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90
8월22일[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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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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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blWllB_JI8
(조대윤 야고보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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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여러분은 도둑입니다>
아이들과 저녁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한 개구쟁이 친구가 다가오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제게 할 말이 좀 있답니다.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아이 입장에서는 정말 큰 고민꺼리였습니다.
“신부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저희 반 통틀어 핸드폰 없는 사람이 저 포함해서 딱 두 명이었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친구’ 외할머니가 핸드폰을 사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결론은 저희 반에서 핸드폰 없는 사람은 유일하게 딱 한 명, 바로 저란 말입니다.
신부님, 입장을 한번 바꿔서 생각해보세요. 신부님이 제 입장이라면 어떻겠냐고요? 그래서 결론은 뭐시냐, 삼촌한테 잘 이야기해서 꼭 제 소원 좀 들어주게 해달라고요. 신부님, 알겠죠? 신부님만 믿습니다!”
때로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때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애원조로 매달리는 녀석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또 다른 녀석, 이제는 완전히 자랄 대로 자라서 꽤나 ‘부담스러워진’ 녀석이 저한테 자리에서 일어서보라네요. 왜 그러나 했더니 자기하고 키를 한번 재보자는 것입니다.
한 달 전까지는 분명이 저보다 1cm 정도 작았는데, 이번에는 녀석의 키가 저보다 훨씬 더 커버렸습니다. 드디어 저보다 더 커졌다며 활짝 웃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갑자기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저녁시간이었습니다.
요즘은 수도회 안에서 별로 영양가 없는 이런 저런 책임을 맡다 보니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지난 시절을 돌아보니 돈보스코의 아들로서, 살레시안으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아무래도 철부지 녀석들과 함께 티격태격, 아옹다옹할 때였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아이들이 하루하루 몰라보게 달라지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보람이었습니다. 흔들리던 아이들이 안정을 되찾고 갈팡질팡하던 아이들이 제 갈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기쁨보다 큰 것이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들을 동반하면서 얻는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돈보스코였기에 이런 말까지 남겼습니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 내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은 이렇게 청소년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청소년 여러분,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항상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내게 있어 단 한 가지 소원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행복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은 도둑입니다. 왜냐하면 제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청소년의 사도 돈보스코 성인의 탄생일입니다. 오는 2015년이 탄생 200주년이니, 아직 살아계셨더라면 올해로 연세가 196세가 되겠네요.
돈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토리노 근교 베끼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아버지 프란치스코 루이지 보스코와 어머니 말가리다 오키에나 보스코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린 요한 보스코에게 큰 비극이 닥쳤습니다. 아버지 프란치스코 보스코가 1817년 5월 11일 서른 세 살의 나이로 사망한 것입니다. 차가운 지하실에서 일하다가 폐렴에 걸린 지 이레 만의 일이었습니다.
돈보스코는 당시 두 살이 채 안되었지만, ‘오라토리오 회고록’에서 애절한 어조로 그 슬픈 사건을 회상합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내 인생 최초의 기억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가 숨을 거둔 방에서 나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따라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비애에 잠긴 어머니는 거듭 타일렀다.
“요한아, 어서 이리 온. 엄마랑 나가자.”
“아빠가 안 가면 나도 안 갈 테야.”
“가엾은 것, 이제 너는 아빠가 안 계시단다!”
어머니는 울음을 터트리며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가 우는 것을 보고 나도 덩달아 울었다. 아버지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보스코가 사망한 뒤, 말가리다가 이끄는 가족의 재정 상황은 이태 동안의 가뭄과 기근을 고려하더라도 몹시 악화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예를 들어 가축 우리에는 암소한 마리와 송아지 한 마리만 있었던 듯합니다. 말가리다의 빚은 프란치스코 소유의 모든 가축을 합한 값에 달했습니다.
돈보스코는 그의 어머니가 이 무렵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신사에게서 아주 유리한 제의, 하지만 아이들은 데려가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았다는 사실도 애기합니다.
“아들들은 좋은 후견인에게 맡길 수도 있다는 애기를 듣고” 그녀는 “온 세상의 금을 다 준다 해도 결코 아이들을 버리지 못합니다.”라며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돈보스코가 이 일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청혼이었고, 젊은 과부가 보통 택하는 행로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은 말가리다 입장에서 용기 있는 결단이었습니다. 19세기 과부들은 고아들처럼 고대(古代)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직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존재였습니다. 많은 과부들이 그런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곤 했습니다.
