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 1]
Cielito Lindo - 3 Tenores
[Music - 2]
Shostakovich / Symphony No.5 - BBC / Gergiev (Condu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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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toon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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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Scrap Files]
# 1. 가는데 20분 … 싸이를 위한 잔치였다
MTV 유럽 뮤직 어워드
‘강남스타일’ 베스트 비디오 수상
유튜브 조회 7억 … 역대 1위 눈앞
11일(현지시간) MTV 유럽 뮤직어워드에서 싸이가 공연하고 있다. 싸이는 이날 베스트 비디오상을 받았다. [프랑크푸르트 AFP=연합뉴스]
돌풍의 끝은 대체 어디일까. 월드스타 싸이(본명 박재상·35)가 연일 낭보를 전해오고 있다. 이번엔 그의 ‘강남스타일’이 올해 유럽에서 가장 사랑 받은 뮤직비디오로 뽑혔다.
싸이는 11일(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 페스트할레에서 열린 ‘MTV 유럽 뮤직 어워드(MTV EMA 2012)’에서 한국 가수 최초로 ‘베스트 비디오’ 상을 수상했다. 함께 후보에 오른 팝스타 리아나·레이디 가가·테일러 스위프트 등을 제쳤다.
이날 행사는 싸이를 위한 잔치 같았다. 저스틴 비버·레이디 가가·리아나 등 세계 최정상급 스타가 불참해 김이 다소 빠진 시상식장에 그가 열기를 불어넣은 듯 보였다. 전세계 60여 개 국에 생중계된 이날 행사에서 싸이는 초대가수로 나와 ‘강남스타일’을 열창했다.
싸이가 무대 밖에서부터 노래를 부르며 등장하자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말춤을 따라 추며 ‘강남스타일’ 후렴구 “헤이 섹시 레이디”를 합창했다. 이날 사회를 맡은 톱 모델 하이디 클룸은 “올해는 싸이가 큰 성공을 거둔 해”라며 그를 “팝의 왕”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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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는 입장 행사 때도 앨리샤 키스·테일러 스위프트·뮤즈·노 다웃 등 다른 참가자보다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싸이가 약 50m의 레드 카펫을 통과하는 데 20여 분이 걸렸다. 외신들의 즉석 인터뷰 요청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참가자 가운데 가장 오래 레드 카펫 위에 서 있어야 했다.
시상식 뒤 본지와 만난 싸이는 “이 모든 일이 믿기지 않는다. 이곳 관객들이 한국어로 노래를 하고 있는 것, 한국인 최초로 MTV 시상식 무대에서 공연을 한 것 모두 정말 자랑스럽다. 가슴 벅찬 날”이라고 말했다.
◆유튜브 1위 넘본다=‘강남스타일’은 11일 유튜브 뮤직비디오 조회수 7억 건을 넘어섰다. 공개 약 4개월 만이다. 이 기세라면 ‘역대 가장 많이 본 동영상’ 1위 등극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1위는 7억 9800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 중인 저스틴 비버의 ‘베이비’ 뮤직비디오다. ‘강남스타일’은 미국에서 ‘더블 플래티넘(200만 장 이상 팔린 음반)’ 반열에도 올랐다. 미국레코드협회(RIAA)는 10일 “‘강남스타일’의 디지털 싱글 판매량이 200만 건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싸이는 18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AMA)에서도 ‘강남스타일’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프랑크푸르트=이상언 특파원
서울= 송지혜 기자
# 2. ‘김정남 망명’ 질문에 눈만 껌뻑인 원세훈
국회 정보위 출석
“마카오에 없다는 건 확인”
2009년 평양 별장 습격설엔 “시인도 부인도 않는다”
원세훈 국정원장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이 12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지난해 12월 사망)의 장남인 김정남(41)의 망명 가능성을 묻는 국회 정보위원들의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민주통합당 정청래 의원은 이날 정보위 직후 브리핑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서 김정남이 망명할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고 묻자 (원 원장이) 대답 않고 눈만 껌뻑껌뻑했다”고 말했다. 정보 당국은 지난달 31일 김정남이 우리 정부에 망명을 요청했다는 설이 제기되자 경위 파악에 나선 바 있다. (중앙일보 11월 1일자 2면)
정 의원에 따르면 이날 정보위에서 원 원장은 김정남의 소재를 묻는 질문에 “확인해 줄 수 없다. 다만 현재 김정남이 마카오에 없다는 건 확인했다”고 답했다. 대북 정보기관의 수장이 김정일 일가의 행방에 대해 특정지역에 있는지 여부를 단정적으로 언급한 건 이례적이다. 김정남이 한때 서울에 왔었다는 추측에 대해선 “서울에 없다. 사실이 아니다”고 분명하게 답했다.
원 원장은 또 북한 국가보위부가 평양에 있는 김정남의 근거지를 습격했다는 설에 대해선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습격설은 2009년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28)이 이복형인 김정남이 머물던 ‘우암각’ 별장을 뒤지고 관련자를 잡아간 평양판 ‘형제의 난’을 말한다.
