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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화장실귀신
큰집은 읍에서 제일 큰 한옥이었다.
안채에서 돌계단을 내려가면 작은 연못이 있고, 연못 건너편에 별채와 큰 대청마루가 있는 사랑채가 있었다.
읍내 사람들은 이 대청마루를 사랑마당이라 불렀다.
타지의 선비들이 쉬어 갈 수도 있고, 읍내의 대소사가 거의 여기서 열렸던 탓에 그렇게 불렸지만, 이 사랑마당은 매일 밤, 마을 사람들이 죄다 모이는 장소로 더 소문나 있었다.
실제 겪었다는 판술아재의 괴기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매사에 모르는 것이 없고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으며, 귀신도 곡할 손재주를 가진 사람이어서 마을 사람들은 물론 읍내 사람들도 판술아재의 괴담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우리집 앞의 개울 건너 씨락아지매나 대나무숲의 무안댁 그리고 과수원 모퉁이 양철집 돌출이는, 판술아재의 괴담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어서 판술아재의 괴담은 허구가 아니었다.
사랑마당 앞의 돌담에 보름달이 떠오를 때였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사랑마당에 들어 온 판술아재가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내가 오늘은 무신 이야기 한다캤재?”
사랑마당 끝에 걸터앉아 있던, 과수원 모퉁이 빨간양철집의 돌출이가 대답했다.
“새로온 쎄엔님이 학교 밴소기신 한테 홀린 이바구 한다고 했심니더.”
판술아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나? 인자 나도 늙었는갑다. 요새는 돌아서몬 이자삥게.”
한숨 쉬듯 씨락아지매가 말했다.
“그런 말 마이소. 나는 늙었다는 소리가 제일 싫어예.”
판술아재가 유자나무에 걸린 보름달을 쳐다보며 씨락아지매의 말을 받았다.
“화무는 십일홍이요, 저 달도 차면 기우는 법. 가는 세월을 누가 잡겄소?”
씨락아지매를 곁눈으로 흘겨보며 무안댁도 한마디 했다.
“아재 말이 맞소. 참말로 허벌나게 빠른 세월이지라.”
배시시 웃는 무안댁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판술아재는 궐련을 꺼내 입에 물고 두루마기를 뒤적거렸다.
눈치 빠른 돌출이가 잽싸게 무릎으로 기어 와서, 판술아재의 담배에 성냥 불을 붙였다.
씨락아지매가 무안댁과 판술아재를 번갈아 보며 한마디 했다.
“아따! 숨넘어 가겄다. 퍼뜩 안하요?”
씨락아지매의 말에 쫓기듯 판술아재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학교에 소사로 취직한지 꼭 석 달째 되던 날이었지 싶다. 이름은 가물가물해도 성은 배씨였지. 키도 훤출하고 인물도 읍내 제일이었는데 그런 학교에 자원해 온기 참 신기하대.”
“학교가 우땠는데요?”
“왜정 때 판대기로 지은 학교라 신식 학교하고는 틀맀거든.”
“요새같으면 그런 선생은 없을거여유.”
씨락아지매와 무안댁이 입 맞춘 것처럼 동시에 찔레네를 타박했다.
“고 주둥이 몬닥치나? 자꾸 이야기 가로채면 아재 힘들다!”
두 여자의 타박을 맞은 찔레네는 더 이상 나서지 않았고, 판술아재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마을 초입에서 한참 떨어진 초등학교에 부임해 온 15일 만에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으나 배선생은 집으로 가지 않고 아이들과 학교의 낡은 곳을 고치기로 작정했다.
아이들의 도움으로 수리를 일찍 끝낸 배선생은 고마운 마음에 남은 자재로 여러 명이 함께 탈 수 있는 썰매를 만들어 주었다.
아직 얼음이 얼지 않아 탈 수 없었지만, 썰매를 머리에 이고 깡충깡충 마을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배선생은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날 밤이었다.
운동장 옆의 텃밭에서 흙 파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먹이가 없어 학교 텃밭으로 내려온 멧돼지를 쫓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교장선생님이 신신당부한 더덕밭을 지켜야 했기에 배선생은 창문을 열고 창 앞에 걸린 종을 여러 차례 울렸다.
멧돼지들의 달아나는 소리를 확인하고 배선생은 다시 책상에 앉았다.
이제 막 방학이 시작되었지만 배선생은 신학기 교육자료들을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정리된 스크랩을 스테플러로 분류하던 배선생의 손가락을 철심이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피가 한 방울 솟아 올랐다.