그녀의 결정은 영웅적인 것이었으며, 보스코가(家) 아이들은 운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말가리다는 자신의 앞길에 무엇이 놓여있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그녀는 이제 가족의 생계를 도맡아야 했던 것입니다. 혹독한 노동과 한없는 희생을 감내해도 혼자 벌어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 빠듯했습니다. 이렇게 보스코 가족은 1820년대를 힘겹게 버텨냈습니다.
아버지와의 때 이른 사별, 그리고 곧 다가온 혹독한 가난은 솔직히 돈보스코 성소 여정에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체험했던 아버지 부재 체험, 가난으로 인해 견뎌내야 했던 많은 어려움들은 오히려 그가 나중에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깊이 투신하는 배경이 되어주었습니다.
돈보스코는 베드로 사도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것들, 건강 젊음, 능력, 마음, 사랑, 미래 모두를 자신을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예수님이신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바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무엇을 받았을까요? 엄청난 선물을 받았습니다. 살아있을 때부터 성인 칭호를 들었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나 그에 대한 칭송이 대단했던지 신속하게 시복시성 절차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교육노선에 박수를 보내며 자신의 교육활동의 이정표로 삼았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남녀 살레시오 수도자들, 협력자들, 살레시오 가족들이 돈보스코의 영성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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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CcxhK9zxr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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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유일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하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어서 우울해진 부자를 보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그 ‘크기’로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는 낙타의 크기이고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바늘귀보다 작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정말 크기가 다양합니다. 본래 우리의 크기는 태어날 때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우리는 숨만 쉬고 있어도 행복한, 그러나 낳아주지 않고 만들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본래 크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 뜻은 이렇게 작아져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작아짐이 겸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성장하면서 세상의 영향으로 자기의 몸집도 키웁니다. 누군가의 자녀로, 누군가의 형제로, 누군가의 친구로, 무엇을 가진 사람으로, 어떤 스팩을 지닌 사람으로, 예쁜 사람으로 자신을 덮어씌워 갑니다. 이 껍데기들이 마치 양파처럼 자기 몸집을 키웁니다. 그것들이 마치 나의 살과 피가 되어 그것을 떼어내면 살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껍데기가 벗겨질까봐 두려워서 쉽게 화를 냅니다.
창세기 6장에 나필족이라는 거인이 나오는데 그 거인은 하늘의 사람, 곧 바늘귀보다 작아서 하늘을 날 수 있는 크기였다가 땅의 여인들과, 곧 재물이나 애정, 명예 등과 혼인하여 자신의 몸집을 키운 존재를 의미합니다. 나필족은 노아의 배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처럼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바늘귀보다 작은 존재가 돼야 합니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은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힌 사람 때문에 열 명이 처형을 당해야 하는데 죽기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가차 없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었습니다. 어차피 세상에서 잃을 게 없는 존재로 자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몸집을 줄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떻게 껍데기를 벗고 바늘귀보다 작게 되도록 하신다는 것일까요?
그리스에 알렉산더대왕이, 몽골에 징기스칸이 있다면 인도엔 아소카 대왕이 있습니다. 아소카 대왕은 정복 군주이면서도 알렉산더나 칭기즈칸과는 다른 덕목이 있었습니다. 가장 잔혹한 살육자에서 평화주의자로 극적인 전환을 이뤘기 때문입니다.
아소카 대왕은 인도를 침략한 알렉산더의 군대를 몰아내고 인도 최초의 통일왕국을 연 마우리아왕조 창건자 찬드라굽타의 손자입니다.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왕은 중앙인도와 데칸고원까지 넓힌 영토를 분할통치하기 위해 무려 16명의 부인을 맞아들여 101명의 왕자를 두었습니다. 아소카 대왕은 친동생 한 명만 빼고 이복형제 99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즉위한 8년 뒤 치른 칼링가 전투는 피의 전쟁이었습니다. 칼링가국은 코끼리부대까지 갖춰 찬드라굽타마저도 정복하지 못한 강소국이었는데 마우리아국이 벵골만으로 진출해 동남아와 스리랑카까지 교역로를 넓히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칼링가 전투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본 아소카대왕은 다야강에 칼을 버리고, ‘이제 (전쟁의) 북소리의 정복자가 아닌 담마(진리)의 정복자가 되자’라고 다짐했습니다. 자신의 정복으로 인한 파괴와 인명 손실에 겁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도 합니다. “왕궁 베란다에서 어느 날 길거리를 내려다보던 아소카 대왕은 어린 사문(승려)이 위풍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는 왕위 계승 1순위였다가 독살당한 이복형 수시마의 아들 니그로다였습니다. 그로부터 짧은 ‘법구경’을 듣고 아소카 대왕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하나, 이복형에 대한 미안함으로 니그로다의 종교를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아소카 대왕이 없었다면 불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못한 채 인도에서 소멸했을지 모릅니다. 아소카대왕이 담마 사절단 혹은 전법사를 스리랑카는 물론 지중해 연안인 이집트, 그리스, 시리아까지도 파견했기에 한·중·일 삼국은 물론 동남아 전체에 불교가 전통 종교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제국 전역의 바위와 기둥에 새긴 일련의 칙령으로 ‘다르마’를 공포했습니다. 이 칙령은 비폭력,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중, 다양한 종교적 관행에 대한 관용, 인간과 동물 모두를 위한 병원 설립을 설교했습니다.
