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김기림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를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 사랑도 그 길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놀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느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덕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김기림(1908-? )
1930년대 모더니스트들 중에서는정지용이 섬세한 언어 감각과 감정의 절제를 통한 생동감 있는 이미지의 창출로 가장 성공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방 이후는 모더니스트에서 일변하여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에 합류, 적극적인 현실 참여의 시를 쓰게 된다. 인천 상륙 작전이후에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북으로 끌려가던중 사망한 이유로 생사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게 아닌가라고 보고있다.
현재로선 김기림이 북으로 끌려가던중 정지용과 마찬가지로 폭격으로 사망한탓에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것이란게 가장 유력한 설명으로 보인다.
T. S. 엘리엇에게서 영향받아 주지주의 이미지즘 시를 주로 썼다. 동시대 한국 모더니즘 시의 기교주의를 비판하며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룬 '전체시'의 창작을 주장하였다. 그의 초기 시들은 자신의 이론에 지나치게 충실하여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흩어져 있을 뿐 시적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그런 결점들은 착복되었다. 평론 면에서는 영미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도입하여 한국 시문학계의 한 전환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내가 무척 좋아해서 한 때는 외우기도 했는데,, 머리 속이 썪으면서 외웠던 시도 썩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