휴지가 얼른 눈에 띄지 않자 배선생은 손가락을 입으로 빨았다.
피가 멎은 손가락을 쳐다보던 배선생은 손톱이 많이 자란 것을 발견하고 책상 서랍에서 손톱깎이를 꺼내 들었다.
어릴 때, 밤에 손톱을 깎으면 귀신을 부른다는 속설을 수없이 들었지만 배선생은 미신이나 주술 같은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주저없이 손톱을 깎았다.
“딸깍! 딸깍!”
마지막 새끼손가락의 손톱을 깎으려고 했을 때였다.
어디선가 휘파람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배선생은 귀를 쫑긋 세웠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4개교실의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는 음산한 기운을 품고 불규칙했다.
휘파람소리가 들린 직후 천정의 형광등 불 빛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배선생은 벽에 붙은 스위치를 반복해서 오르내렸다.
또다시 휘파람소리가 조금 더 또렷하게 들렸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휘파람 소리에 젊은 여자의 흐느낌도 섞여 있었다.
“으흐흐흐으응. 으흐흐흐으으흑.”
머리끝이 쭈뼛 서는 여자의 흐느낌이 예사롭지 않아 배선생은 복도 등을 켜고 교무실 문을 열었다.
복도의 형광등도 깜빡거리고 있었다.
싸늘한 냉기가 교무실 안으로 들어왔을 뿐 복도엔 아무것도 없었다.
배선생은 자리로 돌아와 음산하고 기이한 소리들이 다시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삐이이익. 찌이이익.”
좀전의 소리와 전혀 다른 소리가 역시 복도 끝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천정의 형광등도 크게 깜빡인 후 일제히 나가버렸다.
캄캄한 어둠이 교무실을 채웠다.
예상하지 못한 어둠 속에서 배선생은 허겁지겁 랜턴을 찾았다.
다행이 랜턴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랜턴을 켰을 때 기이한 소리는 교무실을 향해 다가오는 듯했다.
배선생은 잔뜩 웅크린 자세로 들려오는 소리에 온 신경을 쏟았다.
“삐이이익 삐이이익.”
그 시간.
칠흑 같은 어둠 속의 네 번째 화장실에서, 온몸이 썩어 너들너들한 여자가 미끄러지듯 걸어 나왔다.
허리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간간이 드러나는 해골이 달빛에 반사되었다.
여자는 곧바로 뒷산의 숲을 지나 공동묘지로 갔다.
“오늘 밤 내가 기다리던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하니, 너의 옷을 좀 빌려다오.”
비석 앞에서 여자가 말하자 무덤 속에서 하얀소복이 연기처럼 솟아올랐다.
소복으로 갈아입은 여자는 공동묘지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더니 한 무덤 앞에 섰다.
“내가 타고 갈 것이 마땅찮으니, 너의 관을 좀 빌려야겠다.”
무덤 속에서 말했다.
“제 것은 너무 낡아 볼품없습니다.”
“여기는 죄다 탈관매장한 무덤뿐이라 게중 네 것이 그래도 온전하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덤이 갈라지고 낡은 관이 나왔다.
여자는 낡은 관속으로 들어갔다.
낡은 관은 공동묘지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배선생은 복도에서 계속 들려오는 소리에 바짝 긴장했다.
철봉에 매달린 그네가 움직일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했고, 마른나무 갈라지는 소리 같기도 했지만, 그네 소리는 아니었다.
한쪽 줄이 끊어져 철봉에 매달아 둔 그네가 바람에 움직일 리는 없었고, 복도의 나무들은 오래된 나무들이라 갈라질 리가 없었다.
형광등이 일제히 나가는 것도 기이했다.
얼마 전, 교장선생이 직접 학교형광등을 전부 교체했다는 말을 판술아재를 통해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소리에 배선선생의 신경은 예민할 대로 예민해졌다.
별안간 어둠 속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땡 땡 땡.”
자정을 알리는 벽시계 소리에 놀란 배선생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야구방망이를 옆에 가져다 놓고 기이한 소리가 더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찌이익 삐이이익.”
정체를 모를 소리 속에 여자의 흐느낌도 섞여 있었다.
바로 교무실 앞까지 다가온 기이한 소리에 음산한 여자의 흐느낌이 섞여 들리자 배선생의 입은 바짝 타들었다.
머리끝도 쭈뼛 일어섰다.
