 주범' '비리·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되는 현실을 안타까웠다고 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서면로터리 부산탑 중앙 부분에 있던 횃불을 높이 든 남녀 청동상은 부산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좌대 위에 재건되어 놓였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기념상은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과 매연, 먼지를 맞으며 야외에 놓여져 있었는데 청동에 녹이 피어 아름다운 빛은 간 곳 없고 푸른빛 녹으로 변질되어 있다가 최근 새롭게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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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부산시민의 곁을 홀연히 사라져버려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던 기억 속의 서면로터리 부산탑은 영광도서 앞 도로에서 만날 수 있다. 서면로터리 부산탑의 2세인 양 작아진 모습으로 떡하니 말이다. 그때 그 시절의 추억들을 되새기는 듯, 오고 가는 시민들은 카메라에 한 컷을 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가슴 찡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이 밖에도 서면로터리 부산탑은 부전지하상가 휴게 공간과 부산진구청 입구에 축소 모형이 세워져 있어 옛 영광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한다.
표용수 부산시청 시사편찬연구실 연구위원
※ 공동기획: 부산진구,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