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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3.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 없애주신 죄를 다시 만들어내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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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없애주신 죄를 다시 만들어내는?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제 새해맞이 공동 휴식을 한 뒤 형제들과 긴 대화를 나누다가
죄에 관한 얘기까지 대화가 풍성해졌습니다.
이때 저는 우리 교회가 너무 죄 얘기를 많이 한다고,
이 죄 저 죄, 죄가 너무 많다고 다소 비판적으로 얘기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무 많은 율법 조항으로 죄가 많게 만든 유대교를 비판하시고,
계명을 사랑의 계명으로 단순하셨고 오늘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듯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신데 우리 교회는 다시 죄를 많이 만들고는,
주님을 그 많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요 자비하신 분으로 만들었다고,
어떻게 보면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만들려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었다고
일부 신학자들은 교회를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였지요.
사실 죄가 너무 많습니다.
사는 것이 죄다 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주시는 분이시고,
사랑하지 않는 것만이 죄라며 죄를 단순화하시고,
그럼으로써 죄를 적게 만드셨습니다.
요한의 서간도 같은 맥락으로 얘기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최초에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가 이것이었습니다.
하지 말라는 짓을 한 것이 1차적인 죄이었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숨은 두 번째 죄가 더 큰 죄였습니다.
명을 한 번 어긴 것보다 관계가 끊긴 것이 더 큰 죄이지요.
아무리 엄한 명령일지라도 그 명령을 한 번 어긴 것보다
그로 인해 부모와 단절한 것이 더 큰 죄인 것과 같습니다.
한번 상상해봅니다.
죄를 짓고도 하느님을 피해 숨지 않았다면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쫓겨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피해 그늘로 숨은 것 자체가 어둠이고 지옥이며
하느님께서 추방하신 것이 아니라 셀프 낙원 추방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쨌거나 주님께서 제일 중요한 계명이 사랑이라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셨으니 제일 큰 죄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것,
하느님 안에 머물지 않는 것,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있는 것 등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이고,
하느님 사랑의 은총 안에 있지 않고 자기 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계속 우리 죄를 없애주시는데
우리는 자꾸 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자꾸 자기 죄 안에 머무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내가 자주 하고 자꾸 하는 짓은 무엇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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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어제 <복음>이 세례자 요한의 신원과 사명에 대한 말씀이었다면,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한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말해줍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예수님의 언어인 아람어로 ‘양’(탈리야)은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곧 ‘유월절의 어린 양’과 ‘주님의 종인 어린 양’입니다.
<첫째>로, ‘어린 양’(하말), ‘새끼 양’, ‘아기’(아들)을 의미하는데, ‘지고 가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곧 나무, 과일 또는 임신한 여인이 아이를 ‘지고 간다.’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시 ‘양’은 물건을 실어 나르는 동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어린 양’이란 ‘속죄양’으로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해방절’ 양을 상징합니다(출애 12,1-13).
<둘째>로, ‘어린 양’이란 ‘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라고 하듯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는 ‘종’인 메시아를 상징합니다(이사야 53장).
그러니 ‘어린 양’이란 표징에는 인류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고 있으며, 동시에 세상의 죄를 없애고 하느님과의 화해를 가져오는 메시아로 증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체험한 환시를 통해, 보고 들은 바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 1,33)
성령께서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신 것은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그에게 돌아와 새 시대를 알렸듯이, 이제 예수님에게서 구원이 시작됨을 알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어린 양의 흰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분께서 성령을 통하여 입이신 옷입니다. 속죄양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없애시고 깨끗이 빨아 입히신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어린 양’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은 대속으로 자신을 내어놓기에 억울함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오히려 ‘봉헌’이기에 지향이 있는 삶이요, 향하여 바치는 삶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진정 내 삶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피어나고 있고, 그분을 향하여 바치고 있는 봉헌된 삶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되새겨 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주님!
죄를 탓하기보다 스스로 짊어질 줄을 알게 하소서.
허물을 뒤집어쓰고 하늘을 여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기꺼이 바치는 삶이기에, 그 어떤 억울함도 원망도 없게 하소서.