거의 교무실 앞까지 다가온 소리는 갑자기 멈추었다.
문득 썰매를 들고 뛰어가던 아이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겨울이 다가왔지만 아직 얼음이 얼지 않아 썰매를 탈 수 없는 아이들이 복도 끝에서 썰매를 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그럴 것 같았다.
마음을 진정하고 긴장을 푼 배선생은 방전되어 희미한 랜턴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였다.
“똑. 똑. 똑.”
교무실 문을 노크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배선생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출입문을 향해 말했다.
“어서 들어와.”
배선생이 재차 아이들을 불렀지만, 인기척은 없고 노크 소리만 계속됐다.
“똑. 똑. 똑.”
“괜찮아, 어서 들어와!”
“똑. 똑. 똑.”
“허! 이 녀석들, 들어오라니까?”
배선생은 교무실문 앞으로 다가갔다.
교무실문 앞에서, 생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상한 냉기를 느끼고 배선생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때 교무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열린 문 앞에 아이들의 썰매 대신 섬뜩한 물체가 놓여 있었다.
얼른 랜턴으로 물체를 비추었다.
랜턴 불빛에 비친 물체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아주 오래된 나무 관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놀랐지만 배선생은 침착하게 나무 관을 살폈다.
소리 없이 나무 관의 뚜껑이 서서히 열렸다.
나무 관 속은 서리 같은 설무로 서려 있었다.
그 설무 속에서 붉은 두 개의 광채가 일렁거렸다.
그 붉은 광채는 소복여자의 두 눈이었다.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여자가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일어섰다.
“왜 이제 오셨어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답니다. 이제부터 우리 오래도록.....”
소복여자의 말에 배선생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여자는 싸늘하게 웃으며 배선생의 가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치던 배선생은 중심을 잃고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졌다.
다음 날 아침.
하얀 거품을 물고 교무실 바닥에 쓰러진 배선생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교무실 청소하러 온 판술아재였다.
뒤이어 교장선생님과 늙은 조무사가 학교로 달려왔다.
황급히 응급처치를 끝낸 조무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무사의 모습을 지켜보던 교장선생이 배선생의 상태를 물었다.
“어떻습니까? 괜찮을까요?”
대답 대신 조무사는 긴 한숨만 또 내쉬었다.
걱정스럽게 배선생의 사지를 주무르던 판술아재도 답답해서 조무사에게 물었다.
“세엔님, 우리 배센님 이러다 죽는 거 아입니꺼?”
조무사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조무사의 응급처치를 받고도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교정선생이 조무사를 다그쳤다.
마지못해 조무사는 배선생의 가슴에 찍혀 있는 희미한 자국을 가리켰다.
“여기 보시오. 이 자국이 뭔지 알겠소?”
“이거요? 글쎄, 사람 손바닥 같지만 아닌 것도 같고.”
교장선생보다 배선생의 가슴 자국을 더 면밀히 살피던 판술아재가 경련하듯 외쳤다.
“아! 그거?”
놀라는 판술아재에게 교장선생이 물었다.
“이게 무슨 자국인지 아나?”
판술아재가 배선생의 앞으로 바짝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예, 압니더. 이건 여시발자국인데, 그런데 좀 이상한데예?”
“뭐가 이상한데?”
“여시발자국이라면 세 개 일텐데 이건 네 개네예?”
조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총각이 바로 봤어요. 허지만 흔한 짐승발자국은 아니오.”
교장선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학교 뒷산이 깊긴 하지만, 여직 여우를 본 사람은 없었는데. 그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로군.”
조무사가 링거 호스에 주사기를 꽂으며 말했다.
“이 사람 깨어나면 병원으로 옮길거지유?”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간호사가 딱한 표정을 지었다.
교장선생이 물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봅니까?”
“이 사람은 병원보다 용한 무당에게 먼저 보여보소.”
“그 무슨 말입니까? 무당이라니요?”
조무사의 느닷없는 제안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교장선생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교장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을 꺼냈다.
“제가 간질도 여럿 고쳤다는 무당을 알긴 하지만 병원 검사도 안 해보고 무당한테 먼저 가보라니까 그게 조옴,”
조무사가 목소리를 지그시 눌러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일은 내가 경험해 봐서 일러주는거요. 내가 보기에 이건 예사로운 자국이 아니고, 요물이 표시해 놓은 게 틀림없소.”
“예? 요물이 표시했다고예?”
조무사의 말에 판술아재는 당혹했다.