아소카 대왕이 인도의 가장 강력한 폭군에서 인도의 가장 덕망 있는 왕이 된 데는 바로 그 자신이 찌르고 죽은 이들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그를 작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작아지는 방법은 나의 욕심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양심이 있어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 내가 작아집니다. 어머니의 죽음이 나의 잘못 때문이었음을 안다면 어떨까요? 작아집니다. 껍데기를 벗어버리게 됩니다.
아이가 작아질 수 있는 이유는 부모가 자신 때문에 받은 상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느 소매치기가 자신의 범죄 때문에 어머니가 수술하지 못해 죽었다면 그가 이젠 소매치기로 커지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죄로 인해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러면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유일한 구원의 힘이 되는 이유는 그분이 바로 나 때문에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으로 작아짐을 느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분이 나의 죄 때문에 흘린 피를 묵상하면 됩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주님 수난 7기도’를 바치기를 강력히 권고합니다.
내가 작아져 결국엔 연옥도 거치지 않고 바늘귀보다 작은 문으로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게 만드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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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9,23-30: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4절) 예수께서는 재물 자체를 나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재물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비판하신 것이다. 바늘귀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도시는 성곽으로 둘려 있고 성문이 있는데, 성문에는 짐을 실은 낙타라든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큰 문이 있고 그 옆에는 작고 낮은 좁은 문이 있어서 밤에 큰문을 잠그고 수위 병이 지키면서 이 문으로 사람들을 통과시켰다. 이 작은 문을 흔히 바늘귀 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낙타가 사람도 겨우 지나가는 이 작은 문을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하신 말씀이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신 것이다. 낙타와 바늘귀의 예가 그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놀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5절) 한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즉 하느님께서 해 주셔야만 가능하다고 하신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6절)
“보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27절) 베드로가 그렇게 물은 것은 우리가 모두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물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어떤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완전히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렇게 큰 사랑으로 완전히 버린 분들이다.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28절)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뜻이다. 그분을 따르는 것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백 배는 하늘나라에서 누릴 상급을 의미한다. 현재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것이다. 즉 주님을 위해 육적인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30절) 하신다. 재물이나, 생각이나 이념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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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우연히 ‘KBS 영상 실록’을 보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있어서 우리는 조선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영상 실록‘은 매년 있었던 사건과 사고를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영상 실록을 보면서 제가 태어났던 1963년의 사건과 사고를 보았습니다. 그해 1월은 인천항이 얼 정도로 매서운 추위가 있었습니다. 영상 실록을 보니 1963년은 군인들의 세상이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5.16의 주역인 박정희 의장이었습니다. 정치활동이 금지된 가운데 군인들은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고, 군인이었던 박정희 의장은 전역하여 민주공화당의 총재가 되었고, 곧 대통령 후보가 되었습니다. 박정희 의장은 15만 표 차이로 윤보선 후보와 경쟁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제가 태어났던 1963년은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되는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1963년에 ‘라면’이 처음으로 출시되었고, ‘장충체육관’이 신축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였고, 제가 태어났습니다. 유튜브를 검색하면 'KBS 영상 실록‘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났던 해의 영상을 보는 것은 어떠신지요? 문득 생각합니다. 하느님나라에 우리들 각자의 삶이 ’영상 실록‘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교회는 오늘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모후’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2000년 전에 마리아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담담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서 ‘마리아는 아이를 가질 것이다.’라고 전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아직 처녀인데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천사 가브리엘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하와의 불순명으로 죄가 생겨났고 죄의 결과로 죽음이 찾아왔지만 마리아의 순명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우리는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했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인성과 신성’이 함께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되셨으니 성모님에게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라는 호칭을 드리고 공경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십니다. 문득 예수님께서는 돈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지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돈의 중요성과 저축의 필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루가 15, 8-10)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은전 한 닢을 되찾은 양 한 마리처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다음은 적극적인 재테크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마태 25, 14-30)는 목표 수익률 100%의 공격적인 재테크입니다. 