원 원장은 또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방한계선(NLL)에 관한 대화록과 김정남 망명설이 12월 대선판을 흔들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선 “그럴 일 없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원 원장은 “김정남을 서울로 망명시켜 대선 국면을 흔들겠다는 항간의 설이 있다”는 일부 야당 위원의 질문에 이같이 답하며 “국정원이 그 부분에 관여하거나 공작해 12월 대선에 개입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대선이 임박한 시점에 국정원이 (정상회담) 대화록을 조작해 공개할 수 있다는 설이 있다”는 위원들의 질의엔 “그럴 일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의 대화록과 관련, “북쪽에서 받은 녹취록이 있느냐”는 질문엔 원 원장은 “국정원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이에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 대면(對面) 보고로 깊게 확인해 알아보고 나에게 보고해 달라고 (원 원장에게) 요청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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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국정원에 대화록 열람을 요청한 서상기 정보위원장은 “국정원 측에서 열람이 불가하다고 공문을 가져왔는데 공문 자체가 비밀이어서 주지는 못하겠다고 하더라”면서 “공문을 첨부해야 (국정원을 자료열람권 방해 혐의로) 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공문을 받아 고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회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정당한 이유 없이 국회의 보고 또는 서류 제출 요구를 거절한 경우 3년 이하 징역과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 3. 개성공단서 귀순한 병사, 신체가…
10대 후반 … 키 크다고 전방 근무
“반찬은 거의 매일 염장무만 먹어”
복무 중인 북한군 발육 부진한 건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출생 탓
지난 8월 북한군 서해 최전방 부대인 무도방어대를 방문한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장병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우리 당국은 사진에 등장한 병사 중 상당수가 육안으로 판별할 수 있을 정도로 심한 영양실조 상태를 보이고 있으며 발육도 부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키 1m80㎝에 체중은 불과 46㎏. 개성공단 진입 도로변 북측 초소에서 근무하다 지난달 6일 귀순한 북한군 병사의 체격이다.
정부 당국자는 12일 “북한 군인으로서는 신장이 상당히 큰 편이지만 몸이 지나치게 마른 상태라 합동신문 관계자들이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 당국이 개성공단을 드나드는 남측의 시선을 의식해 키 큰 병사 위주로 선발 배치한다”고 덧붙였다.
북한이 과거에는 판문점이나 개성공단 지역에 출신 성분이 좋거나 군부와 노동당에 든든한 배경이 있는 병사를 뽑아 배치했지만 최근에는 신체조건을 중시해 징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귀순한 병사도 평범한 집안 출신이며, 군 복무 2년째인 10대 후반의 어린 병사라고 당국자는 전했다. 이 당국자는 “귀순병사가 근무하던 초소는 남측과 불과 500m 떨어진 곳으로 119만 북한군 가운데 가장 가깝게 자주 남한 측과 접하게 되는 지점”이라며 “당초 상당한 고위층 자제일 것으로 판단했으나 뜻밖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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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합동신문 결과에 따르면 귀순병사가 소속된 부대는 북한군 총참모부 직할 개성 경무대로 개성공단을 오가는 남측 인력과 물자를 통제하고 공단지역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개성 지역에 주둔한 2군단 6사단과는 다른 부대다. 이 병사는 조사 과정에서 “인민군 부대 중에서는 비교적 처우가 좋은 편이었고 쌀밥도 나왔지만 반찬은 거의 매일 염장무만 먹을 정도로 열악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국자는 “북한 군부대에서도 식량난이 심각해 급식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하는 곳이 적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김정은이 직접 방문한 정예부대에서도 식량과 보급품이 부족한 정황이 드러날 정도”라고 말했다.
군 당국은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지난 8월 서해 최전방 무도방어대를 방문해 찍은 사진 속에도 영양실조로 추정되는 병사들의 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 1월 최정예 부대인 105탱크사단을 방문했을 때도 병사들에게 치약 없이 양치질을 하도록 지시한 안내판이 드러났다. 당국자는 “북한군 내부에서도 ‘강하게 영양실조가 걸렸다’는 의미의 ‘강영실 동무’란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라며 “영양실조로 복무 중 숨지거나 귀가 조치되는 경우도 적잖다”고 말했다.
김연수 국방대 교수는 “군 복무 중인 북한군 병사들은 식량난이 극심하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 영·유아 시절을 겪은 세대”라며 “발육이 부진하고 기초체력이 부실한 병사들이 군 복무 중 적절한 급양을 받지 못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난의 행군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듬해 큰 수해로 북한 주민 200만~300만 명이 굶어 죽은 사태를 일컫는다. 당국자는 “귀순병사는 관계당국 조사를 마치고 안정을 취하면서 현충원과 63빌딩 방문 등 남한 정착을 위한 견문을 넓히고 있다”고 전했다.
귀순병사는 우발적 충동이 아니라 개성공단에 출입하는 남측 인원이나 차량을 보고 남한의 발전상을 깨달은 뒤 상당 기간 고심 끝에 한국행을 결심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국자는 “사전 계획에 의한 귀순임을 입증할 중요한 자료를 남측에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 병사는 한국 정착 후 대학에 진학해 공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 4. 여친과 덕수궁 데이트 하다가 이걸 보곤 기겁… 농성 천막 더 는다
<한번 묵인한 不法, 이제 어떻게 막나>
해군기지·원전 반대자들 외국인 관광명소 대한문 옆에 불법 농성천막 추가로 설치
쌍용차 노조 천막시위 7개월 박원순 서울시장이 옹호해 와
<철거 포기한 구청 "대선후보도 천막 옹호하니…">
지난 4·5월 두 차례 철거했지만 쌍용노조 다시 세워
그 후 朴시장 철거반대… 市 중재안 "천막 1동만 허용"
노조, 협상 무시하고 2동 세워… 區는 여태껏 손 못대
쌍용차 해고 근로자, 제주 해군기지 반대, 용산 참사, 반핵(反核) 등 시위 단체들이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보도에 농성 천막을 추가 설치하고 이를 '농성촌(村)'으로 규정했다. 농성 천막은 불법 시설물이지만 기존 쌍용차 농성 천막의 경우 당국과 경찰의 방임 속에 7개월째 유지돼 왔다.
이 4개 단체가 결성한 '함께 살자 농성촌 입주 주민과 친구들'은 12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한문 앞에 '공동 농성촌'을 만들어 농성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대한문 앞 농성촌은) 이 땅에서 쫓겨나고 내몰린 사람들의 연대의 장, 빼앗기고 억압당하는 이들의 공동 투쟁의 장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는 덕수궁 대한문은 시민과 외국인의 관광 명소이다.