배선생의 가슴 자국을 처음 본 순간, 그 자국은 꼬리 세 개 달린 여우의 짓이라고 짐작했으나 성급하게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무사가 돌아가고 얼마 후 배선생은 깨어났지만, 전날의 배선생과 많이 달라있었다.
마치 숨 쉬는 마네킹 같았다.
그날 오후, 교장선생의 연락을 받은 무당이 학교로 찾아왔다.
배선생을 유심히 살피던 무당은 5개의 학교 화장실 구석구석을 세밀히 둘러본 후 돌아왔다.
“입대, 사고 없었다는 게 참 희안하다. 네 번째 변소가 문제야.”
교장선생이 깜짝 놀라 판술아재를 쳐다봤다.
“교장세엔님예. 우리 학교벤소에 귀신이 있다캅니더. 우짜몬 좋심니꺼?”
황당해하는 두 사람에게 무당이 무심하게 말했다.
“어쩌긴? 귀신을 없애면 되지.”
“무슨 방법으로 귀신을 없앤다는 말입니까?”
“그야, 변소를 몽땅 태우고 양밥처방을 하면 되오.”
“네에? 화장실을 전부 불태운다고요?”
귀신을 퇴치하는 것은 솔깃했지만, 화장실 없는 학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교장선생은 크게 낙담했다.
허지만 교장선생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해방되기 10년 전.
이 학교를 지을 때 공사장에서 일하던 처녀를 죽인 감독관이 처녀의 시신을 다섯 개의 화장실 중 어딘 가에 묻었다는 뜬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그 화장실이 네 번째 화장실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그냥 덮고 갈 수는 없었다.
교장선생은 화장실을 소각하기로 용단을 내렸다.
위로하듯 교장선생에게 무당이 말했다.
“잘 생각했소. 그 조무사라는 여자. 나이 많은 산파라 아는 게 많겠지만 보통 사람은 아닌듯하오.”
배선생을 들여다보며 무당이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의 가슴에 찍힌 이 자국은 귀신의 짓이 맞소. 귀신이라도 사람을 해하는 요괴가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교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괴가 왜 하필 우리 배선생에게 이런 짓을 했을까요? 이유가 궁금하네요..”
“나야 뭘 알겠소? 할아버지께 물어봐야지.”
세차게 흔들던 부채와 방울을 내려놓고 무당은 접신의 말을 전했다.
“한을 품은 귀신이 오래되어 요물이 되었으나, 하도 오래되어 할아버지도 기억이 아물거리신다요. 그저 죽은 여자가 한을 풀지 못해 답답하다고만 말씀하시네요.”
무당이 전하는 접신의 말을 듣고 교장선생은 학교의 오랜 뜬소문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교장선생과 무당은 굿할 날짜를 논의했다.
사흘 뒤.
판술아재가 이른 새벽 뒷산에서 베어 온 큰 대나무를 화장실 앞에 세우는 동안 무당이 데려온 퇴마사들은 수건을 뒤집어쓰고 네 번째 화장실 속에 큰 갈고리를 집어넣고 휘저었다.
지독한 분뇨 냄새가 온 학교를 뒤덮었다.
화장실 속에서 건져 올린 것은 예상과 달리 한 개의 여자 목걸이였다.
무당이 목걸이를 판술아재에게 건넸다.
“이것을 흐르는 물에 정갈하게 씻어, 간곡한 마음으로 저 제단에 올려놓도록 하게.”
“이게 그 요물의 것입니까?”
무당은 교장선생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판술아재는 대충 짐작했다.
감독관에게 죽은 여자의 시신은 90여 년의 세월에 녹아 없어지고 죽은 여자가 착용했던 목걸이만 남은 것이라고 믿었다.
판술아재가 학교 옆의 개울에서 정성을 다해 목걸이를 씻어 오는 동안 교장선생과 무당 그리고 제자들이 5색 천을 들고 화장실을 빙빙 돌아 입구를 묶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굿을 시작하기 전 무당은 판술아재를 불러 앉혔다.
“자네는 신 오른 나를 잘 지켜보다 내가 이 방울을 던지면 즉시 변소에 불을 질러야 하네. 내 말 명심 또 명심. 한 치라도 어긋나면 이 굿은 말짱 허사야 알아들었는가?”
배선생이 깨어날 유일한 길이어서 판술아재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염려 마이소 시킨대로 하겠심니더.”
무당은 19마디의 대나무뿌리로 만든 가느다란 피리를 품에서 꺼내 판술아재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아주 아주 중대차한 또 한 가지가 있네!”