위하여 내어놓는 제 삶 안에서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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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알아본다는 것
하느님께서는 실망과 좌절, 실패 안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만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약점 중 하나는 한번 만난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더욱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하면 그제야 어디서 만난 분일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먼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한 관심과 사랑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러면서도 누가 나를 알아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죄송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겉모양도 모르니 그 속은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상대를 잘 알아볼 수 있는 눈과 지혜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증언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만이 그분을 알아 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그를 도구로 선택하셨고, 요한이 그분의 말씀에 충실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과 관심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며 사랑하면 할수록 더 알게 되고 또 그가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야 세상은 더 맑고 밝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연장으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칭호는 그분의 운명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 사건은 신앙의 큰 사건이었는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어린양의 피를 집의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발라서 그 표가 된 집은 죽음의 천사들이 지나쳐 가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파스카’라고 하는데 ‘건너뛰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 죽음에서 건져지고 해방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백성인 우리의 구원은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셨습니다.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성체성사를 통한 음식으로 밥이 되어 오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랑의 주님을 알아보아야 하고 그 어린 양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처럼 세상의 어린양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이웃의 구원을 위해 우리를 원하십니다.
사제가 미사 때에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높이 들고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하고 외칠 때마다 이제 내가 높이 달리어, 또 하나의 어린양이 되고 그 복된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을 알아 뵙고 만나는 은총이 모두에게 함께하시기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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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4년은 ‘용의 해’입니다. 옛날 중국에 장승요(張僧繇)라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이 화가는 안락사(安樂寺)라는 절에 용 두 마리를 그리게 되었는데 그 용 두 마리에는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그 까닭을 묻자 장승요는 '눈동자를 그리면 용이 날아가기 때문에 그리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장승요가 용 한 마리에 눈동자를 그리자 잠시 후에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용이 벽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고 합니다. 화룡점정은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는 뜻으로 가장 요긴한 부분을 마치어 일을 끝냄을 이르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비단 용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생물을 그리는 그림에는 생명을 불어 넣는다는 의미였는지 눈동자를 마지막에 그렸다고 합니다. 2024년에는 나의 말과 행동이 내가 속한 공동체에 화룡점정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더욱 발전하고, 공동체에 활력이 생기고, 공동체가 하나가 되면 좋겠습니다.
옛날 중국의 용흥사라는 절에 진존숙이라는 명승이 있었습니다. 진존숙은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 나면 지푸라기로 짚신을 삼았습니다. 그는 짚신을 한 켤레씩 짝을 맞춰 산길의 나뭇가지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스님, 왜 짚신을 만들어 매달아두시는지요?” 스님이 답했습니다. “먼 길을 가다 보면 짚신이 낡아 발이 불편한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들의 발을 편하게 하고자 함이지요.” 어느 날 용흥사에 낯선 스님이 찾아왔습니다. 진존숙은 그와 선문답을 하게 되었는데, 첫마디를 건네자마자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습니다. 진존숙은 속으로 ‘도가 깊은 스님이신가?’하고 다시 말을 건네니, 또다시 버럭 역정을 냈습니다. 진존숙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용의 머리를 닮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뱀의 꼬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얼굴을 붉히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고 합니다. 용두사미(龍頭蛇尾)는 시작은 거창하지만 끝이 보잘것없고 초라함을 일컫습니다. 흔히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무리입니다. 뜻을 세웠다면 시작하고, 시작했다면 마무리를 져야 합니다. 성공만이 마무리는 아닙니다. 일에 매듭을 짓는 것, 그게 바로 마무리입니다. 2024년에는 나의 말과 행동이 용두사미가 아닌 용두용미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서에 보면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축복해 주시면서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쓸모없는 아버지’(아브람의 뜻) 대신에 ‘훌륭한 아버지’, ‘선택된 아버지’(아브라함의 뜻)로 불립니다. 그는 하느님을 몰랐기 때문에 쓸모없는 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게 되자 선택된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입니다. 시몬이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라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시몬은 ‘갈대’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지만 참회의 눈물을 흘렸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첫 번째 교황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상처받은 이들이 위로 받고, 위로하는 공동체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즈카리야라고 이름을 정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에 의해서 ‘요한’으로 이름을 정하였습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그런 뜻에서 요한은 화룡점정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엘리야나, 오시기로 한 메시아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엘리야는 이미 와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요한이 엘리야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요한 보다 더 큰이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시대에 요한은 분명 화룡점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요한 보다 더 크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기꺼이 용두사미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용두사미가 되는 것도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용두사미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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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의 장면은 우리 주님의 세례식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주님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느님의 아드님 위에 머무르시며 주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사실 세례자 요한과 주님의 만남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엘리사벳 성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태중에서의 만남 이후 요한과 주님은 이렇게 오늘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오늘 복음을 통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분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라고 말입니다.