이들은 지난 4월부터 설치된 쌍용차 노조의 농성 천막 2동 옆에 천막 1동을 이날 더 설치했다. 또 앞으로 1동을 더 지어 15명 내외의 인원이 상주하도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경우 대한문 앞 시위대의 불법 천막은 4개 동으로 늘어난다.
지난 4월과 5월 관할 중구청은 두 차례 쌍용차 농성 천막을 철거했다. 하지만 쌍용차 노조는 철거 인력이 철수한 뒤 다시 천막을 세웠다. 구청 관계자는 "경찰이 장소를 봉쇄하고 천막 설치를 막아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천막 철거를 둘러싸고 충돌이 생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들의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철거라는 방법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후 서울시가 중재에 나서 대한문 앞 농성 천막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무소속 안철수 대선 후보도 최근 농성 천막을 방문해 농성자들을 위로했다.
중구청 관계자는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일개 구청이 나서서 철거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고 말했다.
12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옆 보도에 추가로 설치한 농성 천막에 ‘No navy base on Jeju(제주 해군기지 반대)’란 현수막이 걸렸다. 제주 강정마을에서 2009년부터 해군기지 반대 시위를 벌여온 시위대가 내걸었다. 이 천막 옆에 지난 4월 설치된 쌍용차 농성 천막 2동이 보인다. 시위대는 여기에 천막 1동을 더 지어 이 지역을 ‘공동 농성촌’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뉴시스
12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엔 천막 3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난 4월 쌍용차 노조가 해고에 항의하며 설치한 천막 2동에 이날 농성 천막 1동이 더 설치됐다. 천막 크기는 가로 4~5m, 세로 2~2.5m였다. 시민들이 걸어다니는 폭 4m 인도 절반을 천막이 차지했다. 천막에 걸린 현수막엔 '쌍용차문제 해결하라', '해군기지 결사 반대', '용산참사 진상규명! 구속자를 석방하라!', '핵 없는 세상 녹색당' 등의 문구가 보였다. 대한문 앞에 '농성촌'을 만든 '함께 살자 농성촌 입주 주민과 친구들'은 "개별 사안도 중요하지만 힘을 합쳐서 싸우지 않으면 해결이 어렵겠다는 생각에 농성촌을 만들게 됐다"고 주장했다.
대한문 앞 쌍용차 노조의 농성 천막이 처음 설치된 건 지난 4월. 중구청은 천막 설치 즉시 철거를 실시했다. 도로법에 따라 인도·차도에 시설물을 설치하려면 관할 구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대한문 앞에 설치된 천막은 모두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시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거반이 철수하자 쌍용차 노조는 천막을 다시 설치했다.
중구청은 지난 5월 24일 다시 철거에 나섰다. 당시 노조원들이 시너통에 불을 붙이려고 해 단속반이 소화기로 불을 끄는 등 경찰·공무원과 노조원들이 충돌하기도 했다. 이병목 중구청 가로정비팀장은 "대한문 앞은 외국인이 제일 많이 오는 문화재인데, 쌍용차 노조가 문화재 옆에 시너, 휘발유통 등 위험물을 갖다 놓고 집회를 하고 기거하고 있다"면서 "외국 사람이 그렇게 많이 오고 시민들이 다니는 곳을 3분의 2 이상 점유하고 불법행위를 하는 것은 법질서를 안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두 번째 철거 직후에도 쌍용차 노조는 천막을 다시 설치했다.
12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 시위 단체들이 세워놓은 천막들 사이로 시민과 관광객이 지나가고 있다. 쌍용차 해고 근로자, 제주 해군기지 반대, 용산 참사, 반핵 관련 단체들은 이날 이곳에“농성촌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허영한 기자
이후 지금까지 중구청이 선뜻 철거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서울시의 반대 때문이다. 두 번째 철거 다음 날인 지난 5월 25일 서울시는 중구청에 긴급회의를 요청했다. 이창학 서울시 행정국장의 주재로 열린 이날 회의에서 서울시 측은 "분향소 천막 한 동만 허용하고 평화적인 집회를 유도하는 게 어떻겠느냐" "시국 사건과 관련해서는 서울시와 사전에 협의를 하자" 등의 의견을 중구청 측에 제시했다. 서울시는 중재안으로 천막 1동을 묵시적으로 허용하고 추가 설치는 곤란하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이후 서울시는 5월 31일쯤 분향소 측과 협상안을 마련해 중구청에 그 의견을 물었다. 구체적인 서울시 제시안은 ▲일반 시민의 자유로운 보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통행로 상시 확보 ▲천막 1동은 묵시적으로 허용하되 추가 설치는 곤란 ▲플래카드는 과도하게 설치하지 않고 청결한 상태 유지 ▲직접 집회 및 시위에 활용되지 않는 물품 적치(積置) 지양 등이었다. 중구청은 이에 아무런 의견을 제시하지 않아 사실상 묵인한 게 됐다. 하지만 쌍용차 노조는 서울시의 협상안마저 무시하고 천막 2동을 그대로 유지했다.
서울시가 중재에 나선 것은 박원순 시장이 천막 철거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박 시장은 5월 24일 중구청의 천막 철거 직후 트위터를 통해 "파악해 보니 중구청이 서울시와 아무런 상의 없이 철거 조치했답니다. 구청장 권한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연구해보겠습니다"라고 밝혔다.
현재 단속 권한이 있는 중구청은 대한문 앞 농성 천막 철거를 두고 보자는 입장이다. 중구청 관계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천막 시위대를 옹호하는 데다 야당 국회의원에 대선 후보들까지 쌍용차 노조를 옹호하는 상황이라 당장 철거가 어렵다"고 말했다.
# 5. <中 5세대 지도부 인물-리더십 집중탐구>
中시진핑, 토굴서 7년 살며 몸 낮춰...왜?