“네 말씀하이소. 머시든 빈틈없이 다 하겠심니더.”
“변소가 다 탈 때까지 눈을 똑바로 뜨고 불 속에서 무엇이든 날아가는 것이 있으면 즉시 이 피리를 불게. 이 피리소리를 들어야 요괴나 귀신이 다시 이승에 터를 만들지 못할 테니...”
“예. 알았심니더.”
판술아재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퇴마 굿은 해가 지자마자 화장실문 앞에서 시작되었다.
꽹과리와 태평소 북소리가 으슥한 화장실을 덮었다.
오랫동안 신춤을 추던 무당이 긴 대나무와 함께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며 격한 몸짓을 했다.
무당의 이마에서 비 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마침내, 대나무와 함께 바들바들 떨던 무당이 허공에 방울을 던졌다.
판술아재는 잽싸게 휘발유가 뿌려진 화장실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목재로 지어진 화장실은 화염에 휩싸였다.
판술아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불길 속을 꿰뚫어 봤다.
그러나 불이 다 꺼질 때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지만, 화장실 불길 속에서 날아가는 물체는 아무것도 없었다.
굿이 끝나고 불길이 꺼진 화장실 터는 뻥 뚫린 다섯 개의 변기 구멍만 흉물스럽게 남았다.
무당은 물 한 모금을 입에 넣었다 그 물을 배선생의 얼굴에 뿜었다.
잠시 후 배선생은 눈을 번쩍 뜨고 사방을 둘러봤다.
“여기가 어딥니까?”
“배선생, 이제 정신이 좀 드오? 그냥 그대로 좀 더 누워있으시오.”
신복을 벗으며 무당이 판술아재에게 넌지시 물었다.
“봤 남?”
“아니라예,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날아갔심니더.”
손을 내젓는 판술아재를 향해 무당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않아, 나는 봤네. 종이 한 장이 불길 속에서 훨훨 날아가더군.”
무당의 말에 놀란 교장선생은 이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종이가 어떻게 불 속에서 날아갈 수 있습니까? 타버리지.”
무당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요물이지. 내 눈에는 보여도 그 요물을 잡을 수 없는 것이, 그 또한 퇴마무당의 대속운명이라오.”
무당의 말에 판술아재는 찔끔했다.
매사에 신중하고 눈썰미 좋은 사람이라 인정받던 자부심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 너풀너풀 날아가는 한 장의 하얀 종이를 생생하게 목격하고도, 그 종이가 왜 불에 타지 않았는지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판술아재는 자신의 실수를 털어놓지 않고 입을 꼭 다물었다.
판술아재의 이야기가 끝나자 잔뜩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던 씨락아지매가 신음 같은 소리를 냈다.
바로 뒤에 앉아 있던 무안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와그런다요? 성님?”
사랑마루 기둥에 기대앉아 있던 찔레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보나마나 오줌 싸러 몬 가서 그라겠지.”
씨락아지매가 곱지 않게 째려봤다.
“야들이 미쳤나? 내가 나이가 몇 살이고? 요만 일에 오줌도 몬누러 갈까?”
씨락아지매와 달리 무안댁은 어울리리 않은 교태를 부리며 판술아재에게 몸을 배배 꼬아 보였지만, 판술아재는 애써 못 본척했다.
판술아재가 점잖게 말했다.
“와? 무안댁도 오데 아푸요?”
“아니어라. 아재 이야기 한 자리 더 듣고 싶어서 그라재.”
판술아재가 다독이듯 말했다.
“오늘 밤은 너무 늦었고, 내일은 내가 택시 몰다 만난 처녀귀신 이야기 해볼까 하는데 우떻소?”
“택시 몰다 귀신도 만났소? 하이고야!”
바로 내 등 뒤에 앉은 태섭형이 물었다.
“귀신도 택시를 타고 다닙니까?”
판술아재가 진지하게 태섭형을 쳐다봤다.
“요새 젊은 아아들은 안 믿겄지만 내가 겪은 일이니 참말이다. 그것도 지 사십구제 음복하러 가던 처녀였재.”
태섭형 뒤에 앉은 우리 앞집 누나가 판술아재를 거들었다.
“태섭이 니는 다 좋은데 어른 말을 안믿는기 틀맀다. 판술아재가 한 번이라도 빈 말 하는 거 봤더나? 안그렇심니꺼? 아재?”
금세 판술아재의 표정이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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