요한은 평생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살았습니다. 특히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외침 자체인 요한은 오늘도 소리 높여 주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희망합니다.
우리 내면에서 매일매일 요한의 외침이 이어지기를 말입니다. 회개하며 하늘나라를 기다리라는 외침도 우리 안에 이어지기를 바라고 주님께서 바로 하느님의 아들, 즉 구세주이심을 믿으라는 외침도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요한의 외침이 가끔 걸어가야 할 길을 잃고 마는 우리에게 이정표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분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왜 그분을 믿고 따라가야 하는지, 그 믿음의 끝이 어디인지 늘 알려 주는 이정표 말입니다.
요한은 오늘도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분을 따라갑시다. 그곳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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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만 듣고도….
소리만 듣고도
어떤 음식을 즐기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소리만 듣고도
그 음식의 부드러움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소리만 듣고도
그 음식의 길이를 알 수 있습니다.
소리만 듣고도
그 음식의 뜨겁기를 알 수 있습니다.
소리만 듣고도
그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의 닫힘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 아픔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들어주세요. 그대 마음의 소리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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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30대 초반부터 강의했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 저였지만 많은 곳에서 저를 초대해 주셨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제 강의를 들으신 분은 “목소리가 좋다.”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십니다. 또 3시간 넘게 강의하는 동안 물 한 잔 마시지 않고 강의하는 것을 보고서는 강철 성대를 타고났다는 말씀도 해주십니다.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40대에 교수법 수업을 들으면서 말하는 것은 계속 연습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대도 근육이라서 늙는다는 것입니다. 운동하지 않으면 몸의 근육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성대도 사용하지 않으면 성대 근육이 빠져서 강의하는 것이 힘들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워낙 발음이 안 좋아서 입에 나무젓가락을 물고서 매일 연습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연습이 모여 튼튼한 성대 근육을 만든 것인데, 타고난 것처럼 착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타고난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타고난 것도 사라집니다. 운동하지 않으면 근육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말이지요.
주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머무는 것도 계속해서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냥 저절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은 또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주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자주 만나야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저절로 주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예수님 위에 성령이 내려오셔서 머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증언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냥 우연히 보게 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두른 채 생활했으며, 메뚜기와 들 꿀만을 먹으면서 하느님을 향했기에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진리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절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으셨을까요? 아닙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 인간들보다도 더 열심히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도 이렇게 노력하는데, 우리의 노력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오늘의 명언: 인생의 고통은 지나가 버리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는다(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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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따름과 닮음;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
어제는 우정에 대해 다양한 예를 들면서 나눴고 우선적 본보기로 복음을 근거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과의 영적우정에 대해 나눴습니다. 이미 두분간의 영적우정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시 두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시작된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새삼 예닮의 여정에 빛나는 모범이 세례자 요한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깊은 우정 관계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그 많은 사람중 예수님의 신원을 알아 본 사람은 세례자 요한뿐이었습니다. 사람이라 하여 다 똑같은 눈이 아닙니다. 영의 눈이 활짝 열린 세례자 요한의 외침입니다. 유난히 ‘본다’라는 동사가 많이 나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하고 내가 말한 분이시다.”