예화 속의 주인은 종에게 금융기관의 수익률보다 높은 수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재물은 소중하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잘 키워야합니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이니 잘 키워나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맹목적인 저축에 대한 경고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가 12, 16-21)는 돈 자체에 탐닉하는 수전노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곳간이 미어터지게 재물을 모아도 소용없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인의 목숨을 가져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나눔의 미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눔이 참 행복임을 가르치십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가 16, 19-31)는 나눔을 모르는 부자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싫어하신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탐닉을 싫어하셨습니다. 부자를 미워하신 게 아니라 나눔을 모르는 부자를 책망하셨습니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된 것이 죄가 아니라 모은 돈을 나누지 않은 것이 죄가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었던 자캐오(루가 19, 1-10)를 축복하셨습니다. 자캐오와 가정이 구원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눌 수 있다면 부자도 얼마든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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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전에도 감염병이 있었습니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가 있었습니다. 전염성이 강했고, 사망률도 높았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로 감염병이 퍼지지는 않았습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와서 몇 개월이면 일상의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감염병이 있었지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행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예전의 감염병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건과 위생 상태가 좋은 선진국들도 여지없이 코로나19에 노출되었고,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백신이 개발되어 접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코로나19는 변종으로 대응하고 있으며 여전히 높은 감염률을 보입니다. 그동안은 백신과 치료제를 통해서 감염병을 막아왔지만 이제는 감염병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건강에 좋은 식단을 만들어 먹으면 굳이 살을 빼지 않아도 됩니다. 돈 관리를 잘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살이 찌는 음식을 먹으면 늘 살을 빼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돈을 쉽게 써 버리는 사람은 돈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은 주기적으로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 도시에 밀집해서 사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도시에는 삶의 질을 높이는 시설들이 있습니다. 직업을 찾을 기회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모였습니다.
지방은 점점 사람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도 늘어납니다. 도시와 지방이 균형 발전을 이루면 자연스럽게 거리두기가 생길 수 있습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고,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없다면 감기처럼 코로나19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다행히 백신이 개발되었고, 치료제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가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라면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쉬운 문제, 중간 문제, 어려운 문제를 내주시는 것 같습니다.
많은 경우에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믿으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믿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으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믿음은 어쩌면 마음의 문제입니다. 세상일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차원 더 높은 문제를 내주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과는 다른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제 믿음을 넘어서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문제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세상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우리 안에 있는 ’위선, 가식, 욕망, 탐욕, 분노, 원망, 미움, 질투, 시기‘를 모두 던져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들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희생, 사랑, 나눔, 겸손’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내 주시는 어려운 문제를 삶으로 실천하는 신자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시는 분, 신앙이 삶의 중심이신 분,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가하면 쉬운 문제에 머무는 성직자들도 더러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겹게 느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질책하셨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모습이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정 안에서 신앙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성직자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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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낙타와 바늘구멍>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3-26)
낙타는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는 말씀은,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라는 말씀도,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몹시’ 놀란 것은, 자기들의 생각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사도들도 ‘부유함’을 ‘하느님의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말은,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면,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들을 눈여겨보며”라는 말은, “그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며”라는 뜻인데, 예수님께서 특별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려고 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말씀은, “사람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셔야만 그 나라에 들어간다.”라는 뜻입니다.
