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1-3 아브라함이 거기서
본문에는 아브라함이 또 다시 남방으로 이사하여 그에게서 재차 나타나는 우맹성에 대한 기록입니다. 흔히 머리가 좋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순간 모면용의 잔꽤인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지독한 우맹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같은 질병으로 진퇴양란에 빠지게 되는데, 만약에 그대로만 진행 되어진다면 하나님의 약속 즉 사라에 잉태되어진 약속의 씨와 그 후의 모든 일들이 “무”로 돌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 일에도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그 일에 개입하시고 그 일까지 떠 맡으셔서 해결해 주십니다.
1. 본문 1절은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사이 그랄에 우거하며”입니다.
1) 모세가 소돔 멸망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은 주제에서 이탈되어 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그의 역사적인 이야기의 속편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이야기 중에 그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를 말합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를 변호해 주셨는가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계속되다가 마침내 교회의 미래 원천이 되는 약속된 자손이 그에게 출생되어서 끝나게 됩니다.
2) 그리고 여기서 모세는 또 아브라함이 남방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거주의 한계선을 넘어서 여행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전의 거주지를 떠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갔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가리키고 있는 그 지역은 후에 주로 유다 지파의 제비에 당첨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이사해간 의도가 무엇이었는가, 또 무슨 필요가 그로 하여금 거주지를 변경하게 했는가에 대하여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어떤 불만족스런 원인 때문에 그의 거주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특별히 그가 감히 원하지도 못했던 아들이 최근에 사라를 통하여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까지 받았기 때문에 그런 불만으로 이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롯이 계속적으로 자기 눈앞에서 전개되는 슬픈 광경으로부터 도망쳤다고 상상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보기에 그전에는 참으로 즐거운 곳으로 보였고 또한 여러 가지 과일이 풍성한 기름진 곳으로 보였었던 그 평야가 이제는 보기에도 흉측스런 혼돈으로 돌변해버린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확실히 그 전체 이웃의 인접 지역들이 유황냄새와 또한 다른 부패된 것들로 인하여 영향을 입었을 것이라는 점은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그분의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심판을 보다 더 확실하게 깨닫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측되고 있는 다음 사실들과 일치하지 않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그곳이 하나님의 저주 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그곳이 지겹도록 싫어져서 그렇게 다른 곳으로 가게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 그에게 일어났던 일과 같이 그는 그 자신이 함께 거주하고 있는 자들의 사악성들과 불의 때문에 그것이 지겨워서 그곳을 떠나가게 된 것이라는 말도 신빙할 만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더욱 더 풍성하게 은혜를 나타내 주시면 주실수록 그 대신에 그의 인내가 단련되어야 할 필요성이 더욱 더 절실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다니는 순례자로서 그가 자신의 상태를 회고해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3) 모세는 또한 그가 그랄 땅에서 나그네로 거주하고 있었다고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거룩한 가족이 피난민처럼 이리저리 이끌려 다녔다는 사실을 봅니다. 그리고 또 한편 고정된 거주지는 악한 자들에게 허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에서 불안정하게 되는 것은 경건한 자들에게는 유익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편리한 주택을 가지고 편안하고 조용한 생활을 하는 데에 몰두됨으로 하늘나라의 상속을 잃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2. 본문 2절 상반절은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입니다.
이 줄거리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괄목할 만한 본보기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의 유약성에 대한 표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표본입니다. 어리석은 자도 고생을 하면 지혜로와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아브라함 자신에게 닥쳤던 큰 위험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는 그는 다시 한번 똑같은 돌에 치이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비록 여호와께서 고의적으로 그를 징치하여 그의 전 생애동안 경종을 울려서 정신을 차리고 있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실수는 실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한 족장의 본보기에서 하나님의 징벌과 호의에 대한 망각이 얼마나 쉽사리 우리를 살그머니 엄습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간 과거에 한번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또한 그의 아내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된다면 그 자신만이 그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마음 속에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의 막대한 소홀함은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검토해보면 우리도 흔히 그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배은망덕의 혐의에서 도저히 탈피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이 추가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자기 아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놀라웁게 보존되었다는 사실을 회상했다면 절대로 빤히 알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누릴 수 있었던 하나님이 내려주신 은총을 전혀 효력 없이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죄의 성질을 주시해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아내를 창녀로 만드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서 자손에 대한 약속을 받기 전에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 노력하였던 것처럼 지금은 그토록 큰 복을 누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그가 아기를 배고 있는 그의 아내를 볼 때 오직 자기 아내의 위험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철저하게 이 모든 것들을 헤아려 본다면 마땅히 그가 그것들을 하나님의 섭리에 완전히 맡겨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조금밖에 의탁하지 않으므로써 불신의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의 지혜나 생각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런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주위를 하나님의 약속에 고정시키는 것까지는 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끈질기게 기다리는 면에서는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니 만큼 이 점에서 그는 비난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인내력 있게 그분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마음이 정당하지 않은 수단을 이용하는 데에 쏠리게 되었습니다.