바로 우리가 미사시 영성체전 ‘하느님의 어린양’ 세번 되풀이하는 고백과 사제의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는 권고도 오늘 복음에 근거함을 봅니다. 그러니 미사전례가 얼마나 정교하게 성서를 반영하고 있는지 참 고맙고 놀랍습니다.
이어지는 백부장의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고백과 더불어 성체를 모심으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과 일치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고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날마다의 미사전례 은총이 얼마나 결정적 도움을 주는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상기시키는 “하느님의 어린양”에는 두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는 죄가 없으면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자신을 어린양처럼 희생하는 ‘주님의 고통받는 종’의 표상과, 둘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상징하는, 파스카 때에 잡는 어린양의 표상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미사중 모시는 예수님은 바로 이런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문득 11월 위령성월,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저녁성무일도때 마리아의 후렴도 생각납니다. 11월 위령성월중 내내 노래했던 내용입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여기서도 예수님을 어린양이라 부릅니다. 이어 영의 눈이 열린 세례자 요한의 힘찬 고백이 뒤따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에 이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고백합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마음의 눈만 밝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귀도 밝아 주님께 늘 열려 있었던 참 탁월한 주님과 사랑의 우정 관계에 있던 ‘성령의 사람’ 세례자 요한임은 다음 고백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따르고 닮아가는 분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자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입니다. 바로 우리가 갈망하고 소원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이런 예수님을 따르고 닮아감으로 실현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깊이 마음에 새길 것을 촉구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따르고 닮아 그분처럼 되는 것,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과제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 상태에 있는 미완의 존재임을, 또 살아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우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이렇게 예닮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과의 궁극적 일치에 희망을 둔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하며 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도룩 분투의 노력을 다합니다. 제가 피정지도시 자주 드는 예가 생각납니다.
“나중에 천국문을 통과할 때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얼굴을 검사하실 것이다. 주님을 닮았나 안닮았나. 사랑할 때 닮는다. 주님을 따라 섬기고 사랑하면서 닮아갈수록 역설적으로 참나의 얼굴이 된다. 주님을 닮은 참나의 얼굴로 주님은 심판하실 것이니 사랑의 심판이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대죄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하느님의 자녀답게 예닮의 여정에 올라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며,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힘껏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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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 오시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 29)
어둠은
결코 스스로
걷지 않으니
어둠을 사르러
빛이 오시네
멈춤은
결코 스스로
나아가지 않으니
멈춤을 멈추러
길이 오시네
거짓은
결코 스스로
밝히지 않으니
거짓을 드러내러
참이 오시네
아픔은
결코 스스로
씻지 않으니
아픔을 씻기러
위로가 오시네
굴레는
결코 스스로
벗지 않으니
굴레를 벗기러
자유가 오시네
폭력은
결코 스스로
멈추지 않으니
폭력을 끝내러
평화가 오시네
무관심은
결코 스스로
돌아서지 않으니
무관심을 돌리러
사랑이 오시네
사람은
결코 스스로
살지 않으니
사람을 살리러
참사람이 오시네
악은
결코 스스로
무너지지 않으니
악을 무너뜨리러
선이 오시네
세상의 죄는
결코 스스로
없어지지 않으니
세상의 죄를 없애러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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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왜 어린양이신가?
제단에서 봉헌되는 짐승들은 다섯 종류인데,세 종류는 물짐승이고 두 종류는 날짐승입니다(레위 5,6-7.18 참조). 나는 왜 요한이 주님을 다른 짐승이 아니라 ‘어린양’이라고 부르는지 알아보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류에따라 세 가지 짐승이 봉헌되는데 왜 요한은 뭍짐승의 경우에 양 종류에서도 하필 어린양을 언급하는 것입니까? 다섯 종류의 짐승이란 황소,양, 염소, 산비둘기, 집비둘기입니다. 양에는 숫양, 암양 그리고 어린양이 있습니다.