그 나라는 ‘내가 나의 힘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들어가고 싶어 한다고 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도 아니고, 자격을 갖추었으니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나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받아 주셔야만, 또는 하느님께서 문을 열어 주셔야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 원칙에 예외는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데리고 들어가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살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데리고 가시기를 청할 뿐이고, 나의 간청을 받아 주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부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다음 두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16-20)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이 두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어쩌면 ‘같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쾌락만 생각하면서 이웃의 사정에 무관심한 것,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희망하지도 않고, 노력하지도 않는 것, 그런 점에서 두 부자는 똑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재산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27-30)
여기서 “가족을 버린다.”라는 말은, 실제로 가족을 버리거나 포기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집착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가족은 결코 ‘버림’과 ‘포기’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끝까지, 하느님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가족을 사랑해야 하고, 가족과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집착이란, 가족을 사랑한다고 주장하지만, 가족을 하느님 나라의 반대쪽으로 데리고 가는, 헛되고, 속되고, 어리석은 일들, 부질없는 욕심 같은 것들입니다.> 여기서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는 마음껏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을 첫째로 생각하지만, 그 사람들이 바늘구멍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낙타와 같은 사람들이라면, 하느님 나라에서는 꼴찌가 될 것이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뜻을 생각하면 ‘그런데’보다는 ‘그래서’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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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부의 위험성을 깊이 생각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전합니다. 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이에게 언제나 큰 걸림돌이 됩니다. 돈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거의 대부분 부가 가져다준다고 믿게 합니다. 부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보장하고 그것이 실현되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한 가장 올바른 풀이는 ‘불가능성’입니다. 부자도 심지어 가난한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이 많건 적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형제들에게 내놓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따르려면 포기하여야 하는 일곱 가지 목록이 나옵니다.(29절 참조) 거기에는 부모, 형제자매, 자녀, 곧 가족도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와 자녀,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분명히 옳고 좋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일도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 안에 자기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앞에서 우리가 꼭 붙든 채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좋은 것이 많지만 그 가운데 참으로 좋은 것은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뿐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마르 10,21, 오늘 복음의 병행 구절) 그 하나를 얻고자,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고자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 좋은 것들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잃지 말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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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버려도 버릴 것이 생깁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는 말씀을 들은 한 부자가 “하느님,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바늘 귀를 아주아주 크게 만들어주십시오. 그리하면 저의 재산을 당신께 아낌없이 바치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그렇다면 그가 재산을 바친다고 해서 하느님나라를 차지할 수가 있을까요? 재물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각자는 자기가 소유한 것을 포기하되 무엇을 버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버렸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유익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렸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상을 백배로 받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는 이유로 버린다면 결코 진정한 열매는 맺을 수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상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그분의 이름 때문에”(루카 18,29. 마태 19,29) 바쳤을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입니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언젠가 올림픽대회 때 상을 위해 고의적인 져주기 게임을 한 베드맨턴 경기는 결국 실격을 당하였습니다. 그 근본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때문에 전체를 얻을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때문에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를 얻을 수 있는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사실 부자가 가진 재물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눈이 가려 보아야 할 참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재물은 인간을 노예화하는 유혹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만을 생각하면 부정한 방법으로도 일등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정신, 의미, 가치를 생각하면 그 생각을 한순간 이미 경기에서 진 것입니다.
사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잘 써야 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을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물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쪼록 많이 벌되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들을 하나하나 늘려가길 바랍니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십시오. 버려도 버려도 또 버릴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돈이 많다고 우쭐대다가는 쓰러지지만 착하게 살면 나뭇잎처럼 피어난다.”(잠언 11,28)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지 않으면 결국은 하느님 나라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모든 것을 얻게 되고, 모든 것을 누리려 한 사람은 그것을 잃게 됩니다. 부디 모든 것을 얻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8-9)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 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성 베르나르도)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의 물질에 매여 있다면 사랑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헛소리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의 모두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의 모두를 당신의 뜻대로 써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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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병자성사를 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환자 교우의 상태에 대해 여쭤보니, 병원에서 이제 해야 할 치료가 없다면서 마지막을 잘 준비하라고 했답니다. 낮에 두 군데에서 특강이 있어서 곧바로 가지 못하고, 저녁 늦게 그 집에 방문했습니다. 다행히 형제님께서는 아주 밝으셨고, 또 기운도 넘쳐 보였습니다. 병원에서는 얼마 안 남았다고 했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더군요.
정성껏 병자성사를 드리고 성당에 돌아왔습니다. 그 가족에게는 매달 봉성체가 있으니 꼭 신청하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열흘쯤 지났을까요? 병자성사를 받은 형제님께서 선종하셨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빨리?’라는 생각과 함께, 병자성사를 드리기 전에 나눴던 대화가 마지막 대화였음을 깨닫습니다.
사람들과 만남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는 과연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요? 지금의 만남 뒤에도 계속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만남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만남이 마지막 만남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뒤로 미룹니다. ‘다음에 잘하면 되지….’라는 말과 함께 말이지요.