3. 본문 2절 하반절은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종이 너무나 경솔하게 취한 그 생각 때문에 그를 멸하시려고 계획하셨다는 것에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신의 결과는 마땅히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몇몇 왜곡된 자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승강이를 벌입니다. 그렇게 다 늙어버린 여자를 그 왕이 탐을 내서 그녀의 남편에게서 빼앗았을 것이라는 점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그들에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째로 모세가 전에 그 여자가 특이하게 아름다웠다고 언급한 외에 아무도 그 여자의 용모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녀는 나이는 늙었지만 그 나이만큼 얼굴 미모가 늙지는 않았다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일이지만 어떤 여자들은 사십대에 있으면서도 칠십대에 있는 여자들보다 얼굴에 주름살이 더 잡히고 늙은 것을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른 약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비범한 은혜로 인하여 그녀의 용모의 아름다움은 그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다른 재능들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아비멜렉 왕도 그녀의 우아한 모양에 그렇게 반한 것이 아니고 나이 지긋한 귀부인으로서 그녀가 지니고 있는 보기 드문 덕성에 그만 매력을 느끼고 말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잊지 말 것은 이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서 주장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를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물들의 자연적인 원인을 분별하는 데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날뛰는 자들이 아직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가장 우맹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있는 우리는 작은 사건이지만 이것으로 아비멜렉이 하나님을 징계를 침해하는 사역자로서 은밀한 충동을 받아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4. 본문 3절 상반절은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여호와께서 매우 온후하게 행동을 하고 계시므로 그분의 종을 벌하시면서도 아버지로서 그를 용서하고 계신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다루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징치하시면서도 그분의 긍휼과 선하심이 그분의 혹독하게 징계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게 넘치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또한 하나님은 우리 육신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나게 큰 관심으로 경건한 자들을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추론하게 됩니다. 그것은 경건한 자들이 잠을 잘 때도 그분이 그들을 살펴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역시 주시해야 될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제 아무리 멸시를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아직도 귀한 존재라는 점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왕까지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105편 14절에서 기록된 사실과도 같습니다. 이 제목에 대하여는 12장에서 충분히 토의되고 있습니다. 거기서 신자들은 우리가 지금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는 것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오셨다’ 고 언급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그것은 왕의 지각에 적용시켜야 되는 것입니다.그에게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위엄이 현현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책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합니다. 동시에 다른 헛된 망상으로 혼미하게 되지 않게 하셨을 것입니다.
5. 본문 3절 하반절은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보호로 덮어주셨던 아브라함을 인하여 아비멜렉 왕을 책망하십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일반적으로 간음에 대하여 그분이 불쾌하게 여기시는 점을 보이시려고 의도하지 않고 계십니다. 사실상 여기서는 아브라함에 대하여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부분의 충절을 유지시킬 목적으로 일반적인 선언이 제공됩니다.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 말에서 한가지 규범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누구든지 간에 그 이웃의 아내를 절대로 만지지 말라는 금지령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의 생애 가운데서 이 결혼보다 더 신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남편들과 아내들 사이에 간직되어야 할 상호간의 충절(忠節)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빈번히 범해지면 그것에 대하여 그분이 복수하시는 분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을 절대로 의아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직접 오직 한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그 경고는 간음을 범하는 모든 자들의 귀에 언제나 쟁쟁하게 울려 퍼지는 말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들 간음자들이 당분간은 벌을 받지 않고 그것을 즐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결혼을 주재하시는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그들에게 보복을 하실 것이라는 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히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