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베리칩에 대한 장로교 합동측과 통합측과 보고서와 이에 대한 다른이의 주장을 실은 것입니다.
'베리칩 = 666표'는 경솔, 그러나 다양한 종말론 존중해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2013년에 예장 합동 총회 신학부가 요한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666표를 베리칩과 연관 짓는 일에 대해 신학적으로 분명한 반대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 후 그 해 가을 합동 교단 총회에서는 이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 베리칩 논란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공식 결의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에는 예장 합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도 최근 보고서를 통해 비슷한 입장을 발표한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올 가을 총회에서는 이 이대위의 의견 또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꽤 높아 보입니다. 앞으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개신교 내 각 교단의 총회에서도 분명한 반대 입장이 통과될 듯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전체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방향의 입장도 동시에 갖고 계속 더 진지하게 이 문제를 살피고자 하는 변증전도연구소가 이때쯤은 함께 의견을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글을 씁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 현 시점에서 베리칩이 666표라고 단정 짓는 것도 경솔하지만 베리칩은 결코 666표일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것 역시 신중한 결정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물론 예장 합신 이대위의 보고서는 베리칩이 666표라고 단정 짓는 이들을 경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베리칩은 결코 666표일 수 없다는 또 다른 확정을 내림으로써 베리칩이 666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만 여기는 많은 사람들마저 불필요하게 신학적으로 부담을 갖게 하는 결과를 빚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베리칩을 경계하자는 이들이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한다면 분명한 정죄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베리칩이 666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예의주시하며 경계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정도라면 그것은 신학적인 해석 차이의 문제로 열어두어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베리칩에 대해 가타부타 의견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는 극단적으로 성급하게 베리칩이 바로 666표라고 단정하면서 불필요한 공포심을 자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인류사의 특정 문명의 이기를 벌써부터 666표라고 단정 지음으로써 그것이 단정한 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성경의 권위를 훼손할 위험성마저 쉽게 노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때때로 지나치게 앞서가는 선정적인 태도로 인해 불필요하게 많은 불안감을 자아내는 부작용을 일으키곤 합니다. 또한 밤낮 종말에 대해서만 너무 치우쳐 강조하는 바람에 정작 복음전도나 삶의 성결,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나라 확장 같은 더 중요한 신앙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는 후유증을 낳기도 하지요.
물론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언제든 이뤄질 수 있는 예수님의 재림에 깨어 있길 원하고 종말이 가깝기에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기를 소원해야 한다고 권하기도 하는 분들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베리칩을 666표라고 확정짓는 태도는 신학적으로 너무 앞서나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과 달리 베리칩이 666표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이니 경계심을 갖고 지켜보며 조심해야 한다는 정도로 합리적이고도 신중한 의심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합리적인 의심은 좀더 신중한 관찰의 대상이지 섣부른 정죄의 대상이 아닙니다. 정죄의 대상이 되는 순간부터 교조적인 분위기에 압도된 눈치 보기가 횡행하게 되어 민의는 묵살되고 음성화된 불건전한 종말론이 성행하게 될 위험이 많아집니다.