주님과 만남에서도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성이 곧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만나기보다 세상을 만나야 하고, 주님의 일보다는 세상의 일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우리이기에 오늘 복음을 통해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크게 와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기가 더 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자가 이 세상에서 말하는 억만장자를 비롯한 갑부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뜻보다 세상의 뜻을 더 중요해서 재물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권력과 재물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주님과 만남을 소홀히 여깁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일에 매여 있으면 주님을 찾거나 청하지 않으며 또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주님과 만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만남에 온 정성을 쏟는 사람은 무엇보다 주님이 먼저가 됩니다. 그리고 그 보상을 백 배로 받게 되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만남에 정성을 쏟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정성을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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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버림과 따름>
마태오 19,23-30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버림과 따름>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마태 19,27)
따름을
위한
버림입니다
가진 것을
내어놓는
버림입니다
갖고픈 것마저
꿈꾸지 않는
버림입니다
버린다는 마음조차
머금지 않는
버림입니다
따름만
남을
버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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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받을 자격과 능력>
어제 부자 청년이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떠난 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놀라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오늘 저는 이 말씀이 특별히 눈에 들어오며 이어 이런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받을 수 있는가? 라는 말은 본래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묵상 말입니다.
예를 들어 투수가 던지는 공을 받을 수 있냐고 얘기하는 것은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얘기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받는 것도 하나의 능력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
도움을 받는 것.
사랑을 받는 것.
위로를 받는 것.
이런 것이 다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의 예로 만일 구원과 도움과 사랑과 위로를 구원과 도움과 사랑과 위로라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의 것으로 오해하면 받을 수 없겠지요.
하느님의 구원과 도움과 사랑의 손길을 우리는 오늘 판관기의 기드온처럼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지요.
오늘 기드온은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시자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고통과 불행을 들먹이며 “지금은 주님께서 저희를 버리셨습니다.”라고 답함으로써 구원을 버림이라고 오해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구원도 사랑도 도움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받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받는 것인데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첫째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사람을 믿건 하느님을 믿건 믿는 자가 받을 자격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사람을 믿지 못하다가 하느님도 믿지 못합니다. 이 사람도 믿지 못하고 저 사람도 믿지 못하고 하다 보니 믿지 않는 것이 그의 천성처럼 되어버렸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원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구원과 도움을 원하는 사람이 받지, 원치 않거나 다른 사랑과 구원과 도움을 원하면 받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로 버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구원과 도움이 아닌 다른 사랑과 구원과 도움은 버리는,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구원과 도움을 원하는 사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버리는 사람이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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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나인가?>
우리의 전례는 이번 주간 판관기를 읽는데 오늘은 판관 기드온 얘기를 들려줍니다. 기드온에게 나타난 주님의 천사는 이렇게 말을 겁니다. "힘센 용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그리고 그러니 미디안을 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에 기드온은 이렇게 주님의 말을 되받습니다.
"나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
주님은 기드온이 힘센 용사라고 하고, 기도온은 자신과 자신의 지파가 약하고 보잘것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자신을 약하다고 하는 기드온의 말은 겸손입니까? 겸손을 가장한 엄살 또는 책임의 회피입니까?
그래서 저를 성찰케 됩니다. 과거의 저는 바쁘다는 말을 싫어했고 그래서 바쁘냐고 인사치례로 말을 걸어도 바쁘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많은 경우 바쁜 척하는 것이고 엄살을 떠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제가 싫어한 말은 자신이 없다거나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일을 앞두고 그 일에 의미를 두지 않거나 열망이 부족한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일을 앞두고 멈칫하거나 망설이고 그래서 전만큼 추진력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요즘 툭하면 하는 말이 힘이 딸린다는 말인데 그런데 이것이 사실이고 현실의 인정이기도 하지만 하기 싫은 마음에서 비롯된 방어적인 약함이거나 하지 않으려는 방어적 핑계와 엄살이 섞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힘이 약해지고 그래서 전에 쉽게 하던 일이 힘이 들게 되면 하고 싶은 마음도 줄어들고 그래서 망설이거나 멈칫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방어적인 핑계와 엄살이라고 너무 부정적으로만 말할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영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인간적인 핑계와 엄살이고 그래서 하느님은 오늘 기드온에게처럼 힘센 용사라고 하는데 나는 힘도 없고 보잘것없다고 핑계를 대고 엄살을 부리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기드온의 주님은 "힘센 용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힘센 용사가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힘도 없고 보잘것없다고 핑계를 대거나 엄살을 부리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표시일 뿐이지요.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나인지, 또는 아닌지 돌아보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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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의 구원>
-구원은 하느님께 달려 있다-
"영원토록 동정이신 마리아, 세상의 지극히 높으신 여왕이시여, 당신은 온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낳으셨도다."