토굴로 쫓겨난 ‘反혁명’ 아들… 떠날땐 주민들이 60리길 배웅
본보 고기정 특파원, 시진핑 下放생활했던 산시성 량자허 현지 르포
《 중국은 8일 개막한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18차 당대회)’를 통해 10년 만의 지도부 교체에 들어갔다. 앞으로 10년간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중국을 이끌어 갈 지도자들이 어떤 인물인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중국 대륙에 떠오르는 새로운 별들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
지난달 31일 찾은 량자허(梁家河)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이 머물던 시절처럼 여전히 궁벽한 산촌이었다. 혁명성지 옌안(延安)에서 국도 210호선을 1시간 반가량 달린 뒤 농로를 20분 정도 더 타야 겨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민이래야 80가구 347명. 남북이 산으로 막힌 협곡에 자리한 탓에 ‘도대체 뭘 먹고 살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다.
○ “디댜오(低調·자세를 낮춤) 유지하라고 했다”
시 부주석은 원래 ‘태자당(혁명원로 자제 그룹) 중의 태자당’이었다. 부친 시중쉰(習仲勳·1913∼2002)은 국무원 부총리를 지냈다. 최고위 간부들의 주거지인 베이징(北京) 중난하이(中南海)에 살던 그가 량자허까지 오게 된 건 9세 때인 1962년 아버지가 ‘류즈단(劉志丹)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실각한 것이 계기였다. 산간혁명의 근거지인 시베이(西北)에서 활약하다 전사한 건국 영웅 류즈단의 생애를 다룬 소설이 마오쩌둥(毛澤東)의 심기를 건드렸다. 마오보다 류즈단을 더 치켜세우는 듯한 이 소설 때문에 류즈단의 전우이자 초고를 손봤던 시중쉰마저 반(反)혁명분자로 몰렸다. 반혁명분자의 가족이었던 그는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던 1969년 1월 량자허로 하방(下放)됐다.
당시 량자허 주민은 야오둥(窯洞)으로 불리는 토굴에서 살았다. 부잣집 도련님이던 그는 몸에 이가 옮을까 봐 농민들이 가까이 오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아무 생각 없이 빵을 개에게 던져줬다가 “부르주아 부패분자 시중쉰의 아들이 개에게 (귀한) 빵을 줬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왕(王)모 씨(73)는 “학생 몇 명(12명)이 왔는데 마을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시진핑은 책을 많이 봤고 아는 게 많았지만 일은 잘 못했다”고 회고했다.
농촌 밑바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시진핑은 3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도망갔다. 이모부에게서 “민중의 바다로 들어가라. 그게 노동개조를 받고 있는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다”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그는 비로소 그 바다에 몸을 적셨다. 시 부주석은 량자허로 돌아와 벼룩과 거친 음식, 농촌생활, 노동, 사상 등 ‘5대 관문’을 통과하며 농민들과 친숙해졌다.
그가 살던 10m²(약 3평) 남짓한 토굴의 입구는 지금은 일반 집과 마찬가지로 개조돼 관광지처럼 꾸며져 있다. 앞에 작은 매점도 있다. 매점 주인은 “일반인에게 개방은 안 되지만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다”라고 전했다. 토굴뿐 아니라 마을 주변도 새로 도로 공사를 하는 등 시 부주석의 최고지도자 등극을 앞두고 지방정부에서 적잖게 신경을 쓰는 듯했다.
토굴 취재를 마치고 주변을 돌아보던 중 갑자기 경찰차 한 대와 승용차 2대가 다가와 기자를 둘러쌌다. 공안이 끌고 간 곳은 파출소 분소로도 쓰이는 촌민위원회. 시진핑이 21세 때 서기로 근무했던 곳이다. 연행한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고 외신기자가 함부로 취재하면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들은 2시간가량 기자를 억류해 취조한 뒤 풀어줬다.
마을 자율경비대원이라고 밝힌 한 40대 남성은 기자에게 “우리도 시 부주석이 더 높은 자리로 가게 돼 정말 기쁘다. 하지만 위에서 ‘디댜오(低調·자세 낮추기)’를 유지하라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긴장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런 토굴에서 생활 중국 산시 성 량자허 촌에 지금도 남아 있는 토굴의 내부. 시진핑 국가 부주석도 1969년 하방돼 이런 곳에서 7년간 살았다. 오른쪽 사진은 시 부주석이 살았던 토굴의 외부를 깔끔하게 정비한 ‘시진핑 토굴’의 입구. 량자허=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
○ 오늘의 시진핑을 만든 ‘겸손과 온화’
2007년 10월 시 부주석이 당 상무위원으로 선출됐을 때 홍콩 다궁(大公)보는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디댜오, 핑스(平實·소박하고 수수), 첸허(謙和·겸손하고 온화), 다치(大氣·대범하고 당당)’라는 4단어였다. 이 중 ‘디댜오’와 ‘첸허’는 오늘의 시진핑을 있게 한 핵심 키워드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시 부주석은 량자허에 다시 돌아갔을 때 옌안 사투리부터 익혔다. 촌민과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다. 이곳의 거친 잡곡에도 익숙해졌으며 양말을 직접 짜서 신었다. 서기로 있을 때는 전용 승용차를 배정받았으나 엔진을 빼내 트랙터를 만들어 농사일에 쓰도록 한 일화도 전해진다. 베이징의 귀족 청년이 어느새 농군으로 변한 것이다. 주민들은 시진핑이 1975년 10월 량자허 생활을 끝내고 상경할 때 60리길을 걸어 배웅할 만큼 친근한 사이가 됐다.