.. 하지만 일일 번제물로 봉헌되는 것은 어린양입니다(탈출 29,38-44 참조) .••• 어떤 일일 번제물이 말씀보다 더 영적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말씀께서 상징적으로 ‘어린양’이라 불리시는 것입니다. … 그러나 예수님을 가리키며 한 선언인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말을, 요한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육체를 지니시고 사람들 가운데 사셨던 구원 역사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면, ‘어린양은 바로 그분의 인성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이사 53,7)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예레 11,19)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묵시록에서도 어린양이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묵시 5,6) 것입니다. 사실 어떤 신비로운 이유 때문에 죽임을 딩하신 이 어린양은 온 세상의 속죄물이 되셨습니다(묵시 5,9 참조). 인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따라 그분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셨으며, 우리가 죄에 떨어져 우리 자신을 팔아넘겼을 때 우리를 샀던 자에게서 당신의 피로 우리를 되사셨습니다. 하지만 이 어린양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분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셨습니다. 위대한 대사제이신(히브 8,1 참조) 그분께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말로 계시하십니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요한 10,18).
-오리게네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이름 주님이시로다"(시편 68,5). “주”라는 말은 고차적인 권위를 뜻하고, “종”이라는 말은 낮은 등급을 가리킵니다. 어떤 이름들은 적절하게도 하느님에게만 속하고, 다른 모든 것에게는 붙여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 봅시다. 하느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고, 인간이라는 이름은 인간에게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리석든 슬기롭든 간에, 그는 언제나 인간일 따름입니다. “인간은 인간을 넘어설 수 없는 가련한 존재다”라고 세네카는 말합니다. 어떤 명칭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를 가리킵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이 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 여러분은 동시에 아들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아버지가 있은 뒤에 아들이 있을 수 없고, 먼저 아들이 있은 뒤에 아버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스스로 시간을 뛰어넘는 영원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암시함과 동시에 시간을 암시하는 제3 범주의 신적인 명칭도 있습니다. 성서 안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무언가를 인지한 다음 그것에게 이름을 붙인다 해도, 그것이 하느님은 아니라고 말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이름이나 본성보다 월등히 뛰어나신 분입니다. 어떤 선한 사람이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분에게 이름을 붙이려고 하자, 한 형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잠하십시오, 그대는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라고. 우리는 감히 하느님에게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성인들께서 그분에게 붙였던 이름들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들은 하느님께서 성인들의 마음속에 주신 것들입니다. 그 이름들에는 신적인 빛이 깃들어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 어찌 기도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당신께서 성인들의 마음속에 불어넣어 주시고, 당신의 빛이 깃들어 있는 그 이름으로 부르오니, 주님, 저희가 당신께 간절히 구하고, 당신을 찬양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께 붙일 만한 이름이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느님께 좋은 이름을 붙여드린다고 해도, 우리는 하느님을 충분히 찬양하고 높여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시고, 형언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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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당신은 하루에 얼마나 봉사의 시간을 할애합니까?
봉사란 자신의 죄를 파괴시키고 심령(mind)을 정화시키는 영적훈련이다. 참된 봉사란 봉사한다는 생각조차도 잊어버리고 하는 봉사이다. 또한 일에 대한 결과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그 이후의 어떤 것이라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으로 돌리는 봉사가 참된 봉사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종이라고 부른다. 자신을 평화의 도구라고 칭한다. 종과 도구는 그냥 주인이 원하는 것을 기쁘게 한다. 그리고 일이 끝난 후에도 ‘저는 해야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주인에게 고백한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겸손한 종을 들어 높여 주시는 분이시다. 성모 마리아는 수태고지에서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함으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이 세상에 내 놓는 역할을 하셨던 것이다. 마리아는 임신한 몸으로 산후의 고통을 겪게 될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가 시중을 들게 된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났을 때 마리아는 기뻐 마니피캇을 노래했다. “하느님은 권세 있는 자를 내치시고 가난한 이를 들어 높이셨다…….”
여러분들이 하는 청소라든지 형제자매들을 섬기는 일이라든지 또한 공부를 하는 것도 다 봉사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했는데…….’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자세이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했노라고, 일의 결과가 성공적이든, 실패한 것이든, 오직 하느님의 영광이었다고 고백하는 마음이 바로 참된 봉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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