불건전한 종말론을 막으려면 먼저 종말론 논의를 공교회 차원에서 양성화하고 좀더 정당하게 토론해나가는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럴 가능성도 있고 안 그럴 가능성도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안 그럴 가능성만 붙잡고 그럴 가능성은 아예 배제시켜버릴 게 아니라(배제한다고 해서 깨끗이 없어질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깨어 경계하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베리칩이 장차 666표로 발전될 가능성도 있으니 경계하는 것이 좋으며 그런 의미에서 지금부터라도 베리칩을 받아야 할 일이 생길 경우 마땅히 받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는 태도까지 정죄해버리는 결정으로 오용될 수도 있습니다. 인류의 미래 역사와 종말을 친히 주관하실 주께서 (신학적으로도 정당한 논란이 계속되게 하시는 가운데) 아직 확정해주시지 않은 이상 모호할 수 있는, 또 어떤 면에서는 태생적으로 모호함으로 더 의미 있게 되기도 하는 종말론 분야를 놓고 너무 명확하고 깔끔한 결론을 너무 일찍 낼 필요가 있을까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정말 진실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거듭 강조하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베리칩을 666표라고 단정 짓는 데는 반대합니다. 현재로선 베리칩은 중립적인 문명의 이기일 뿐입니다. 그것을 누군가가 독재적 통치의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종교적, 경제적 통제 장치로 삼아 각자의 생존을 빌미로 자신을 강제로 경배하게 하는 우상숭배의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면, 그때부터 베리칩은 명백히 영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인데,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우상숭배를 목숨 걸고 배격하는 신자라면 누구도 그 표를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러한 적그리스도 통치의 시대가 되지는 않았지만 베리칩과 그 주변의 인프라가 총체적으로 장차 적그리스도 통제 시대에 666표로 사용될 가능성이 꽤 높아 보이니 지금부터 잘 경계하며 그 동향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일, 그러한 신학적 예의주시의 대상이 되는 만큼 신자들은 그 칩을 몸에 받을 일이 생기면 신중을 기하기 위해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안전하다고 믿고 그렇게 주위에 권면해두는 일이 잘못된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요한계시록 13장은 이 짐승의 표 부분을 아주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문맥상 상징으로 볼 근거도 희박합니다. 실제로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지목되는 네로 황제의 시대에 특정한 표를 주어 매매활동을 통제한 역사 속의 전례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과거와 미래에 걸쳐 종종 중의적으로 성취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보면, 로마시대의 네로 황제는 인류사의 여러 적그리스도적인 인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장차 인류사에 나타날 최후 적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그가 실제로 행할 매매활동 통제와 같은 정치 종교적 술수 또한 비슷한 양상을 띨 것이라고 예견해볼 수 있습니다.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계 13:15-18).
요한계시록에서 전지구상에 부어지는 갖가지 무시무시한 재앙들은 출애굽 사건 당시 이집트에 쏟아 부어진 기적적인 여러 재앙들의 재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재난을 상징으로 보려 한다면 출애굽 당시의 재앙도 실제 역사가 아닌 상징으로 보아야 하는 딜레마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당시의 바로 왕과도 대비될 수 있는 종말 때의 적그리스도 짐승의 존재나 그 이름의 표 역시 상징이라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백보 양보해 마지막때에 일어날 적그리스도와 그의 전체주의적 통치 매개물에 대해 경계하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상징으로 치부한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언급하고 사도 바울도 서신서에서 실제적인 교회의 배도와 함께 나타날 존재로 분명히 언급한 적그리스도와 그의 독재적 통치체제에 대한 경고를 신학적인 종말론의 입장 한 가지를 확정적으로 선택함에 따라 희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자칫 성급하고 부주의한 판단이 될 수 있다고 느낍니다.
무천년설자들은 인류사 속에서 여러 적그리스도들이 있어왔을 뿐 최후 종말의 때에 마지막으로 나타날 결정적인 한 사람의 적그리스도를 적시하려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여러 종말론 가운데 하나인 무천년설의 입장일 뿐이지 성경이 전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거부해온 유대인들이 장차 마지막때에 등장할 최후의 적그리스도를 거짓 메시아로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친히 예언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 아버지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 5:43).
이 예언은 여지껏 인류사에서 성취된 적이 없어 아직도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래의 어느 때에 등장할 적그리스도를 그들의 거짓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예수님의 예언을 실제 역사 속에서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 마지막때에 실제상의 한 국가로 예전의 고토에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된(겔 37:21) 이스라엘의 존재 역시 최후의 적그리스도를 상징화시킬 경우 함께 상징화되어 결국 묵살되어버리고 맙니다.