량자허에서 몸에 익힌 덕목은 이후 공직생활에서 발휘됐다. 그는 푸젠(福建) 성장(대리성장 포함)으로 6년간 재직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반면 성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서민의 고충을 듣고 함께 호흡한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화권 언론이 2007년 그가 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전격 발탁됐을 때 리커창(李克强), 리위안차오(李源潮), 보시라이(薄熙來) 등 5세대 지도부 ‘4대 천왕’ 중 그를 으뜸으로 꼽은 것도 이런 품성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 석자를 따서 ‘시(習)-윗세대의 장점을 배우는(習) 데 뛰어나고, 진(近)-중앙 지도부와 지방 인민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近) 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핑(平)-평소 간부로서 태도는 소박하고(平) 겸손, 온화하며 대범하고 당당하다’는 말도 있다. 량자허에서 만난 촌민위원회의 한 청년은 “우리 마을 출신이 최고지도자가 됐다고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한 것도 그가 ‘자세 낮추기’를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사정보]
부산대 강연 안철수 인기, 풍선 바람 빠지듯~
5월엔 3천여명...정치인 안철수로 나타나자 8백여명, 학생들 '확' 줄었다!
뉴데일리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가 12일 부산대학교에서 ‘과거에서 미래로 갑니다’란 주제로 강의를 했다.
그러나 이날 강연장엔 예상보다 훨씬 더 적은 인원이 참석했고, 일부 학생들은 안 후보의 방문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하는 등 논란이 됐다.
정치인이 된 '안철수'. 그의 강연에 '정치적 발언'이 담기기 시작하자 학생들의 반응도 점차 달라져가는 것으로 보인다.
■ 지난 9일 총학생회가 자유게시판에 '안 후보를 초청해 12일에 특강을 연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자 학생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국악학과 김모씨> '전에 박근혜 후보가 올 땐 대선 후보로서 오는 걸 격렬하게 반대하더니 이번에는 안철수 후보가 대선후보로서 오는 걸 격렬하게 환영한다. 이게 어떻게 민주주의냐.'
<행정학과 이모씨>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말을 들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 총학생회가 '학생들과 함께 가겠다'며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이 보기 좋지 않다.'
<경제학과 이모씨> '우리 학교 모두가 총학 당신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통, 소통’ 하면서 왜 다른 후보의 의견조차 들으려 하지 않느냐.'
이에 부산대 총학생회 전모씨는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박 후보 강연의 경우 대학 본부와 박 후보 측에서 일정 단계까지 강연을 추진했지만 박 후보 측의 결정으로 무산됐다.'
'해당 과정에서 총학생회가 강연 추진을 환영하거나 반대하는 등의 의사를 표현한 적이 없다. 당시 정문에서 유인물배포와 항의 시위를 한 단체는 ‘다함께’였다.'
'개인적 견해로 박 후보의 강연추진에 우려되는 점은 유신에 대한 그분의 입장과 평가가 부산대의 역사성과 대치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 외에 없다.'
'이번 안 후보 강연은 '대선후보가 아닌 청년멘토로서의 안철수'에 집중해 '지난 5월(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신분으로 부산대에서 강연하던 시절)의 안철수와 11월의 안철수를 바라보다'라는 기획의도로 추진한 것이다.'
■ 그러나 반발은 끊이지 않았다.
<수학-통계학부 김모씨> '초청과 환영은 분명 차이가 있다. 분명한 것은 안철수는 초청을 하였다는 것이다. 총학은 유독 안철수만을 초청했다는 뜻인데 공정하다 볼수 있느냐.'
<기계공학부 강모씨> '부산대는 항상 진보적인 인사, 편향적인 인사만 강연을 온다.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학생들에 대한 강연은 없다고 본다. 다른 후보들의 의견도 듣고싶다.'
<국어국문학과 장모씨> '적어도 세 후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연락을 시도해서 현재 대통령 후보들의 생각을 학우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이같은 지적에 대해 총학생회는 '강연회엔 선거관리위원회에서도 인력이 배치돼 관리한다. 그만큼 선거 유세와 관련된 발언은 일체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날 안 후보는 강연에서 정치적으로 첨예한 사안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국민이 이기는 단일화’, ‘상식이 이기는 단일화’, ‘미래로 나아가는 단일화’를 단일화 3원칙으로 제시하면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기는 단일화”라고 밝혔다.
'이기는 단일화가 돼야 국민이 이기고, 상식이 이기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본선에서 누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이길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
이날 강연이 열린 경암체육관엔 8백 여명의 학생들이 자리했다. 지난 5월 같은 장소에서 열린 안 후보의 강연에 3천여 명이 몰렸던 것과는 큰 차이가 났다.
당시 안 후보의 강연엔 자리가 없어 그냥 돌아간 학생들을 제외하고도 1천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체육관 밖에서 안 후보를 기다리기도 했었다.
김태민 기자
[Opinion - 1]
박근혜에게 몇 번씩 되묻고 싶은 것 -박근혜의 외교 안보 통일 공약을 보고-
며칠 전 박근혜가 발표한 외교 안보 통일정책을 보니 반갑고 든든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남북문제 해법의 원칙과 핵심을 짚었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공약한 외교 안보 통일정책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先安保强化 後經濟協力"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안보가 흔들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대북협력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남북 관계를 다루는데 있어서 꼭 지켜야 할 원칙과 핵심이다. 아니 당연한 상식이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은 그런 원칙도 상식도 없이 햇볕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을 양보하며 남북대화니, 대북 협력이니, 남북 정상회담이니...해가며 북에게 비굴하게 당해왔다. 그 결과 우리의 안보가 흔들리고 국가 안전망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좌파 정권 10년을 반역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들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헌법의 명령과 헌법적 가치를 무시하면서 이 처럼 國基를 흔드는 반국가적 이적행위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북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우리의 담이 무너지고 기둥뿌리가 뽑히는 것도 모르는 체하고 북이 요구하는 대로, 북이 하자는 대로 하면서 우리 국민의 눈가림용 평화를 구걸하기 위해 북의 비위를 맞추기에만 바빴다.