아침 성무일도 즈가리야의 후렴이 잔잔한 위로를 줍니다.
-“한미일 사실상 ‘군사동맹’....격랑 한복판 선 한반도”-
어제 어느 일간지 1면의 톱기사 제목에 마음이 참 착잡했고 이어 다른 칼럼 내용에 충격과 더불어 공감한 내용 일부를 나눕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퍼디낸드가 폭풍우 속에서 외친 말이다. “지옥이 비었다.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말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여기가 지옥이다.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불길은 점점 거세져 지구 기온이 계속오르고 있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온난화 시대가 끝나고 지구가 들끓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과학은 이미 악마편에 선 것 같다.
지구전체 인구의 2배가 먹을 만큼 식량이 생산되지만, 매일 최소 약1만4천명, 매년 약500백만명이 굶어 죽는 건 식량이나 첨단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난해 그 과학이 만든 전쟁무기로 사망한 사람이 4만3천명에 달한다. 우리나라는 어느새 무기 수출 세계 8위, 성장률 1위 국가가 됐다.
망각과 둔감은 지옥의 단어다. 잊으라, 용서를 강요하는 자가 악마다. 신곡의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모든 희망을 버려라, 들어오는 그대들이여,” 희망을 가질수 없는 곳이 지옥이란 말이다. 지금 이곳이 지옥이다. 악마는 모두 여기에 있다.”
지옥은 텅비어 있으니 지옥에 있는 악마들이 모두 나와 활개치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탄식입니다. 이미 여기서 시작된 지옥입니다. 이미 그런 징후는 곳곳에 차고 넘칩니다. 반대로 이미 여기서 시작된 천국이요 하늘 나라입니다. 희망이 없는 지옥같은 세상에서 희망의 천국을 살아내야 할 우리 믿는 이들이요 그럴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40장1절 말씀이 문득 떠오릅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어제 26년전 제 자작시 달개비꽃을 어느 좋은 분이 시화詩畫로 만들어 선물로 보내 주었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달개비꽃 시화를 나눴고 위로를 받았다는 감사인사도 받았습니다. 달개비꽃시 전문을 인용합니다. 요즘 아주 낮은 그늘진 곳에서 영롱하게 피었다 잠시후 지는 남보랏빛 작은 야생화 달개비꽃입니다.
“오!
하느님이 밤사이 쏟아놓은 남보랏빛
생명의 보석들!
아주 낮은
그늘 속에 있어 잘 눈에 띄지 않는
생명의 보석들!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생명의 보석들!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져갈 수 없는 달개비꽃
생명의 보석들!”-1997.8.25
26전 요즘 여름철에 쓴 시입니다. 이때의 시적감성이 그립습니다. 이 시화 선물에 대한 어느 분의 답신입니다.
“요즘 한참이나 힘들었습니다. 신부님이 어떻게 아시고 생명의 보석꽃을 보내셨을까요. 제 마음 아시는 주님처럼 신부님이 참 신기합니다. 남보랏빛 진한 바다 물빛 작은 달개비꽃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참으로 지옥같은, 연옥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얼마나 위로의 구원을 갈망하는지 모릅니다. 주변을 보면 예외없이 온통 아프고 위로 받아야 할 참 마음이 가난한, 쓸쓸한,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위로에 굶주려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작은 시 하나에도 감격하여 고마워합니다.
어제 저녁식사후 세기시 수도원에 잠시 거주중인 젊은 몇분 형제들에게 “겸손의 수련”으로 여기며 잘 지내시라고 위로의 말을 전했고 만족했습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주님의 위로와 평화, 휴식의 구원을 찾아 수도원에 옵니다. 수도원의 환대는 그대로 주님의 환대를 반영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 주님은 의미심장한 답을 주십니다. 부자가 구원받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할 것이란 말씀은 부자의 구원은 불가능할뿐더러 이렇다면 모두의 구원 역시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은 무조건 구원을 받을 것인가, 그것 역시 아닐 것입니다. 제자들의 반문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를 눈여겨 보시며 최고의 명답을 주십니다. 결론하여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참으로 하느님의 회개 은총으로 새로워질 때, 모든 삶의 어려움을 주님을 닮아가는 겸손의 수련, 겸손의 계기, 비움의 수련, 비움의 계기로 삼을 때, 그리하여 작은, 가난한, 겸손한 영혼으로 살 때 구원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부자라도 하느님의 회개 은총으로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나눔에 항구하다면 이런 부자의 구원은 너무나 자연스러우니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가난하다 해도 마음이 탐욕이나 부자에 대한 질투로, 증오로 가득차 있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성무일도시 힘차게 불렀던 몇 성구가 떠오릅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느님을 뵈오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바로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옥같은, 연옥같은 세상이라 하느님을 추호도 탓할 수 없습니다. 무지한 인간의 탐욕으로 자초한 재앙이요 불행의 연옥이요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께 두고 참으로 주님의 회개 은총으로 지옥같은, 연옥같은 세상에서 날마다 거듭 새롭게 하늘 나라 천국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파스카의 삶이요 이의 빛나는 모범이, 연옥같은, 지옥같은 세상에서 하늘 나라 천국을 살았던 분이 바로 오늘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입니다. 특히 잠자리에 들기전 성모찬송가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요!