현재 안타깝게도 국가로 회복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다시 짓는다고 하고 구약 제사를 다시 회복시킨다고 하는 일들은 모두 거짓 메시아 적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일들입니다. 결국 그 적그리스도는 예수님이 다니엘서를 인용해 예언하신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마 24:15)이라고 말씀하실 때의 그 '가증한 것'으로 등장할 겁니다. 그는 또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 내세우느니라"(살후 2:4)고 말할 때의 그 참람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지금 한국은 세월호 문제로 정국이 꼬일 대로 꼬여 있는데 그 근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으로는 정말 진실이 무엇인가를 찾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봅니다. 드러난 양상들은 분명히 이 쪽을 가리키고 있는데 정치적 이해관계는 또는 신학은 저 쪽을 보는 것으로 그치라 한다면 수긍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가 의문이 해소되지 않아 불필요한 긴장을 지속시키는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베리칩 문제는 어쩌면 하나님 안에서 각자가 가진 신앙양심과 신자로서의 존재 자체를 타협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들에게는 외부의 강제적인 결정에 여전히 수긍하지 못한 채 혼자서 방황의 시간을 보내려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제가 나름대로 변증적인 접근 차원에서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그런 분들이 조금이라도 균형잡힌 이해를 하는 데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사회참여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전통 교리를 수호하려는 열심 때문에 보편적인 진실 대신 자신이 신봉하는 교리나 신학을 은연중 더 우선하는 경향을 보이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현실과 신학간의 교리적 균형을 두루 이루고자 하는 노력이 때로는 많이 아쉽기도 합니다.
특히 종말의 때에 하나님 말씀의 진리가 성취됨으로 인해 드러나는 특별한 현상들은 일부러 무시하고 외면하려 한다 해도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과 피해갈 수 없이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언젠가는 각자가 거기에 대해 특정 반응을 선택해야만 할 때를 맞게 될 것입니다. 그때 늘상 자신의 관심사에 국한해서만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적용하려는 데 익숙하던 이들의 경우 한꺼번에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아픔을 경험해야겠지요. 그러한 충격을 피하고 하나님나라를 자신의 취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부분적으로만 보는 데 그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차근히 하나님의 말씀을 치우침 없이 두루 살펴 현실을 조명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과장된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활동도 결정적 요소 아니다
변전연은 베리칩과 666표를 연관시키는 이들이 대체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의 활동에 대해서도 거기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그들의 비밀스런 동태를 살피며 미래를 예견하고 짜맞춰보려는 일들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없이도 종말의 역사를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실 수 있습니다. 그들의 동태를 살피지 않고 성경만 사용한다 해도 명백한 종말의 징조들은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지금도 베리칩이든 무엇이든 신자의 몸에 경제활동이나 어떤 특정 편의를 위해 인공적인 칩 같은 걸 박아 넣는 일에는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예속됩니다. 그분이 우리가 먹고 사는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신용카드와 달리 우리 몸에 직접 어떤 경제 수단을 심는다는 건 예배 차원에서도 위험하다고 믿습니다. 주님의 소유인 우리 몸을 주님이 아닌 다른 외적 수단에 맡긴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니까요.
베리칩은 적그리스도의 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베리칩이 적그리스도의 표로 사용된다 하더라도 그 표는 적그리스도의 전체주의 독재 체제 아래 시행되며 사람들의 경배를 먼저 요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계 14:11).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지옥이 상징이 아니듯 저는 짐승의 이름 표 역시 상징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해오던 자가 결국 그 적그리스도의 때에 그 표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표는 영적으로는 지금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각종 우상을 섬기며 사는 자들이 이미 받고 있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느부갓네살 치하의 다니엘과 세 친구, 로마황제시대의 카타콤 성도들, 일제 당시의 신사참배 거부자들, 그리고 지금 정치와 종교가 교묘하게 결합된 북한의 우상숭배 체제 아래에서(실제로 동상을 우상으로 만들어 절하게 하지요) 신음하는 지하교회 성도들은 마지막때 순교자들의 모형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지난 역사 속에 나타난 그 모든 적그리스도 모형들의 실체로 최후의 적그리스도가 등장해 최후의 우상숭배를 강요할 때에 최후의 순교사를 장식할 마지막 순교행전이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최후의 우상숭배가 진행될 그때에 신자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담대히 우상숭배를 거부해야 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앞선 순교행전의 열매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고 믿습니다(물론 지금 깨어 순교적으로 사는 신자들은 환난의 때에 이겨낼 길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코드에서 컴퓨터, 베리칩으로 666표가 바뀌어왔다는데...
지금 세상정부에서는 돈의 기능에 의료보험증, 주민등록증까지 겸한 칩 신분증을 국민들의 몸에 이식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이야기들이 풍문인 것만은 아닌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미 애완동물부터 칩 이식을 의무화해나가고 있기도 하지요.