북이 달라는 대로 퍼주고 하자는 대로 해 온 결과 우리의 안보와 국방이 흔들리고 국민의 안보의식이 해이해졌다.
반국가적 세력이 사회 곳곳에 파고들어 국가 파괴행위를 일삼고, "지금 세상에 빨갱이가 어디 있느냐"고 하던 맹물이 안보 국방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와서 떠들어대는 판이 돼 버렸다.
게다가 믿고 기대했던 박근혜 마저 反國家的 反憲法的인 김대중의 6.15선언과 노무현의 10.4선언을 존중한다고 했었을 때...박근혜의 안보관과 국가관에 실망한 나머지 침 뱉고 돌아서서 낙담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박근혜! 이제는 정녕코 제 정신이 들었는가? 작년에 ‘6.15선언과 10.4선언을 존중한다고 했을 때 실망했던 사람들이 마음을 놓아도 되겠는가?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니까 믿어도 되겠는가? 몇 번 씩 되묻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믿고 싶다. 당신의 아버지 박정희 장군이 1961년 5,16군사혁명을 통해 집권 한 후 이룬 업적으로 경제발전 기반구축을 제1로 꼽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순서.
실제 제1의 업적은, 당시 4, 19 혁명 후 횡행하기 시작한 종북세력이 지금보다 더 심하게 활개쳐도 문약한 민주당 정부는 손을 쓰지 못해 국가안보가 풍전등화였던 위기를 타개한 업적이다.
군사혁명이 일어난 3일 후인 5월 19일 23 : 00 현재 전국적으로 2,016명의 종북세력을 검거해 1차 소탕작업을 전개한 일이다. 그때는 어린 소녀이기에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니 이제라도 아버지의 최대 업적을 다시 수정해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이다.
아버지가 발표한 혁명공약 제1호가 ‘반공을 국시에 제1로 삼고-----“로 시작된 것이 바로 이를 입증해주는 것이다.
이제, 당신이 공약을 발표하면서 약속한 다음과 같은 말들을 믿을 수밖에 없다. 당신마저 믿을 수 없다면 우리에게 달리 어찌할 방법도 희망도 없기 때문이다.
“제2의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과 같은 사태는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 “우리 장병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온 NLL에 대한 어떠한 도발도 용납하지 않겠다”. “北核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북한의 核과 미사일 위협을 무력화 할 수 있는 억지력을 강화하겠다” “북한의 도발을 억지하기 위해 韓美동맹을 포함한 포괄적 방위역량을 강화해 나가겠다”
“지난날 정책의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살리며 투명한 정책수립과 집행을 통해 국민이 공감하는 對北정책을 추진하겠다” 6.15, 10.4공동선언은 “기존 합의에 담긴 평화와 상호존중의 정신을 실천하되, 세부 사항은 현실에 맞게 조정해 나가겠다”
“북한은 核 개발이 아니라 경제개발을 통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 북한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여건을 조성하겠다” ‘북한인권법’을 제정하고 “국제사회에 이러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겠다”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기초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계승-발전시켜 통일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겠다”
경제문제는 잘 사느냐 못 사느냐의 문제이지만 안보문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얼마 전까지도 박근혜의 안보관마저 확고한 믿음이 가지 않았으나 발표된 안보 공약을 보니 이제는 마음이 놓인다, 노파심에서 또 다시 다짐받고 싶다.
이제는 마음을 놓아도 되겠는가?
[Opinion - 2]
"재입북했다"가 되돌아온 탈북자도 있다.
북한에서도 들어가 보지 못했던 감옥을 한국에 와서 가게 되다니
장진성
북한정권이 '남조선 정보기관에 속아 탈북했다가 재입북했다.'고 주장한 탈북자 인터뷰를 올해 들어 벌써 3번이나 공개했다. 자진입북이라고 하기엔 의심스런 대목이 많은 북한의 선전과 달리 실제로 재입북했다가 한국으로 되돌아온 탈북자가 있다. 뉴포커스는 어렵게 그 주인공을 찾아 인터뷰를 요청했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그의 첫 인상은 상상했던 것과 달리 조용하고 어진 성격의 소유자인 듯싶었다.
그런 그가 탈북자들이라면 감히 돌아보는 것조차 두려운 북한으로 제 발로 갔다왔다. 고향 사람들 9명과 아버지 유골을 갖고 오기 위해서였다. 그 죄로 그는 이제 며칠 후면 감옥에 가야 할 형편이다. 몇 년 형을 받게 될지는 며칠 내로 법원이 결정하게 된다. 김정만(가명, 나이 51세) 씨는 처음 뉴포커스의 전화를 받고 고민했지만 감옥에 가기 전에 인터뷰를 하기로 결심했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요즘 탈북자들이 재입북했다고 북한이 선전하잖아요. 저의 아버지는 죽어서도 한국에 오고 싶어했습니다. 북한은 거짓말 하고 있어요, 그걸 탈북자신문인 뉴포커스에 말하고 싶어 사무실로 찾아온 겁니다.'
2006년 9월 4일 북한을 탈북한 김정만 씨는 약 보름간 중국에 머물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 현재 일산의 물류택배 회사를 다니며 성실한 한 가정의 아버지로 살던 그가 왜 결단코 두만강 북한지역을 밟았다 다시 돌아왔는지 그와 나눈 이야기를 요약해 보았다.