“여왕이시며 사랑에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세상살이 끝날 그때 당신 아드님, 우리 주 예수를 뵙게 하소서.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마리아!”
우리의 희망과 기쁨, 위로의 샘이신 동정마리아 성모님이 구원받은 자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났던 주님과 하나되어 살았던 주님의 천사로부터 격찬을 받았던 우리 어머니 성모님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참으로 회개로 깨끗해진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이 보속 말씀 처방전을 받고 환호하던 어느 수녀님의 탄성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신부님! 보속이 아니라 보석입니다. 생명의 보석 말씀입니다!”
그 빛나는 모범이 동정마리아 성모님에 이어 제1독서 하느님께 불림 받아 주님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을 만난 기드온 판관입니다. 기드온을 찾아 온 주님의 말씀에 이어지는 주고받은 대화입니다.
“힘센 용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너의 힘을 지니고 이스라엘을 미디안족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여라. 바로 내가 너를 보낸다.”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입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그대로 위로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대목도 은혜롭습니다.
-“아, 주 하느님, 제가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주님의 천사를 뵈었군요!”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결코 죽지 않는다.”
기드온은 그곳에 주님을 위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주님은 평화’라고 하였다.-
똑같은 위로와 격려의 주님께서 이 거룩한 제단의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우리 모두 하늘 나라 천국의 일꾼으로, 위로와 평화의 사도로, 희망과 기쁨의 사도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당신 성자의 모친을 우리의 어머니와 여왕으로 모시게 해주신 하느님, 그의 전구로 보호를 받는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서 당신 자녀로서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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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마태19,23)
<(1)부자의 의미!>
오늘 복음(마태19,23-30)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인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 의미로만 받아들인다면, 부자는 구원에서 영원히 제외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그럴까?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들은 비유적, 은유적 표현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자라는 단어에 숨겨져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돈과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계명을 실천할 때 받는 복입니다.
하지만 돈과 재물에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바로 안주의 유혹이고, 우상숭배의 유혹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자기소유로만 하는 유혹과 돈과 재물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우상숭배의 유혹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이런 유혹을 경계하라.'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이 단순히 돈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 돈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19,27)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19,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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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오 복음 19장 26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태오 복음 19장 23절.24절)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하는 제자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오 복음 19장 26절)
낙타가 아주 작은 바늘 귀를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단순한 믿음'에서 나온다는 '묵시적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 하느님보다 재물을 첫째 자리에 놓고 살아가는 사람,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지 않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 이는 우리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을 굳게 믿으면, 우리 안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가능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잘 안 되는 것,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바로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어제와 다르게, 아니 조금 전과 다르게 '내가 변하는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변하는 회개, 그것도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하는 회개는 정말 불가능해 보입니다. 내 힘,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아!"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고, 하느님의 힘으로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9장 30절) 그러니 늘 깨어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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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XAhfIJj9d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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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 24)
은총으로
채워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은총의
하느님께서
먼저
작아지십니다.
우리가
더 작아지면
못 빠져나갈
바늘구멍이란
없을 것입니다.
깨어있는
삶이란
우리자신이
작아지는
삶입니다.
작아져야 할
대상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버려야
빠져나갈 수 있고
비워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를 버려야
하느님을 위한
빈자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나의 뜻을
버려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나누어야
작아질 수
있습니다.
작은
바늘구멍을
못 빠져나가기에
우리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빈곤한 이가
있기에 부자가
있는 것입니다.
위 아래의
구분이 아닌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많이 지녀서
못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
나누고 감사하는
기쁜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작아지면
모든 것이
하느님 나라의
은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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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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