장차 적그리스도 치하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경배하고 표 받게 하는 시스템과는 달리 처음에는 자율적으로 표 받기를 권장하다가 차츰 의무화되어나갈 거라는 점에서 조건이 좀 다르긴 하겠지만, 현재까지의 추세만으로도 신분증과 매매 수단의 통합을 통한 완전한 적그리스도 통제 사회의 전조로 볼 변증적 증거들은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바코드나 컴퓨터 등을 666이라 했다가 이제는 베리칩이 666이라 한다면서 그동안 666표의 정체가 계속 바뀌어왔다는 지적도 있는 걸 보면, 앞으로도 바뀔 확률이 다분히 높은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나노 기술 같은 게 더 발전되면 지금과 같이 쌀알만한 크기이긴 해도 어쨌든 몸에 박아 넣기에는 번거로운 베리칩마저도 뒤처지거나 폐기될 가능성이 없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 그 칩의 모든 기능을 간단한 레이저 빔 하나에 다 담아낼 최첨단 기술이 앞으로 더 개발되어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될 때에라도 그동안 바코드나 컴퓨터, 베리칩이 666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경계해온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지나온 역사를 봐도 결국 바코드는 그 자체가 666은 아닐지라도 666표가 시행될 철저한 디지털식 매매 중심의 경제활동 통제 인프라로 사용되게 된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이 시스템을 추동하는 매체의 중심에 컴퓨터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바코드가 전자 태그(RFID)로 발전하고, 컴퓨터가 통신과 인터넷을 겸한 손 안의 컴퓨터인 휴대폰으로 발전해온 것처럼, 앞으로 베리칩 역시 기술 발달에 따라 점점 더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프라이버시 침해 요소들에 대한 언론들의 수많은 날선 공방들을 무릅쓰면서까지 차츰 더 확고하게 우리 일상에 무시 못할 존재감을 드러내며 전방위적으로 옥죄어오는 이 강력한 디지털 통제 시스템의 도도한 시대적 흐름만큼은 누구도 쉽게 부인하기 어려울 겁니다.
바코드가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특정 공산품 몇 가지에만 찍히겠거니 했지 오늘날처럼 크고 작은 모든 상품에 일일이 다 찍히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대형 마트에서나 결재 수단으로 체크될 줄 알았지 오늘날처럼 작은 동네 가게에서도 지극히 디지털스러운 '삑삑' 소리로 물건값을 다 계산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나마 아직껏 최후의 보루로 남아 있는 동네 재래시장들의 매매 수단도 현금이 점점 사라져가는 디지털 시대 흐름에 맞춰 어쩔 도리 없이 ‘삑삑 거래’의 대열에 모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날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없는 세상사람들은 이런 시스템이 장차 전지구적인 독재자 적그리스도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자신의 자유와 존엄성을 말살하고 강제적으로 그 독재자를 경배케 할 도구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겁니다(여전히 믿기 어렵지만 북한이 지금 그렇게 인민들의 밥줄을 담보로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우상숭배 시스템을 작동시키고 있는 것처럼).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미래의 종말 역사를 처음부터 계획하시고 미리 다 밝혀둔 하나님의 책 성경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시초부터 종말까지의 모든 인류역사가 담긴 역사서이기도 한 특별한 책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종교 경전의 하나일 뿐일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장차 독재 시스템의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이 충분한 베리칩 시스템 문제를 진단함에 있어 자신의 특정 종말론 신학 입장을 절대시한 나머지 다른 정당한 종말론 입장들을 무시하려 한다면 너무 성급한 판단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더구나 그 문제는 수많은 성도들의 영원한 생명의 안위가 달려 있고(구원론이나 칭의론 논쟁을 떠나 적어도 요한계시록 13장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할 경우) 어쩌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게 할 가능성까지 있는 것이라면 특히 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다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천년설을 절대화할 때 생기는 종말론 딜레마
