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일간의 조국순례기 (28) 보령 하부내포 성지에서
바보들의 거룩한 발자취
나는 웅천읍에 도착해 하룻밤을 지낸 후 아침에 식당을 찾아나섰다. 해장국집이 보여 들어갔다. 주일 이른시간이라 손님은 없고 서울에 살다 시골생활이 그리워 딸네 집이 있는 이곳에 식당을 차렸다는 초로의 할머니가 반갑게 맞이한다. 내 말씨가 서울말이라며 계속 내 옆에 앉아 서울살던 이야기를 꺼낸다. 시골생활에 외로웠던 모양이다. 아닌게 아니라 할머니는 주위에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없어 답답하다고 했다. 내가 성당에 다니면 친구도 사귈 수 있을 것 아니냐고 했더니 주일은 자리를 비울 수없다고 한다. 하긴 아무리 시골생활이 좋아도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면 외로울 것 같았다. 나는 초면 여인의 수다를 들으면서 이것도 시골에 아직 정이 남아있다는 증거로 생각했다. 식당을 나서는데 할머니가 큰길까지 따라오면서 내가 물어 본 하수종말 처리장 방향을 가리키며 안내해 준다. 식당 누렁이가 계속 따라오다 자기 구역을 벗어났는지 쏜살같이 되돌아간다.
집결장소인 웅천 하수종말 처리장에 신자들이 모여든다. 나는 유흥식 주교와 행사책임자 윤종관 신부에게 인사했더니 이미 알고 계셨다. 윤 주교는 나의 미국생활에 관심을 갖고 여러가지 물어보았다. 출발시간이 되자 5백여 신자들이 충청남도 각 지역에서 모였다. 이날 목적지는 지난 해 축성된 하부내포 성지로 이곳에서 10킬로 거리이다. 충청남도 아산만 일대와 공주, 부여, 논산, 서천 지역을 아우르는 내포지방은 한국 교회사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1784년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운 예산 출신 이존창(루드비꼬)이 입교한 뒤 충청도 일대에 이를 전하면서부터이다. 신해박해 때 투옥되었다 잠시 배교해 석방된 이존창은 이후 마음을 굳게먹고 사방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면서 신앙을 지켰다. 그 결과 내포지역은 천주교 중심지로 신앙의 못자리가 되었으며 이존창은 '내포의 사도'라 불리우게 된다. 그는 신유박해인 1801년 4월 공주에서 순교했다. 대전교구에서는 당진 여사울의 이존창 생가터를 성지로 크게 개발해 놓았는데 안타깝게 이번 시복되는 124위 명단에는 없다. 한번 배교했던 때문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렇게 따지면 베드로 사도도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던가. 다행히 한국교회에서 또다른 순교자들의 시복청원을 위해 준비하는 중이라니 다음차례를 기대해야 할 것같다. 또한 내포 지방은 1791년 박해부터 백년 간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박해기간 조선에서 활동하던 성직자들도 대부분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활동지역을 넓혀갔다. 특히 이 지역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사방에 흩어짐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국에 널리 확산될 수있었다.
이날 순례하는 하부내포 서짓골은 병인년인 1866년 3월 30일 보령 갈매못 해변에서 참수당한 제 5대 조선교구장 안토니오 다블뤼(한국명 安敦伊) 주교와, 閔 루가 위앵 신부, 吳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 평신도 장주기 요셉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곳이다. 이들은 1984년 교종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들이 순교한 후 서짓골에 숨어살던 신자 이화만 바오로 등이 시신을 거두어 갈매못에서 낡은 삯배를 이용해 완장포구까지 운반한 후 산길을 넘는 12일 간의 은밀한 운송 끝에 서짓골에 안장했다. 웅천 하수종말처리장 일대가 옛날 완장포구 자리다. 따라서 이날 순례는 신자들이 산길을 넘어 무덤까지 시신을 운반한 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특히 이날은 이분들의 순교기념일이다. 대전교구는 지난 해부터 매년 이날 도보순례를 실시하기로 했다. 순교자들은 16년이나 비밀리에 서짓골에 묻혀있다 박해가 끝난 1882년 교회에서 유해를 수습해 현재는 서울 절두산에 모셔져 있다. 그러나 서짓골 무덤 자리는 성인들의 육신이 진토되어 있는 곳으로 의미가 있다. 또 이들을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운반한 이화만과 그의 아들 그리고 몇몇 신자들은 그해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했는데 시체는 어디에 버려졌는지 찾을 수없었다.
유흥식 주교의 축복기도로 시작된 도보순례는 유 주교를 선두로 긴 대열을 이루었다. 차도에는 경찰이 순례자들을 보호했다. 호젓한 시골길에 접어들자 사방에 꽃들이 만발했다. 순례자들은 개천을 가로지른 보 위를 징검다리 건느듯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순례단에 노인이 많아 일행이 모두 산길을 넘어 성지에 도착하기까지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보령시는 성지조성을 관광산업과 연계해 대지확보와 공원조성을 지원했다고 한다. 이날 행사는 점심식사 후 주일미사로 오후 5시 경 끝났는데 나는 미국에서 순례 온 신자로 소개되어 이목을 끌었다. 성지 전담 윤종관 신부는 강론에서 하부내포 성지의 의미를 설명하고 아무런 개인적 관계도 없는 머나먼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프랑스 신부들과 신앙의 신념을 순교로 보여준 선조들의 순교정신을 현세생활에서 실천하자고 강조했다. 유흥식 주교는 이날 교종 방한에 얽힌 뒷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했다. 교종이 대륙별 청소년 대회에 참석하는 것과 바티칸 밖에서 시복식을 거행하는 것도 처음이라고 한다. 특히 교종이 한 국가를 위해 아시아를 방문하는 것도 역시 처음이라고 한다. 이러한 교종 방한이 성사된 것은 무엇보다 이태리에서 공부해 바티칸에 인맥이 넓은 유 주교가 이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감동적인 초청서한을 보낸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대전교구는 요즘 아시아 청소년 대회와 교종의 해미와 솔뫼 성지 방문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날 만난 유 주교는 아직까지 젊음이 넘치고 겸손하면서도 다정한 목자의 모습으로 무척 믿음직스러웠다.