당신은 북한에 2번이나 간 셈이다. 북한 식으로 표현한다면 재입북인 셈이다. 당신은 위법인 줄 몰랐다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는 북한 땅을 밟지 않았다. 그냥 두만강에 들어섰을 뿐이다. 내가 북한에 있을 당시 중국 관광보트가 북한 근처까지 자주 접근하는 걸 봐와서 넘어가도 죄가 되지 않는 걸로 생각했다. 한마디로 강물 위에는 국경이 없는 줄 알았다. 북한 땅만 짚지 않으면 괜찮은 줄로 알았다. 2009년에는 아내와 딸을 탈북시키기 위해 브로커비용을 아끼려고 내가 직접 두만강에 갔었다. 강 근처에서 직접 만나 가족 모두를 데려오기까지 했다. 중국 쪽에 밧줄을 고정한 후 내 몸에 묶고 헤엄쳐서 북한 쪽까지 간 후 줄을 넘겨줬었다. 그리고 작년 7월에는 아버지 유골을 가져오려고 갔었다. 미리 친구에게 전화로 부탁까지 해서 유골을 두만강까지 가져와달라고 했는데 만나지 못했다.
무섭지 않았나? 만약 북한 군인들이 당신을 강에서 끌어냈다면 그때는 당신도 재입북 선전원이 되어 기자회견장에 섰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은 못해봤었나?
미리 그 쪽(북한)에 전화를 했었기 때문에 북한 쪽은 무섭지 않았다. 그들이 날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조금 무서웠던 것은 오히려 중국 변방대원들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한국여권이 있어서 배짱이 있었다. 나는 한국인, 그 생각이 나를 오로지 그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한 일념에만 집중하게 해줬다.
처음에는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굳이 아버지 유골을 가지러 다시 갔던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아버지의 고향이 경남 합천군 가해면 오도리이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내게 세뇌하듯 나의 고향이 남한이라며 고향 주소를 자주 언급하시곤 하셨다. 살아선 힘드니 죽어서 통일되면 고향 땅에 묻어달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15살에 돌아가셨는데 비록 어렸지만, 가슴속에 깊이 새겨두었었다. 어릴 때 기억이 더 진한 법이다. 산 사람들을 데려오고 나니 죽은 아버지 얼굴이 자꾸 꿈에 보였다. 한국에서 더운 밥을 먹을 때마다 아버지 유언이 계속 가슴에 걸렸다. 그래서 탈북을 하기 전 언젠가는 아버지 유골을 가지러 다시 오겠다며 믿을만한 동네 친구에게 아버지 묘를 파기 쉽도록 얕게 가묘로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마침 아는 분이 자기 가족을 데려오게 해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여비가 생겨 결심하게 됐다.
아버지 고향이 남쪽인데 왜 북한으로 가셨고, 남한 태생으로서 북한에서의 삶은 어떠했는가?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가셨던 아버지가 해방 후 소련에 머물다 60년대 초반 남한행을 원했지만 소련이 당시 국교를 맺고 있던 북한으로 보냈다. 지금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100세가 넘으신다. 나를 50 넘어 낳으셨다. 출신성분 탓에 나는 군대도 가지 못하고 대대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탄광에서 국군포로들과 같이 노동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일제 징용이 더 편하고 사람다웠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탄은 겉이 시커멓지만 속은 뜨겁다. 나는 그렇게 악으로 살아왔다. 시커멓게 살면서 늘 탈북결심 하나로 버텨왔었다.
아버지 유골은 모셔오지 못했지만 이번에 직접 두만강까지 가서 9명을 탈북시켰다고 하던데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두만강까지 갔었나?
맹세컨대 돈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잘 알던 고향사람들인데다 그 중 한명이 아버지 유골을 갖고 오기로 돼 있었다. 원래 계획은 서너 명 정도였는데 막상 가보니 예상보다 많은 9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북한에서 고생하는 이들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사비를 털어 구명조끼와 밧줄을 구매해서 결국 탈북 시킬 수 있었다. 아버지 유골을 파오기로 했던 친구는 사정이 생겨 오지 못했다. 그래서 9명을 중국 브로커에 인계한 후 나는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처음에 아내를 탈북시킬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왜 이번에는 문제가 되어 실형 위기에 놓인 것인가?
아버지 유골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절차를 밟던 중 내가 출국정지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알아보니 원주 경찰서에서 그런 조치를 취했다더라. 나는 양천구에서 살고 있기 때무에 원주 경찰서랑 아무 상관이 없다. 나의 행적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흘린 말을 아마 원주경찰서 보안경찰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 같다. 얼마 전 원주 검찰에 다녀왔다. 월북 의도가 전혀 없었고, 그 증거가 고향 사람들을 데려온 것이라고 했다. 또 중국에 갈 때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 간다고 했고, 갔다와서도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도 원주에선 최소 6개월에서 1년 정도 감옥에 있을 각오를 하라고 하더라. 나의 담당 경찰서에서도 아무도 문제 삼지 않은 걸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원주경찰서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주변에선 실적 때문이라고 말을 하더라.
이런 상황에 놓이다 보니 혹시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고 있지는 않은가?
길어야 1 년 감옥에 있을 텐데 그 세월과 아버지의 소원을 맞바꾸었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렇게라도 아버지에게 위안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단 하나 안타까운 점은 그동안 한국에서 막노동하며 지내다 얼마 전 운전을 배워 힘들게 자리 잡은 택배 직장 일을 놓치게 된다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아직 자동차 할부금도 다 갚지 못했다. 감옥에 갔다 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딸 셋을 두고 생활해야 할 아내에게도 미안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북한에 있을 때도 가보지 않았던 감옥을 남한에 와서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억울하다. 단지 한국에서 가족과 같이 살고 싶었고 아버지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유해를 가져오려 목숨을 걸고 강물에 뛰어든 것뿐이다. 북한에 이로운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동네 사람들 여럿이 탈북하여 우리 동네 보위원이 처벌받았다고 한다. 월북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검찰에서 실랑이를 했는데 결국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처를 해준다면 다시는 북한쪽에 갈 일도 없다.