하나님께서 이 정도로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앞당겨 대충 예견할 수 있을 만큼 비교적 뚜렷하게 윤곽을 보여주심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을 애써 외면하려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럴 경우 이 부분에서 가장 크게 문제시되어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을 상징으로 보는 무천년 종말설을 따를 거냐, 장차 인류사 가운데 나타날 실제 역사로 보는 전천년 종말설을 따를 거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문제되고 있는 것은 사실은 베리칩과 같은 특정 물체를 놓고 666표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요한계시록의 종말 사건들을 상징으로 볼 거냐, 실제 역사로 볼 거냐, 그리고 철저히 그 신학적 전제에 따라 베리칩 역시 666 통제 시스템의 한 흐름으로 볼 거냐, 그저 상징의 하나로 볼 거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저처럼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사건들이 어떤 부분은 상징적이지만 어떤 부분은 실제로 기록된 그대로 미래의 종말 역사 속에 일어날 것이라고 보는 역사적 전천년설의 입장을 견지할 경우, 베리칩이 666표냐 아니냐는 부차적인 문제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더 본질적인 관점은 장차 적그리스도 체제가 실제로 등장해 전 세계를 지배할 것이며 그 적그리스도가 매매 활동을 통제할 어떤 수단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할 터인데, 그 수단이 시대 흐름으로 볼 때 베리칩과 그 주변의 연관 시스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종말론 분야는 신학적으로 여러 해석이 가능하기에 신학자들 간에도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며 일부러 최종 결론을 유보해두고 있는 영역입니다. 어느 한 입장 곧 무천년설을 절대화해서 교조적으로 주장한다면 그것은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놓지 않고 어느 하나를 절대시함으로써 훗날 자신들의 특정 신학적 입장이 결정적인 오류인 것으로 드러날 때 더 큰 책임을 모면하기 어렵게 만들 자충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종말론은 일면 지나봐야 정확한 실상을 알게 되는 그런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신학적으로 결론을 열어두는 아량과 인내가 필요한 영역입니다. 종말론 신학의 발전도 그러한 열린 분위기와 마인드 가운데서 좀더 자유롭고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거겠고요. 그런데 왜 이런 신학적 모험을 감행하면서까지 벌써부터 한 가지 종말론으로 확정하면서 좀더 성숙한 이해를 도모해가는 과정마저 사전에 차단하려 하는지 저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국내에서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미국의 초교파 복음주의 신학교인 풀러신학교에서 M.Div 과정을 공부했기에 이런 식의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미국 복음주의계에서는 한국의 많은 신학자들이 경계해 마지않는 세대주의 신학(물론 극단적인 세대주의 종말론 신학은 경계 대상이지만)이 가진 영향력이 상당히 큽니다.
달라스신학교나 탈봇신학교, 무디신학교 등은 미국 복음주의의 중요한 한 지류인 세대주의 신학의 본산이며, 침례교 역시 개혁주의를 따르는 곳도 있지만 세대주의에 온정적인 교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유독 한국은 다양한 해석적 입장이 가능한 특정 신학적 논점에 대해, 그것이 복음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것일 경우에도 충분히 관용적이지 못한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세대주의 신학에 동의하지 않고 또 종말론 입장도 역사적 전천년설을 지지하는 쪽에 있지만, 종말론 부분에서 일면 세대주의 신학이 복음주의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의 시각을 열어주는 데 기여한 면이 분명히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적어도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모든 내용을 다 상징으로 보고 교회시대에 이미 다 이뤄져오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 무천년설의 단점을 파악하고, 상징적으로 해석할 것과 문자적으로 봐야 할 것,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과 그 연장선상에서 미래에 일어날 것을 구분하여 시대의 징조들에 대해 긴장감과 경각심을 갖게 해준 면은 세대주의 신학이 복음주의 신학에 일정 부분 기여한 측면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진실을 가려내기 위한 건설적인 혼란은 때로 필요하다
베리칩 논란으로 성도들 간에 혼란과 불안이 조성된다는 게 지금과 같은 신학적 통제의 이유라면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그 불안이나 혼란은 예수님이 곧 다시 오신다는 데 대한 더 큰 소망으로 귀결될 과정상의 진통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또 실제로 그 소망으로만 잠재울 수 있는 것입니다. 혼란을 일으키는 현상 자체를 신학적으로 통제하려 해서는 정당하게 제대로 통제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혼란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자체 정화가 이뤄지기도 하고, 성경적인 것이 아닐 경우 결국 스스로 소멸되거나, 무언가 성경적인 근거를 가진 경우에는 여러 사람들에게 대중적으로 어필하며 살아남기도 하겠지요. 이런 자연스런 열매들이 역설적으로 혼란의 과정을 통해 제대로 걸러지기도 한다고 봅니다.