한국 천주교는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다른 나라들과 달리 우리나라는 평신도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가톨릭이 처음 동양에 소개된 것은 1534년 창설된 예수회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1541년 인도에 도착해 복음을 전파한 후 1549년에는 일본 카고시마에 상륙해 천주교회를 세웠다. 사베리오는 중국 선교를 위해 건너갔으나 그곳에서 병사해 당시에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예수회원들이 뒤를 이어 1559년 신학교를 세우고 1605년에는 지금의 일본신자보다도 많은 75만 신자가 생겼다. 한편 중국에는 명나라 신종 때인 1601년 마태오 릿치 신부가 북경에 교회를 설립한 후 서광계, 이지조 같은 유력한 대감들을 포함한 많은 신자들이 생겨났다. 그 무렵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전후 북경에 사신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에 의해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천주교 교리 해설서가 전해져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문으로 쓰여진 천주실의는 처음 학자들 사이에 학문적 호기심으로 읽혀졌으나 차츰 종교적 신앙심으로 발전하여 이를 생활에서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영조 34년(1758년) 임금이 황해도와 강원도 관찰사에게 그 지방에 천주학(서학)이 유행하여 제사를 폐하는 사람이 많으니 이를 엄금하라고 명했다. 이보다 앞선 숙종 12년(1686년)에도 천주학 성행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얼마나 천주학이 성행했는지 알 수있다. 이는 우리나라 천주교의 출발점으로 삼는 1784년 이승훈의 영세는 물론 주문모 신부 입국보다 백년이상 앞선 일이다. 당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실천했던 사람으로는 이수광(1563-1627), 허균(1569-1618) 등이 있다. 홍길동의 저자 허균은 1610년 북경에서 천주교 12단을 가져와 이를 실천한 신자이다. 이밖에 실학자 이익(1682-1763)과 제자 안정복(1712-1791)과 홍유한(1725-1785) 등도 서학 신봉자였다. 특히 홍유한은 천주실의와 칠극 등으로 교리를 배운 후 1757년부터 혼자 계명을 지키며 수덕생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달력과 축일표, 기도서도 없지만 7일마다 주일이 온다는 것을 알고 날짜를 따져 경건하게 지냈으며 금육일을 몰라 언제나 좋은 음식은 먹지 않았다. 그는 충남 예산에서 18년, 경북 영주에서 10년 죽을 때까지 28년동안 이런 생활을 계속했다. 그의 후손 가운데 순교자가 7명이나 된다. 그의 묘는 경북 봉화군 우곡(愚谷)리에 있다. 우곡은 어리석은 골짜기라는 뜻이다. 장래가 탄탄하게 보장된 그가 천주학을 받아들여 스스로 극기생활로 평생 살았으니 세속의 눈으로 보면 여지없이 바보요, 어리석은 사람이다. 따라서 어리석은 골짜기에 묻히는 것도 당연하다. 현재 천주교 안동교구는 그의 묘를 성지로 조성하여 선구자적인 그의 신앙을 본받게 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에 교회가 세워지기 훨씬 전 스스로 깨우친 신자들이다.
우리 선조들은 비록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후일 폐지했지만 스스로 가성직제도를 만들어 가톨릭 교회를 자처할만큼 평신도들의 자주적 노력으로 교회를 세웠다. 특히 수 천년동안 불교와 유교가 든든하게 자리잡고 있는 조선에서 외래종교인 그리스도교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사회적으로 대변혁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외국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도 다른 나라와 달리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우리나라의 만 명 가까운 순교자 가운데 103명 성인이 있고 이번에 다시 124명이 성인의 전단계라 할 수 있는 복자품에 오른다. 이 가운데 외국 선교사는 성인 10명과 복자 1명 뿐이다. 또한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도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순교자들이 많은 것은 선교사들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평신도 스스로 신앙의 신념을 목숨으로 증거한 것이다. 이날 순례한 하부내포 성지도 평신도의 노력으로 조선에 입국해 목숨을 바친 분들과 그분들을 뒷바침했던 분의 유해가 진토된 곳이다. 이분들에 대한 이야기는 갈매못을 순례할 때 다시 살펴볼 것이다. 아뭏든 당시 선진국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알지도 못할 이역만리 조선에서 목이 잘린 이들은 과연 어리석은 자들일까. 나는 우연찮게 이날 순례에 동행했지만 기왕 충청도에 들어 온 이상 이곳의 많은 어리석은 바보들의 거룩한 발자취를 찾아보겠다고 다짐했다. 충청도는 한국에서 가장 성지가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순례를 마친 나는 대전행 버스에 올라탔다.
(2014.6.27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