부모님의 유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민족은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또 유골이 되어서라도 고향으로 오고 싶어했던 그 유언이 아직 땅에 묻혀 울고 있는 이런 분단국가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김정만 씨는 검찰의 그 어떤 결정도 받아들일 마음 속 준비가 돼 있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국가 안보를 위해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이 개개인의 모든 사정까지 봐 줄 수 없다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뷰 이후 웃음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서는 그에게 다른 기자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부탁했다. 한번 안아보고 싶다고 말이다.
[Opinion - 3]
참으로 놀라운 안철수식 위선-북한인권법 반대!
한 인간으로서 인내력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음흉함!
윤창중
안철수, 그가 노무현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부정 발언 논란 속에서 취해온 자세를 추적해 보면 그는 참으로 음흉함에 있어서는 타고났음에 경탄하게 된다. 왜 천부적?
새누리당 국회의원 정문헌이 노무현의 NLL 발언을 문제 삼은 게 언제? 10월8일, 한 달 전이다.
안철수는 박근혜·문재인 진영이 NLL 발언을 놓고 격돌하는 내내 NLL 문제에 관한 한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입 꽉 다물고 일체 대응이 없다가 마침내 입을 연다.
이틀 전인 7일, 안철수는 “NLL을 사수하겠다”고 말한다.
왜 그랬을까? 가만히 있더니.
박근혜가 ‘문재인+안철수=문철수’ 후보 단일화 합의에 대해 “NLL을 지킬 의지가 있는지 의심되는 세력에게 우리 안전과 미래를 맡길 수 있겠느냐”며 ‘문철수’를 ‘NLL 포기 세력’으로 몰아붙이자 앗 뜨거워!, 하며 입을 연 것!
왜 입을 열었을까?
박근혜와 안철수 자신의 지지층이 서로 중첩된다고 판단해 박근혜의 'NLL 포기 세력’ 발언에 자극 받아 박근혜 쪽으로 회귀(回歸)하는 역풍을 막기 위한 것!
이런 전략이 아니라면 거의 한 달이나 입 다물며 못 본척하다가 언급할 이유가 없다. 논리적으로 볼 때!
그런 안철수가 어제(2012년 11월8일) 외교정책을 발표하면서 NLL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뜯어보면 ‘안철수의 정체(正體)’를 한마디로 보여준다.
뻐꾸기가 고공(高空)에 올라가 이리 저리 망보다가 잇속 다 챙겨가는 식의 전형적인 기회주의!
“NLL을 인정하는 전제 아래 공동어로구역을 협의하겠다.”
이게 무슨 의미?
속내로는 북한과 국내 종북세력들이 애타게 관철하려는 ‘공동어로구역’을 지지해 이들의 환심을 사고 싶고, 또 한편으론 그 쪽으로만 너무 나가면 중간층이나 보수우파층이 반발할 것 같으니 ‘NLL을 인정하는 전제’를 갖다 붙인 것!
정말 토할 것 같다.
이건 실현 가능성이 단 1%도 없는 말장난!
이걸 안철수가 모르고 한 말이다? 천만의 말씀!
북한이 천안함을 폭침시키고 연평도를 때린 게 NLL을 지워버려 서해 바다를 공동어로구역으로 만들겠다는 것인데, 북한이 NLL을 인정한다는 전제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게 바로 ‘안철수 화법(話法)’!
북한 주장대로 공동어로구역을 만들겠다는 소리를 그렇게 돌려 말하는 것!
안철수는 자신이 대북정책에 관한 한 실력이 없음을 고백이나 하듯이 구체적인 문제는 노무현 정권 때 햇볓정책의 전도사였던 전 통일부 차관 이봉조를 내세웠다.
그런데 자칭 ‘남북문제 전문 관료’라는 이봉조가 내놓은 대북정책은 한마디로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남북분쟁해결위원회'를 만들어 남북 간의 우발적 충돌과 갈등을 해결하겠단다.
‘정전협정’까지 깨버리고 천안함 폭침도 모자라 연평도 포격 도발하는 북한 붙잡고 뭐, 해결 하겠다?
그럼,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이 우발적 충돌과 갈등이냐!
남북문제가 노사문제?, 분쟁해결위에서 해결하게!
더 들어보면 이런 철없는 세력이 대한민국을 이끌겠다고 나선다니, 하는 장탄식이 절로 입에서 새어나온다.
“남북 정상 간 핫라인을 설치하겠다”?
‘대통령 안철수’와 ‘대장동지 김정은’이 전화통 붙잡고 통화한단다.
더 기막히게 하는 안철수의 음흉함은 북한인권법에 이르러서는 극치에 이른다.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종합적인 인권 개선 계획을 수립하고 국제·민간사회와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한 발은 북한 인권 개선에 걸치더니, 북한인권법 제정에 대해선 반대한다는 것!
그러면 지난 겨울 주한중국대사관 앞에서 열렸던 탈북자 강제송환 반대 시위 현장엔 왜 갔나?
최소한의 상식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선 탈북자 강제송환엔 반대하고, 북한인권법 제정에 반대하는 건 전혀 앞뒤가 맞지 않지만 안철수의 표 계산에서 보면 그게 안철수식! 왜?
탈북자 강제송환 문제는 국민적 관심을 받았던 사안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동조하는 모습 보여야 득이 되는 것이지만, 북한인권법 문제는 북한을 비롯해 종북세력, 얼치기좌파 할 것 없이 극력 반대하기 때문에 찬성한다고 하면 표 날아갈 것이니 반대하는 것!
안철수, 모르고 있나?
북한인권법, 미국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04년, 일본은 6년 전인 2006년에 제정한 북한인권법이라는 게 바로 탈북자 보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세력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인권탄압에 대해선 박 대통령이 서거한지 33년이나 흘렀어도 여전히 공격해대고 있다.
저들의 이중성, 기회주의에 정말 환멸이 끌어 오른다.
북한인권법에 반대하는 안철수, 그는 참으로 놀라운 수준의 위선적 인간이다.
윤창중 전 문화일보 논설실장/ 정치 칼럼니스트