궁극적으로 혼돈과 불안은 건전한 종말론이 양성화될 때 조금씩 사라져갈 것입니다. 그동안은 이런 논의 자체가 신학적 전제에 따라 대체로 금기시되거나, 논의되더라도 공정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하는 바람에 적어도 종말론 부분에서는 비제도권 중심으로 이른바 신학적 ‘장외투쟁’ 양상이 벌어져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건전한 종말론의 발전 측면에서도 이런 구도는 좋지 않다고 볼 때 너무 일찍 이런 종말론 분야의 민감한 부분들을 칼로 무 자르듯 정리해버리는 것은 그냥 놓아두는 것보다 어쩌면 더 큰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도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의 중차대한 운명과 관련되어 있는 소중한 종말론의 영역이 왜 이토록 제도권 신학자와 교회들의 관심권 바깥에 방치되어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미선교회 사태로 인해 한 번 홍역을 치른 후유증 탓이겠지요. 그러나 명백히 이단적인 시한부 종말론과, 예수님과 사도 바울도 언급한 종말의 시대적 징조, 적그리스도 체제의 도래 움직임 같은 일들은 옥석을 가리는 차원에서라도 조직신학자들이 중대한 관심을 갖고 책임 있게 신학적 혼돈을 줄여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동안은 거의 전혀 제대로 된 통합적 논의나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듯하다가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리며 성도들의 삶속에 불쑥 끼어들 경우, 베리칩 논란에 대해서도 온건한 경계심을 갖고 종말에 깨어 있으려는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까지 어색하게 양단간의 입장을 억지로 강요받게 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리진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오히려 혼란을 겪는 과정 가운데서 우려할 만한 일들이 벌어질 때 그것은 목회현장에 있는 목회자들이 케이스별로 지혜롭게 해결할 몫으로 남겨둠이 더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놓아두는 것이 교단적, 신학적 차원에서 획일적으로 통제하려 하는 것보다 후유증이나 부작용이 덜할 거라고 봅니다.
베리칩을 받아도 좋다고 적극 권장할 것이 아니라면 베리칩이 문제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 또한 일말의 오류 가능성이나 잠재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을 것은 자명합니다. 오히려 “이러이러하여 1%라도 베리칩이 우상숭배의 도구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어 보이니 나중에 베리칩이 상용화되더라도 우리 교단 소속 목회자와 교우들은 이 칩을 받지 않는 게 좋겠다”고 권고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더 조심스럽고도 신중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베리칩의 위험스런 잠재적 가능성을 강하게 경계하는 바람에 신자들 가운데 생겨날 수 있는 두려움과 혼란보다 재림의 때가 가깝다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갖기 싫어하는 신자들의 미지근한 태도가 더 위험하고 두려워해야 할 일은 아닐까 싶습니다. 유독 우상숭배의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해온 예장 고신 소속 신학자나 목사님들 가운데는 베리칩까지 666표 우상숭배의 매체로 사용될 가능성을 포함시키면서 종말의 때에 깨어 있을 것을 강하게 경계하시는 모습들을 가끔 봅니다.
일제 신사참배를 국민의례의 하나라고 강변했던 과오
과거에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심각한 우상숭배가 아니라 단순한 국민의례의 하나라고 강변하여 신사참배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과오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도 적그리스도 우상숭배 체제의 그림자 모형에 불과했던 그 신사참배 사건에서 여전히 합당한 교훈을 얻지 못한 채 정작 실체적으로 최후 적그리스도의 우상숭배가 지상에서 시행될 때 본의 아니게 또 한 번 동일한 실수를 반복해서 짓게 하는 정지작업으로 오용될 소지도 있지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신자들의 몸에 강요될 666표란 것은 상징에 불과한 것이고 베리칩 역시 편리한 문명의 이기일 뿐이다. 장차 전세계적으로 적그리스도 체제가 서게 된다는 것 또한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허황된 이야기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천년설을 절대시하려는 조급한 신학적 치우침일 뿐입니다. 정당한 다른 종말론의 현실화 가능성을 너무 일찍 닫아버리는 것이라면 재고에 재고를 거듭해서라도 최종 결론을 좀더 열어두고 유보해둔 채 더 올바르고도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결국 베리칩 논란과 관련한 일련의 신학적, 교단적 조치나 결정은 곧 사람이 내리는 해석의 제한된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여러 입장을 존중하며 공존해온 종말론들 중 무천년설만을 정통교리화하고 역사적 전천년설이나 다른 전천년설은 일단 모두 사이비로 보겠다는 입장을 공식화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베리칩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칫 신학적 착각이 될 수 있거나, 아니면 훗날 치명적 오류로 밝혀질 경우 책임의 수위를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높이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만큼 연약한 인간이기에 생겨날 수 있는 부작용들을 케이스별로 목회적 차원에서 해소해나가려는 작업과 심각한 시대적 사안에 대해 좀더 균형있게 올바로 분별해나가려는 신학적 차원의 작업은 서로 적절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구분 없이 이 문제를 도매금으로 일괄처리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칫 목욕물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본의 아니게 이와는 다른 견해를 품은 가운데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며 교회의 건전한 지도를 바라고 있는 많은 성도들을 포기하게 되거나 그들을 음지로 내몰게 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교회는 시대의 징조들에 대해 깨어 있어 그때그때 적실하게 파수꾼처럼 나팔을 불어야 하고, 신학자들 또한 그 일에 대해 책임 있고도 신중하게 대응하여 신학적으로나 목회적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을 믿음과 말씀 안에서 보호해야 함이 마땅한데도 말입니다.
사회적으로 베리칩을 통해 또 다른 종말론 소동이 벌어질까 우려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긍부정의 양면이 있다고 봅니다. 이를 통해 제2의 다미선교회 사태처럼 “또 종말 타령이구나” 하는 핀잔과 잔소리들은 좀 듣겠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사람들도 성경이란 책이 미래의 디지털 사회에 대해서까지 무언가 신빙성 있는 예언들을 담고 있는가에 관심 갖게 함으로써 어느 누군가에게는 전도의 접촉점으로 활용될 수도 있을 겁니다.
절대진리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말세의 징조들에 깨어 있는 종말론은 과하지 않게 지혜롭게 활용할 경우 성경의 역사성과 사실성을 드러내는 좋은 변증전도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또 온통 세속주의에 휩쓸려 예수님만을 사모하고 그분만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아야 할 교회의 본질, 신앙의 본질을 차츰 잃어가고 있는 때에 그 본질을 회복하도록 강하게 도전하는 면에서도 건전한 종말의식과, 종말의 시대적 징조와 현상들에 대해 성경에 입각하여 차분히 관찰하고 경각심과 영적 긴장감을 갖고 깨어 있고자 하는 자세는 요긴하다고 느낍니다.
종말론은 베리칩보다 훨씬 더 크다
베리칩 한 가지를 정죄한다고 해서 그릇된 종말론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금세 올바른 종말론이 조성되는 것도 아닐 겁니다. 그런 점에서 베리칩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베리칩 현상 자체에 지나치게 관심 두는 것에 대해서는 저는 강하게 반대하고 싶습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경외하는 신자들에게는 베리칩을 포함해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종말론은 베리칩보다 훨씬 더 큽니다. 종말의 징조나 현상들도 무시해선 안 되겠지만 종말론이나 종말의식이 그런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좌우된다고 보는 것도 치우친 태도겠지요. 중요한 것은 깨어 있는 건전한 종말의식을 갖고 궁극적으로는 신자다운 거룩성을 회복하는 삶에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베리칩 현상도 이런 맥락에서 좀더 넓고 크게 장기적으로 품고 생산적으로 함께 고민하면서 더 성경적으로 균형 잡힌 바람직한 해답과 대안을 찾아나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두서없고 부족하지만 누구를 탓하거나 두둔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다만 현재의 한국교회 성도님들을 향해 품지 않을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누는 글이오니 각자 상황에 맞게 참고하시고 종말을 살아가는 삶의 현장 가운데서 나름대로 의미 있고 분별력을 갖춘 균형을 잡아가시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고 감사하겠습니다.
-안환균 목사/ 변증전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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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칩은 과연 666 짐승의 표인가?
[단독입수] 예장 합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보고서(안)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666 짐승의 표' 카테고리 NO1974 게재글 참조 바랍니다.
최신의 원격의료 관련 바이오칩 관련 입니다.
좋은말씀 감사드립니다 ~ 같은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